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합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합려는 오나라의 왕으로, 본래 이름은 광(光)이다. 그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오왕 료를 암살한 후 왕위에 올랐다. 이후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을 함락시키는 등 뛰어난 군사적 업적을 세웠으나,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에 대한 복수를 유언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나라의 군주 - 부차 (오나라)
    부차는 춘추 시대 오나라의 제7대 왕으로, 아버지 합려의 복수를 위해 왕위에 올라 월나라를 굴복시키고 제나라를 격파하며 오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간신의 모함과 미인에게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한 결과 월왕 구천에게 패하여 자결, 오나라를 멸망시킨 와신상담 고사와 관련된 인물이다.
  • 오나라의 군주 - 오왕 요
    오왕 요는 주몽왕의 손자이자 오나라의 군주로서 초나라와의 잦은 전투와 오자서 등용을 통한 국력 강화에 힘썼으나, 공자 광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해 왕위 계승 과정에서의 문제점과 권력 찬탈에 대한 비판을 받았다.
  • 쑤저우시 - 태호석
  • 쑤저우시 - 양청호
    양청호는 다양한 어패류가 서식하는 호수이며, 특히 상하이 따자씨에의 최상품 재료로 사용되는 대갑게가 유명하고, 경극 사가빈의 배경으로 알려져 있다.
  • 기원전 6세기 중국의 군주 - 초 영왕
    초 영왕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왕으로,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후 쇠퇴한 초나라의 패권을 재건하려 했으나, 쿠데타로 자결했다.
  • 기원전 6세기 중국의 군주 - 주 경왕 (개)
    주 경왕은 주 영왕의 손자이자 주 경왕의 아들로, 형인 도왕 사후 기원전 520년에 즉위하여 왕자조의 난 등을 겪고 성주로 천도했으며 기원전 476년에 사망했다.
합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합려
다른 이름闔閭 (정체자), 阖闾 (간체자), Hélǘ (병음), Ho-lü (웨이드-자일스)
또 다른 이름闔廬 (정체자), 阖庐 (간체자), Hélú (병음), Ho-lu (웨이드-자일스)
희광 (姬光)
호칭
통치
국가
재위 기간기원전 514년 ~ 기원전 496년 (추정)
전임자
후임자부차
도읍구쑤 (姑蘇)
가족 관계
아버지여매 또는 제번
자녀부차
파 (波)
선 (善)
생애
사망 년도기원전 496년 (합려 19년) (추정)
능묘알려지지 않음
기타
참고『사기색은』에 따르면 당나라 공영달의 말에 의하면 여매의 아들임.

2. 왕위 계승 및 즉위 과정

오나라 초대 국왕 수몽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막내 아들 계찰은 현명하여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여겨졌다.[13] 그러나 계찰은 왕위를 사양하였고, 결국 수몽의 장남 제번이 왕위를 이었다. 제번 사후에는 동생인 여제가 왕위를 이었고, 여제 사후에는 다시 그의 동생 여말이 왕위를 이었다. 여말은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계찰은 이를 거부하고 도망쳤다. 결국 왕위는 여말의 아들 에게 돌아갔다.[13]

이러한 왕위 계승 과정에 불만을 품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제번의 아들 공자 광이었다. 그는 계찰이 왕위를 사양했다면, 장자의 아들인 자신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광은 자신의 야심을 숨기고 오왕 요를 섬기며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초나라에서 망명해 온 오자서가 광의 야심을 눈치채고, 그에게 암살자 전제를 추천하였다.[13]

2. 1. 왕위 쟁탈전

오나라의 공자 광은 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랐다.[13] 광은 요의 아들이자 조카였다.[2][3] 그는 초나라에서 망명해 온 오자서를 측근으로 받아들였고, 오자서의 추천으로 전제를 만나게 되었다.[4]

사기』 오태백세가에 따르면, 광의 아버지 제번은 오나라 초대 국왕 수몽의 장자였다. 수몽에게는 3명의 아들이 더 있었는데, 그 중 막내 계찰이 현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수몽은 계찰을 왕으로 삼고 싶어 했으나, 계찰은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제번, 여제, 여말 순으로 형제 계승이 이루어졌고, 마지막에 계찰에게 왕위가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계찰은 여말로부터 왕위를 양보받으려 하자 도망쳤고, 결국 왕위는 여말의 아들 요에게 돌아갔다.

이에 광은 불만을 품었다. 그는 계찰이 왕위를 사퇴한 후에는 장자의 아들인 자신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불만을 숨긴 채 요를 섬기며 장군으로 활약했고, 그 무렵 망명해 온 오자서가 광의 야망을 눈치채고 전제를 추천했다. 전제는 요에게 물고기 요리를 올리면서 물고기 안에 숨겨둔 비수로 요를 찔러 죽였고, 자신도 호위병에게 살해당했다.[13] 이는 기원전 515년 여름 4월의 일이었다. 이 때문에 왕위에 오른 광, 즉 합려는 전제의 아들을 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춘추좌씨전』의 기록은 『사기』와 다른 부분이 많다.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계찰은 요의 숙부가 아니라 동생이며, 합려는 사촌이 아니라 숙부이다. 또한, 료에 이르는 "형제 상속"이 순조로웠다는 견해도 있다.[10]

수몽, 계찰의 일화와 관련해서는 백이, 숙제나 고공단보·계력 등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타나는데, 이는 형제 상속·막내 상속의 풍습을 유교적인 미담으로 윤색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학자도 많다.

2. 2. 즉위 후

오자서, 손무 등을 등용하여 초강대국 초나라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506년에는 당(唐), 채(蔡)나라와 연합하여 백거 전투에서 초나라의 수도 영을 함락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고 초나라를 거의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이듬해(기원전 505년)에 본국이 월나라에 침략 당하고, 동생 부개가 왕을 칭하고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가까스로 도망친 초왕을 추격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본국에 돌아와 난을 평정했다.[11]

기원전 506년, 합려는 오자서와 손자병법의 저자 손자의 도움을 받아 초나라를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그들은 다섯 번의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백거 전투였고, 수도 영을 점령했다. 수도를 약탈하는 동안, 합려는 백영에게 성적 폭행을 시도했지만, 백영은 칼로 그를 물리치며 꾸짖었고, 합려는 수치심에 빠져 물러났다.[5] 초나라는 진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진나라에게 패배한 후, 오나라 군대의 선봉 장군인 합려의 동생 부개는 반란을 일으켰다. 부개를 물리친 후, 합려는 초나라를 떠나야 했다. 부개는 나중에 초나라로 은퇴하여 그곳에 정착했다.

3. 월나라와의 전쟁 및 최후

기원전 506년, 합려는 오자서, 손무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백거 전투를 포함한 다섯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도 영을 함락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듬해(기원전 505년) 본국이 월나라의 침략을 받고, 동생 부개가 왕위를 찬탈하려는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초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고도 급히 귀국하여 내란을 평정해야 했다.[5]

기원전 496년, 월나라 왕 윤상이 죽자 합려는 월나라를 침공했으나, 범려의 계책에 패하고 령호부가 쏜 화살에 발가락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이 악화되어 합려는 사망했고, 아들 부차에게 복수를 유언했다.[12]

3. 1. 월나라 침공

기원전 496년, 합려는 10년 전의 원한을 풀기 위해 월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월나라 장군 범려의 책략에 막혀 패배하였다. 이 과정에서 합려는 다리에 을 맞았고, 이 상처가 덧나 사망하게 되었다.[2] 합려는 아들 부차에게 구천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음을 잊지 말라고 유언하며 복수를 맹세하게 하였다.

3. 2. 합려의 죽음과 복수 유언

기원전 496년, 월나라로 쳐들어갔으나, 월나라의 장군 범려의 책략에 막혀 패배하고 다리에 을 맞아 상처가 덧나 죽게 되었다. 아들 부차에게 구천이 부친을 죽였던 것을 잊지 말라고 유언하고, 복수를 맹세하게 했다.[2] 그는 아들에게 자신에게 복수하라고 말한 뒤 부상으로 사망했다.[5]

4. 합려에 대한 평가

합려는 오나라를 강국으로 이끈 군사적 업적과 오자서, 손자와 같은 인재 등용 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왕위 찬탈 과정에서 료왕을 암살하는 등의 비윤리적인 행위와 잦은 전쟁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점은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

4. 1. 긍정적 평가

합려는 뛰어난 인재 등용과 군사적 업적을 통해 오나라를 강국으로 만든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초나라의 망명자 오자서를 측근으로 받아들였고, 손자병법의 저자 손자의 도움을 받아 초나라를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펼쳐 백거 전투를 포함한 다섯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수도 영을 점령하기도 했다.[5] 이러한 군사적 업적은 오나라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4. 2. 부정적 평가

합려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료왕을 암살하는 등 비윤리적인 모습을 보였다.[4] 백거 전투에서 승리한 후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했을 때, 백영에게 성적 폭행을 시도했으나 백영이 칼로 저항하며 꾸짖자 수치심에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5] 이러한 행적은 그의 도덕성에 대한 비판을 낳는다.

또한, 합려는 지나치게 군사력을 남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초나라를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펼쳐 수도를 함락시키고, 월나라를 침공하는 등 잦은 전쟁을 일으켰다. 비록 백거 전투를 포함한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이러한 군사적 행동은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5. 기타

합려와 관련된 유물 및 문학 작품에 대한 내용은 관련 유물 및 문학 작품에서의 묘사 섹션을 참고하면 된다.

5. 1. 관련 유물

합려왕의 묘에서 나온 검. 칼날의 비문에는 "오나라 광공의 개인적인 용도로 제작됨"(攻吾王光 自作用僉)이라고 적혀 있다. 상하이 박물관 소장.


청동 ''오왕 광감'' ("오나라 광공의 대야"). 내부의 비문에는 합려가 딸의 지참금으로 이것을 의뢰했으며, 오나라와 초나라 가문 간의 정략 결혼의 증거가 기록되어 있다.

5. 2. 문학 작품에서의 묘사

사기에 등장한다.[6] 1983년 후베이성 징저우 장자산에서 발굴된 247호 묘(기원전 202-186년)의 8개 텍스트 중 하나인 ''개로'' 텍스트는 합려와 오자서 사이의 대화를 담고 있는데, 둔황 필사본과 유사하게 이 대화를 제 경공과 안영의 대화로 묘사하고 있다.[6]

참조

[1] 웹사이트 吳王 闔閭 https://web.archive.[...] 2010-10-25
[2] Citation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3] Citation The Columbia History of Chinese Literature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1
[4] Citation eBeijing https://web.archive.[...] Beijing Foreign Affairs Information Center 2016-12-15
[5] 서적 列女传 https://ctext.org/li[...] 2021-03-15
[6] 문서 The Glory of Yue 2010
[7] 문서 『史記索隠』が引く唐の孔穎達の言によると、余昧の子。
[8] 문서 『春秋左氏伝』では鱄設諸。
[9] 문서 『史記』では紀元前531年に逝去
[10] 문서 『史記』では余昧の息子
[11] 문서 紀元前506年に闔閭が楚の都である郢を占領したとき、王宮のうち旧令尹邸を末子の子山に与えた。しかし叔父の夫概が子山を攻撃したので、叔父を恐れた子山は立ち退いて、父の陣営に向かった。代わって夫概がここを本営とした(『春秋左氏伝』)。
[12] 문서 闔閭は3人の息子がいた。長男は太子波(杜預の『春秋経伝集解』および前述の『史記索隠』が引く『竹書紀年』や『呉郡図経続記』による。『春秋左氏伝』では太子'''終纍''')、次男が夫差、三男が公子子山(『春秋左氏伝』)である。
[13] 문서 전제(専諸) 또는 전저(專諸) 사기-자객열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