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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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촉한은 후한 말 유비가 건국한 삼국 시대의 국가이다. 유비는 제갈량의 융중 대책에 따라 세력을 확장하여 221년 황제에 즉위, 국호를 한(漢)으로 정하고 촉한을 건국했다. 유비 사후 제갈량이 섭정하며 국정을 운영했으나, 제갈량 사후 유선 시대에 국력이 쇠퇴하여 263년 위나라에 멸망했다. 촉한은 군사 중시 국가였으며, 제갈량의 북벌 시도 등 위나라를 정벌하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촉한은 삼국 중 가장 약소했으나, 후세에 정통성 논쟁에서 주목받았으며,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유비의 촉한이 정통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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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한 - 천수의 난
천수의 난은 228년 제갈량의 북벌 시도 중 촉한에 귀순한 남안군, 천수군, 안정군이 장합의 공격으로 진압되며 제갈량의 첫 번째 북벌이 실패로 끝난 사건이다.
촉한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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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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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국명 | 촉한 |
한자 표기 | 蜀漢 |
로마자 표기 | Shu Han |
중국어 발음 (표준어) | shǔ hàn |
중국어 발음 (광둥어) | suk6 hon3 |
건국 시기 | 221년 5월 |
멸망 시기 | 263년 12월경 |
이전 국가 | 후한 |
다음 국가 | 조위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청두 |
공용어 | 파촉어 상고 한어 |
종교 | 도교 유교 중국 민간 신앙 |
통화 | 오수전 |
인구 | |
221년 | 900,000명 |
263년 | 1,082,000명 |
역대 군주 | |
초대 황제 | 소열제 (221년 ~ 223년) |
말대 황제 | 회제 (223년 ~ 263년) |
역대 재상 | |
재상 | 제갈량 (221년 ~ 234년) |
대사마 | 장완 (234년 ~ 246년) |
대장군 | 비의 (246년 ~ 253년) |
대장군 | 강유 (253년 ~ 263년) |
현재 국가 | |
영토 | 중화인민공화국 미얀마 (일부) |
2. 역사
220년 조조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비가 헌제를 퇴위시키고 조위를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유비는 이에 맞서 221년 스스로를 '한 황제'라 칭했다.[8] 그러나 유비는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고 주장하지 않고, 촉한을 한나라의 계승으로 보았다.
유비는 황제로서 3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을 통치했다. 그는 제갈량 등에게 촉(蜀)의 법률인 촉과(蜀科)를 제정하게 하여 법 제도를 정비하였다.[8] 또한 유바의 건의에 따라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화폐 제도를 정비하였다.[8] 익주는 광물 자원이 풍부하고 소금을 생산하였으므로, 유비는 소금과 철의 전매로 이익을 얻기 위해 사염교위(司鹽校尉)를 설치하고, 소금과 철의 전매를 통해 국고 수입을 크게 늘렸다.[8]
222년,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고 경주를 탈환하기 위해 손권의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육손에게 크게 패하였다(이릉 대전).[8] 이 전투에서 마량을 비롯한 주요 장병들이 전사하여 많은 인재를 잃고 군사력이 크게 약해졌다.[8] 같은 해, 유비는 손권과 화의를 맺었다.[8]
223년, 유비는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죽었다.[8] 후에 소열제(昭烈帝)로 추존되었다. 유비 사후 아들 유선이 뒤를 이었고, 제갈량이 승상(丞相)으로 정무를 총괄하였다.[8]
유선이 즉위했을 당시, 촉나라는 삼국 중 가장 약한 국가였다. 제갈량은 오나라와 평화를 협상하고, 손권과 촉나라 사이의 동맹을 재확인했다. 남중의 외딴 남부 지역에서 촉한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병하여 225년 현지 반란과 그 지역에서 남만(남쪽 오랑캐)의 증가하는 영향력을 진압했다.
제갈량은 위나라에 대한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옹호했는데, 228년에서 234년 사이에 그는 5차례의 군사 원정을 위나라에 대해 시작했다. 228년 강유를 장교로 얻었으나, 5차례의 원정에서 어떤 중요한 승리도 거두거나 지속적인 이득을 얻지 못했다.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에 걸려 진중에서 죽었다(오장원 전투).[12]
제갈량 사후, 장완, 비의 등이 촉나라 정부를 이끌었고, 촉나라는 일시적으로 위나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다.
246년 장완과 동윤이 연이어 죽고, 253년 비의가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촉나라를 지탱할 정치가가 없어지면서 강유와 진지 등이 국정을 맡아 북벌을 재개했다.[12] 255년에는 위나라를 크게 이겼으나, 256년 단곡의 싸움에서는 오히려 대패했고, 연이은 북벌로 촉나라는 쇠약해졌다.[12] 258년 환관 황호가 정권을 장악하고, 황호를 중용한 유선의 폭정으로 궁궐은 어지러워졌고 국력은 크게 쇠퇴했다.[12]
263년, 위나라의 실권자 사마소가 촉나라 토벌을 명령했다.[12] 강유 등은 검각에서 위나라 군대에 저항했으나, 대치하는 사이에 위나라의 별동대가 우회하여 촉나라 땅으로 진입했고, 면죽에서 오나라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제갈첨이 전사했다.[12] 이 소식을 들은 유선은 남쪽이나 오나라로 도망치려 했으나, 초주의 반대에 부딪혀 위나라 군대가 성도에 육박하기 전에 항복했다.[12] 촉나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멸망했다(촉한의 멸망).[12]
2. 1. 건국 이전
후한 말기, 한 황실의 먼 친척이자 군벌이었던 유비는 많은 유능한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제갈량의 계책인 롱중 대책에 따라 유비는 208년과 209년에 경주(오늘날의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포함) 일부를 정복하고, 212년부터 214년까지 군벌 유장으로부터 이주(오늘날의 쓰촨성과 충칭시를 포함)를 장악했으며, 219년에는 라이벌 조조로부터 한중을 빼앗았다. 그 후 유비는 스스로를 한중왕이라 칭했다.[8]유비는 얻은 영토를 기반으로 한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219년, 유비와 손권의 동맹은 손권이 여몽을 파견하여 경주를 침공하면서 깨졌다. 유비는 손권에게 경주 지역의 영토를 잃었고, 경주에서 유비의 자산을 지키던 장군 관우는 손권의 군대에 사로잡혀 처형되었다.[8]
207년경, 형주 목 유표 밑에 있던 유비는 제갈량을 삼고의례로 맞이했다. 이때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여 손권과 손을 잡고 조조를 무찌르는 천하삼분지계가 제시되었고, 208년에 손권과 함께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무찌르고, 209년에 형주 남부 4군을 평정했다. 212년부터 214년에 걸쳐 유비는 유장의 부하 장송, 법정, 맹달 등의 협력으로 유장으로부터 영토를 빼앗아, 이주 대부분을 차지하였다(유비의 입촉).[8]
215년, 손권과 영토 문제로 분쟁이 발생하여 형주 남부 군의 동쪽을 손권에게 할양하였다. 219년, 유비는 한중을 방비하고 있던 하후연을 토벌하고(정군산 전투), 조조로부터 한중을 빼앗아 한중왕이 되었다. 유비의 부하 관우는 형주 방면에서 조조 영역으로 침공하였으나, 조조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은 손권, 여몽에게 형주를 공격받아 형주는 함락되었고, 관우는 포로가 되어 손권에게 처형되었다(번성 전투).[8]
2. 2. 유비의 통치 (221년 ~ 223년)
220년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가 뒤를 이어 헌제를 퇴위시키고 조위를 세워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유비는 이에 맞서 221년 스스로를 '한 황제'라 칭했다.[8] 그러나 유비는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고 주장하지 않고, 촉한을 한나라의 계승으로 보았다.유비는 황제로서 3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을 통치했다. 그는 제갈량 등에게 촉(蜀)의 법률인 촉과(蜀科)를 제정하게 하여 법 제도를 정비하였다.[8] 또한 유바의 건의에 따라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화폐 제도를 정비하였다.[8] 익주는 광물 자원이 풍부하고 소금을 생산하였으므로, 유비는 소금과 철의 전매로 이익을 얻기 위해 사염교위(司鹽校尉)를 설치하고, 소금과 철의 전매를 통해 국고 수입을 크게 늘렸다.[8]
222년,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고 경주를 탈환하기 위해 손권의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육손에게 크게 패하였다(소정전투).[8] 이 전투에서 마량을 비롯한 주요 장병들이 전사하여 많은 인재를 잃고 군사력이 크게 약해졌다.[8] 같은 해, 유비는 손권과 화의를 맺었다.[8]
223년, 유비는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죽었다.[8] 후에 소열제(昭烈帝)로 추존되었다. 유비 사후 아들 유선이 뒤를 이었고, 제갈량이 승상(丞相)으로 정무를 총괄하였다.[8]
2. 3. 유선과 제갈량의 시대 (223년 ~ 234년)
유비가 죽은 후, 승상 제갈량과 장군 이엄을 아들 유선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어린 유선은 불과 16세였고, 삼국 시대 통치자 중 가장 어렸으며 유비는 두 섭정이 유선이 국정을 관리하는 것을 돕기를 기대했다. 제갈량은 유선의 통치 기간 동안 사실상 촉나라 정부의 수장이었으며, 그의 섭정 시대 동안 촉나라의 대부분 정책에 책임이 있었다.유선이 그의 아버지를 계승했을 때, 촉나라는 삼국 중 가장 약했다. 221년 아버지의 패배 후, 촉나라가 이전에 점유했던 경주의 일부는 이제 오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었다. 촉나라는 익주의 서쪽 땅만 포함하고 있었고, 위는 북쪽 땅 전체를, 오는 익주 동쪽에서 남쪽과 동쪽 해안선까지 모든 땅을 지배했다. 한편, 촉나라의 인구는 위나라와 같은 경쟁 국가에 맞설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6] 이것은 자원과 인력 측면에서 촉나라를 크게 제한했고, 비록 나라가 효율적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지만, 촉나라는 쉽게 성공적인 원정을 시작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제갈량은 오나라와 평화를 협상하고, 손권과 촉나라 사이의 동맹을 재확인했는데, 손권이 위나라와 결별하고 229년 스스로 "오황제"라고 선포했을 때, 전자는 후자의 정통성을 인정하기까지 했다. 남중의 외딴 남부 지역에서 촉한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제갈량은 또한 원정군을 파병하여 225년 현지 반란과 그 지역에서 남만(남쪽 오랑캐)의 증가하는 영향력을 진압했다.
제갈량은 위나라에 대한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옹호했는데, 그는 그것이 촉나라의 생존과 주권에 매우 중요하다고 강하게 믿었기 때문이다. 228년에서 234년 사이에 그는 5차례의 군사 원정을 위나라에 대해 시작했는데, 그 목표는 위나라 수도 낙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전략적 도시 장안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전투는 오늘날의 감숙성과 산시성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228년 강유를 장교로 얻은 것 외에는 5차례의 원정에서 어떤 중요한 승리도 거두거나 지속적인 이득을 얻지 못했다. 위나라 장군 사마의와 싸운 그의 마지막 원정에서 이미 과세되고 병들었던 제갈량은 적벽대전에서 위나라 군대와의 장기간의 교착 상태의 압박 속에서 죽었다.
제갈량 사후, 촉나라 정부는 강완, 패이이 등이 이끌었고, 촉나라는 일시적으로 위나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다.
제갈량은 유비의 유지를 이어 위나라에 대한 북벌을 감행했다. 이 북벌 출정에 앞서 제갈량이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는 당시부터 현대까지 명문으로 매우 높이 평가받고 있다. 228년, 위나라의 천수, 남안, 안정 3군을 빼앗았으나, 선봉장인 마숙이 군령을 어기는 바람에 가亭(가정)에서 장합에게 패배하여(가정의 싸움), 천수, 남안, 안정 3군은 장합 등에게 되찾겼다. 제갈량은 군율을 모범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자신의 제자인 마숙을 처형했다. 이것이 유명한 고사 “마숙을 울며 베다”이다.
같은 해 겨울 진창성 공격은 식량 부족으로 인해 철수했지만(진창의 싸움), 229년에는 위나라의 무도, 음평 2군을 빼앗았다. 같은 해, 오나라의 손권이 황제를 자칭하자, 촉한에서는 원칙론적으로 손권의 즉위를 인정해서는 안 되므로 동맹을 파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잇따라 제기되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위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현재 시점에서 동맹 파기는 타당하지 않다고 설득하여 촉한과 오는 다시 동등한 동맹을 맺었다.[10] 동시에 위나라 영토의 분할에 대해서도 결정했다.[11]
그 후에도 기산 주변에서 위나라와의 공방전이 계속되었고, 231년 기산 공격에서는 다시 식량 부족으로 철수했으나, 추격해 온 장합을 사살했다(기산의 싸움). 그러나 제갈량 다음가는 지위에 있던 도호·표기장군 이엄이 이 전투에서 군수에 문제를 일으켜 실각했고, 정치·군사적 압박은 제갈량에게 더욱더 짓눌리게 되었다. 233년에는 다시 이주 남부에서 남서이(南西夷)의 유주가 반란을 일으켰고, 마충·장의 등이 반란을 진압했다.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에 걸려 진중에서 죽었다(오장원의 싸움).
2. 4. 제갈량 사후와 촉한의 멸망 (234년 ~ 263년)
246년 장완과 동윤이 연이어 죽고, 253년 비의가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촉나라를 지탱할 정치가가 없어지면서 강유와 진지 등이 국정을 맡아 북벌을 재개했다.[12] 255년에는 위나라를 크게 이겼으나, 256년 단곡의 싸움에서는 오히려 대패했고, 연이은 북벌로 촉나라는 쇠약해졌다.[12] 258년 환관 황호가 정권을 장악하고, 황호를 중용한 유선의 폭정으로 궁궐은 어지러워졌고 국력은 크게 쇠퇴했다.[12]263년, 위나라의 실권자 사마소가 촉나라 토벌을 명령했다.[12] 강유 등은 검각에서 위나라 군대에 저항했으나, 대치하는 사이에 위나라의 별동대가 우회하여 촉나라 땅으로 진입했고, 면죽에서 오나라의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제갈첨이 전사했다.[12] 이 소식을 들은 유선은 남쪽이나 오나라로 도망치려 했으나, 조주의 반대에 부딪혀 위나라 군대가 성도에 육박하기 전에 항복했다.[12] 촉나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멸망했다(촉한의 멸망).[12] 유선의 다섯째 아들인 유섬과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분노하여 죽었고, 그 후 성도에서 일어난 반란에서 황태자 유선이 살해되는 등 혼란이 있었지만, 유선 자신은 위나라와 서진 양나라에서 "안락공"에 봉해져 271년 65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살았다.[12]
진수에 따르면, 촉나라는 역사를 편찬하는 관리(사관)를 (대부분의 기간 동안) 두지 않았기 때문에, 위나라나 오나라에 비해 촉나라의 역사는 후세에 그다지 전해지지 않은 것 같다.[12]
3. 정치
촉한은 위나라를 토벌하는 것을 중요한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군사를 매우 중시하는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13] 촉한의 전체 인구는 90만 명에서 100만 명 정도였는데, 군인과 관리가 14만 명으로 인구의 15%를 차지할 정도로 특이한 구조였다.[13]
유비는 장비 등과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겨우 형주 일부에 세력을 확보했기 때문에,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군대를 늘리고 세력을 확장해야 했다. 제갈량이 제안한 천하 삼분지계는 유비의 명분과 현실에 맞는 방침이었다.[14] 유비는 농업이 발달한 익주를 확보한 후 성 안의 금은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는 유비의 기반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자신의 정권 수립과 국내 정비에 필요한 재정마저 낭비해 버렸다.[15]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파의 건의로 “직백전”(오주전 100개에 해당)이라는 화폐를 만들어 강제로 시장에 유통시켜 물자를 사들였다. 또한 유비를 따랐던 기존의 호족과 지주들에게는 토지 소유를 보장하여 그들의 경제적 타격을 완화하고 반란 발생을 막았다.[16] 왕련이라는 뛰어난 재무 관료를 등용하여 철과 소금의 전매제를 시행하고, 비단 직물의 생산과 무역을 관리하는 “금관”을 설치하는 등 재정을 확충했다.[17]
유비 시대에 이미 제갈량은 국정 최고 책임자인 승상, 행정 실무 최고 책임자인 록상서사, 지방 정치 최고 책임자인 익주자사를 겸임하여 군사, 행정, 경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18] 촉한에서는 인사 문제는 상서대가 담당했고, 호적도 관리했을 가능성이 있다.[19]
유비는 한중을 얻고 황제에 즉위했지만, 형주를 잃고 이릉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 사망했다. 이후 황제 유선과 승상 제갈량은 유비의 체제를 계승했다. 유비가 죽자 남중 여러 군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제갈량은 남정을 계획했지만 왕련은 북벌을 우선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왕련이 죽은 후 전매제는 부진해졌고, 결국 남정이 실시되어 남중 지역에서 병력과 물자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융중대”에도 기록된 내정의 충실은 형주를 소유해야 실현 가능한 것이었고, 형주를 위와 오에 빼앗긴 상황에서는 민간 경제를 희생시켜 군비를 강화하고 북벌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의 ‘출사표’에도 “익주 피폐”라고 기록되어 있다.[20] 북벌에서도 한중 등에서의 둔전이나 적지에서의 약탈, 납치를 통해 촉한의 물자를 최대한 낭비하지 않도록 하는 방책이 강구되었다.[21] 잦은 북벌은 촉한 국내에 대한 반복적인 임시 징수 등으로 더욱 피폐함을 초래했다. 제갈량은 엄격한 법치와 사상 통제, 평시의 군대를 공공 사업에 사용하는 등을 실시하여 국내의 불만을 위나라로 돌리는 전략을 계속 취함으로써 북벌과 체제 유지를 양립시켜 나갔다.[22]
제갈량 사후, 촉한의 체제는 일시적으로 흔들렸지만, 후계자인 장완은 승상에는 취임하지 않았지만 대장군, 록상서사, 익주자사를 겸임하여 제갈량의 지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 장완은 도독, 군사, 감군, 영군, 호군, 전군, 참군에 군의 중추가 되는 인물을 배치하여 군의 안정을 도모했다. 제갈량이 사망하자 장완은 상서령이 되고, 곧 행도호의 지위를 더 받았다. 동시에 등지가 전군사, 양의가 중군사, 비의가 후군사, 강유가 우감군, 장익이 전영군, 왕평이 후전군이 되고, 차기장군이 된 오의와 함께 한중의 군과 성도의 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23] 장완 사후 그 뒤를 이은 비의도 마찬가지였다. 제갈량 생전에 장완은 무군장군·상서랑, 비의는 중호군·상서령으로 모두 군사 계통과 상서 계통의 직무를 모두 경험했기 때문에, 군사·행정·경제를 일원적으로 운영하는 제갈량의 정치 수법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24]
그러나 비의 사후 강유는 록상서사에 취임했지만 행정 실무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진지도 진군장군에 취임했지만 군무에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갈량의 정치 수법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대장군으로서 군사를 장악하는 강유와 상서령으로서 행정 실무를 장악하는 진지는 대립하면서도 북벌을 위해 협조하는 노선을 계속 취했다. 그러나 강유의 북벌 실패와 진지의 사망, 환관 황호의 등장으로 인해 강유는 장익, 엄우, 제갈첨, 동궐, 번건, 황호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인사를 담당하는 상서에 기반을 갖지 못한 강유는 성도로 귀환하면 파면될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성도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반대파도 서로 대립 관계에 있었고, 촉한 말기의 궁정은 4파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애, 종회의 촉 침공에 있어서 장익, 제갈첨, 동궐 등이 강유와 함께 이를 저지했고, 지략으로 성도를 함락시킨 등애를 제외하면 위나라 군대를 철수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등 격렬한 권력 투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치명적인 분열은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26]
주요 직책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
승상 | 제갈량 |
사도 | 허정 |
록상서사 | 제갈량, 장완, 비의, 강유 |
상서령 | 법정, 유파, 이엄, 진진, 장완, 비의, 동윤, 여예, 진지, 동궐, 번건, 제갈첨 |
평상서사 | 마충, 제갈첨, 동궐 |
상서복사 | 이복, 요주, 동궐, 제갈첨 |
승상장사(서제조사) | 왕련, 향랑, 양의 |
유부장사(승상영병출칙통류사) | 장예, 장완, 마충 |
4. 군사
위를 중심으로 발전한 중앙의 중군과 주(州)나 특정 지역을 책임진 도독(都督)이 이끄는 지방군 제도는 촉한에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여러 주를 소유한 위나 오와 달리, 익주(益州) 한 주만을 가진 촉한에서는 도독의 관할 지역이 제한적이었다. 촉을 구성하는 한중(漢中)·파(巴)·촉(蜀)·남중의 4개 블록이 최대의 군관구였으며, 한중에는 위에 대한 방어와 북벌의 중심이 되는 한중도독, 파에는 북벌군과 영안(永安) 수비군과 성도(成都) 사이의 중계점이며 그 병참을 담당하는 강주도독(江州都督), 오에 대비하는 영안도독, 남중을 지배하는 압강도독(庲降都督)이 있었다. 그 외에도 더 작은 규모로 특정 장소를 수비하는 도독, 독군(督軍), 독(督)이 있었다.
또한 촉한에만 있는 특유의 관직으로 "도호(都護), 군사(軍師), 감군(監軍), 영군(領軍), 호군(護軍), 전군(典軍), 참군(參軍)"이 있다.[27] 비슷한 관직은 위에도 있지만, 촉의 경우에는 서열에서 군호(軍號)에 우선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 관직과 승상부(丞相府)의 지위(장사·사마), 거점의 독·도독, 대규모 출정 시의 전후좌우의 부독(部督) 등의 지위를 조합하여 서열이 결정되었다. 이엄(李嚴)을 파면하는 상소가 이 서열에 따라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는 사실로 알려져 있다.[28]
제갈량이 죽은 후, 승상의 지위에 오른 자는 없었고, 장완(蔣琬)과 비의(費禕)는 대장군(大將軍)·녹상서사(錄尚書事)로서 정치와 군사를 장악했다. 하나의 이유로 제갈량과 동등한 지위를 피하려 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한(漢)의 부흥을 내걸고 위를 멸하는 것이 국가의 과제였으며, 수도 성도와 정권 수좌인 대장군이 한중에서 정무를 보는 이원정치였기에 촉한에게는 군사 조직을 중심으로 한 정권이 운영하기 더 수월한 측면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 대장군(大將軍): 장완(蔣琬), 비의(費禕), 강유(姜維), 엄우(閻宇)
- 표기장군(驃騎將軍): 마초(馬超), 이엄(李嚴), 오반(吳班), 호제(胡済)
- 거기장군(車騎將軍): 장비(張飛), 유염(劉琰), 오의(吳懿), 하후패(夏侯覇), 장익(張翼), 요화(廖化)
- 위장군(衛將軍): 강유(姜維), 제갈첨(諸葛瞻)
5. 경제
촉한은 단순한 전쟁 중인 국가가 아니었다. 평화 시대에 촉나라는 경제를 개선하기 위해 많은 관개 및 도로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러한 많은 공공 사업들은 아직도 존재하며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자평보 댐(Zipingpu Dam)은 여전히 청두(Chengdu), 사천(Sichuan) 근처에 있다. 이러한 사업들은 중국 남서부의 경제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사천의 경제 활동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오나라(Eastern Wu)가 지배하던 중국 남부와의 무역을 촉진했다.
촉한은 위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위나라 토벌을 대의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군사 최우선 국가”라 평가될 정도로 군사 중시적인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13] 촉한의 총인구가 90만 명에서 100만 명이었던 데 비해, 군인과 관리만 14만 명으로 인구의 15%에 달하는 특이한 구조였다.[13] 또한, 하북 출신인 유비는 관우, 장비 등과 함께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겨우 형주 일부에 세력 기반을 확보한 존재에 불과했기에,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적극적인 군비 증강과 세력 확장에 힘쓸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제안한, 속칭 “천하 삼분지계”라고도 불리는 “융중대”는 유비의 정통성과 현실에 적합한 방침이었다.[14]
유비가 부유한 농업 지대였던 익주를 확보한 후 성 안의 금은을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도 유비의 기반이 약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자신의 정권 수립과 국내 정비에 필요한 재원조차도 낭비해 버렸다.[15] 그 때문에, 유파의 건의로 “직백전”(1매가 오주전 100매에 해당)이라는 화폐를 주조하여 강제로 시장에 유통시켜 물자를 사들여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편 유비를 따랐던 기존의 호족·지주들에게는 토지 소유를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경제적 타격을 완화하여 반란 발생을 막았다.[16] 더욱이 왕련이라는 뛰어난 재무 관료를 등용하여 철과 소금의 전매제를 기능하게 하고, 비단 직물의 생산·무역을 관할하는 “금관”을 설치하는 등 재정 확충이 이루어졌다.[17]
유비 시대에 이미 제갈량은 국정 최고 책임자인 승상일 뿐만 아니라, 행정 실무 최고 책임자인 록상서사를 겸임하고, 더 나아가 지방 정치의 최고 책임자였던 익주자사를 겸임하여 군사는 물론 행정·경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18] 참고로, 촉한에서는 인사 문제는 상서대가 관할했고, 호적도 관할했을 가능성이 있다.[19]
그 후, 유비는 한중을 얻고 한중왕에서 황제에 즉위했지만, 형주를 상실하고 이릉 전투에서 패퇴하는 등 곤경 속에서 죽었고, 새 황제 유선과 승상 제갈량은 유비의 체제를 계승하게 된다. 유비의 죽음과 함께 남중 여러 군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제갈량은 남정을 계획했지만 왕련으로부터 반대를 받는다. 제갈량 계획의 배경 중 하나는 세력 유지·확장을 통해 재정 기반을 강화하려는 것이었지만, 왕련은 자신의 재정 정책이 효과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 본래 목적이었던 북벌을 뒤로 미루고 남정을 하는 데는 이점이 적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왕련이 죽자 전매제는 부진해지고, 결국 남정이 실시되어 남중 지역에서 병력과 물자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융중대”에도 기록된 내치의 충실은 형주를 영유해야 비로소 실현 가능한 것이었고, 형주를 위와 오에 빼앗긴 상황에서는 민간 경제를 희생시켜 군비를 강화하고 하루빨리 북벌을 추진하는 수밖에 없었으며, 제갈량의 ‘출사표’에도 “익주 피폐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0] 그 때문에, 북벌에서도 한중 등에서의 둔전이나 적지에서의 약탈이나 납치를 통해 촉한의 물자를 가능한 한 낭비하지 않도록 하는 방책이 강구되었다.[21] 그러나, 잦은 북벌은 촉한 국내에 대한 반복적인 임시 징수 등으로 더욱 피폐함을 초래했다. 이에 대해 제갈량은 엄격한 법치와 사상 통제, 평시의 군대를 공공 사업에 사용하는 등을 실시하여 국내의 불만을 위나라로 돌리는 전략을 계속 취함으로써 북벌과 체제 유지를 양립시켜 나갔다.[22]
제갈량 사후, 촉한의 체제는 일시적으로 동요했지만, 후계자인 장완은 승상에는 취임하지 않았지만 대장군·록상서사·익주자사를 겸임하여 제갈량의 지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다. 또한 장완은 도독·군사·감군·영군·호군·전군·참군에 군의 중추가 되는 인물을 배치하여 군의 안정을 도모했다. 제갈량이 사망하자 장완은 상서령이 되고, 곧 행도호의 지위를 더 받았다. 동시에 등지가 전군사, 양의가 중군사, 비의가 후군사, 강유가 우감군, 장익이 전영군, 왕평이 후전군이 되고, 차기장군이 된 오의와 함께 한중의 군과 성도의 정권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23]
장완 사후 그 뒤를 이은 비의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것은 제갈량 생전에 장완은 무군장군·상서랑, 비의는 중호군·상서령으로 모두 군사 계통과 상서 계통의 직무를 모두 경험했기 때문에, 군사·행정·경제를 일원적으로 운영하는 제갈량의 정치 수법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24] 그러나, 비의 사후 그 지위를 계승해야 할 강유는 록상서사에 취임했지만 행정 실무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또 한 사람인 진지도 진군장군에 취임했지만 군무에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갈량의 정치 수법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대장군으로서 군사를 장악하는 강유와 상서령으로서 행정 실무를 장악하는 진지는 대립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북벌의 실현을 위해 대립보다 협조하는 노선을 계속 취했다.
그러나 강유의 북벌 실패와 진지의 사망, 그에게 등용된 환관 황호의 등장으로 인해 강유는 군사 면에서는 장익·엄우, 상서 측에서는 제갈첨·동궐·번건, 그리고 환관 황호의 3방향의 반대파로부터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인사를 담당하는 상서에 기반을 갖지 못한 강유는 성도로 귀환하면 상서 내 반대파에 의해 확실히 파면될 것이므로, 성도로 귀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파도 서로 대립 관계에 있었고, 촉한 말기의 궁정은 4파로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25] 그래도 등애·종회의 촉 침공에 있어서는 장익·제갈첨·동궐 등이 강유와 함께 이를 저지했고, 지략으로 성도를 함락시킨 등애를 제외하면 위나라 군대를 철수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등 격렬한 권력 투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치명적인 분열은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26]
촉한의 주요 관직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
승상 | 제갈량 |
사도 | 허정 |
록상서사 | 제갈량, 장완, 비의, 강유 |
상서령 | 법정, 유파, 이엄, 진진, 장완, 비의, 동윤, 여예, 진지, 동궐, 번건, 제갈첨 |
평상서사 | 마충, 제갈첨, 동궐 |
상서복사 | 이복, 요주, 동궐, 제갈첨 |
승상장사(서제조사) | 왕련, 향랑, 양의 |
유부장사(승상영병출칙통류사) | 장예, 장완, 마충 |
6. 평가
촉한은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으나, 후대에 일어난 정통 논쟁(정윤론)에서 그 존재가 크게 주목받았다.[29]
삼국 시대에는 세 왕조가 대립하였으나, 진수는 『삼국지』에서 조조와 조비 등 위만을 황제로 인정하고, 유비와 손권은 열전에 수록하여 형식적으로는 위나라의 신하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춘추의 필법"으로 촉한과 오도 독립된 왕조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고국인 촉한을 오와도 차별하며, 그 정통성을 엿보게 하는 묘사도 은밀히 넣었다.
동진 시대, 진 왕조는 중원이 비한족 왕조에 지배당하여 강남으로 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또한 동진은 약체였고, 환온·환현 부자와 유유에 의해 선양이 노려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양을 부정하기 위해, 진은 위로부터의 선양이 아니라, 후한을 잇는 촉한을 무너뜨리고 처음으로 성립했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위의 정통성을 부정한 결과, 촉한을 정식 왕조로 여기는, 소위 촉한 정통론이 생겨난 것이다. 습착치의 『한진춘추』와 원굉의 『후한기』는 그러한 역사관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사료이다. 『사고전서』는 『한진춘추』의 촉한 정통론을, 중원을 조위에 빼앗기고 파촉으로 피한 촉한에 동진의 현황을 중첩시킨 결과로 보고 있다. 또한, 나카무라 케이지는 『한진춘추』의 촉한 정통론에, 위의 정통성을 부정함으로써 위에서 진으로의 선양 시에 일어난 사건에서 사마씨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29]
비한족 왕조에서는, 흉노의 유연이 스스로를 한 왕조의 후계자로 위치시키고, 동시에 유선에게 시호를 추증하고 유비를 유방, 유수와 함께 제사 지내는 등, 역시 촉한을 한의 후계자로 여겼다.
북송에 성립한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그때까지의 정사류를 총람하는 대서이지만, 이 책에서 위·촉한·오는 모두 정통 왕조로 인정받지 못했다. 사마광은 통일 왕조만을 정통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년에는 편의상 위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어, 소극적이지만 위의 정통을 인정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남송 시대가 되면, 다시 촉한 정통론이 주목을 받는다. 여진족의 금에 의해 남송 왕조가 동진과 마찬가지로 강남으로 몰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주희는 『통감강목』을 편찬하여 촉한의 정통성을 선양했다. 또한 남송의 소상이나 원나라의 하경 등은 『속후한서』라고 칭하는, 『삼국지』를 촉한 정통론에 기초하여 재편집한 역사서를 저술했다. 이들은 모두 촉한을 본기로 세우고, 조조 등의 존재는 기재나 열전으로 옮겼다.
원말명초에 성립한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통감강목』의 사상·역사관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촉한이 정통인 존재로 이야기에서도 명확히 위치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청나라 초에 『삼국지연의』를 개편한 모종강도 그것을 계승하여 정통관을 강하게 작용시켜, 촉한을 정통으로 하고, 위·오를 참국이라고 단정 지었다. 여기에 유비를 선인, 조조를 악인으로 하는 삼국지관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7. 역대 황제
유비는 일부 역사 기록에서 선제(先帝)라고도 불린다. 유선은 진에 항복한 뒤 안락사공(安樂思公)이라는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한조를 건국한 유원에 의해 효회황제(孝懷皇帝)로 추존되었다. 일부 역사 기록에서는 그를 후주(後主)라고도 부른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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