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스크렐링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크렐링기는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노르드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과 툴레족을 지칭했던 용어이다. 어원은 고대 노르드어 'skrá'(마른 가죽)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야만인'을 뜻하는 현대 아이슬란드어 'skrælingi'와 관련이 있다. 이 용어는 아이슬란드인의 서에 처음 등장하며, 노르드인들은 11세기 초 빈란드에서 스크렐링기라고 불리는 원주민들과 접촉했다. 토르핀 칼세프니는 빈란드를 식민지화하려 시도했지만, 원주민과의 충돌로 인해 실패했다. 이누이트 설화에서는 노르드인을 '카블루나이트'라고 부르며, 이는 유럽인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 사우크족
    사우크족은 스스로를 '타키와키'라 칭하는 알곤킨어족의 북미 원주민 부족으로, 여러 지역으로 이주 후 블랙 호크 전쟁에서 패배하여 일부는 강제 이주되었으며 현재는 여러 네이션과 부족으로 나뉘어 존재한다.
  • 북아메리카의 원주민 - 나체즈족
    미시시피강 하류 지역에 살았던 나체즈족은 플라케민 문화의 후예로, 복잡한 사회 계층과 독특한 문화를 가졌으나 프랑스와의 갈등과 반란 이후 흩어져 다른 부족에 흡수되었고, 현재는 오클라호마주에 후손들이 거주하며 문화와 언어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노르드인의 아메리카 식민화 - 레이프 에이릭손
    레이프 에이릭손은 아이슬란드 출신의 노르드인 탐험가이자 그린란드 족장으로, 북미 빈란드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여겨지며, 헬룰란드, 마르크란드를 거쳐 빈란드에 이르는 항해를 통해 북아메리카를 탐험했고, 그의 탐험 기록은 사가에 남아있으며, 스칸디나비아계 미국인들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노르드인의 아메리카 식민화 - 빈란드
    빈란드는 라이프 에이릭손이 북아메리카 일부 지역에 붙인 이름으로, "포도주 땅" 또는 "목초지"를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랑스 오 메도스 유적 발견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불확실하며, 사가 기록과 고고학적 발견에도 불구하고 여러 미스터리를 남기고 있다.
스크렐링기
정의
의미스크렐링(Skræling)은 노르드인그린란드빈란드(현재의 캐나다)에서 만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어원'약한', '보잘것없는'을 의미하는 고대 노르드어 단어 'skrá'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가죽옷을 입은 자'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대상
그린란드도르셋 문화인
빈란드베오투크족
이누족
미크마크족
그 외의 원주민
역사적 기록
아이슬란드 사가아이슬란드 사가에 스크렐링과의 충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주요 내용스크렐링은 노르드 정착민에게 적대적이었으며, 교역을 하거나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노르드인은 스크렐링을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현대적 의미
의미 확장때로는 북극 원주민 전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비판적 시각스크렐링이라는 용어가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2. 어원

스크렐링기(Skræling)라는 단어는 이누이트족이 입었던 동물의 가죽을 지칭하는 "마른 가죽"을 의미하는 고대 노르드어 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2] 윌리엄 탈비처는 skrælingnon이 "고함치다, 소리 지르다"를 의미하는 고대 노르드어 동사 skrækjanon에서 파생되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3] 현대 아이슬란드어에서 는 "야만인"을 의미하며, 덴마크어 파생어인 은 "약골"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아리 토르길손이 그의 저서 Íslendingabók|italic=yesnon (아이슬란드인의 서)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4] 이는 노르드인 탐험가들이 처음으로 아메리카 원주민과 접촉한 시대보다 훨씬 후에 쓰여졌다. 이러한 자료가 기록될 당시 은 노르드 그린란드인들이 현대 이누이트의 조상인 툴레족을 부르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툴레족은 13세기에 북아메리카 본토에서 그린란드에 처음 도착했고, 이후 그린란드인들과 접촉했다. 13세기에 쓰여진 ''그린란드인의 사가''와 ''에리크 사가''는 노르드인들이 11세기 초에 만난 빈란드 지역의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18세기부터 영어에서 사용되어 왔다.[5]

그린란드 이누이트의 가장 큰 민족 집단인 "칼라알릿"은 아마도 ''skræling''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3] 1750년, 폴 에게데는 이누이트족이 그들끼리는 "이누이트"를 사용하지만, 이누이트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칼라알릿을 사용했는데, 이는 노르드 정착민들이 사용한 용어라고 말했다.[3]

3. 노르드인의 신세계 탐험

신세계에 대한 노르드 탐험은 985년 또는 986년에 그린란드로 가는 도중 항로를 벗어나 육지를 발견한 아이슬란드인 비야르니 헤리울프손에 의해 시작되었다.

: 그들은 이 땅이 무엇인지 서로 추측했는데, 비야르니는 이곳이 그린란드 같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6]

그의 항해는 레이프 에이릭손을 비롯한 후대 탐험가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헬루랜드, 마르크랜드, 빈란드 지역을 탐험하고 이름을 붙였다.

레이프 에이릭손은 빈란드를 탐험하면서 스크렐링기라고 불리는 원주민들과 접촉했다.

레이프는 빈란드에 "큰 집들"을 건설하여 이후 식민지 개척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린란드로 돌아온 그는 그의 형제 토르발드에게 빈란드를 탐험할 것을 제안했다.[6]

토르발드는 빈란드 원주민을 '스크렐링기'라고 불렀으며, 이들과 최초로 접촉했다. 토르발드는 원주민 8명을 공격하여 살해했고, 이후 해변에 정박한 배 옆에서 원주민의 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토르발드는 팔 아래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고, 이 상처로 인해 사망했다.[6]

3. 1. 레이프 에이릭손의 탐험

레이프 에이릭손은 빈란드를 탐험하면서 스크렐링기라고 불리는 원주민들과 접촉했다.

3. 2. 토르발드 에릭손의 탐험

레이프는 빈란드에 "큰 집들"을 건설하여 이후 식민지 개척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린란드로 돌아온 그는 그의 형제 토르발드에게 빈란드를 탐험할 것을 제안했다.[6]

토르발드는 빈란드 원주민을 '스크렐링기'라고 불렀으며, 이들과 최초로 접촉했다. 토르발드는 원주민 8명을 공격하여 살해했고, 이후 해변에 정박한 배 옆에서 원주민의 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토르발드는 팔 아래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고, 이 상처로 인해 사망했다.[6]

4. 토르핀 칼세프니의 식민지 개척 시도

에이나르 욘손의 토르핀 칼세프니 동상 (필라델피아)


토르핀 칼세프니는 선배인 토르발드와 레이프 에릭손과 같은 장소인 새로 발견된 빈란드를 진정으로 식민지화하려 시도한 최초의 노르드 탐험가였다. 에리크 사가에 따르면 그는 세 척의 배와 140명의 남자를 이끌고 항해를 시작했다.[7]

목적지인 빈란드에 도착하자 그들은 땅의 이름이 유래된 유명한 포도와 저절로 자라는 밀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 장소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냈으며, 낚시, 내륙에서 사냥, 섬에서 알을 채집하며 간신히 살아남았다. 다음 여름 그들은 호프 섬으로 항해하여 그곳에서 원주민과 처음으로 평화로운 교류를 했고, 그들과 교역을 했다. 토르핀은 그의 부하들에게 칼과 창을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여 그들은 주로 붉은 천으로 모피를 교환했다. 그들은 원주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들은 키가 작고 위협적인 특징을 지녔으며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눈은 크고 뺨은 넓었다.[7]

얼마 후, 노르드인들은 노르드 야영지에서 풀려난 황소에 겁을 먹은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공격자들과 교전하기 전에 더 방어 가능한 위치로 후퇴해야 했다. 전투가 끝날 무렵 그의 부하 두 명이 죽었고 "많은 원주민"이 살해되었다. 다른 모든 사람이 거주하는 외국 땅과 마찬가지로 토르핀과 그의 부하들은 다음과 같이 깨달았다.

그 땅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전 거주민들의 공격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7]

이 모험 이후 그들은 그린란드로 돌아갔다. 그들의 3년간의 원정은 500년 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전면적인 유럽 정복을 시작할 때까지 신세계에서 알려진 가장 오래 지속된 유럽 식민지였다.

4. 1. 원주민과의 관계

토르핀 칼세프니는 선배인 토르발드와 레이프 에릭손과 같은 장소인 새로 발견된 빈란드를 진정으로 식민지화하려 시도한 최초의 노르드 탐험가였다. 에리크 사가에 따르면 그는 세 척의 배와 140명의 남자를 이끌고 항해를 시작했다.[7]

목적지인 빈란드에 도착한 그들은 땅의 이름이 유래된 유명한 포도와 저절로 자라는 밀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 장소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냈으며, 낚시, 내륙에서 사냥, 섬에서 알을 채집하며 간신히 살아남았다. 다음 여름 그들은 호프 섬으로 항해하여 그곳에서 원주민과 처음으로 평화로운 교류를 했고, 그들과 교역을 했다. 토르핀은 그의 부하들에게 칼과 창을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여 그들은 주로 붉은 천으로 모피를 교환했다. 그들은 원주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얼마 후, 노르드인들은 노르드 야영지에서 풀려난 황소에 겁을 먹은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은 공격자들과 교전하기 전에 더 방어 가능한 위치로 후퇴해야 했다. 전투가 끝날 무렵 그의 부하 두 명이 죽었고 "많은 원주민"이 살해되었다.[7] 다른 모든 사람이 거주하는 외국 땅과 마찬가지로 토르핀과 그의 부하들은 다음과 같이 깨달았다.

이 모험 이후 그들은 그린란드로 돌아갔다. 그들의 3년간의 원정은 500년 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전면적인 유럽 정복을 시작할 때까지 신세계에서 알려진 가장 오래 지속된 유럽 식민지였다.

5. 이누이트 설화 속의 노르드인

곧 카약을 탄 사람이 진심으로 창을 던져 [노르드인을] 즉사시켰다. 겨울이 오자 카블루나이트(Kavdlunait)가 와서 동포의 죽음에 복수할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8] 카블루나이트(복수)는 이누이트족이 외국인 또는 유럽인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현대 그린란드어의 ''qallunaaq'' ("덴마크인")와 비교해 보면 되는데, 이전에는 ''ĸavdlunâĸ''으로 표기되었다.

6. 결론

참조

[1] 서적 Liberty, Equality, Power: A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Compact https://books.google[...] Thomson Wadsworth 2010-11-24
[2] 서적 Íslensk orðsifjabók https://malid.is/lei[...]
[3] 서적 Language Contact in the Arctic: Northern Pidgins and Contact Languages https://books.google[...] Walter de Gruyter 1996-01-01
[4] 서적 The Last Vikings https://archive.org/[...] I.B. Tauris 2010
[5] 간행물 Skraeling http://dictionary.oe[...] 2010-10-12
[6] 서적 The Saga of the Greenlanders Penguin Books
[7] 서적 The Saga of Erik the Red Penguin Books
[8] 서적 Tales and Traditions of the Eskimo https://books.google[...] Blackwood
[9] 서적 Liberty, Equality, Power: A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Compact http://books.google.[...] Thomson Wadsworth 2010-11-2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