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기오로 아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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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지거는 1605년에 태어나 청나라 초기의 군사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는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았으며, 용맹함과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후금 건국에 기여했다. 홍타이지 치세에는 명나라 정벌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에도 참전했다. 순치 연간에는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권력욕으로 인해 도르곤과 갈등을 겪었다. 도르곤 사후 반란 혐의로 처형되었고, 그의 가문은 몰락했다. 그러나 강희제 때 일부 후손들이 사면되어 신분을 회복했다.
아지거는 1605년 누르하치의 열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만주어로 '작다'는 뜻이다. 어려서부터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았으며, 용맹하고 전투에 능하여 후금 건국 초기부터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1626년 다이샨을 따라 자루트부를 정벌하고 버일러(貝勒)에 봉해졌다.
2. 생애
1627년 정묘호란 때 아민과 함께 조선을 공격했고,[2] 홍타이지 즉위 후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1629년 기사지변(己巳之變) 당시 지르갈랑과 함께 명의 금주, 영원 등을 공격하고 군량을 불태웠으며, 1632년 차하르부 원정에 나서 릭단 칸을 도주시키고 명의 대동(大同)과 선부(宣府)를 공격했다.[2]
1636년 무영군왕(武英郡王)으로 승격되었고,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피도(皮島)를 함락시켰다.[2] 1641년 지르갈랑과 함께 금주를 포위 공격하고, 홍승주가 이끄는 명군을 격파했다.[2]
1644년 청군이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의 난을 진압할 때 정원대장군(靖遠大將軍)에 임명되어 이자성의 퇴로를 차단하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1] 이자성 사후 좌량옥의 아들 좌몽경의 항복을 받고 하남성, 호광성, 강서, 강남 등지를 평정했다.[1]
그러나 도르곤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1649년 '숙왕(叔王)' 칭호를 요구하다가 육부(六部) 사무 관여와 한관(漢官) 접견을 금지당했다.[1] 1651년 도르곤 사후 군사를 동원하려다 지르갈랑에게 저지당하고 작위가 삭탈된 채 유폐되었다. 결국 방화를 시도했다는 보고를 받은 순치제에 의해 사사(賜死)되었고, 아들들도 서인으로 강등되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2. 1. 초기 생애와 후금 건국 기여 (천명 연간)
만력(萬曆) 33년(1605) 7월 15일에 태어났다. '아지거'라는 이름은 만주어로 '작다'는 뜻이다.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았다. 홍타이지의 푸진(福晉) 니오후루씨(鈕祜祿氏)는 아지거를 보았는데도 가마에서 내리지 않아 시아버지 누르하치가 이혼을 명령했다. 아지거는 용맹하고 전투에 능하여 타이지(台吉)에 제수되었다. 후금(後金) 천명 10년/명 천계 5년(1625), 버일러(貝勒, beile) 망굴타이(莽古爾泰, Manggūltai)를 따라 차하르부(察哈爾部)를 정벌하였고, 농안탑(農安塔)까지 추적하였다. 천명 11년(1626) 타이지 쇼토(碩託, Šoto)와 함께 칼카(喀爾喀) 바린부(巴林部)를 토벌하였고, 다시 버일러 다이샨(代善, Daišan)을 따라 자루트부(扎魯特部)를 토벌하여 모두 전공을 세웠으며, 이 공적으로 버일러(貝勒)에 봉해졌다.
2. 2. 홍타이지와의 관계와 군사적 활약 (천총 연간)
1627년 정묘호란 당시, 버일러 아민과 함께 조선을 공격하여 5개의 성을 함락시켰다.[2] 홍타이지의 명 정벌 시에는 망굴타이와 함께 탑산(塔山)을 지키며 군량을 운반했고, 영원(寧遠)을 공격하여 명군을 섬멸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총병(總兵) 만계(滿桂)가 이끄는 명군을 성 아래까지 진격시켰다.[2]
1629년 기사지변(己巳之變) 당시, 지르갈랑과 함께 명의 금주, 영원 등을 공격하고 군량을 불태웠다. 홍타이지를 따라 명을 정벌하여 용정관(龍井關), 한아장성(漢兒莊城), 홍산구(洪山口)를 함락시켰으며,[2] 준화(遵化) 공격에 참여하여 총병 조솔교(趙率教)를 죽였다. 북경(北京) 전투에서는 원숭환(袁崇煥), 조대수(祖大壽)가 이끄는 명군과 교전했으며, 아바타이 등과 함께 통주(通州)를 공격하고 장가만(張家灣)까지 진격했다. 이후 계주(薊州) 공략 중 산해관(山海關)의 구원군을 격파했다.[2]
1632년 차하르부 원정에 나서 릭단 칸(林丹汗)을 도주시키고, 명의 대동(大同)과 선부(宣府)를 공격하여 장가구(張家口)의 재물을 획득했다.[2] 1633년 통원보(通遠堡)를 공격하고 공유덕(孔有德)의 투항을 받았으며, 명과 조선군을 막았다.[2] 1634년 명 원정에 나서 보전(保全)과 영구(靈丘)를 함락했다.[2]
2. 3. 무영군왕 책봉과 병자호란 참전 (숭덕 연간)
1636년, 아지거는 무영군왕(武英郡王)으로 승격되었다. 그는 요여버일러(饒餘貝勒) 아바타이와 양구리와 함께 명나라를 공격하여, 조악보(雕鶚堡)에서 장안령(長安嶺)으로 들어가 연경(延慶)으로 돌진하였다. 보정(保定)을 넘어 안주(安州)에 이르러 창평(昌平), 정흥(定興), 안숙(安肅), 보저(寶坻), 동안(東安), 웅(雄), 순의(順義), 용성(容城), 문안(文安) 등의 현(縣)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56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였고, 붙잡은 포로와 사람 및 가축은 10만여 명이었다.[2] 또한 구사어전(固山額眞) 탄타이 등을 보내어 매복하게 하였고, 준화(遵化) 세 둔영의 수장들을 참살하였으며 말 140여 필을 노획하였다. 철군 시에 홍타이지가 지재문(地載門) 밖 10리까지 나와 아지거 군대를 맞이하고 위로하였는데, 아지거가 수척해진 모습을 본 홍타이지는 눈물을 흘리고 친히 감잔에 술을 따라주며 위로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홍타이지가 조선을 공격하였을 때 아지거는 우장(牛莊)을 지키게 하였다. 1637년, 쇼토가 피도(皮島)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아지거는 부대를 이끌고 수륙 양공을 펼쳐 함락하였다. 홍타이지는 사신을 보내어 아지거를 포상하고 위로했다.[2]
1639년, 아지거는 명나라를 공격하였다. 아지거는 홍이포(紅夷炮) 혹은 홍의포(紅衣炮)로 대(臺, 포 등을 놓고 쏘는 성탑과 같은 군사 시설)를 공격한다고 기세양양하게 말하자, 수비자들이 두려워하였고, 이에 사리둔(四里屯), 장강둔(張剛屯), 보림사(寶林寺), 왕민둔(旺民屯), 어가둔(於家屯), 성화욕(成化峪), 도이창(道爾彰) 등의 대가 모두 함락되었다. 다시 아지거는 회군하여 탑산(塔山)과 연산(連山)을 방어하였고, 포로와 사람 및 말이 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후 아지거는 아바타이와 함께 금주와 영원을 공격하였다.[2]
1641년, 지르갈랑과 함께 금주를 포위 공격하였다. 수부몽골타이지(守郛蒙古台吉) 우바시(吳巴什) 등은 상의하여 성을 들고 투항하기로 하였으나, 조대수는 이를 알아차리고 몽골군을 공격하였고, 아지거는 밤에 성에 올라 싸움을 도와 명군이 대패하였으며, 항복한 몽골인을 의주(義州)로 이동하였다. 아지거는 자주 명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고 청 조정은 4000냥을 하사하였다.[2]
홍승주가 대동총병(大同總兵) 왕박과 오삼계 등을 이끌고 금주 구원에 나섰으니, 13만 대군이었다고 한다. 홍타이지가 직접 대군을 탐시하고는 송산(松山)에 주둔하였다. 명군이 탑산으로 가서 투항하니 아지거는 추격하였고, 필가산(筆架山)에 있던 군량을 노획하였고, 또한 도르곤과 함께 네 대를 공격하여 명 장수 왕희현(王希賢) 등을 포획하였다. 왕박과 오삼계 등은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명군은 금주, 송산, 행산(杏山), 고교(高橋) 등을 지키고 있자 홍타이지는 성경(盛京)으로 회군하고는 아지거에게 두두와 도도 등과 함께 포위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홍승주는 밤에 송산을 빠져나와 청에 투항하였고, 아지거 등은 군대를 이끌고 명군을 둘러싸서 화살을 퍼부었으니, 명군은 패퇴하여 성으로 돌아갔으나 성문이 굳게 잠겨 들어가지 못하였고, 명군 가운데 2천명은 투항하였다.[2]
1642년, 행산을 포위공격하였고 군대를 파견하여 영원을 공격하였다. 오삼계는 4천명으로 탑산과 고교에 주둔하였고 싸우지 않고 후퇴하였으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공격하니 또한 패배시켰다. 1643년, 지르갈랑과 함께 영원을 공격하였고 청군은 성 북쪽에서 운제(雲梯)를 놓고 발포하였으며, 성벽이 무너져 함락되었다. 전둔위(前屯衛)에 이르러 성 서쪽을 공격하였고 4천 여명을 죽이거나 붙잡았으며, 명 총병 황색(黃色)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으며, 다시 함락시켰다.[2]
2. 4. 이자성의 난 진압과 권력 투쟁 (순치 연간)
순치 원년(1644년), 청군이 산해관을 넘어 이자성을 격파한 후, 아지거는 영친왕으로 봉해지고 안마(鞍馬, 안장과 말) 2부를 하사받았다. 정원대장군(靖遠大將軍)에 임명되어 섬서(陝西)로 진군, 이자성의 퇴로를 차단하고 여덟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네 곳의 성을 함락시키고 38개 성을 항복시켰다.[1] 당시 이자성은 도도에게 패해 서안(西安)을 버리고 상주(商州)로 도주한 상태였다. 순치제는 도도에게 회(淮)와 양(揚)으로 진군하게 하고, 아지거에게는 이자성을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1]
이자성은 남쪽으로 도주하여 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경(南京)을 공격하려 하였다. 아지거는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등주(鄧州), 승천(承天), 덕안(德安), 무창(武昌), 부지구(富池口), 상가구(桑家口), 구강(九江) 등지에서 이자성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자성은 도주 중 사망하였고, 아지거는 대순(大順) 군대의 효장(驍將) 유종민을 참하고 군사(軍師) 송헌책을 생포하였다.[1]
좌량옥의 아들 좌몽경은 구강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청군이 쇄도하자 총독(總督) 원계함 등을 붙잡고 마병과 보병 10만 명, 배 수만 척을 이끌고 청군 진영에 투항하였다. 이 전투로 하남성(河南省) 12군데, 호광성(湖廣省) 39군데, 강서(江西)와 강남(江南) 6군데를 함락시켰다.[1]
순치제는 사신을 보내 아지거를 위로하고, 조서를 내려 '왕과 행군 장사들이 험준한 지형을 넘어 만여 리를 행군하였으니, 그 공이 크다. 도적이 평정되었으니 회군하라. 항복한 병사들의 처리는 왕과 대신들이 논의하여 결정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조서가 도착하기 전에 아지거는 이미 북경으로 회군하고 있었다.[1]
도르곤은 아지거가 조서를 기다리지 않고 회군하였고, 이자성이 죽기 전에 먼저 죽었다고 보고하였다는 이유로 아지거를 질책하였다. 조정에서는 아지거가 출정 시에 선부순무(宣府巡撫) 이감석(李鑒釋)을 협박하여 적성도(赤城道) 주수려(朱壽錅)를 체포하고 심문하게 하였고, 오르도스(鄂爾多斯)와 투메트(土默特) 부락을 마음대로 취하였다는 이유로 군왕(郡王)으로 강등시켰으나, 이후 다시 원래 작위로 복귀하였다.[1]
순치 5년(1648년), 아지거는 천진(天津)과 조현(曹縣)의 토구(土寇)를 초토하였다. 같은 해 11월, 대동(大同)에서 강양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서대장군(平西大將軍)에 임명되어 바얀 등을 이끌고 진압하였다.[1]
순치 6년(1649년), 강양이 유천(劉遷)을 데리고 대주(代州)를 침공하자, 아지거는 볼로를 파견하여 구원하였고, 결국 포위가 풀렸다.[1]
도르곤이 대동에서 청군을 살펴보던 중, 아지거는 자신의 군공을 과시하며 도르곤에게 '숙왕(叔王)'으로 칭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도도와 지르갈랑의 공적을 폄하하고, 자신이 태조(누르하치)의 아들이자 황제(순치제)의 숙부이므로 '숙왕'으로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르곤은 이를 망령된 발언이라 질책하고, 아지거의 육부(六部) 사무 관여와 한관(漢官) 접견을 금지했다.[1]
2. 5. 몰락과 죽음
1651년 도르곤이 사망하자, 아지거는 아들 로오친에게 군사를 동원해 도르곤 휘하 부대를 자신에게 붙도록 하려 했다. 그러나 지르갈랑 등이 길을 막아 저지했다. 아지거가 북경에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그의 작위를 삭탈하고 유폐시켰다.
아지거가 방화를 시도했다는 보고를 받은 순치제는 옥중에 있던 아지거에게 사사(賜死)를 명했다. 아지거의 아들들도 서인으로 강등되거나 노비로 전락했다.
강희제 때 아지거의 일부 후손들이 사면되어 신분을 회복했고, 건륭제 때 아지거의 후손들은 아이신기오로종보에 다시 편입되었다.
3. 가족 관계
혼인 구분 성씨 비고 적처 시린기오로씨(西林覺羅氏) 후신(祜新)의 딸 계처 코르친보르지기트씨(科爾沁博爾濟吉特氏) 코르친부(科爾沁部) 빙투군왕(炳圖郡王) 홍고르(洪果爾)의 딸, 수강태비 자매. 1636년 도로이적복진(多羅嫡福晉)에 봉해짐.[3] 첩 이씨(李氏) 이사흥(李士興)의 딸 첩 유씨(愉氏) 유춘인(愉春仁)의 딸 미상 성명 미상 호오거(豪格, Hooge) 사망 후 도르곤이 호오거의 비(妃)를 아지거에게 주었으나, 이후 행적은 불명.[4]
아지거는 아들 12명을 두었으며, 작위가 있는 아들은 허두(和度), 풀러허(傅勒赫), 로오친(勞親) 3명이다.
아지거는 딸도 있었는데, 군주(郡主)는 어빌룬과 혼인하였고, 또 다른 딸은 나라 밍주의 처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4. 평가
아지거는 청나라 초기의 뛰어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용맹함과 뛰어난 전술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청나라의 건국과 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56차례 전투를 모두 이기고 10만여 명의 포로와 사람, 가축을 붙잡는 등 큰 공을 세웠다.[1] 홍타이지는 아지거의 공을 치하하며 친히 술을 따라주며 위로하기도 하였다.[1]
그러나 아지거는 과도한 권력욕과 독단적인 행동으로 도르곤과의 갈등을 초래했고, 결국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 일본인의 표류 기록인 『달단표류기(韃靼漂流記)』에서는 아지거를 "성격이 포악하고 생각을 하지 않는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그의 용맹함과 전투에서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고 있다.[4]
참조
[1]
서적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정초본•중초본 광해 13년 9월 10일 무신조
[2]
서적
만문로당(滿文老檔) 第十冊
[3]
서적
만문로당(滿文老檔) 第三十五冊
[4]
서적
세조장황제실록(世祖章皇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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