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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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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염은 사마소의 장남으로, 265년 서진을 건국하고 삼국 통일을 이룬 인물이다. 그는 조부 사마의가 권력을 장악한 후 위나라를 대신하여 진나라를 세웠으며, 초기에는 개혁 정치를 펼쳤으나 말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서진의 몰락을 초래했다. 사마염은 황족에게 군권을 부여하는 정책으로 팔왕의 난을 유발했고, 이민족 통제에 실패하여 혼란을 야기했으며, 어리석은 아들 혜제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서진의 멸망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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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위의 섭정 - 사마사
    사마사는 사마의의 장남으로,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으며, 관구검·문흠의 난을 진압하다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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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로 조예의 유언에 따라 사마의와 함께 어린 황제 조방을 보좌했으나, 권력욕으로 사마의와 대립하다 고평릉의 변으로 몰락하여 위나라 황족 세력 약화와 사마씨 일가의 권력 장악에 영향을 미쳤다.
사마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진 무제 ([[염립본]] 필, [[보스턴 미술관]] 소장)
진 무제 (염립본 필, 보스턴 미술관 소장)
사마염
안세(安世)
시호무황제(武皇帝)
묘호세조(世祖)
존호시조(世祖)
출생236년
사망290년 5월 16일
아버지사마소
어머니왕원희
배우자무원황후 양염
무도황후 양지
효회태후 왕씨
좌귀빈
호귀빈
제갈부인 외 9명
자녀사마궤
사마충
사마간
사마치 외 21명
능묘준양릉(峻陽陵)
통치 정보
국가서진
재위 기간266년 2월 8일 ~ 290년 5월 16일
즉위일태시(泰始) 원년 12월 13일
퇴위일태희(太熙) 원년 4월 20일
연호태시 : 265년 - 274년
함녕 : 275년 - 280년
태강 : 280년 - 289년
태희 : 290년
봉호진왕(晉王)
봉호 기간265년 9월 7일 ~ 266년 2월 8일
왕조
왕조서진
같이 보기
관련 항목진나라의 군주 목록

2. 건국 이전

사마염은 조위의 권신 사마소의 장남으로, 236년에 태어났다. 사마염의 집안은 할아버지 사마의 대부터 조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버지 사마소는 고평릉 사변으로 권력을 잡은 사마의의 아들로, 형 사마사가 죽은 후 조위 정부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5]

사마염은 260년 조모가 사마소에게 대항하여 일으킨 시도를 진압하고, 새로운 황제 조환을 수도 낙양으로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263년 사마소가 진공(晉公)으로 봉해진 후, 사마염은 태자로 책봉되었다.[6][7]

젊은 시절 사마염은 "관대하고 은혜로우며 어질고 두터우며, 침착하고 깊으며 도량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품관인법에 따라 그의 출신지인 하내군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의 귀공자로 여겨졌으며, 할아버지와 백부가 맡았던 관직을 역임했다.

265년 9월 6일, 사마소가 사망하자 사마염은 진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조환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진(晉)으로 바꾸었다.

2. 1. 가문의 권력 장악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통해 정적인 조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사마씨 가문은 조위의 3대 황제 조방과 4대 황제 조모를 폐위하며 권력을 강화했다.[5] 조위의 마지막 황제인 조환 대에 이르러, 사마씨 가문의 수장인 사마소승상에서 진공(晉公)을 거쳐 진왕(晉王)으로 승작되었고, 이에 따라 사마염은 왕세자가 되었다.[6][7]

사마소는 주공조조의 선례를 따라 황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사마 가문은 조위 황실을 압도하는 권력을 쥐게 되었다.

2. 2. 후계자 지명

사마소는 사마염과 그의 동생 사마유 중 누구를 후계자로 할지 고민하였다. 사마유는 재능이 있다고 여겨졌고, 사마사에게 입양되었기 때문에, 사마소는 형의 가문이 사마씨의 정통이라고 생각하여 사마유를 후계자로 고려했다. 그러나 많은 고위 관리들이 사마염을 지지했고, 결국 사마소는 사마염을 후계자로 결정했다.[6][7] 배수는 사마염이 인망을 얻고 있고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될 상이 아니라고 사마소에게 진언하여 세자가 결정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3. 서진 건국과 통일

265년, 사마소가 사망한 후, 사마염은 조환에게 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했다. 사마염은 사마소왕원희(왕숙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젊은 시절부터 "관대하고 은혜로우며 어질고 두터우며, 침착하고 깊으며 도량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품관인법에 따라 향품을 정할 때, 하내군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 사마의사마사가 맡았던 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즉위 이듬해(266년) 1월, 사마염은 일족 27명을 군왕으로 삼아 각지에 봉하고 토지와 병력을 부여했다. 이는 위(魏)가 황족에게 힘과 토지를 많이 주지 않아 황족의 힘이 약했던 것이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태시 4년(268년) 1월에는 태시율령이 완성되었다.

사마염의 초기 치세는 학식과 예교를 중시하는 명망가를 중신으로 많이 등용하고, 서진 성립 시 민심을 얻기 위해 서민에게 민작을 하사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후한이나 위(魏)의 황족 임관 금지를 해제하고 조식의 아들 조지제갈량의 자손을 등용하는 등, 후한 말부터 위(魏)에 걸쳐 전란으로 고통받았던 백성의 마음을 고려하여 황족 간의 우애, 예교에 기반한 국가를 구축하고자 했다.

3. 1. 건국 과정

265년, 사마소가 죽고 진왕직을 승계한 사마염은 조환을 압박하여 선양을 요구했다. 사마염은 선양을 받은 뒤 조환을 진류왕(陳留王)으로 봉하고, 낙양에서 국호를 진(晉)으로 바꾸어 '''진나라를 건국하였다.''' 훗날 사마예가 건업에 건설한 동진과 구별하기 위하여, 흔히 사마염이 건국한 진을 '''서진'''이라 부른다.

함희 원년(264년), 사마소가 진왕이 되자 사마염은 그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처음에는 사마소가 셋째 아들 사마유를 후계자로 생각했는데, 이는 사마유가 사마사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며, 사마소는 형 쪽 가문이 사마씨의 정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신의 반대로 함희 2년(265년) 5월, 사마염은 정식으로 진왕의 세자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사마소가 사망하자 사마염은 진왕·상국의 자리를 계승했다. 같은 해 12월, 가충, 배수, 왕침, 양호, 순욱, 석포, 진건 등과 함께 원제(조환)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황제의 자리를 빼앗고, 새로운 왕조를 "진"이라고 칭하며, 연호를 태시로 고쳤다.

3. 2. 삼국 통일

280년, 뛰어난 장군 두예왕준의 활약으로 손호가 다스리던 오나라를 멸망시켜 60년간 이어진 삼국 시대의 막을 내렸다.

279년, 마륭이 투파의 반란을 진압하자 사마염은 오나라 정벌에 집중하여, 숙부 사마주, 왕혼, 왕융, 호분, 두예, 왕준이 이끄는 여섯 방면의 공격을 지시했다. 진나라 군대는 빠르게 진격하여 주요 도시를 점령했고, 왕준의 함대는 양쯔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나라 함대를 격파했다. 오나라 재상 장제는 왕혼의 군대를 막으려 했으나 패배하고 전사했다. 왕혼, 왕준, 사마주는 건업으로 진격했고, 결국 손호는 280년 봄에 항복했다. 사마염은 손호를 귀명후로 봉했고, 옛 오나라 영토는 진나라에 순조롭게 통합되었다.

오나라가 멸망한 후, 사마염은 지방 장관이 군사 문제를 담당하지 않고 문관으로 전환하도록 하고, 지방 민병대를 해산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도황과 산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행되었으며, 훗날 오호 십육국 시대에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함녕 5년(279년) 11월부터 가충, 양제를 각각 주장과 부장으로 삼아 토벌 조서를 내리고, 20만 대군이 동서에서 오나라를 공격했다.[1] 함녕 6년(280년) 2월, 진나라 군대가 강릉을 함락시켰고, 3월에는 석두성이 함락되어 진나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오 멸망)[1]

4. 통치와 정책

사마염은 통일 이후 내부 통치에 힘쓰며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특기할 만한 업적은 태강 원년(280년)부터 시행된 점전과전법이다.

후한 말 혼란기부터 흉노, 선비 등 이민족이 중원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기존 한인 주민들과 문제를 일으켰다. 시어사 곽흠은 통일된 기회에 이들을 변경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상소했지만, 사마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태자 사마충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여론은 사마염의 동복 동생인 제왕 사마유를 후계자로 기대했다. 그러나 사마염은 사마유에게 제나라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를 지지하는 파벌을 숙청했으며, 사마유는 283년에 사망했다.

284년 이후에는 천재지변이 잇따르고 일식도 자주 일어나 인심이 황폐해졌다. 만년에는 정치 실권이 황후 양지의 친아버지인 양준에게 넘어가, 외척 전권의 양상이 나타날 조짐도 보였다.

4. 1. 초기 개혁 정치

사마염은 즉위 초기에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며 형벌 제도를 개혁하는 등 개혁 정치를 펼쳤다.[1] 그는 조위(曹魏)가 황실 종친들의 권력이 부족했던 점을 보완하고자, 266년 2월 즉위 직후 많은 숙부, 사촌, 형제, 아들들을 제후로 봉하고 각자 독립적인 군사 지휘권과 영지 내 완전한 권한을 부여했다.[1]

사마염은 조위의 가혹한 형벌 제도를 개혁하여 보다 자비로운 제도를 만들고자 했다.[1]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귀족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형평성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다.[1] 귀족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가벼운 처벌을 받는 반면, 평민들에 대한 처벌은 크게 줄어들지 않아 귀족들의 부패와 사치가 만연하고 빈민들은 어려움을 겪었다.[1] 예를 들어, 267년에는 여러 고위 관리들이 현(縣)의 치안과 공모하여 공공 토지를 사유화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마염은 고위 관리들을 처벌하지 않고 현의 치안만 가혹하게 처벌했다.[1]

4. 2. 황족 우대 정책

사마염은 즉위한 이듬해 1월, 일족 27명을 군왕으로 삼아 각지에 봉하고 토지와 병력을 부여했다.[1] 이는 위(魏)가 황족에게 힘과 토지를 많이 주지 않아 황족의 힘이 약했던 것이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 사마염은 후한이나 위(魏)의 황족 임관 금지를 해제하고 조식의 아들 조지제갈량의 자손을 등용하는 등, 후한 말부터 위(魏)에 걸쳐 전란으로 고통받았던 백성들의 마음을 고려하여 황족 간의 우애와 예교에 기반한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2]

5. 말년의 실정과 몰락

삼국 통일 이후 사마염은 성군(聖君)처럼 행동하고 검소한 생활을 강조했지만, 말년에는 부패와 향락에 빠져 서진 몰락의 길을 열었다. 신하들은 사마염에게 '공명 같은 신하가 왜 없느냐'고 묻자 '폐하께서는 공명이 여럿 있어도 소용없다'는 답변을 들었고, 어떤 이는 사마염을 후한 말기 환제영제와 같다고 평가했다.[12]

279년, 장군 마륭이 투파의 반란을 진압하자 사마염은 동오 정벌에 나섰다. 사마주, 왕혼, 왕융, 호분, 두예, 왕준에게 6개 방면으로 공격을 지시했고, 특히 왕혼과 왕준에게 많은 병력을 배치했다. 진나라 군대는 빠르게 진격하여 변경 도시들을 점령했고, 왕준의 함대는 양쯔강에서 동오 함대를 격파했다. 동오의 재상 장제는 왕혼에게 맞섰으나 패배하여 죽었다. 왕혼, 왕준, 사마주는 건강(建業)으로 진격했고, 손호는 280년 봄에 항복했다. 사마염은 손호를 귀명후로 봉하고 동오 영토를 통합했다.

동오 멸망 후, 사마염은 지방 장관의 군사 문제 담당을 금지하고 문관으로 전환, 지방 민병대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는 도황과 산도의 반대에도 시행되었고, 훗날 오호 십육국 시대에 지방 장관들이 신속하게 병력을 소집하지 못하는 문제를 야기했다. 그는 또한 한족이 아닌 사람들을 제국 밖으로 이주시키라는 조언을 거부했다.

이전의 로마 사절단 (166년, 226년)에 이어, 《진서》와 《문헌통고》는 사마염 통치 기간인 284년에 "대진"에서 온 사절단이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했다.[10][11]

5. 1. 사치스러운 생활

무제(사마염)는 서진 통일 이전인 273년 7월에 조칙으로 여성의 혼인을 잠시 금지하고 자신의 후궁에 넣기 위한 여자를 5천 명 뽑았다. 281년에는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오나라 황제였던 손호의 후궁 5천 명을 자신의 후궁으로 들였다.[8] 이로써 총 1만 명이나 되는 궁녀를 수용하는 광대한 후궁이 만들어졌다. 사마염은 매일 밤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돌아다녔으며, 이 양의 수레가 멈춘 곳의 여성과 하룻밤을 보냈다. 그래서 궁녀들은 황제가 자신에게 오도록 자기 방 앞에 대나무 잎을 꽂고 소금을 쌓아두었다. 양이 대나무 잎을 먹고 소금을 핥기 위해 멈추기 때문이다.[8]

무제는 국사보다는 연회와 여자들과의 즐거움에 더 집중했다.[8] 궁에는 너무나 많은 미녀들이 있어서 누구와 잠자리를 해야 할지 몰라, 염소가 끄는 작은 수레를 타고 다녔고, 염소가 멈추는 곳에서 멈췄다고 한다.[8]

5. 2. 외척 세력의 발호

281년, 사마염은 손호의 궁에서 5,000명의 여자를 데려와 자신의 궁으로 들였다. 그 후 중요한 국사보다는 연회와 여자들과의 즐거움에 더욱 집중했다. 궁에는 너무나 많은 미녀들이 있어서 누구와 잠자리를 해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염소가 끄는 작은 수레를 타고 다녔고, 염소가 멈추는 곳마다 그도 멈췄다고 한다.[8] 이 때문에 많은 여자들이 침실 밖에 대나무 잎과 소금을 심었는데, 이는 염소가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들이다. 양황후(楊皇后)의 아버지 양준(楊駿)과 삼촌 양요(楊珧), 양제(楊濟)가 실질적인 권력을 잡게 되었다.[8]

5. 3. 후계자 문제

사마염은 어리석은 아들 사마충을 후계자로 삼아, 팔왕의 난서진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다.[12] 276년, 사마염은 심각한 질병으로 후계자 위기를 맞았다. 태자 사마충은 정당한 후계자였지만, 관리와 백성들은 사마염의 유능한 동생인 제왕 사마유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희망했다. 사마염은 회복 후, 사마유를 지지한다고 생각되는 관리들에게서 일부 군사 지휘권을 박탈했지만, 그 외 다른 징계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황태자 사마충이 어리석었기 때문에, 여론은 사마염의 동복 동생으로 뛰어났던 제왕 사마유가 후계자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사마염은 사마유에게 제나라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주변의 간언을 묵살했으며 사마유를 지지하는 파벌을 철저히 숙청했다. 사마유는 이에 우울해하다가 283년에 사망했다.

283년 1월, 사마염은 사마유에게 야심이 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신의 영지로 보냈다. 장산공주는 머리를 조아리며 사마염에게 명령을 철회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사마염은 오히려 화를 내며 장산공주의 남편을 강등시켰다.[9]

289년, 사마염이 병에 걸리자 섭정으로 누구를 임명할지 고민했다. 그는 양준과 사마량을 모두 고려했다. 양준은 사마량을 두려워하여 그를 허창으로 보냈다. 290년, 사마염은 양준과 사마량 모두를 섭정으로 삼기로 결정했지만, 유서를 작성한 후 양준에게 압수되었고, 양준은 자신만을 섭정으로 임명하는 다른 유서를 공포했다. 사마염은 곧 사망했고, 제국은 발달 장애가 있는 아들과 권력을 위해 서로 피를 흘리려는 귀족들의 손에 맡겨졌다.

6. 평가

사마염은 삼국을 통일한 업적을 세웠지만, 말년의 실정으로 인해 서진의 몰락을 초래했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12] 통일 이전에는 영명한 군주였으나, 통일 이후에는 타락하여 국가의 기반을 다지지 못하고 서진의 빠른 멸망을 초래했다는 것이다.[12]

사마염의 정책 중 황족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고 군사력을 부여한 것은 팔왕의 난을 유발했고, 이민족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은 이민족이 화북에서 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12] 또한, 어리석은 아들 사마충을 황태자로 세운 것 역시 팔왕의 난 이후 혼란을 야기했다.[12] 후궁에 많은 여성을 둔 것도 백성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12]

사마염은 중국을 통일했지만, 그의 사후 서진은 팔왕의 난으로 피폐해졌다. 결국 서진은 영가의 난으로 손자 민제 대에 멸망했고, 사마염의 자손은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6. 1. 부정적 평가

사마염은 삼국을 통일한 뒤 초기에는 성군처럼 행동했지만, 말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했다.[12] 이러한 모습은 그를 환제영제와 비교하게 만들었다.[12]

사마염은 여색을 밝혀 손호의 후궁 5천 명을 포함해 총 1만 명의 궁녀를 거느렸다. 매일 밤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가다 멈추는 곳에서 잠자리를 가졌으며, 궁녀들은 황제의 선택을 받기 위해 대나무 잎과 소금을 문 앞에 두기도 했다.

후계자 문제도 심각했다. 어리석은 태자 사마충 대신 동생 사마유를 후계자로 원하는 여론이 있었지만, 사마염은 이를 무시하고 사마유를 제거했다. 결국 사마충이 즉위한 후, 황후 가남풍의 전횡과 팔왕의 난이 일어나 서진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흉노, 선비 등 이민족에 대한 통제 실패는 훗날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지방 군사력을 해산하고, 이민족을 중원에서 변경으로 이주시키지 않은 정책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결과적으로 사마염의 실책은 서진의 조기 멸망과 팔왕의 난, 그리고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혼란을 초래했다.

7.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사마방
조부사마의고조 선황제
조모장춘화선목황후 장씨
백부사마사세종 경황제
백모(정처)하후휘경회황후 하후씨
백모(후처)양휘유경헌황후 양씨
외증조부왕랑
외조부왕숙난릉후
부황사마소태조 문황제
모후왕원희문명황후 왕씨
황후(정후)양염237년~274년, 무원황후 양씨
제1황자사마궤비릉도왕
제2황자사마충황태자, 서진 혜제
황태자비(정후)가남풍혜문황후 가씨
황태자비(계후)양헌용혜헌황후 양씨
제3황자사마간진헌왕
제7황녀평양공주
제8황녀신풍공주
제9황녀양평공주
황후(계후)양지259년~292년, 무도황후 양씨
제16황자사마회발해상왕
황후(추존)왕원희효회태후 왕씨
제17황자사마치예장왕, 서진 회제
황자 비(정후)양난벽회황후 양씨
좌분귀빈 좌씨
호방귀빈 호씨
제11황녀무안공주
궁인이씨부인
제9황자사마윤회남충장왕, 272년~300년
제15황자사마안오효왕
황손사마업진왕, 서진 민제
궁인제갈완부인
제13황자사마모여음애왕
궁인심씨미인
제4황자사마경성양회왕, ~270년
제8황자사마위초은왕, 271년~291년
제12황자사마예장사여왕, 277년~304년
궁인진씨미인
제11황자사마하청하강왕
궁인조씨미인
제18황자사마연대애왕
궁인서씨재인
제5황자사마헌성양상왕
궁인궤씨재인
제6황자사마지동해충왕
궁인조씨재인
제7황자사마유시평애왕
궁인정씨재인
제14황자사마영성도왕
궁인장씨보림
제10황자사마해신도회왕
아우사마유제헌왕
아우사마조성양애왕
아우사마정국요동도왕
아우사마광덕광한상왕
누이경조장공주


8. 연호

사마염의 연호
연호기간
태시(泰始)265년 ~ 274년
함녕(咸寧)275년 ~ 280년
태강(太康)280년 ~ 289년
태희(太熙)290년 1월 28일 ~ 290년 5월 16일


참조

[1] 문서 bingyin day of the 12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Taishi era
[2] 인용
[3] 서적 Book of Jin
[4] 문서 According to Sima Yan's biography in Book of Jin, he died aged 55 (by East Asian reckoning) on the jiyou day of the 4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Taixi era of his reign. This corresponds to 16 May 290 on the proleptic Gregorian calendar. By calculation, his birth year should be 236. ([太熙元年四月]己酉,帝崩于含章殿,时年五十五...) Jin Shu, vol. 03
[5] Zizhi Tongjian Zizhi Tongjian
[6] 인용
[7] 문서 The month corresponds to 1 to 30 Jun 265 in the Julian calendar. However, vol. 78 of Zizhi Tongjian indicated that Sima Yan was made heir (世子) on the bing'wu day of the 10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Xian'xi era, which corresponds to 25 Nov 264 in the Julian calendar.
[8] 서적 華容世貌: 上海博物館藏明清人物畫 https://books.google[...] Xianggang da xue mei shu guan 2020-09-30
[9] 서적 晉書 http://ctext.org/wik[...] 2017-03-13
[10] 서적 Rome in the East: Transformation of an Empire Routledge, London & New York 2016
[11] 웹사이트 East Asian History Sourcebook: Chinese Accounts of Rome, Byzantium and the Middle East, c. 91 B.C.E. - 1643 C.E. http://www.fordham.e[...] Fordham University 2016-09-20
[12] 위키문헌 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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