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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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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중회는 1930년대 초 최린을 중심으로 결성된 자치 운동 단체이다. 3·1 운동 이후 천도교 내 갈등과 일제의 문화 통치 기조 속에서 자치론을 주장하며 설립되었다. 1934년 발기인회를 개최하고 회원 모집, 기관지 발간 등의 활동을 펼쳤으며,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친일 색채를 강화하다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참여하고 해산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시중회를 일제 협력 단체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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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회
기본 정보
한글시중회
한자時中會
히라가나じちゅうかい
가타카나シヂュンホェ
로마자 표기Sijunghoe

2. 설립 배경

1934년 11월, 최린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신파는 조선총독부의 지도를 받아 시중회를 결성했다. 시중회는 자치론을 실천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시중회의 목적은 "대세에 합류하여 실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조선 민중의 신생활, 신문화로 신흥 조선을 건설"하고, "일본 민족과 혼연일체가 되어, 어느 방면으로나 잘 일치 합작하여 나아감으로써 우리의 자립적 실력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 독립 대신 타협적으로 추구한 자치론과 실력 양성론을 바탕으로 일본 제국의 일선융화 정책을 따르는 것이었다. 1935년을 기준으로 회원 수는 258명이었다.

2. 1. 천도교 내 갈등

3·1 운동 이후 천도교는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오랜 갈등을 겪고 있었다. 3·1 운동에도 참여했던 최린 중심의 신파는 조선의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 제국 통치 하의 자치를 추구하는 자치론을 추구하였다.

2. 2. 최린의 자치론

1934년 11월에 최린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신파가 조선총독부의 지도를 받아 시중회를 결성했다. 천도교는 3·1 운동 이후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오랜 갈등을 계속하고 있었다. 3·1 운동에도 참여했던 최린 중심의 신파는 조선의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 제국 통치 하의 자치를 추구하는 자치론을 추구하였다. 시중회는 자치론의 실천적 추진을 위하여 창립되었다.

시중회의 목적은 "대세에 합류하여 실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조선민중의 신생활 신문화로 신흥조선을 건설"하며, "일본 민족과 혼연일체가 되어, 어느 방면으로나 잘 일치 합작하여 나아감으로써 우리의 자립적 실력을 확충"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독립 대신 타협적으로 추구한 자치론과 실력양성론을 바탕으로, 일본 제국의 일선융화 정책을 따르고 있다.

3. 주요 활동

시중회는 조선인의 의식주 개선과 풍속 진흥을 목표로 하는 생활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3. 1. 조직 구성 및 활동

1934년 8월 발기인회를 개최하고, 9월에 회원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발회식을 개최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5년 1월 각 경찰서장에게 시중회 취지서와 강령을 송부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기관지 《시중》 창간호를 발행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알렸다.

3. 2. 일제 협력 강화

중일 전쟁 발발 등으로 시국이 경색되면서 시중회의 친일 색채는 점차 강화되었고, 1938년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발기단체로 참가하면서 자진 해산하였다.

4. 평가

시중회는 조선 독립 대신 타협적 자치론을 추구하며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는 3·1 운동 이후 최린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신파가 조선의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 통치 하의 자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4. 1. 비판적 시각

민족문제연구소는 시중회를 일제 협력 단체로 규정하고, 친일 행적을 비판하였다. 최린의 자치론은 민족운동 진영으로부터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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