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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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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 내전은 1810년부터 1880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발생한 일련의 무력 충돌을 의미한다. 지역주의와 권력 다툼으로 시작되어 연방주의와 중앙집권주의 간의 갈등으로 심화되었다. 호세 아르티가스의 연방 동맹 결성,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분리, 세페다 전투와 파본 전투 등 주요 분쟁을 거치며, 18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연방화와 훌리오 로카의 집권으로 국가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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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 명칭아르헨티나 내전
일부아르헨티나 공화국의 건국
상단 왼쪽부터: 아로요그란데 전투, 마누엘 도레고 처형, 파본 전투, 후안 라바예 사망, 파쿤도 키로가 암살, 카세로스 전투, 파마이야 전투, 부에노스아이레스 봉쇄
시기1814년–1880년
장소아르헨티나
우루과이
결과1853년 아르헨티나 헌법 제정
1880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연방화
교전 세력
교전국 1자유민족연맹 (1815–1820)
연방주의자
아르헨티나 연합 (1831–1861)
백색당
세리토 정부
교전국 2최고지도부 (1814–1820)
단방당
내부연맹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적색당
국방 정부
지원 세력 2대영제국
프랑스

지휘관
지휘관 1호세 게르바시오 아르티가스 (1814–1820)
프란시스코 라미레스 (1814–1821)
에스타니슬라오 로페스 (1814–1838)
카를로스 마리아 데 알베아르 (1815–1852)
호세 미겔 카레라 (1818–1821)
파쿤도 키로가 (1820–1835)
마누엘 오리베 (1825–1851)
마누엘 도레고 (1826–1828)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1828–1852)
후스토 호세 데 우르퀴사 (1835–1870)
차초 페냘로사 (1836–1863)
리카르도 로페스 호르단 (1870–1876)
지휘관 2호세 론도 (1814–1844)
후안 라바예 (1814–1841)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1821–1834)
호세 마리아 파스 (1829–1854)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1831–1874)
바르톨로메 미트레 (1839–1880)
프룩투오소 리베라
베난시오 플로레스

2. 연방주의의 기원과 초기 혼란 (1810-1831)

1810년 5월 혁명 이후, 남아메리카 연합주 내에서 권력 구조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2. 1. 연방 동맹의 결성과 분열 (1814-1820)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이끄는 오리엔탈 지방은 모든 주가 동등한 조건을 갖출 때까지 연방 제도를 지지했다. 1814년 6월, 아르티가스는 오리엔탈 지방, 엔트레리오스 주(Entre Ríos Province), 코리엔테스 주(Corrientes Province), 미시오네스 주(Misiones Province), 코르도바 주와 함께 연방 동맹을 결성했는데, 이는 1810년 5월 혁명(May Revolution)으로 수립된 남아메리카 연합주(United Provinces of South America)에서 처음으로 공식 분열된 사건이었다.

1816년 6월, 오리엔탈 지방은 포르투갈 제국의 침략을 받았고, 이로 인해 아르티가스의 군대는 해당 지역 방어에 집중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티가스는 남아메리카 연합주의 중앙집권화를 선언한 1819년 아르헨티나 헌법(Argentine Constitution of 1819)에 무력으로 대항했다. 세페다 전투(1820)(Battle of Cepeda (1820))에서 연방 동맹이 승리하면서 사실상 정부가 해산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카우딜로(caudillos)''가 지역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타페, 엔트레리오스 간의 필라르 조약(Treaty of Pilar)과 이후 점령된 오리엔탈 지방을 돕기를 거부한 다른 연방 회원들로 인해 연방 동맹은 해체되었다.

2. 2. 1820년대의 혼란과 카우디요의 등장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이끌던 오리엔탈 지방은 모든 주가 동등한 조건을 갖출 때까지 연방 시스템을 지지했다. 1814년 6월, 아르티가스는 오리엔탈 지방(Banda Oriental), 엔트레리오스 주(Entre Ríos Province), 코리엔테스 주(Corrientes Province), 미시오네스 주(Misiones Province), 코르도바 주와 함께 연방 동맹을 결성했는데, 이는 1810년 5월 혁명(May Revolution)으로 탄생한 남아메리카 연합주(United Provinces of South America)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분열된 사건이었다.

1816년 6월, 오리엔탈 지방은 포르투갈 제국의 침략을 받았고, 이로 인해 아르티가스의 군대는 해당 지역을 방어하는 데 집중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티가스는 남아메리카 연합주의 중앙집권적 성격을 띤 1819년 아르헨티나 헌법(Argentine Constitution of 1819)에 무력으로 저항했다. 세페다 전투(1820)(Battle of Cepeda (1820))에서 연방 동맹이 승리하면서 사실상 중앙 정부는 해체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각 지방의 군벌 지도자인 ''카우디요(caudillos)''가 최고 권력을 가진 지역 당국이 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타페, 엔트레리오스 사이에 체결된 필라르 조약(Treaty of Pilar)과, 이후 점령된 오리엔탈 지방을 돕지 않기로 한 다른 연방 회원들의 결정은 연방 동맹의 해체를 의미했다.

연방 동맹이 붕괴된 직후인 1820년대 초, 리토럴 지역 주지사들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아르티가스는 필라르 조약을 거부하고 코리엔테스 및 미시오네스 정부와 아발로스 조약을 맺었다. 1820년 5월, 그는 군대를 이끌고 엔트레리오스의 콘셉시온 델 우루과이(Concepción del Uruguay)로 진격했지만, 9월에 미시오네스에서 패배하여 아순시온(Asunción)으로 망명했다. 엔트레리오스 주지사 프란시스코 라미레스는 코리엔테스와 미시오네스 주를 사실상 점령했다. 1820년 11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산타페 사이에 베네가스 조약(Treaty of Benegas)이 체결되면서 라미레스와 산타페 주지사 에스타니슬라오 로페스(Estanislao López)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821년까지 이어진 부에노스아이레스-산타페 동맹과 코리엔테스 간의 전쟁은 라미레스의 죽음과, 브라질-포르투갈에 대항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타페, 엔트레리오스, 코리엔테스 간의 방어적인 사각형 조약(Quadrilateral Treaty) 체결로 마무리되었다.

2. 3. 연방 의회와 시스플라티나 전쟁 (1824-1828)

브라질의 추가적인 공격에 대한 두려움으로 각 주들은 1824년 연방 의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의회는 공식적인 국가 원수직 설립 전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를 임시 국가 원수로 임명하는 "기본법"을 초안했다. 이후 회의에서는 브라질에 대한 몬테비데오(Banda Oriental)의 저항에 대한 지지가 강화되었고, 1825년 8월 25일 플로리다 의회에서 우루과이 독립 선언 이후 해당 주의 공식적인 재통합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브라질은 1825년 12월 10일 연합주에 선전포고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엔트레리오스, 산타페 대표들의 항구 권리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아르헨티나 군대를 조율하기 위해 대통령직을 제정하고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리바다비아와 그의 추종자들은 연방 정부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여 1826년 아르헨티나 헌법을 통과시켰지만, 의회 대표들은 이를 중앙 집중적인 성격으로 비난했다.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지만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1827년 부실하게 진행된 협상은 중앙 정부의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모든 전선에서 반대에 직면한 리바다비아는 사임했고, 부통령 비센테 로페스 이 플라네스도 곧 사임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선거가 치러졌고, 야당 지도자 마누엘 도레고가 유일한 후보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그가 브라질과 협상한 평화는 계속되는 전쟁이 무역망에 위협이 된다고 본 영국 제국의 엄청난 압력에 직면했다. 영국을 매개로 1828년 8월 예비 평화 협약이 체결되어 몬테비데오의 독립이 확정되었는데, 이는 지역 주민들이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3. 연방 조약과 내전의 격화 (1831-1852)

1829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후안 라발레의 항복을 받아내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직을 맡으면서, "연방주의자"와 "유니테리오"라는 두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호세 마리아 파스가 리가 델 인테리오르를 결성하여 연방주의 세력과 대립하게 되자, 1831년 1월 4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타페, 코리엔테스, 엔트레리오스 주는 연방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르티가스가 제안했던, 부왕령을 대체할 연방 시스템을 명시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는 연방주의 통치 아래 연방을 확보했다.


잔혹한 유니테리오들을 죽이라고 외치는 로사스 시대의 배너는 지속적인 갈등을 보여준다.


연방 조약 체결 이후에도 중앙 정부는 수립되지 않았다. 코리엔테스와 같은 일부 주들은 1834년에 조약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판단했다. 외교 문제는 더 큰 영향력을 가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담당하게 되었고, 각 주지사들은 공식적으로 로사스 정부에 대표권을 위임했다. 또한, 로사스는 상징적으로 "공공 권력의 합"을 부여받아 권력 분립을 중단시켰다. 이러한 권한을 바탕으로 로사스는 마누엘 오리베를 지원하며 장기간 지속된 우루과이 내전에 개입했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오리베는 로사스를 대신하여 여러 군사 작전을 이끌었고, 후안 라발레를 비롯한 다른 유니테리오 세력과의 투쟁에서 중요한 동맹 역할을 수행했다.

1835년 로사스의 주지사 임기부터 이러한 일련의 합의는 "아르헨티나 연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 아르헨티나는 지속적인 갈등과 개입, 국내외적 긴장 고조를 겪었다. 페루-볼리비아 연방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대해 연방 전쟁을 선포했다. 엔트레리오스 주지사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는 다른 주들을 이끌고 헌법 초안 작성, 관세 권한 및 수출 수입 공유를 요구했다. 라플라타 전쟁 중 1852년 카세로스 전투에서 브라질 주도의 콜로라도 우루과이, 반체제 연방주의자, 파라과이 세력 동맹이 아르헨티나-우루과이 군대를 물리치면서, 로사스는 권좌에서 물러나 망명길에 올랐다.

3. 1. 리가 델 인테리오르 (내륙 동맹)와의 대립

호세 마리아 파스는 중앙집권적 성격의 리가 델 인테리오르를 결성하여 연방주의 세력과 대립했다. 파스는 자신의 저술에서 리토랄 지방의 주지사들을 "''카우딜로''"라고 비난하고, 중앙집권화에 반대하는 내륙 주들을 식민지적 사고방식을 가진 것으로 규탄하며, 국가의 무질서한 상태와 독립 전쟁 노력의 정체 및 북부군의 붕괴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돌렸다. 파스의 아르헨티나 서부 정착지에 대한 군사 작전은 멘도사의 카우딜로 후안 파쿤도 키로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으며, 일련의 작은 전투에서 키로가를 물리쳤다. 파스는 도시에서 카우딜로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키로가 가문과 같은 폐위된 주지사들에 대한 일련의 숙청과 재산 몰수를 명령했다.

1830년 7월 5일, 모든 지역 주지사가 파스의 추종자들로 대체되면서 유니테리오 리가 델 인테리오르가 군사 동맹으로 공식 요청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1831년 1월 4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타페, 코리엔테스, 엔트레리오스 주는 아르티가스의 원래 제안인 부왕령을 대체할 연방 시스템을 언급하며 연방 조약을 체결했다. 두 동맹 간의 적대 행위는 그해 5월에 시작되어 라 시우다델라 전투에서 유니테리오 연맹의 패배로 끝났다.

3. 2. 연방 조약의 체결과 아르헨티나 연방의 성립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후안 라발레의 항복을 받아내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직을 맡은 1829년부터, "연방주의자"와 "유니테리오"라는 두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831년 1월 4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타페, 코리엔테스, 엔트레리오스 주는 연방 조약을 체결하여, 부왕령을 대체하는 연방 체제를 구축했다. 이는 유니테리오 연맹에 대한 대응이었다.

연방 조약은 중앙 정부를 수립하지는 않았다. 코리엔테스 등 일부 주들은 1834년에 조약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보았다. 외교 문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맡았고, 주지사들은 로사스 정부에 권한을 위임했다. 로사스는 "공공 권력의 합"을 부여받아 권력 분립을 중단시켰다. 이러한 권한으로 로사스는 마누엘 오리베를 지지하며 우루과이 내전에 개입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오리베는 로사스를 대신해 군사 작전을 이끌며 후안 라발레 등 유니테리오 세력과의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35년 로사스의 주지사 임기부터 이러한 합의는 "아르헨티나 연방"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지속적인 갈등, 개입, 국내외 긴장이 고조되었다. 페루-볼리비아 연방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연방 전쟁을 선포했다. 엔트레리오스 주지사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는 다른 주들과 함께 헌법 제정과 관세 및 수출 수입 공유를 요구했다. 라플라타 전쟁 중 1852년 카세로스 전투에서 브라질 주도의 연합군이 아르헨티나-우루과이 군대를 격파하면서, 로사스는 권좌에서 물러나 망명길에 올랐다.

3. 3. 계속되는 내전과 갈등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이끌던 오리엔탈 지방은 모든 주가 동등한 조건을 갖출 때까지 연방 시스템을 지지했다. 1814년 6월, 아르티가스는 오리엔탈 지방, 엔트레리오스 주(Entre Ríos Province), 코리엔테스 주(Corrientes Province), 미시오네스 주(Misiones Province), 코르도바 주와 함께 연방 동맹을 결성했다. 이는 1810년 5월 혁명(May Revolution)으로 탄생한 남아메리카 연합주(United Provinces of South America)의 최초의 공식적인 분열이었다.

1816년 오리엔탈 지방은 포르투갈 제국의 침략을 받았다. 이로 인해 아르티가스의 군대는 지역 방어에 집중해야 했다. 그럼에도 아르티가스는 남아메리카 연합주의 중앙집권적 1819년 아르헨티나 헌법(Argentine Constitution of 1819)에 무력으로 대항했다. 세페다 전투(1820)(Battle of Cepeda (1820))에서 연방 동맹이 승리하며 정부는 해산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카우딜로(caudillos)''가 지역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필라르 조약(Treaty of Pilar)과 점령된 오리엔탈 지방 지원 거부는 연방 동맹의 해체를 의미했다.

연방 동맹 붕괴 직후, 1820년대 초 리토럴 주지사들 간 무력 충돌이 빈번했다. 아르티가스는 필라르 조약을 거부하고 코리엔테스 및 미시오네스 정부와 아발로스 조약을 체결했다. 1820년 5월 군대를 이끌고 엔트레리오스의 콘셉시온 델 우루과이(Concepción del Uruguay)로 진군했지만, 9월 미시오네스에서 패배하여 아순시온(Asunción)으로 망명했다. 엔트레리오스 주지사 프란시스코 라미레스는 코리엔테스와 미시오네스 주를 점령했다. 1820년 11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산타페 간 베네가스 조약(Treaty of Benegas) 체결은 라미레스와 산타페 주지사 에스타니슬라오 로페스(Estanislao López)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 182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산타페 동맹과 코리엔테스 간 전쟁은 라미레스의 죽음,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타페, 엔트레리오스, 코리엔테스 간 사각형 조약(Quadrilateral Treaty) 체결로 종결되었다.

1829년부터 "연방주의자"와 "유니테리오당" 두 파벌이 형성되었다.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는 라발레 항복 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되었다. 코르도바에서는 호세 마리아 파스가 내륙 주 정복 운동을 시작, 리토랄 주지사들을 "''카우딜로''"라 비난하고 중앙집권화 반대 내륙 주들을 식민지적 사고방식으로 규정, 국가 무질서와 독립 전쟁 정체, 북부군 붕괴 책임을 돌렸다. 멘도사 카우딜로 후안 파쿤도 키로가를 제외, 거의 반대 없이 키로가를 여러 전투에서 물리쳤다. 파스는 키로가 가족 등 폐위된 주지사 숙청, 몰수를 명령했다.

1830년 7월 5일, 유니테리오 리가 델 인테리오르가 군사 동맹으로 요청되었다. 이에 1831년 1월 4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타페, 코리엔테스, 엔트레리오스 주는 아르티가스 제안인 부왕 제도를 대체할 연방 시스템 언급 연방 조약을 체결했다. 1831년 5월 라 시우다델라 전투에서 유니테리오 연맹 패배까지 적대 행위가 이어졌다. 후안 라발레는 1841년 패배, 암살까지 로사스와 연방 조약에 맞선 반란을 계속했다.

연방 조약은 중앙 정부 창설 시도를 하지 않았다. 코리엔테스 등은 1834년 조약 해소를 간주했다. 외교 대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맡았고, 주지사들은 로사스 정부에 위임했다. 로사스는 "공공 권력의 합"을 부여받아 권력 분립을 중단했다. 이 권한으로 로사스는 우루과이 내전에 참여, 마누엘 오리베를 지원했으나 실패했다. 오리베는 로사스 대신 군사 작전을 이끌었고 라발레 등 유니테리오들과 투쟁 동맹이었다. 1835년 로사스 주지사 임기부터 이 합의는 "아르헨티나 연방"으로 불렸다. 페루-볼리비아 연방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연방 전쟁을 선포했다. 엔트레리오스 주지사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는 헌법 초안, 관세 권한, 수출 수입 공유를 요구했다. 라플라타 전쟁에서 1852년 카세로스 전투에서 브라질 주도 콜로라도 우루과이, 반체제 연방주의자, 파라과이 동맹이 아르헨티나-우루과이 군대를 격파, 로사스는 폐위, 망명했다.

4.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분리와 국가 통합 (1852-1880)

카세로스 전투에서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패배하고 망명하면서, 아르헨티나 연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는 로사스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852년 산 니콜라스 협정 비준을 거부하고 유니테리오를 통해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를 선포하며 연방에서 탈퇴했다. 이들은 1853년 아르헨티나 헌법을 거부하고 이듬해 자체 헌법을 공포했다.

1859년 세페다 전투에서 바르톨로메 미트레가 이끄는 부에노스아이레스군은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의 아르헨티나 대통령 군대에 패배했지만, 우르키사는 이들을 협상 테이블로 초대하여 산호세데플로레스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미트레는 이 조약을 파기하고 1861년 파본 전투를 일으켜 우르키사의 국가군을 제압하고 승리했다. 산티아고 데르키 대통령은 사임하고, 미트레 군대는 내륙 주의 절반 이상을 점령하여 연방 정부를 유니테리오 정부로 대체했다.

바르톨로메 미트레 대통령은 제한된 선거권 제도를 도입했고, 1874년 선거에서 국민자치당의 니콜라스 아벨라네다가 승리하자 군함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연방주의자들의 저항은 계속되었으나, 1880년 선거에서 훌리오 로카 장군이 당선되면서 카를로스 테헤도르의 무장 봉기가 진압되고 국가 통합에 대한 저항도 종식되었다.

4. 1.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분리 독립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가 로사스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852년 산 니콜라스 협정 비준을 거부했다.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유니테리오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를 선포하며 연방에서 탈퇴했다. 이 분리주의 국가는 1853년 아르헨티나 헌법을 거부하고 이듬해 자체 헌법을 공포했다. 가장 큰 문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관으로, 여전히 도시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고 주요 공공 수입원이었다. 더욱이, 외교 관계를 맺은 국가들은 모든 대사관을 (수도인 파라나가 아닌)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두었다.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의 1852년 로사스 타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분리주의자들을 부추겼다.


바르톨로메 미트레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한 양보를 끌어내고 국가 통합의 강력한 수호자가 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는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주(마누엘 타보아다가 이끌었음)를 포함한 내륙의 수많은 동맹과 살타, 코리엔테스, 투쿠만, 산후안의 강력한 유니테리오당 주지사들 사이에서도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1858년 산후안의 연방당 주지사 나사리오 베나비데스가 유니테리오들에게 암살당한 사건은, 주요 연방 항구(로사리오 항과 몬테비데오 항 간의 자유 무역 협정처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무역을 훼손하여 연방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비타협적인 발렌틴 알시나의 당선은 분쟁을 더욱 악화시켰고, 결국 1859년 세페다 전투로 이어졌다.

4. 2. 세페다 전투와 파본 전투

1859년 세페다 전투에서 바르톨로메 미트레 장군이 이끄는 부에노스아이레스군은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군대에 패했다. 우르키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분리주의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대신 패배한 자들을 협상 테이블로 초대하여 산호세데플로레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여러 헌법 개정을 규정하고 주 세관 관세 감면 연장 및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은행에 유리한 조치(세관에서 법정 통화로 사용이 허가됨으로써 국가 외교 무역의 대부분을 통제)를 포함한 다른 양보를 확보했다.

미트레는 결국 산호세데플로레스 조약을 파기하여 새로운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적대 행위는 1861년 파본 전투로 절정에 달했고, 미트레와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우르키사의 국가군을 제압하고 승리했다. 우르키사의 지지를 받았던 산티아고 데르키 대통령은 1861년 11월 4일에 사임했다. 미트레의 군대는 내륙 주의 절반 이상을 점령하고 연방 정부를 유니테리오 정부로 대체했다.

4. 3. 국가 통합과 연방주의의 종식

바르톨로메 미트레 대통령은 '보토 칸타도' (소리내어 하는 투표)로 알려진, 유연한 선거인단에 의존하고 필요하다면 선거 부정을 통해 분리주의자들의 고위직 당선을 막도록 고안된, 제한된 선거권 제도를 도입했다. 1874년 선거에서 국민자치당의 니콜라스 아벨라네다가 승리하자, 미트레는 군함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아돌포 알시나의 지지를 받은 아벨라네다 대통령의 형벌 감면으로 목숨을 건졌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저항은 연방주의자들로부터 계속되었다. 특히 1863년 내전 후 살해된 라리오하 주 지도자 차초 페냐로사, 1870년부터 1876년까지 마지막 연방주의자 반란을 일으킨 엔트레리오스 주 지도자 리카르도 로페스 호르단 (전 연방주의자 대통령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 암살로 시작된 호르다니스트 반란)이 있었다. 1880년 사막 정복의 국민자치당 지도자 훌리오 로카 장군의 당선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연방화와 그에 따른 특권 상실에 반대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카를로스 테헤도르의 최후의 무장 봉기를 불러일으켰다. 이 봉기의 빠른 진압과 미트레가 중재한 휴전은 국가 통합에 대한 마지막 저항을 진압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연방화뿐만 아니라 로카의 PAN과 80년대 세대 정책 입안자들의 1916년까지의 국가 정치에 대한 헤게모니를 가져왔다.

5. 주요 분쟁


  •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 최고 지도자와 호세 아르티가스의 자유 민중 동맹 간의 전쟁 (1814–1820): 5월 혁명으로 탄생한 남아메리카 연합주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하여 아르티가스가 오리엔탈 지방, 엔트레리오스 주, 코리엔테스 주, 미시오네스 주, 코르도바 주와 함께 연방 동맹을 결성하면서 시작되었다.
  • 세페다 전투 (1820년): 연방 동맹의 승리로 중앙 정부가 해산되고, 각 지방의 ''카우딜로(caudillos)''들이 최고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 라리오하 지도자 파쿤도 키로가와의 갈등 (1826–1835): 호세 마리아 파스 장군이 이끄는 중앙집권주의 세력과 키로가가 이끄는 지방 세력 간의 분쟁.
  • 12월 혁명 (1828–1831): 후안 라발레가 마누엘 도레고를 처형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되면서 시작된 내전.
  • 연방주의자들과 단일주의자 동맹의 전쟁 (1831): 연방 조약을 체결한 연방주의 세력과 리가 델 인테리오르를 결성한 단일주의 세력 간의 전쟁으로, 라 시우다델라 전투에서 연방주의 세력이 승리하였다.
  •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후안 라몬 발카르세에 대한 복고주의자 혁명 (1833):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발카르세를 축출한 사건.
  • 라리오하 지도자 차초 페냐로사와의 갈등 (1835–1845; 1860–1863): 페냐로사가 이끄는 지방 세력과 중앙 정부 간의 분쟁.
  • 리오데라플라타 프랑스 봉쇄 (1838): 프랑스가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정권에 대항하여 리오데라플라타를 봉쇄한 사건.
  • 1839년 차스코무스에서 진압된 남부 자유인들의 반란: 부에노스아이레스 남부에서 일어난 반란.
  • 페드로 페레의 코리엔테스 반란 (1839–1842): 코리엔테스 주지사 페레가 로사스 정권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
  • 마누엘 오리베를 지지하는 로사스의 우루과이 내전 개입 (1839–1851): 로사스가 우루과이 내전에 개입하여 마누엘 오리베를 지원하였다.
  • 북부 연합과의 전쟁 (1840–1841): 로사스 정권에 대항하는 북부 주들의 연합과 로사스 군대 간의 전쟁.
  • 로사스에 대한 후안 라발레의 반란 (1841): 후안 라발레가 다시 로사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 카아구아수 전투 및 코리엔테스에서 단일주의 세력의 패배 (1841): 코리엔테스에서 단일주의 세력이 패배하였다.
  • 호아킨 마다리아가의 코리엔테스 반란 (1843–1847): 코리엔테스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 볼타 데 오블리가도 전투 (1845) 및 리오데라플라타 영국-프랑스 봉쇄 (1845–1850): 영국과 프랑스가 리오데라플라타를 봉쇄한 사건.
  • 엔트레리오스 지도자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의 로사스와의 결별 (1851): 우르키사가 로사스와 결별하고 반(反) 로사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 카세로스 전투 (1852): 우르키사가 이끄는 동맹군이 로사스 군대를 격파하고 로사스 정권을 종식시켰다.
  • 1852년 9월 11일 혁명, 부에노스아이레스 주 건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가 아르헨티나 연방에서 탈퇴하여 독립적인 국가를 선언하였다.
  • 부에노스아이레스 포위 공격 (1852–1853): 아르헨티나 연방군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포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세페다 전투 (1859년): 부에노스아이레스 군과 아르헨티나 연방군 간의 전투로, 연방군이 승리하였다.
  • 파본 전투 (1861): 부에노스아이레스 군이 아르헨티나 연방군을 격파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르헨티나 연방에 재가입하였다.
  • 카타마르카 및 기타 서부 주에서 펠리페 바렐라의 ''콜로라도스 혁명'' (1867): 펠리페 바렐라가 이끄는 지방 세력이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엔트레리오스 지도자 호르단의 반란 (1870–1876): 리카르도 로페스 호르단이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 자치당과 대통령 당선자 니콜라스 아벨라네다에 대한 미트레의 봉기 (1874): 바르톨로메 미트레가 대통령 선거 결과에 불복하여 봉기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대통령 당선자 로카에 대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 카를로스 테헤도르의 반란 (1880):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의 대통령 당선에 반대하여 테헤도르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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