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아우스트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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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 아우스트랄은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사용된 아르헨티나의 통화이다. 후안 비탈 소루일 재무부 장관이 고안한 아우스트랄 계획에 따라 1985년 페소 아르헨티노를 대체하며 미화 1.25달러 또는 미국 달러당 80센타보의 가치를 지녔다. 1985년 라울 알폰신 정부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아우스트랄 계획을 발표했으나, 경제 통제 실패와 인플레이션 재발로 인해 1989년 세계 은행의 지원 중단과 함께 실패했다. 이후 1992년 아르헨티나 페소로 대체되었으며, 1991년 대외 환율을 고정하는 통화 환전 제도가 도입되었다. 아우스트랄은 센타보, 동전, 지폐로 발행되었으며, 유니코드 기호가 존재하지만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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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의 경제 - 아르헨티나 페소
아르헨티나 페소는 아르헨티나의 통화이며, 여러 차례의 통화 개혁과 환율 변동을 거쳐 2023년 새로운 지폐가 발행되었고, 2011년 이후 외환 규제와 미국 달러 도입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 아르헨티나의 경제 -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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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아우스트랄 | |
---|---|
기본 정보 | |
ISO 코드 | ARA |
기호 | ₳ |
보조 단위 기호 | ¢ |
발행 기관 |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
사용 국가 | 아르헨티나 |
보조 단위 비율 | 1/100 |
보조 단위 이름 | 센타보 () |
복수형 | 아우스트랄레스 () |
복수형 보조 단위 | 센타보스 () |
사용 동전 | 1/2, 1, 5, 10, 50 센타보스, 1, 5, 10, 100, 500, 1,000 아우스트랄레스 |
사용 지폐 | 1, 5, 10, 50, 100, 500, 1,000, 5,000, 10,000, 50,000, 100,000, 500,000 아우스트랄레스 |
발행 기관 웹사이트 |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웹사이트 |
대체 통화 | 페소 아르헨티노 |
폐지일 | 1991년 12월 31일 |
대체된 통화 | 아르헨티나 페소 |
통용 중단 여부 | 예 |
2. 역사적 배경
아르헨티나는 만성적인 고인플레이션에 따른 가치 하락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여러 차례 디노미네이션을 거쳤다. 1970년 1월에는 "페소 모네다 나시오날"(m$n)을 100분의 1로 줄인 "페소"($)로, 1983년 6월에는 다시 "페소"를 1만 분의 1로 줄인 "페소 아르헨티노"($a)로 변경했다. 1983년 6월 당시 최고액권은 백만 페소권($1,000,000)으로, 아르헨티나에서 발행된 지폐 중 가장 액면가가 컸다.[1]
군사 정권의 실정 이후 라울 알폰신 급진당 정권은 하이퍼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아우스트랄 계획을 실시했다. 이후 "페소"를 통화 단위로 사용하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페소 아르헨티노"(Peso Argentino)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했다.
2. 1. 아우스트랄 계획
후안 비탈 소루일 재무부 장관이 아우스트랄 계획을 고안했다.[1] 아우스트랄은 페소 아르헨티노를 ₳1 = $a1,000의 비율로 대체했으며, 아우스트랄의 가치는 미화 1.25USD 또는 미국 달러당 80 센타보 데 아우스트랄이었다.1992년, 아우스트랄은 다시 전환 가능한 페소로 대체되었으며, 그 비율은 $1 = ₳10,000이었다.
라울 알폰신 급진당 정권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이라고 불린 악성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1985년 6월 15일에 "1,000 페소 아르헨티노를 1 아우스트랄로 하는 1천 분의 1 디노미네이션"과 "물가·급여 1년간 동결" 등을 골자로 하는 신 경제 정책 "아우스트랄 계획"(~1988.12)을 발표했다. "동결령"에 맞춰 대미 달러(US$)의 공정 환율도 US$1=₳|0.8es로 약 1년간 고정되었지만, 현지 통화에서 하드 통화로의 교환(예: ₳|es→US$)은 "메르카도 네그로"(암시장)라고 불리는 개인 간 거래(실세 환율)에 거의 한정되어 있었다(공정 환율의 인하가 시작되는 1986년 상반기까지는 US$1=₳|0.85es - 0.9로 추이).
"페소 아르헨티노"($a)로부터의 디노미네이션에 신권 발행이 늦어져 디노미네이션 후 액면(₳|1es·₳|5es·₳|10es)이 찍힌 구 지폐($a1000·$a5000·$a10000)를 유통시키는 것으로 대체했다. 결국 1985년 중에 발행이 시작된 것은 ₳|1es·₳|10es·₳|100es(지폐)과 1/2·1·5·10·50 센타보(동전)뿐이며, ₳|5es·₳|50es(지폐)의 발행은 1986년까지 미뤄졌다.
물가 동결령(1년간)이 해제된 1986년 하반기 이후에도 인플레이션 억제책으로서의 "아우스트랄 계획"은 지속(생필품과 공공 요금의 가격 통제)되었지만, 경제 실정에 맞지 않는 통제를 혐오한 "매점매석"과 심각한 경기 후퇴가 국민의 생활을 직격했다. 대외 채무의 디폴트(이자 지급 정지)를 선언한 1988년 4월 이후, 인플레이션의 재연이 선명해져 1천%(연율 환산) 돌파의 기준이기도 한 월 22%의 라인을 8월에 돌파했다. 2개월 후(10월)에 발표된 환율 제도의 변경 등을 포함한 긴급 경제 대책 "프리마베라 계획"(제2차 아우스트랄 계획)도 확실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3개월도 안 되어 좌절되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억제에서 일단 성과를 거둔 듯 보였던 "아우스트랄 계획"은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다. 이듬해 1989년 1월 세계 은행은 아르헨티나에 대한 지원을 중단, 국제적인 고립이 결정적이 되었다. 이후, 1991년 페그제 도입까지 약 2년 동안, 미증유의 하이퍼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된다.
₳|500es 지폐(1988년)를 시작으로 고액 지폐(₳|1,000es·₳|5,000es·₳|10,000es·₳|50,000es·₳|100,000es·₳|500,000es)의 발행이 잇따랐지만, 인플레이션의 진행에 고액 지폐의 추가(도안 결정)가 따라가지 못했다.
동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1989년 이후 ₳|1es·₳|5es·₳|10es·₳|100es·₳|500es·₳|1,000es의 각 지폐가 동전으로 변경되었다.
정의당(페론당)의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취임(1989년 7월) 이후에도 경제 혼란은 계속되었지만, 1990년 하반기 무렵부터 연율 수천%에 달했던 인플레이션은 점차 진정되는 방향으로 향한다. 1991년 대외 환율을 US$1=₳|10,000es으로 고정하는 "통화 환전 제도"(소위 "페그제")가 도입되었고, 이듬해 1992년 1월 1일에는 ₳|10,000es을 1 페소로 하는 1만 분의 1 디노미네이션도 이루어졌다.
3. 동전
1985년에 0.5, 1, 5, 10, 50 센타보 동전이 도입되었다. 0.5 센타보 동전은 1985년에만 발행되었고, 1 센타보 동전은 1987년에, 5 센타보 동전은 1988년에 생산이 중단되었으며, 나머지 센타보 동전은 1989년에 생산이 종료되었다. 1989년에는 1, 5, 10 아우스트랄 동전이 발행되었고, 1990년과 1991년에는 100, 500, 1,000 아우스트랄 동전이 발행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센타보 동전은 보조 통화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여 빠르게 퇴출되었다. 1989년에는 센타보 단위 자체가 보조 통화로서의 역할을 사실상 마감했다. 아우스트랄 동전 역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가치가 하락하여, 결국 1992년 1월 1일, 1만 아우스트랄을 1 페소로 하는 디노미네이션이 단행되었다.
3. 1. 센타보 동전
액면가 | 앞면 | 뒷면 | 유통 시작일 | 퇴출일 | 재질 | 지름 |
---|---|---|---|---|---|---|
센타보 | 오븐새 | 1985년 9월 23일 | 1991년 12월 31일 | 구리-알루미늄 (92/8) | 19mm | |
1 센타보 | 레아 | 1985년 9월 23일 | 1991년 12월 31일 | 구리-알루미늄 (92/8) | 20mm | |
5 센타보 | 퓨마 | 1985년 9월 23일 | 1991년 12월 31일 | 구리-알루미늄 (92/8) | 23mm | |
10 센타보 | 국장 | 1985년 10월 14일 | 1991년 12월 31일 | 구리-알루미늄 (92/8) | 21mm | |
50 센타보 | 자유의 여신 | 1985년 10월 14일 | 1991년 12월 31일 | 구리-알루미늄 (92/8) | 23mm |
3. 2. 아우스트랄 동전
1985년에 0.5, 1, 5, 10, 50 센타보 동전이 도입되었다. 0.5 센타보 동전은 1985년에만 발행되었으며, 1 센타보 동전은 1987년에, 5 센타보 동전은 1988년에 생산이 중단되었고, 나머지 센타보 동전은 1989년에 생산이 종료되었다. 1989년에는 1, 5, 10 아우스트랄 동전이 발행되었고, 1990년과 1991년에는 100, 500, 1,000 아우스트랄 동전이 발행되었다.액면 | 뒷면 | 유통 시작 | 유통 중단 | 재질 | 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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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부에노스아이레스 카빌도 | 1989년 3월 27일 | 1991년 12월 31일 | 알루미늄 | 20mm |
₳5 | 투쿠만 하우스 | 1989년 5월 22일 | 1991년 12월 31일 | 알루미늄 | 22mm |
₳10 | 카사 델 아쿠에르도 | 1989년 6월 26일 | 1991년 12월 31일 | 알루미늄 | 22mm |
₳100 | 국장 | 1990년 11월 28일 | 1993년 10월 31일 | 알루미늄 | 21mm |
₳500 | 국장 | 1990년 11월 1일 | 1993년 10월 31일 | 알루미늄 | 23mm |
₳1,000 | 국장 | 1990년 11월 28일 | 1993년 10월 31일 | 알루미늄 | 24mm |
4. 지폐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과도기적 지폐와 확정 지폐를 발행했다. 과도기적 지폐는 기존 페소 레이 도안을 수정하여 "PESOS"를 지우고 뒷면에 액면가를 여러 줄로 표시했다. (₳10 MIL (₳10,000), ₳50 MIL (₳50,000), ₳500 MIL (₳500,000)). 과도기적 지폐를 제외한 모든 지폐 뒷면에는 횃불과 방패를 든 자유의 여신상이 있었다.
라울 알폰신 급진당 정권은 1985년 6월 15일 하이퍼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아우스트랄 계획"의 일환으로 1,000 페소 아르헨티노를 1 아우스트랄로 하는 1천 분의 1 디노미를 단행했다.
신권 발행 지연으로 디노미 후 액면(₳1, ₳5, ₳10)이 찍힌 구 지폐($a1000, $a5000, $a10000)를 유통시켰다. 1985년에는 ₳1, ₳10, ₳100 지폐와 1/2, 1, 5, 10, 50 센타보 동전만 발행되었고, ₳5, ₳50 지폐는 1986년에 발행되었다. 아우스트랄 지폐 크기는 155mm x 65mm로 통일되었으나, 초상화 인물과 색상은 권종에 따라 달랐다.
아우스트랄 계획은 초기에는 인플레이션 억제에 성공했으나, 1988년 이후 인플레이션이 재연되어 실패했다. 1989년 세계은행의 지원 중단 후, 아르헨티나는 페그제 도입까지 약 2년간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인플레이션 가속화로 소액 동전이 폐지되었고, 1989년에는 센타보가 보조 통화 역할을 상실했다. 1988년 ₳500 지폐를 시작으로 고액 지폐(₳1,000, ₳5,000, ₳10,000, ₳50,000, ₳100,000, ₳500,000)가 발행되었지만, 인플레이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구 페소 고액 지폐 도안을 수정하기도 했다.
1989년 이후 ₳1, ₳5, ₳10, ₳100, ₳500, ₳1,000 지폐가 동전으로 변경되었다. 동전 재질은 알루미늄으로 통일되었지만, 크기와 디자인은 액면마다 달랐다.
카를로스 메넴 정의당 정권은 1991년 통화 환전 제도를 도입하고, 1992년 1월 1일 ₳10,000을 1 페소로 하는 1만 분의 1 디노미를 단행하여, 2002년 페그제 붕괴까지 대미 달러와 1:1 교환 비율을 유지했다.
4. 1. 과도기적 지폐 (1985)
1985년에는 ₳1, ₳5, ₳10 가치의 과도기적 지폐가 발행되었다. 이 지폐들은 1,000, 5,000, 10,000 아르헨티나 아우스트랄 지폐에 가치를 다시 새겨넣은 형태였다.가치 | 비고 | 초상 | 유통 시작일 | 회수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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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과도기적 지폐 | 호세 데 산 마르틴 | 1985년 10월 31일 | 1987년 11월 30일 |
₳5 | 과도기적 지폐 | 후안 바우티스타 알베르디 | 1985년 10월 31일 | 1987년 11월 30일 |
₳10 | 과도기적 지폐 | 마누엘 벨그라노 | 1985년 10월 31일 | 1987년 11월 30일 |
"페소 아르헨티노"($a)에서 디노미를 할때 신권 발행이 늦어져, 디노미 후 액면(₳|아우스트랄es1·₳|아우스트랄es5·₳|아우스트랄es10)이 찍힌 구 지폐($a1000·$a5000·$a10000)를 유통시키는 것으로 대체했다.
4. 2. 확정 지폐 (1985-1991)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확정 지폐는 다음과 같다.가치 | 비고 | 초상 | 유통 시작일 | 회수일 | 1992년 가치 (전환 페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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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확정 지폐 |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 | 1985년 10월 31일 | 1991년 10월 31일 | ||
₳5 | 확정 지폐 |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 | 1986년 2월 28일 | 1991년 10월 31일 | ||
₳10 | 확정 지폐 | 산티아고 데르키 | 1985년 12월 30일 | 1991년 10월 31일 | ||
₳50 | 확정 지폐 | 바르톨로메 미트레 | 1986년 6월 23일 | 1991년 12월 31일 | ||
₳100 | 확정 지폐 | 도밍고 F. 사르미엔토 | 1985년 11월 25일 | 1992년 6월 1일 | 0.01ARS | |
₳500 | 확정 지폐 | 니콜라스 아베자네다 | 1988년 5월 2일 | 1992년 6월 1일 | 0.05ARS | |
₳1,000 | 확정 지폐 | 훌리오 A. 로카 | 1988년 9월 30일 | 1992년 6월 1일 | 0.1아르헨티나 페소 | |
₳5,000 | 확정 지폐 | 후아레스 셀만 | 1989년 5월 26일 | 1992년 10월 1일 | 0.5아르헨티나 페소 | |
₳10,000 | 확정 지폐 | 카를로스 펠레그리니 | 1989년 8월 25일 | 1992년 10월 1일 | 1ARS | |
₳50,000 | 확정 지폐 | 루이스 사엔스 페냐 | 1989년 11월 8일 | 1993년 1월 2일 | -- -- | 5ARS |
₳100,000 | 확정 지폐 | 호세 E. 우리부루 | 1990년 5월 21일 | 1993년 1월 2일 | 10ARS | |
₳500,000 | 확정 지폐 | 마누엘 킨타나 | 1990년 11월 1일 | 1993년 1월 2일 | -- | 50ARS |
과도기적 지폐를 제외한 모든 지폐 뒷면에는 횃불과 방패를 든 자유의 여신상이 그려져 있었다.
5. 아우스트랄 계획의 실패와 페소로의 전환
라울 알폰신 급진당 정권은 "하이퍼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1985년 6월 15일 "아우스트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1,000 페소 아르헨티노를 1 아우스트랄로 하는 1천 분의 1 디노미네이션과 물가 및 급여 1년간 동결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1] 미 달러(US$)의 공정 환율은 US$1=₳0.8로 약 1년간 고정되었으나, 현지 통화에서 하드 통화로의 교환은 암시장(메르카도 네그로)에서 이루어졌다.
물가 동결령이 해제된 1986년 하반기 이후에도 "아우스트랄 계획"은 지속되었지만, 경제 현실과 괴리된 통제로 인해 매점매석과 경기 후퇴가 발생했다. 1988년 4월 대외 채무 디폴트 선언 이후 인플레이션이 재발했고, 1989년 1월 세계 은행의 지원 중단으로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었다. 이후 약 2년간 아르헨티나는 극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취임 후 1991년, 대외 환율을 US$1=₳10,000으로 고정하는 "페그제"가 도입되었다. 1992년 1월 1일에는 ₳10,000을 1 페소로 하는 1만 분의 1 디노미가 실시되어, 2002년 1월까지 미 달러와 1 대 1의 교환 비율이 유지되었다.
6. 유니코드
기호 | 유니코드 | 이름 |
---|---|---|
₳ | U+20B3 | 아우스트랄 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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