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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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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압타이는 문헌에 따라 압타이 또는 아부타이로 표기되는 인물이다. 그는 누르하치의 친족 딸과 혼인하였으며, 홍타이지와의 갈등으로 인해 처벌받았다. 홍타이지 사후에는 국상 기간에 외유한 행위로 인해 처벌받아 니루를 박탈당하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압타이는 화석공주와 혼인하여 바렁을 아들로 두었으며, 그의 자손들은 좌령 등의 관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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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타이
기본 정보
압타이 초상화
압타이 초상화
아이신 교로 (愛新覺羅, Àixīn Juéluó)
압타이 (阿巴泰, Ābātài)
작위요여친왕(饒餘親王)
시호통(通)
생애
출생1589년
사망1648년
가족 관계
아버지청 태조누르하치
어머니서비 이얼건각라씨
배우자계실 박이제길특씨, 측실 왕씨, 첩 여씨
자녀악락, 박새, 찰니, 액도, 새혁

2. 이름

압타이의 이름은 문헌에 따라 압타이 혹은 아부타이로 표기되어 왔다. 대만 학자 장화극/張華克중국어에 의하면, 『내각장본만문노당(內閣藏本滿文老檔)』에는 한문으로는 '아포태(阿布泰)', 만문(滿文)으로는 '압타이(abtai)'로 표기되었다. 반면 『만문원당(滿文原檔)』에는 한문으로는 '아부대(阿不代)', 만문으로는 '아부타이(abutai)'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압타이(阿布泰, abtai)와 아부타이(阿不代, abutai)는 모두 동일인물이다.[2]

3. 생애

천명 8년(1623), 압타이는 누르하치 친족의 딸이자 거거(gege, 格格)(혹은 화석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3] 천총 2년(1628) 음3월, 처조카 도도가 압타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또다른 처조카 아지거는 친가의 아다하이를 중매인으로 하여 정혼하였다. 이 일로 이후 아지거와 압타이와 아다하이는 홍타이지에게 처벌받았다. 압타이는 유격에서 비어로 강등되었고 벌은 200량을 내었다. 이전에 홍타이지는 '압타이가 참언을 하면서도 악하여 버일러들에게 유하여 압타이와 친해지지 말고, 그 딸과 결혼하지도 말며, 버일러들의 딸을 압타이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지 말도록 하였다'고 전한다.[4] 친가 아다하이는 사형을 면제받았지만 얼마 후 처형되었다.[5]

숭덕 8년(1643), 홍타이지가 사망하였다. 압타이는 원래 내대신 반열에 있었고 대내를 출입하였다. 국상 기간에 압타이는 내정에 들어가지 않고 화석예친왕 도도를 따라 외유하였다. 여러 왕•버일러•버이서•구사어전•의정대신 등은 군주의 은혜를 저버리고 신하의 예가 없다고 여기며 압타이를 처벌하였다. 그 결과 니루를 박탈하고 국구와 어푸 이름을 빼앗고 서민으로 강등시켰으며, 우면장정 100명은 공역에 충당하였다.[6]

3. 1. 초기 생애

천명 8년(1623), 압타이는 누르하치 친족의 딸이자 거거(gege, 格格)(혹은 화석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3] 천총 2년(1628) 음3월, 처조카 도도가 압타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또다른 처조카 아지거는 친가의 아다하이를 중매인으로 하여 정혼하였다. 이 일로 이후 아지거와 압타이와 아다하이는 홍타이지에게 처벌받았다. 압타이는 유격에서 비어로 강등되었고 벌은 200량을 내었다. 이전에 홍타이지는 '압타이가 참언을 하면서도 악하여 버일러들에게 유하여 압타이와 친해지지 말고, 그 딸과 결혼하지도 말며, 버일러들의 딸을 압타이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지 말도록 하였다'고 전한다.[4] 친가 아다하이는 사형을 면제받았지만 얼마 후 처형되었다.[5]

숭덕 8년(1643), 홍타이지가 사망하였다. 압타이는 원래 내대신 반열에 있었고 대내를 출입하였다. 국상 기간에 압타이는 내정에 들어가지 않고 화석예친왕 도도를 따라 외유하였다. 여러 왕•버일러•버이서•구사어전•의정대신 등은 군주의 은혜를 저버리고 신하의 예가 없다고 여기며 압타이를 처벌하였다. 그 결과 니루를 박탈하고 국구와 어푸 이름을 빼앗고 서민으로 강등시켰으며, 우면장정 100명은 공역에 충당하였다.[6]

3. 2. 홍타이지와의 갈등

천명 8년(1623), 압타이는 누르하치 친족의 딸이자 거거(gege, 格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3] 천총 2년(1628) 음3월, 처조카 도도가 압타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또 다른 처조카 아지거는 친가의 아다하이를 중매인으로 하여 정혼하였다. 이 일로 아지거와 압타이, 아다하이는 홍타이지에게 처벌받았다. 압타이는 유격에서 비어로 강등되었고 벌은 200량을 내었다. 홍타이지는 이전에 '압타이가 참언을 하면서도 악하여 버일러들에게 유하여 압타이와 친해지지 말고, 그 딸과 결혼하지도 말며, 버일러들의 딸을 압타이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지 말도록 하였다'고 전한다.[4] 친가 아다하이는 사형을 면제받았지만 얼마 후 처형되었다.[5]

숭덕 8년(1643), 홍타이지가 사망하자, 압타이는 원래 내대신 반열에 있었고 대내를 출입하였다. 국상 기간에 압타이는 내정에 들어가지 않고 화석예친왕 도도를 따라 외유하였다. 여러 왕, 버일러, 버이서, 구사어전, 의정대신 등은 군주의 은혜를 저버리고 신하의 예가 없다고 여기며 압타이를 처벌하였다. 그 결과 니루를 박탈하고 국구와 어푸 이름을 빼앗고 서민으로 강등시켰으며, 우면장정 100명은 공역에 충당하였다.[6]

3. 3. 홍타이지 사후

천명 8년(1623), 압타이는 누르하치 친족의 딸이자 거거(gege, 格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3] 천총 2년(1628) 음3월, 처조카 도도가 압타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또 다른 처조카 아지거는 친가의 아다하이를 중매인으로 하여 정혼하였다. 이 일로 아지거와 압타이, 아다하이는 홍타이지에게 처벌받았다. 압타이는 유격에서 비어로 강등되었고 벌은 200량을 내었으며, 아다하이는 사형을 면제받았지만 얼마 후 처형되었다.[5] 홍타이지는 '압타이가 참언을 하면서도 악하여 버일러들에게 유하여 압타이와 친해지지 말고, 그 딸과 결혼하지도 말며, 버일러들의 딸을 압타이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지 말도록 하였다'고 전한다.[4]

숭덕 8년(1643), 홍타이지가 사망하자, 압타이는 국상 기간에 내정에 들어가지 않고 도도를 따라 외유하였다. 여러 왕, 버일러, 버이서, 구사어전, 의정대신 등은 군주의 은혜를 저버리고 신하의 예가 없다고 여기며 압타이를 처벌하였다. 그 결과 니루를 박탈하고 국구와 어푸 이름을 빼앗고 서민으로 강등시켰으며, 우면장정 100명은 공역에 충당하였다.[6]

4. 가족

압타이는 화석공주(和碩公主)와 혼인하였다.[1] 아들 바렁(巴楞)은 이등시위(二等侍衛)를 지냈다.[1] 손자 바하타(巴哈塔)와 증손자 나?주(納?住)는 좌령(佐領)을 지냈다.[7][1] 현손자로는 좌령(佐領)을 지낸 영복(永福)과 삼등시위겸좌령(三等侍衛兼佐領)을 지낸 영덕(永德)이 있다.[1]

참조

[1] 서적 八旗滿洲氏族通譜·卷二十三 辽海出版社
[2] 논문 建州女真將士獎功實例考析(下) https://acbas.org.tw[...] 中國邊政雜誌社
[3] 문서 만문로당(滿文老檔)第五十一冊
[4] 문서
[5] 문서 만문로당(滿文老檔)第十冊
[6] 문서 청순치실록(淸順治實錄)卷1
[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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