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술
1. 개요
심윤술은 초나라의 장군으로, 초장왕의 후손이며 초나라 영윤 심제량의 아버지이다. 기원전 506년 오나라의 침략 당시 좌사마 겸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사령관 낭와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작전에 실패하고 전사했다. 그는 부패한 관리 비무극을 제거하는 데 기여했으며, '좌전'에는 그의 언행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심주량은 엽공으로 봉해졌으며, 심윤술은 심씨와 엽씨의 시조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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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씨 -
심 (춘추)
심(沈)은 희성을 가진 자작 작위의 국가로, 안후이성 푸양 시 린취안 현에 수도를 두었으며, 주 성왕 때 담계 재가 봉해지면서 시작되어 초나라와 동맹 관계를 맺었지만 기원전 506년 채나라에 멸망했다. -
심씨 -
담계 재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복 형인 담계 재는 주나라 초기에 심에 봉해졌고, 삼감의 난 평정 후 사공이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이 심씨를 칭하게 되었다. -
춘추 시대의 재상 -
안영
안영은 춘추 시대 제나라의 재상으로, 세 명의 군주를 섬기며 뛰어난 재치와 능력을 발휘하여 제나라 부흥에 기여했고, 그의 청렴함과 지혜는 여러 고사성어와 일화로 남아 춘추 시대 명재상으로 평가받지만, 정치적 행보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 -
춘추 시대의 재상 -
초 영왕
초 영왕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왕으로,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후 쇠퇴한 초나라의 패권을 재건하려 했으나, 쿠데타로 자결했다. -
초나라의 군인 -
오기
오기는 중국 전국 시대의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가로, 여러 나라에서 활약하며 군사적 업적을 세우고 초나라 재상으로 법가 개혁을 추진하여 부국강병을 이끌었으며, 《오자병법》을 저술했다. -
초나라의 군인 -
항연
항연은 중국 전국시대 말 초나라의 장군으로, 진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나 왕전에게 패배하여 전사 또는 자결했으며, 그의 죽음은 초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지만 진나라에 저항한 용맹함은 백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진나라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초나라 부흥을 이끌었다.
3. 생애
기원전 506년, 채나라가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오나라의 합려는 손무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초나라를 침공하였다. 초 소왕은 심윤술을 좌사마(左司馬) 겸 총사령관으로, 영윤 낭와(자상)를 우사마(右司馬) 겸 부사령관으로 삼아 손무를 막게 했다. 그러나 낭와는 심윤술의 명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군사를 움직이다 크게 패했다. 이후 심윤술은 낭와와 함께 오군을 협공하는 작전을 세웠으나, 낭와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실패하고 자신도 전사하였다.
3.1. 비무극 제거
비무극은 읍완(郤宛중국어)을 함정에 빠뜨렸고, 재상 낭와 (자창이라고도 함)를 속여 그를 죽이게 했다. 심윤술은 군대의 최고 사령관인 사마의 지위에 오른 후 낭와의 실수를 지적하며 그가 미움을 받던 비무극을 처형하도록 설득했다.
3.2. 백거 전투
오나라와 동맹을 맺은 채나라가 초나라를 침공하자, 초 소왕은 심윤술을 좌사마(左司馬) 겸 총사령관으로, 영윤 낭와(자상)를 우사마(右司馬) 겸 부사령관으로 삼아 손무가 이끄는 오나라 군을 막게 했다. 그러나 낭와는 심윤술의 명을 따르지 않고 독단적으로 군사를 움직이다 크게 패했다.
기원전 506년, 초나라 초 소왕 치세 동안, 오나라 오왕 합려는 손자가 지휘하는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를 침략했다. 오나라 군대는 회수를 따라 항해한 후 배에서 내려 한강 동쪽 강둑으로 진군했다. 이에 낭와와 심윤술은 초나라 군대를 이끌고 한강 서쪽 강둑으로 갔다.
심윤술은 낭와와 함께 다음과 같은 작전을 세웠다. 낭와는 한강을 따라 주력군과 함께 방어하고, 심윤술은 초나라 북부 변경의 방성으로 가서 그곳 군대를 이끌고 회수에 남겨진 오나라 함선을 파괴한 뒤, 오나라 군대의 귀환로에 있는 세 관문을 차단한다. 그 후 낭와가 한강을 건너면 두 군대가 동시에 오나라 군대를 공격한다. 낭와는 이 계획에 동의했고 심윤술은 방성으로 떠났다.
그러나 심윤술이 떠난 후, 사관 시황(史皇중국어)은 낭와에게 초나라 백성들이 낭와를 미워하고 심윤술을 따르며, 심윤술의 계획대로라면 그가 모든 공을 차지할 것이라고 부추겼다. 낭와는 마음을 바꿔 강을 건너 즉시 공격하기로 했다.
두 군대는 현재의 한천시 남동쪽인 소별과 대별산맥 사이에서 세 번의 전투를 벌였고, 오나라가 승리했다. 낭와는 도망치려 했지만 시황이 만류했다. 오나라 군대는 보주 전투에서 초나라 군대를 격파했고, 시황은 전사했으며 낭와는 정나라로 도망쳤다. 오나라 군대는 남은 초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다섯 번 더 승리하고 초나라 수도 영을 점령했다.
심윤술은 돌아와 용서강(현재 경산현의 사마강)에서 오나라 군대를 격파했지만, 세 번의 전투에서 모두 부상을 입었다. 그는 포로로 잡히기 싫어 장교 오구비에게 자신을 죽이고 머리를 집으로 가져가라고 부탁했다.
4. 유산
전쟁 후 조왕은 심윤술의 아들 심주량을 초나라 북쪽 변경에 위치한 예성(현재의 허난성 예현)에 봉토로 봉했다. 기원전 478년, 초 혜왕 재위 기간 동안 심주량은 백공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의 통치를 회복했다. 그는 '예공'(엽공)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엽씨의 시조가 되었다. 따라서 심윤술은 현재 각각 중국에서 49번째와 42번째로 흔한 중국 성씨 목록인 심씨와 엽씨의 시조로 여겨진다.
오늘날 백거 전투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군 중 두 명인 손자와 오자서의 가장 큰 승리로 알려져 있지만, 고대 역사가들은 심윤술을 유능한 장군이자 훌륭한 적수로 묘사했다. 그의 업적, 특히 그의 죽음은 여러 역사 소설에서 극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