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울라 팔라티나
1. 개요
아울라 팔라티나는 310년경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궁전 단지의 일부로 지어진 건물이다. 원래 독립된 건물이 아닌 부속 건물들과 연결된 형태였으며, 바닥 난방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중세 시대에는 트리어 주교의 거주지로, 17세기에는 대주교의 궁전과 통합되어 재설계되었으며, 19세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 의해 로마 시대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었고, 현재는 라인란트 복음주의 교회의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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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콘스탄티누스 대성당 |
|---|---|
| 독일어 이름 | Konstantinbasilika |
| 위치 | 트리어 |
| 용도 | 교회 |
|---|---|
| 이전 용도 | 궁전, 성채 |
| 종파 | 라인란트 복음교회 |
| 양식 | 초기 기독교 |
| 건축 연도 | 310년 |
| 문화재 지정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유네스코 등재 연도 | 1986년 |
| 유네스코 ID | 367-007 |
| 유네스코 기준 | (i), (iii), (iv), (vi) |
| 설계자 | 알 수 없음 |
|---|---|
| 구조 설계자 | 알 수 없음 |
| 설비 설계자 | 알 수 없음 |
| 시공 | 알 수 없음 |
| 건축주 | 알 수 없음 |
| 사업 주체 | 알 수 없음 |
| 관리 운영 | 알 수 없음 |
| 구조 형식 | 알 수 없음 |
| 착공 | 310년경 |
| 준공 | 알 수 없음 |
| 개관 | 알 수 없음 |
| 개조 | 알 수 없음 |
| 해체 | 알 수 없음 |
| 좌표 | 49.7533, 6.6433 |
|---|---|
| 위치 | 알 수 없음 |
| 우편 번호 | 알 수 없음 |
| 설명 |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바실리카는 현재 교회로 사용되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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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어의 교회당 -
트리어 대성당
트리어 대성당은 독일 트리어에 위치한 로마 가톨릭 교회 성당으로, 로마 시대 건축물 위에 세워져 여러 양식이 혼합되었으며, 성유물 "성의"가 보관되어 있고 건축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
트리어의 역사 -
트리어 선제후국
트리어 선제후국은 트리어 대주교가 통치하며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지위를 가진 국가였으나, 프랑스 혁명 전쟁으로 해체되고 제국대표자회의 결의에 따라 세속화되었다. -
트리어의 역사 -
트레베리족
트레베리족은 켈트-게르만 문화의 혼합 양상을 보이며 로마와 협력하여 자치 도시 지위를 얻고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나, 3세기 위기 이후 쇠퇴한 고대 민족이다. -
연합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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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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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성공회는 1970년 여러 교파의 통합으로 설립되어 신학 교육을 제공하며 교구를 운영하고, 일부 주교들은 글로벌 성공회 미래 회의를 지지하며 글로벌 사우스 성공회와의 관계를 맺고 사회 정의를 위해 협력하는 기독교 교단이다.
2. 역사
아울라 팔라티나는 310년경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궁전 단지의 일부로 지어졌다. 처음에는 다른 부속 건물들과 함께 있었으며, 바닥과 벽 난방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중세 시대에는 트리어 주교의 거주지로 사용되면서 앱스가 주거 공간으로 재설계되고 벽 상단에 첨탑이 추가되었다. 17세기에는 대주교 로타르 폰 메테르니히가 아울라 팔라티나를 자신의 궁전에 통합하면서 대대적인 재설계가 이루어졌다.
19세기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로마 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하도록 명령하여, 군 건축가 카를 슈니츨러의 감독하에 복원이 진행되었다. 1856년 아울라 팔라티나는 개신교 교회가 되었다.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의 공습으로 건물이 불탔으나, 전쟁 후 수리되면서 19세기의 내부 장식은 재건되지 않았다.
2.1. 로마 시대
310년경,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현재 건물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건물의 서쪽 절반 벽면에 당시의 유구가 일부 현존하고 있다. 원래 이 위치에는 콜로니아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현재의 트리어)에서의 황제 궁전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도 본거지로 사용했다. 원래는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궁전의 복합 시설의 일부였으며, 옥좌의 방으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검은색과 흰색 대리석 바닥, 벽에 반암으로 만들어진 조각상, 모자이크 등으로 장식되었다.
아울라 팔라티나는 내부 기둥이 없고 열린 상자 모양이라는 점에서 초기 바실리카의 표준 건축 계획을 따르지만, 나르텍스를 연상시키는 가로 현관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바실리카는 견고한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흑백 대리석 바닥이 있었고, 바닥 및 벽 난방 시스템(하이포코스트)이 갖춰져 있었다. 이 바실리카는 원래 궁전 단지의 일부였으며 독립된 건물이 아니었고, 전당, 현관 및 일부 부속 건물과 같은 다른 작은 건물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바실리카의 외부 안뜰과 1층 및 2층 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2.2. 중세 시대
중세 시대에 아울라 팔라티나는 트리어 주교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이를 위해 앱스는 주거 공간으로 재설계되었고 벽 상단에 첨탑이 추가되었다. 17세기에 대주교 로타르 폰 메테르니히는 아울라 팔라티나 바로 옆에 자신의 궁전을 건설하고 이를 통합하여 대대적인 재설계를 하였다.
2.3. 근세 및 현대
중세 시대 트리어는 주교가 통치하는 도시였으며, 아울라 팔라티나는 주교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이 때 앱스는 주거 공간으로 변경되었고, 벽 상단에는 첨탑이 추가되었다. 17세기에는 대주교이자 선제후였던 로타르 폰 메테르니히가 아울라 팔라티나 바로 옆에 자신의 궁전을 건설하면서 아울라 팔라티나를 궁전의 일부로 통합하는 대대적인 재설계를 진행했다.
이후 19세기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건물을 원래의 로마 시대 모습으로 복원하도록 명령했으며, 이는 군 건축가 카를 슈니츨러의 감독 하에 이루어졌다. 1856년 아울라 팔라티나는 개신교 교회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4년, 연합국의 전략 폭격으로 인해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전쟁 후 수리 과정에서 19세기의 내부 장식은 재건되지 않아, 현재는 내부에서도 벽돌 벽을 볼 수 있다.
2014년에는 6,000개가 넘는 파이프를 가진 새로운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3. 건축
아울라 팔라티나는 내부 기둥이 없는 열린 상자 모양으로, 초기 바실리카의 표준 건축 계획을 따르면서도 나르텍스를 연상시키는 가로 현관을 추가한 점이 독특하다. 벽돌로 견고하게 만들어졌으며, 흑백 대리석 바닥에 바닥과 벽 난방 시스템(하이포코스트)을 갖추고 있었다. 원래 궁전 단지의 일부로서 전당, 현관 및 부속 건물들이 부착된 형태였다.
중세 시대에는 트리어 주교의 거주지로 사용되면서 앱스가 주거 공간으로 재설계되고 벽 상단에 첨탑이 추가되었다. 17세기 대주교 로타르 폰 메테르니히는 아울라 팔라티나 바로 옆에 궁전을 건설하고 통합하는 대대적인 재설계를 진행했다. 19세기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명령으로 군 건축가 카를 슈니츨러가 감독하여 원래 로마 시대 상태로 복원되었다. 1856년 개신교 교회가 되었으며,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의 전략 폭격으로 소실되었다가 전쟁 후 수리되었다. 이때 19세기 내부 장식은 재건되지 않아 내부에서도 벽돌 벽이 보인다.
2014년에는 6,000개가 넘는 파이프를 가진 새로운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3.1. 갤러리
3.1.1.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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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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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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