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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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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무는 춘추 시대 오나라의 군사 전략가로, 저서인 《손자병법》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전쟁과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생애는 《사기》 등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실존 여부와 《손자병법》의 저작 시기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손무는 오나라 합려의 군사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했으나, 이후 은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자병법》은 1972년 은작산 한묘에서 죽간 형태로 발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경영, 외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2. 생애

손무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 오나라와 월나라의 흥망사를 다룬 『오월춘추』, 신당서 등에 남아있지만, 그 생애는 논쟁의 대상이다.

손무는 진나라 왕족의 후예로 본래 성은 규성(媯姓)이었다. 기원전 627년, 공자 제나라로 망명하여 씨로 바꾸었고, 이후 손무의 조부 전서(田書)가 거 땅 정벌에 공을 세워 손(孫)씨를 받았다. 손무는 제나라에서 성장했으나, 내란을 피해 아버지 손빙(孫憑)과 함께 오나라로 이주하여 오자서와 교류하였다. 이후 오나라 수도 근처 산간에 칩거하며 『손자병법』 13편을 저술했다.

기원전 515년,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합려에게 등용되어 군사(軍師)가 되었다. 합려는 손무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궁녀 180명으로 군사 훈련을 시켰는데, 궁녀들이 명령에 불복하자 군율을 세우기 위해 왕이 아끼는 궁녀 둘을 처형했다. 합려의 간청에도 손무는 군령이 왕명보다 중요하다며 처형을 강행했고, 이후 궁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일로 합려는 불쾌했으나, 손무를 상장군으로 중용했다.

손무는 오나라 군대를 훈련시켜 강군으로 만들었고, 기원전 506년 합려, 오자서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郢)을 함락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진나라의 개입으로 철군했으나, 오나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패자(覇者)의 위세를 떨쳤다.

기원전 496년, 합려는 손무의 반대에도 월나라를 공격하다 패배하고 전사했다. 손무는 오자서와 함께 부차를 보좌하여 월나라를 격파하고 설욕했다. 부차가 패자가 된 후, 손무는 은퇴하여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72년 발굴된 은작산 한 간에는 손자의 『손자병법』과 산둥성 박물관의 수집품이 포함되어 있다.

2. 1. 출신과 초기 생애

손무에 대한 주요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 오나라와 월나라의 흥망사를 다룬 『오월춘추』, 손무의 선조와 후손에 대해 기록한 신당서 등이 있다. 그러나 손무의 생애는 논쟁의 대상이다.

손무의 조상은 진나라 왕족으로 본래 성은 규성(媯姓)이었다. 기원전 627년, 공자 제나라로 망명하여 씨로 바꾸었다. 손무의 조부 전서(田書)가 거 땅을 정벌한 공으로 손(孫)씨를 받아, 손무도 제나라에서 살았다. 그러나 제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손빙(孫憑)과 함께 전국을 떠돌다 오나라로 가서 오자서를 알게 되었다. 이후 손무는 오나라 수도 근처 산간에서 칩거하며 『손자병법』 13편을 저술했다.

기원전 515년,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합려에게 초빙되어 오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합려는 손무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궁녀 180명을 훈련하게 했다. 손무는 합려가 총애하는 궁녀 둘을 대장으로 삼았으나, 궁녀들이 장난처럼 여기자 군령을 세우기 위해 궁녀 둘을 처형했다. 합려가 용서를 간청했으나, 손무는 군령이 왕명보다 중요하다며 사형을 집행했다. 이후 궁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일로 합려는 불쾌했으나, 손무를 상장군으로 중용했다.

12세기경 일부 중국 학자들은 손무가 역사 고전인 ''좌전''에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역사적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손무"()라는 이름은 ''사기'' 이전의 어떤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으며, "도망친 전사"를 의미하는 만들어진 가명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14]

회의론자들은 ''손자병법''의 시대착오적인 내용(예: 쇠뇌)과 역사적 부정확성을 지적하며, 이 책이 여러 작가와 군사 전략가들의 편집물이라고 주장한다. ''손자병법''의 저자는 손무, 오자서, 익명의 저자, 제나라 또는 오나라의 이론가 학파, 손빈 등 다양하게 추정된다.[16]

그러나 ''사마법''과 같은 다른 작품에서 죽간의 사용은 손자의 역사적 우선순위의 증거로 여겨지기도 한다.[18] 랄프 소이어는 손자가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장군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딴 책의 핵심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19]

2. 2. 오나라 등용과 궁녀 훈련 일화

기원전 515년 오자서의 추천으로 손무는 오나라합려의 초빙을 받아 오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었다.[44]

합려는 손무의 용병술을 시험하고자 "선생(손무)의 병법 13편을 모두 읽었지만, 궁녀들이 조금이라도 군의 지휘를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손무는 이를 승낙했다. 손무는 궁녀 180명을 훈련시키기 위해 합려가 가장 아끼는 궁녀 둘을 대장으로 세웠다. 그러나 궁녀들은 훈련에 따르지 않고 장난처럼 여겼다. 이에 손무는 군령을 세우기 위해 궁녀 둘을 처형하도록 했다. 합려가 용서를 간청했으나, 손무는 군령은 왕명보다 중요하다며 사형을 집행했다. 그리고 다시 다음 궁녀를 대장으로 삼아 훈련을 시키자, 모든 궁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12] 이 일로 합려는 불쾌해했지만, 이후 손무를 상장군으로 중용했다.

사마천은 손자가 나중에 자신의 이론이 효과적임을 증명했고, 성공적인 군사 경력을 쌓았으며, 자신의 시험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손자병법』을 저술했다고 주장했다.[12]

2. 3. 군사적 활약

기원전 515년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합려의 초빙을 받아 오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었다.[10]

합려는 손무의 용병술을 시험하고자 궁녀 180명을 훈련시켰다. 손무는 합려가 아끼는 궁녀 둘을 대장으로 세웠으나, 궁녀들은 훈련에 따르지 않았다. 손무는 군령을 세우기 위해 궁녀 둘을 처형했고, 합려는 용서를 간청했으나, 손무는 군령이 왕명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며 사형을 집행했다. 이후 모든 궁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일로 합려는 손무를 상장군으로 중용했다.[12]

기원전 512년, 손무는 장군으로 임명되어 초나라의 위성국이었던 종오국과 서나라를 공략했다. 합려는 초나라를 진공하려 했지만, 손무는 "초나라는 쇠퇴했어도 아직 강대합니다. 또한 오나라는 전쟁이 계속되어 병사들이 피폐해져 있습니다. 지금 초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라고 간언하여 합려는 이 의견에 따랐다.[13]

6년 후인 기원전 506년, 초나라가 오나라의 보호를 받던 과 채를 공격하자,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를 장수로 삼아 출동시켰다. 오나라와 초나라는 한수 강가인 백거에서 회전을 벌였다(백거 전투). 손무의 양동 작전으로 초나라 군의 주력은 다른 지역으로 유인되었고, 오나라 군 본대가 수도로 향한다는 정보에 급히 전진해왔기 때문에, 전장에 도착했을 때는 강행군의 연속으로 이미 지쳐 있었다. 3만의 오나라 군은 20만의 초나라 군을 크게 무찌르고, 5번 싸워 5번 모두 승리하여, 열흘 만에 초나라의 왕도인 영성을 함락시키고 초나라 소왕을 도망하게 했다.

이후, 초나라 신하인 신포서가 진나라로 도망쳐, 그의 책략으로 진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했기 때문에, 오나라 군은 어쩔 수 없이 초나라에서 철수했다. 이후 오나라는 북쪽의 제나라, 진나라를 위협하여 제후들 사이에 그 이름을 알렸지만, 그러한 공적은 손무의 역할이 컸다.

손무는 오나라 군대를 훈련시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 기원전 506년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를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 원정을 개시하였다. 손무의 전략에 따라 오군은 연전연승하여 초나라 수도 영(郢)을 함락하고 초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이후 진나라의 개입으로 철군하였으나, 오나라는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패자의 위세를 떨쳤다.[11]

기원전 496년, 합려는 손무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월나라를 공격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고, 합려는 적의 화살에 의한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손무는 오자서와 함께 태자 부차를 보좌하여 국력을 키웠고, 후에 오나라는 부초에서 월나라를 대파하여 설욕을 했다.

2. 4. 은퇴와 말년

손무는 일족을 따라 강남 지방 오나라(吳)로 피하여 오나라의 재상 오자서를 알게 되었다. 그 후, 오나라의 수도 근처의 산간에서 칩거하여 손자병법 13편을 저술했다.[10]

기원전 515년 오자서의 추천으로 오나라합려의 초빙을 받아 오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합려는 손무의 용병술을 시험하고자 궁녀 180명을 훈련시키도록 하였는데, 손무는 군령을 세우기 위해 왕이 아끼는 궁녀 둘을 처형하였다. 합려가 용서를 간청하였으나, 손무는 군령은 왕명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며 사형을 집행하였다.[12]

손무는 오나라 군대를 훈련시켜 초나라와 대항할 수 있는 국력을 키웠다. 기원전 506년,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를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郢)을 함락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11]

기원전 496년, 손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려는 월나라를 공격하다 패배하고,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손무와 오자서는 합려의 후계자 부차를 보좌하여 월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부차가 패자(霸者)가 될 무렵, 손무는 은퇴하여 이후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3. 저서: 손자병법

손무의 저서인 손자병법은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의 중요한 병서로 취급되었다. 1910년 대영 박물관의 고서 분야 책임자인 라이오넬 길레가 ''The Art of War''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 출간하였으며,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로 온라인화되었다.[23]

3. 1. 손자병법의 구성

1972년 죽간본이 발굴되어 초기 판본과 후한 이후 추가된 내용을 구분할 수 있는 지표가 마련되었다.[23]

''손자병법''(The Art of War)은 전통적으로 손무의 저작으로 여겨진다. 이 책은 갈등을 관리하고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쟁 철학을 제시하며, 전략에 관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23]

이 책이 언제 완성되었는지,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있지만,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손자병법''이 적어도 전한 시대 초기에 현재의 형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24]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 책에 원래 저자의 생각뿐만 아니라 이전과 두목과 같은 후대 군사 이론가들의 해설과 설명도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다.

진의 천하 통일 전쟁과 진 시황의 이후 분서갱유 이전인 기원전 2세기에 쓰여진 군사 서적 중 여섯 개의 주요 작품이 살아남았다. 훨씬 후대인 송나라 시대에 이 여섯 작품은 당나라의 서적과 함께 ''무경칠서''라는 컬렉션으로 통합되었다. ''손자병법''은 이 컬렉션의 핵심 부분으로서 초기 근대 중국의 정통 군사 이론의 기초를 형성했다. 군사 직책에 대한 황실 임명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필수적인 독서 자료였다.[26]

손무의 ''손자병법''은 전쟁과 전략에 관한 서양의 텍스트에서는 드물게 사용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27] 11장에서는 지도자가 "고요하고 헤아릴 수 없는" 상태여야 하며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진술의 의미는 도교 사상과 관행의 맥락에서 해석할 때 더 명확해진다.

''손자병법''은 행정 및 계획과 관련하여 광범위한 방식으로 전략을 다룬다. 전투 이론을 제시하지만, 외교와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 또한 국가의 건강에 필수적인 것으로 옹호한다.[23]

1972년 4월 10일, 산둥성에서 건설 노동자들에 의해 은작산 한묘가 우연히 발굴되었다.[29][30] 학자들은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죽간에 쓰인 은작산 한간의 고대 문서 모음을 발견했다. 그중에는 ''손자병법''과 손빈의 ''손빈병법''이 있었다.[30] 손빈의 저작 재발견은 손빈과 손무의 관계, 그리고 중국 고대 후기의 군사 사상에 기여한 점 때문에 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31]

3. 2. 손자병법의 영향

손자병법은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의 중요한 병서로 취급되었다.[23] 1910년 대영 박물관의 고서 분야 책임자인 라이오넬 길레가 ''The Art of War''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 출간하였으며, 구텐베르크 프로젝트로 온라인화되었다.

1972년 산둥성에서 건설 노동자들에 의해 은작산 한묘가 우연히 발굴되었다.[29][30] 학자들은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죽간에 쓰인 은작산 한간의 고대 문서 모음을 발견했는데, 그중에는 ''손자병법''과 손빈의 ''손빈병법''이 있었다.[30] 이 발견으로 손자병법의 초기 판본과 후한 이후 추가된 내용을 구분할 수 있는 지표가 마련되었다.

A bamboo book
A copy of ''The Art of War'' written on bamboo


''손자병법''(The Art of War)은 전략에 관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처음 출판, 번역, 국제적으로 배포된 이후 장군과 이론가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고 언급되었다.[23] 이 책은 전쟁과 전략에 관한 서양의 텍스트에서는 드물게 사용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27] 예를 들어, 11장에서는 지도자가 "고요하고 헤아릴 수 없는" 상태여야 하며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도교 사상과 관행의 맥락에서 해석할 때 더 명확해진다.

''손자병법''은 행정 및 계획과 관련하여 광범위한 방식으로 전략을 다루며, 전투 이론뿐만 아니라 외교와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 또한 국가의 건강에 필수적인 것으로 옹호한다.[23] 따라서 이 책은 정치 지도자들과 경영 관리 분야의 사람들에게도 인기를 얻었다.

일본 돗토리현 유리하마에 있는 손무 동상


손자병법》은 많은 저명인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사마천은 중국 최초의 역사적 황제인 진나라진 시황제전국 시대를 종식시키는 데 이 책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다고 기록했다. 20세기에 마오쩌둥은 1949년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에 대한 승리를 《손자병법》 덕분으로 돌렸다. 이 작품은 마오의 마오쩌둥 어록에서 전쟁에 관한 저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전 세계 공산주의 반란에 더욱 영향을 미쳤다.[32]

《손자병법》은 나라 시대일본에 소개되었고, 이 책은 일본의 군 장군들 사이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이후 센고쿠 시대의 "3대 통일자"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영향을 미쳐[32], 근세 시대 초 일본의 에도 시대 통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일본 제국군 사이에서 인기를 유지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을 승리로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손무의 열렬한 독자였다.[33]

호찌민은 베트남 장교들의 학습을 위해 이 작품을 번역했다. 그의 장군 보응우옌잡 역시 손무의 사상을 열렬히 연구하고 실천했다.[34][35][36]

마크 맥닐리는 《손무와 현대 전쟁의 기술》에서 현대적인 손무에 대한 해석과 그의 중국 역사 전반에 걸친 중요성은 21세기에 초강대국이 되려는 중국의 노력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적고 있다. 현대 중국 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개발하는 데 역사적 전략적 교훈과 《손자병법》에 명시적으로 의존하며, 그들의 현대적 투쟁과 손무 시대 중국의 투쟁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를 보고 있다. 손무의 가르침과 다른 전통적인 중국 작가들에게는 매우 큰 가치가 있다고 인식되며, 이는 중국 국가와 지도자들의 전략을 개발하는 데 정기적으로 사용된다.[39]

4. 손무의 실존 여부와 『손자병법』 저작 시기에 대한 논쟁

사마천의 『사기』와 『춘추』같은 오래된 자료들은 손자의 출생지에 대해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이 두 자료에는 손자가 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10] 또한, 손자가 춘추 시대 말기인 기원전 6세기에 의 왕 합려를 섬기며 장군이자 전략가로 활동했으며, 기원전 512년경부터 활동을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손자가 이룬 승리들은 그가 『손자병법』을 저술하는 데 영감을 주었고, 이 책은 이후 전국 시대에 가장 널리 읽힌 군사 서적 중 하나가 되었다.[11]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오나라 왕은 손자를 고용하기 전에 180명의 후궁을 훈련시켜 병사로 만들도록 명령하여 그의 능력을 시험했다. 손자는 후궁들을 두 개의 부대로 나누고, 왕이 총애하는 두 후궁을 부대장으로 임명했다. 손자가 명령을 내렸을 때 후궁들이 낄낄거리자, 손자는 병사들이 명령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는 명령을 반복했지만, 후궁들은 다시 낄낄거렸다. 손자는 왕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왕이 총애하는 두 후궁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장군의 병사들이 명령을 이해했지만 복종하지 않으면, 이는 장교의 잘못이며, 장군은 임명되면 왕이 항의하더라도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두 후궁이 처형된 후, 새로운 장교들이 선택되었고, 이후 두 부대는 완벽하게 기동을 수행했다.[12]

사마천은 손자가 나중에 자신의 이론이 효과적임을 증명했고, 성공적인 군사 경력을 쌓았으며, 자신의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손자병법』을 저술했다고 주장했다.[12] 그러나 『좌전』은 『사기』보다 수세기 전에 쓰여진 역사적 텍스트로, 백거 전투에 대한 훨씬 더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지만, 손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13]

1972년 발굴된 은작산 한간에는 손자의 『손자병법』과 산둥성 박물관의 수집품이 포함되어 있다.

4. 1. 비실존설 및 의문점

12세기경부터 일부 중국 학자들은 손무가 실존 인물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 주된 이유는 춘추 시대의 주요 인물들을 언급하고 있는 역사서인 좌전에 손무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14] "손무"()라는 이름은 사기 이전의 어떤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으며, "도망친 전사"를 의미하는 가명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손"이라는 성은 "도망자"()로 해석될 수 있으며, "무"는 "무술적, 용감한"()이라는 고대 중국의 덕목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14] 백거 전투는 손무가 참전했다고 알려진 유일한 전투이지만, 그가 실제로 전투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다.[15]

백거 전투 당시 상황


회의론자들은 ''손자병법''의 내용에 역사적 부정확성과 시대착오적인 요소가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 책이 여러 작가와 군사 전략가들의 글을 모아놓은 편집물일 가능성도 제기한다. ''손자병법''의 저자에 대해서는 손무, 오자서, 익명의 저자, 제나라 또는 오나라의 이론가 학파, 손빈 등 다양한 인물과 학파가 거론되고 있다.[16] 손빈은 실제로 군사 문제에 권위가 있었던 인물로, 역사적 인물 "손무"를 창조하는 데 영감을 주었을 수도 있다.[14] 손무라는 이름은 사기와 오월춘추 같은 후대의 자료에 등장하지만, 이들은 손무의 시대보다 수 세기 후에 쓰여졌다.[17]

그러나 사마법과 같은 다른 작품에서 죽간이 사용된 것은 손무가 역사적으로 우선한다는 증거로 여겨지기도 한다.[18] 랄프 소이어는 손무가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장군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딴 책의 핵심 내용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19] 텍스트에 묘사된 대규모 전쟁과 정교한 기술은 기원전 6세기에 중국에서 지배적이었다고 알려진 원시적인 소규모 전투와는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 소이어는 손무의 가르침이 그의 가족이나 소수의 제자 집단에 의해 다음 세대에 전해졌으며, 그 집단에 손빈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후손이나 제자들이 원래 텍스트의 특정 부분을 수정하거나 확장했을 수 있다.[19]

전통적인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회의론자들은 ''손자병법''에 등장하는 용어, 기술(시대착오적인 쇠뇌 등), 철학적 사상, 사건, 군사 기술 등이 손무가 살았던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20][21] 또한, 춘추 시대에는 전문 장군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이는 전국 시대부터 존재하기 때문에 손무의 계급과 장군직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21] 이 때문에 ''손자병법''이 실제로 언제 쓰여졌는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첫 번째 전통적인 견해는 기원전 512년, 춘추 시대 말기에 활동했던 손무가 저술했다는 것이다. 사무엘 그리피스와 같은 학자들은 ''손자병법''이 전국 시대 중후반(기원전 –221년)에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학파는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죽간이 출판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는 1972년 은작산 한나라 죽간에서 발견된 죽간에 대한 해석에 근거한다.[22]

손무가 실존 인물인지에 대한 논쟁은 중국 사학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나라에서 큰 활약을 한 무장임에도 불구하고, 오나라에 대해 자세히 기록된 춘추좌씨전에 손무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부자연스럽다. 또한, ''손자병법''은 13편이어야 하는데, 한서 예문지에는 82편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여러 의문점이 있다.

북송의 병법가 매요신은 "전국 시대의 이야기 같다"라며 ''손자병법''과 손무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남송의 엽적은 더 나아가 손무 비실존설을 주장했다. "춘추 시대에 타국 사람을 장군으로 삼은 이야기는 전혀 없다. 오나라 사람도 아닌 손무가 어떻게 장군이 될 수 있었을까? 춘추좌씨전에 손무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결국) ''손자병법''은 춘추 말, 전국 초의 이름 없는 은자의 작품일 것이다. 오에서 큰 활약을 했다는 것은 과장된 헛소문이다. 합려의 첩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믿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고금위서고』 인용).

이 설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많았으며, 전조망, 제등졸당, 제지화 등이 손무 비실존설을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사기 이전의 춘추좌씨전 등 유력한 고서에 손무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점, "무(武)"라는 이름이 너무 잘 지어진 점, 한서 예문지에 "오손자병법 팔십이편 도구권"이 있어 현행 13편의 손자와 일치하지 않는 점 등을 들었다. 다만, 이 손무 비실존설이 옳은지 여부도 논쟁의 대상이 되어, 『고금위서고』에서는 "그렇다면 사기의 손무에 대한 기술은 거짓인가? 손무는 실존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이제 고대의 일이어서 전혀 알 수 없다"라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사기 등 고문헌의 기술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손자병법''의 문장 속에 전국 시대의 사상인 "형명", "오행"[46] 등이 등장하는 점, 춘추 시대의 전투 양상과 ''손자병법''의 문장이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들을 "의고파"라고 칭하며, 이들에 의해 ''손자''는 손빈의 저작이라는 견해, 나아가 손무 자체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견해가 나라 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력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1980년대 무렵까지의 ''손자병법'' 해설서는 대체로 당시 주류였던 이 입장에 근거하여, 손무는 가공의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961년에 출판된 패총무수의 『제자백가』에서는 "손자병법이 오나라 군사 손무의 작품이라는 것은 완전히 헛소문이며, 손빈 자신의 작품임이 최근 밝혀졌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하지만 1972년, 산둥 성 린이 현에서 발굴된 은작산 한간에서 ''손자병법'' 13편과, 손빈이 저술한 병법서(손빈병법)의 죽간이 발견되었다. 분석 결과 ''손자'' 13편은 손빈병법과는 별개의 작품임이 증명되어, 손무의 실존이 확인되었다(금곡치의 설).

다만, 손무의 사적에 관한 사실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연구자들 중 일부는 사기 손자전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다. 특히 손자 륵희병(孫子勒姫兵)의 고사에 대해서는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대장을 처형하는 것도, 그 외의 행동도 ''손자병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손자병법''을 곡해한 후세 사람들의 창작일 것이다"(천야진웅, 요약), "설화적이며,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금곡치, 동일) 등의 의견도 유력하다. 금곡치는 손빈병법에 "손씨의 도"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부터, 손무를 중심으로 한 손씨학파와 같은 병법가 집단이 있었고, 지금의 ''손자병법''은 손무의 작품에 병법가들이 덧붙여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천야진웅은 ''손자병법''의 중복 부분을 삭제한 것이 아마 손무의 진작에 가까운 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원손자"를 추정하고 있다.

4. 2. 실존설 및 반론

손무(孫武)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은 오래전부터 중국 사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되어 왔다. 나라에서 큰 활약을 펼친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오나라에 대해 자세히 기록된 『춘추좌씨전』에 손무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의문을 낳았다. 또한, 『한서』 「예문지」에서는 손자병법이 82편으로 기록되어 있어, 현재 전해지는 13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도 의문점으로 지적된다.

북송의 병법가 매요신은 "전국 시대의 이야기 같다"라며 손자병법과 손무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남송의 엽적은 더 나아가 "춘추 시대에 타국 사람을 장군으로 삼은 이야기는 전혀 없다. 오나라 사람도 아닌 손무가 어떻게 장군이 될 수 있었을까? 『춘추좌씨전』에 손무가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결국) 손자병법은 춘추 말, 전국 초의, 이름 없는 산림 은자의 작품일 것이다. 오에서 큰 활약을 했다는 것은 병법가들의 과장된 헛소문, 날조이다. 합려의 첩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전혀 믿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고금위서고』 인용).

전조망, 제등졸당, 제지화 등 많은 학자들이 이 설에 찬동하여 손무 비실재설을 주장했다. 이들은 『사기』 이전의 『춘추좌씨전』 등 유력한 고서에 손무의 이름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점, "무(武)"라는 이름이 너무 잘 지어진 점, 『한서』 「예문지」에 "오손자병법 팔십이편 도구권"이 있어 현행 13편의 손자와 일치하지 않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다만, 이 손무 비실재설의 진위 여부도 논쟁의 대상이 되어, 『고금위서고』에서는 "그렇다면 사기의 손무에 대한 기술은 거짓인가? 손무는 실존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이제 고대의 일이어서 전혀 알 수 없다"라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사기』 등 고문헌의 기술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손자병법의 문장 속에 전국 시대의 사상인 "형명", "오행"[46] 등이 등장하는 점, 춘추 시대의 전투 양상과 손자병법의 문장이 상이한 점이 많은 것을 논거로 제시했다. 이러한 학자들을 "의고파"라고 칭하며, 이들에 의해 『손자』는 손빈의 저작이라는 견해, 나아가 손무 자체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견해가 나라 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력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1980년대 무렵까지의 손자병법 해설서는 대체로 당시 주류였던 이 입장에 근거하여, 손무는 가공의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1961년에 출판된 패총무수의 『제자백가』(이와나미 신서)에서는 "손자병법이 오나라 군사 손무의 작품이라는 것은 완전히 헛소문이며, 손빈 자신의 작품임이 최근 밝혀졌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1972년, 산둥 성 린이 현에서 발굴된 은작산 한간에서 『손자병법』 13편과, 손빈이 저술한 병법서(『손빈병법』)의 죽간이 발견되었다. 분석 결과 『손자』 13편은 『손빈병법』과는 별개의 작품임이 증명되어, 손무의 실존이 확인되었다(금곡치의 설).

다만, 손무의 사적에 관한 사실성 여부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어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연구자들 중 일부는 『사기』 손자전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특히 손자 륵희병(孫子勒姫兵)의 고사에 대해서는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대장을 처형하는 것도, 그 외의 행동도 손자병법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손자병법을 곡해한 후세 사람들의 창작일 것이다"(천야진웅, 요약), "설화적이며,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금곡치, 동일) 등의 의견도 유력하다. 금곡치는 『손빈병법』에 "손씨의 도"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부터, 손무를 중심으로 한 손씨학파와 같은 병법가 집단이 있었고, 지금의 손자병법은 손무의 작품에 병법가들이 덧붙여 완성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천야진웅은 손자병법의 중복 부분을 삭제한 것이 아마 손무의 진작에 가까운 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원손자"를 추정하고 있다.

4. 3. 현대적 해석

12세기경부터 일부 중국 학자들은 손무가 춘추 시대의 주요 인물들을 언급하는 역사 고전인 좌전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그의 역사적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14] "손무"()라는 이름은 사기 이전의 어떤 기록에도 나타나지 않으며, "도망친 전사"를 의미하는 가명일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4] 백거 전투에 손무가 참전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도 의문점으로 지적된다.[15]

회의론자들은 ''손자병법''의 내용에 역사적 부정확성과 시대착오적인 요소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 책이 여러 작가와 군사 전략가들의 편집물일 가능성도 제기한다.[16] ''손자병법''의 저자로 손무, 오자서, 익명의 저자, 제나라 또는 오나라의 이론가 학파, 손빈 등 다양한 인물 및 학파가 거론된다.[16] 손빈은 실존 인물이었으며, 역사적 인물 "손무"를 창조하는 데 영감을 주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14]

그러나 사마법과 같은 다른 작품에서 죽간의 사용은 손무의 역사적 우선순위에 대한 증거로 여겨진다.[18] 랄프 소이어는 손무가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장군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을 딴 책의 핵심 내용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19] 그는 손무의 가르침이 가족이나 소수의 제자 집단에 의해 다음 세대에 전해졌을 것이며, 이 집단에 손빈이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9]

전통주의적 관점에 문제를 제기하는 회의론자들은 ''손자병법''에 등장하는 용어, 기술(시대착오적인 쇠뇌 등), 철학적 사상, 사건, 군사 기술 등이 손무가 살았던 시대와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20][21] 또한, 춘추 시대에는 전문 장군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도 손자의 계급과 장군직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21]

''손자병법''은 전통적으로 손무의 저작으로 여겨지며, 갈등 관리와 전쟁 승리를 위한 전쟁 철학을 제시한다. 이 책은 전략에 관한 걸작으로 인정받으며, 장군과 이론가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고 언급되었다.[23]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손자병법''이 적어도 전한 시대 초기에는 현재의 형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24] 그러나 이 책이 언제 완성되었는지,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론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25]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 책에 원래 저자의 생각뿐만 아니라 후대 군사 이론가들의 해설과 설명도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다.

진의 천하 통일 전쟁과 진 시황의 분서갱유 이전인 기원전 2세기에 쓰여진 군사 서적 중 여섯 개의 주요 작품이 살아남았다. 송나라 시대에 이 여섯 작품은 당나라의 서적과 함께 ''무경칠서''라는 컬렉션으로 통합되었다. ''손자병법''은 이 컬렉션의 핵심 부분으로서, 초기 근대 중국의 정통 군사 이론의 기초를 형성했다. 군사 직책에 대한 황실 임명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필수적인 독서 자료였다.[26]

손무의 ''손자병법''은 전쟁과 전략에 관한 서양의 텍스트에서는 드물게 사용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27] 예를 들어, 11장에서는 지도자가 "고요하고 헤아릴 수 없는" 상태여야 하며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진술의 의미는 도교 사상과 관행의 맥락에서 해석할 때 더 명확해진다. ''손자병법''은 행정 및 계획과 관련하여 광범위한 방식으로 전략을 다루며, 외교와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 또한 국가의 건강에 필수적인 것으로 옹호한다.[23]

1972년 4월 10일, 산둥성에서 은작산 한묘가 발굴되었다.[29][30] 학자들은 은작산 한간에서 ''손자병법''과 손빈의 ''손빈병법''을 발견했다.[30] 손빈의 저작 재발견은 중국 고대 후기의 군사 사상에 기여한 점 때문에 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31]

손무의 《손자병법》은 많은 저명인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사마천진 시황제전국 시대를 종식시키는 데 이 책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다고 기록했다. 20세기에 마오쩌둥은 1949년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에 대한 승리를 《손자병법》 덕분으로 돌렸다. 이 작품은 마오의 마오쩌둥 어록에서 전쟁에 관한 저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전 세계 공산주의 반란에 더욱 영향을 미쳤다.[32]

《손자병법》은 나라 시대일본에 소개되었고, 일본의 군 장군들 사이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영향을 미쳐[32], 근세 시대 초 일본의 에도 시대 통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일본 제국군 사이에서 인기를 유지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을 승리로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손무의 열렬한 독자였다.[33]

호찌민은 베트남 장교들의 학습을 위해 이 작품을 번역했다. 그의 장군 보응우옌잡 역시 손무의 사상을 열렬히 연구하고 실천했다.[34][35][36]

도교 수사학은 《손자병법》에 포함된 구성 요소이다. 스티븐 C. 콤스는 "손자와 《손자병법》: 절약의 수사학"에서,[37] 전쟁은 "수사학의 은유로 사용되며, 둘 다 철학적 기반을 둔 예술"이라고 말한다.[37] 콤스는 "전쟁은 마음을 사로잡는 싸움으로 설득과 유사하다"고 적고 있다.[37] 《손자병법》의 도교 수사학적 전쟁 전략은 "평화적이고 소극적이며, 말보다 침묵을 선호"하는 것으로 묘사된다.[37]

마크 맥닐리는 《손무와 현대 전쟁의 기술》에서 현대적인 손무에 대한 해석과 그의 중국 역사 전반에 걸친 중요성은 21세기에 초강대국이 되려는 중국의 노력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적고 있다. 현대 중국 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개발하는 데 역사적 전략적 교훈과 《손자병법》에 명시적으로 의존하며, 그들의 현대적 투쟁과 손무 시대 중국의 투쟁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를 보고 있다. 손무의 가르침과 다른 전통적인 중국 작가들에게는 매우 큰 가치가 있다고 인식되며, 이는 중국 국가와 지도자들의 전략을 개발하는 데 정기적으로 사용된다.[39]

손무(孫武)가 실존 인물인지에 대한 논쟁은 오래전부터 중국 사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되었다. 에서 활약한 무장임에도 불구하고, 오나라에 대해 자세히 기록된 『춘추좌씨전』에 손무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 부자연스럽다.

북송의 병법가 매요신은 "전국 시대의 이야기 같다"라며 손자병법과 손무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남송의 엽적은 손무 비실재설을 주장했다.

이 설에 찬동하는 학자로는 전조망, 제등졸당, 제지화 등이 있다. 이들은 『사기』 이전의 『춘추좌씨전』 등 유력한 고서에 손무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점, "무(武)"라는 이름이 너무 잘 지어진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 손무 비실재설이 옳은지 여부도 논쟁의 대상이 되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사기』 등의 고문헌 기술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손자병법의 문장 속에 전국 시대의 사상인 "형명", "오행"[46] 등이 등장하는 점, 춘추 시대의 전투 양상과 손자병법의 문장이 상이한 점이 많은 것을 논하고 있다.

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손무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61년에 출판된 패총무수의 『제자백가』에서는 "손자병법이 오나라 군사 손무의 작품이라는 것은 완전히 헛소문이며, 손빈 자신의 작품임이 최근 밝혀졌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하지만 1972년, 산둥 성 린이 현에서 발굴된 은작산 한간에서 『손자병법』 13편과, 손빈이 저술한 병법서(『손빈병법』)의 죽간이 발견되었다. 분석 결과 『손자』 13편은 『손빈병법』과는 별개의 작품임이 증명되어, 손무의 실존이 확인되었다.

다만, 손무의 사적에 관한 사실성에 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어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연구자들 중 일부는 『사기』 손자전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다. 특히 손자 륵희병(孫子勒姫兵)의 고사에 대해서는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대장을 처형하는 것도, 그 외의 행동도 손자병법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유력하다.

5. 손무의 후손

『신당서』 「재상세계삼하(宰相世系三下)」에 따르면 손씨 문중은 전완의 5대손인 손무의 조부가 군공으로 손씨(孫氏) 성을 하사받은 데서 시작된다.

이에 따르면, 손무에 대해 "(손) 빙(憑)은 무(武)를 낳았다. (무의) 자는 장경(長卿)이다. 전(田)·포(鮑) 사족의 모략으로 난을 일으키자 오(吳)나라로 도망쳐 장군이 되었다. 세 아들이 있으니, 치(馳), 명(明), 적(敵)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손무에게는 손치·손명·손적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고 기술한다. 차남인 손명은 오나라의 부춘군(富春郡)을 하사받아, 후일 부춘 손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부춘 손씨는 또한 '''부춘용문손씨(富春龍門孫氏)'''라고 칭해지며, 『사고전서』에 따르면 삼국 시대손견, 손책, 손권 부자가 이 가계에 속한다고 한다.

반면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손견은 손자의 자손이라고 한다"고 모호하게 기록했고, 더 나아가 남조의 송대 『이원(異苑)』에서는 손견의 아버지가 "과일 장수"인 손종이라는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동시대의 『유명록(幽明錄)』(현재는 산실됨)이나, 동진배계의 『배자어림(裴子語林)』에도 손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등 반증도 많아, 손견이 실제로 손무의 자손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현재 중국저장성항저우시푸양 구 남부에 있는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의 90%가 "손씨"를 칭하며, 부춘 손씨의 후예임을 자처한다. 마을에 전해지는 족보에 따르면, 객가의 쑨원 또한 부춘 손씨와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이 족보는 청대(淸代)의 것이다.

6. 손무를 소재로 한 작품



손무의 《손자병법》은 사마천, 마오쩌둥 등 많은 저명인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32] 특히 마오쩌둥은 1949년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에 대한 승리를 《손자병법》 덕분으로 돌렸으며, 이 작품은 마오의 마오쩌둥 어록에서 전쟁에 관한 저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32]

《손자병법》은 나라 시대일본에 소개되어 일본 군 장군들 사이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었다. 센고쿠 시대의 "3대 통일자"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32]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일본 제국군 사이에서 인기를 유지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을 승리로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손무의 열렬한 독자였다.[33]

호찌민은 베트남 장교들의 학습을 위해 이 작품을 번역했고, 그의 장군 보응우옌잡 역시 손무의 사상을 열렬히 연구하고 실천했다.[34][35][36]

; 소설


  • 해음사 조고로 『손자』 마이니치 신문사, 1964년, 이후 고단샤 문고, 이후 고단샤 문고·신장판(상하권)
  • 정비석, 이은택 역 『손자병법(상·하)』 고분샤, 1986년.

; 만화

  • 정문 『동주영웅전』에서 "손무"
  • 두강윤 『강하의 맹 손자 이야기』 KADOKAWA(중경출판BC) ComicWalker 「키토라」 연재, 단권(서적 취급), 2015년.
  • 요코야마 미츠테루 『사기』

; 텔레비전 드라마

  • 『손자』(원제: 孫武, 1997년, 중국, 손무 역: 쑨옌쥔)
  • 『손자병법』(원제: 兵聖, 2008년, 중국, 손무 역: 주아문)
  • 『손자《병법》대전』(원제: 孫子大傳, 2010년, 중국, 손무 역: 장펑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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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Sun Tzu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2019-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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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간행물
[5] 서적 Sun Tzu and the Art of Modern Warfar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2-12-14
[6] 뉴스 Obama meets privately with Jewish leaders https://www.washingt[...] 2013-03-07
[7] 뉴스 Obama to challenge Israelis on peace http://www.upi.com/T[...] 2013-05-22
[8] 뉴스 Oracle's Ellison Uses 'Art of War' in Software Battle With SAP https://www.bloomber[...] 201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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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The Art of War: Sun Zi's Military Methods Columbia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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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The Art of War Wordsworth Editions Ltd
[21] 웹사이트 Sun Tzu and the Art of War http://asianhistory.[...] Asian History 201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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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간행물 Yinqueshan Han Bamboo Slips http://www.sdwenbo.c[...] Shandong Provincial Museum 2008-04-24
[30] 서적 The Art of War: A New Translation Constable & Robinson Ltd 2012
[31] 논문 Just another Masterpiece: the Differences between Sun Tzu's the Art of War and Sun Bin's the Art of War http://www.airitilib[...] 2013-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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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웹사이트 Interview with Dr. William Duiker http://www.sonshi.co[...] 2011-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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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서적 The Illustrated Art of War: Sun Tzu Cognoscenti
[37] 논문 Sun-zi and the Art of War: The Rhetoric of Parsimony 2000-08
[38] 논문 Philosophy, biography, and Anecdote: On the Portrait of Sun Wu 2011-10
[39] 간행물
[40] 서적 哲学と宗教全史 ダイヤモンド社
[41] 문서 この点には論争あり。論争の内容は『[[孫子 (書物)]]』を参照。
[42] 문서 字は『[[新唐書]]』宰相世系三下による。名を武とするのは呉越春秋である。[[天野鎮雄]]は『孫武』という名前を名乗った人間が兵法に優れるということ自体が偶然すぎることであり、史記孫子呉起列伝に「孫子武は斉の人なり」とあるところから、字が子武、若しくは後世の諡が武である可能性を示唆している。
[43] 문서 『呉越春秋』では呉の人だとする。天野鎮雄は孫武は呉の人だと考えており、孫武の友人であった伍子胥が子供を斉に預けた(『[[春秋左氏伝]]』[[哀公 (魯)|哀公]]十一年条)ことから、孫武の子供も伍子胥の子供と一緒に斉に預けられたのではないかと考えている。
[44] 웹사이트 史記/卷065
[45] 문서 くつわ。ウマの口にかませ、たづなをつける道具。力をもっておさえ整えること。転じて命令を強制すること。
[46] 문서 [[銭穆]]によれば勢篇に登場する「形名」は[[法家]]思想の「形名参同説」に由来、斉志和は虚実篇の「五行」は[[陰陽家]]の「陰陽五行説」ではないかと考えている。いずれも戦国末期の思想家が唱えたものであり、孫武生前には存在しないことを証拠として、孫子の書が孫武と無関係であることを主張している。
[47] 뉴스 三国志の子孫を探せ NHK
[48] 문서 岩波版・金谷治訳の初版は1963年。単行・ワイド版も刊行。
[49] 문서 [[代 (戦国)|代]]は[[趙 (戦国)|趙]]の亡命政権であり、[[秦]]に滅ぼされた。
[50] 문서 《신당서(新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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