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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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는 미국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역사적인 장소로, 본래는 법원 건물과 주변 마을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남북 전쟁 당시에는 윌머 맥린의 집에서 로버트 E. 리 장군이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면서 남북 전쟁이 사실상 종식된 장소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현재는 국립 역사 공원으로 지정되어 보존 및 재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맥린 하우스는 당시 항복 협상이 이루어진 장소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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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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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위치 | 미국 버지니아주 애퍼매톡스군 |
좌표 | 37°22′21″N 78°47′00″W |
면적 | 5.4 km² (1,390 에이커) |
개장일 | 1940년 4월 10일 |
방문객 수 | 29,464명 (2017년) |
관리 주체 | 국립공원관리청 |
역사적 의의 | |
중요 사건 | 남북 전쟁 중 남부연합군의 로버트 E. 리 장군이 북군의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한 장소 |
국가사적지 지정 | 1966년 10월 15일 |
2. 명칭
"코트 하우스"(Courthouse|코트 하우스영어)는 원래 순회 재판이 열리는 법원 건물을 의미하며, 군청 소재지를 나타내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다.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는 애퍼매턱스 군의 군청이 위치했던 곳에서 유래했다.
이 마을은 원래 클로버 힐(Clover Hill)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역마차의 숙소로 발전했다. 이 이름은 1819년경에 건설된 "클로버 힐 태번(the Clover Hill Tavern)"(마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가옥)에서 유래되었으며, 여행객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말을 교환하는 이 태번은 마을 활동의 중심이었다. 1845년 애퍼매턱스 군이 설립되자, 클로버 힐 마을에 그 군청(코트 하우스)이 설치되었다. 당시 토지 소유주였던 새뮤얼 D. 맥디어먼 대령은 2에이커를 행정용 건물 부지로 기증했다. "클로버 힐 태번" 맞은편에 코트 하우스 건물이 세워졌고, 그 뒤편에는 감옥이 건설되었다.
3. 역사
1854년, 애퍼매턱스 군에 사우스사이드 철도(오늘날의 노퍽 서던 철도의 일부)가 부설되었다. 그러나 철도는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 마을 근처를 지나지 않고,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애퍼매턱스 역이 건설되었다. 상업 거래의 중심은 역 주변으로 옮겨갔고, 역 주변에 새로운 마을(애퍼매턱스 타운)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 마을의 인구는 150명을 넘은 적이 없었고, 반면 애퍼매턱스 타운은 수천 명 규모로 성장했다(2000년 통계에서 1,761명). 1865년 4월, 애퍼매턱스 역과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 마을은 남북 전쟁의 최종 국면의 무대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 마을에 있던 코트 하우스는 1892년에 소실된 후 재건되지 않았고, 애퍼매턱스 타운에 새로 건설되었다(이것이 현재의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이다). 군청 소재지도 1894년에 공식적으로 애퍼매턱스 타운으로 이전되었다.
1935년, 클로버 힐 태번 등 남아있는 몇몇 건물들이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격상과 보호 범위 확대(1940년에 국립 기념물, 1954년에 국립 역사 공원 national historical park), 건물의 재건 등 정비가 이루어졌다.
4. 윌머 맥린 하우스
1865년 4월 9일, 윌머 매클린의 집에서 남부 연합의 로버트 E. 리 장군이 북부 연합의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여 사실상 남북 전쟁이 종식되었다. 제1차 불런 전투 (1861년 7월 21일)는 버지니아주 북부 매너서스에 있는 매클린의 농장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를 두고 "남북 전쟁은 1861년 매클린의 뒷마당에서 시작되었고 1865년 그의 거실에서 끝났다"고도 한다(두 사건 모두 공식적인 시작과 끝은 아니다).
매클린은 버지니아 민병대 소령으로 퇴역했지만, 남북 전쟁 발발 당시에는 나이가 많아 징병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전란을 피해 매너서스에서 애포매턱스 코트 하우스로 이주했다. 전후 매클린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주했다고 말하는 것을 선호했지만, 실제로는 전시 중에 북부 연합의 해상 봉쇄를 피해 설탕을 수출하여 재산을 축적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4. 1. 리 장군의 항복
1865년 4월 9일, 윌머 매클린의 집에서 남부 연합의 로버트 E. 리 장군이 북부 연합의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여 사실상 남북 전쟁이 종식되었다. 제1차 불런 전투 (1861년 7월 21일)는 버지니아주 북부 매너서스에 있는 매클린의 농장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를 두고 "남북 전쟁은 1861년 매클린의 뒷마당에서 시작되었고 1865년 그의 거실에서 끝났다"고도 한다(두 사건 모두 공식적인 시작과 끝은 아니다).
매클린은 버지니아 민병대 소령으로 퇴역했지만, 남북 전쟁 발발 당시에는 나이가 많아 징병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전란을 피해 매너서스에서 애포매턱스 코트 하우스로 이주했다.
매클린의 집에서는 4월 10일 항복 조건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고, 이후 며칠간 북부 연합의 존 깁슨 소장의 본부로 사용되었다. 항복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장교는 개인적으로 미합중국 정부에 대해 무기를 겨누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 또한 중대 또는 연대 지휘관은 부하 병사에 대해 이와 같은 약속에 서명할 것."... "장교의 휴대 무기도 그 개인적인 말이나 수하물도" 인도할 것. 남부 연합의 많은 병사들은 말이나 노새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 소유로 인정된 말과 노새는 그대로 가질 수 있었다.
4. 2. 남북 전쟁 이후의 맥린 하우스
맥린은 설탕 밀무역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지만, 그 현금은 남부 연합 통화였기 때문에 남부 연합의 붕괴와 함께 가치가 사라져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파산 직전이었다. 맥린은 1867년 가을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를 떠나 부인이 소유한 프린스윌리엄 군의 농장으로 돌아갔다. 채무를 제대로 갚지 못하자, 리치먼드의 채권 은행이 법원에 저당을 잡아 '항복 저택'은 1869년 11월 29일에 경매에 부쳐졌다. 이 집은 존 L. 파스코가 낙찰받아, 이후 리치몬드 주민이었던 래글랜드 가족에게 임대하였다. 1872년 나다니엘 H. 래글랜드가 그 자산을 1250USD에 구입했다.
1891년 1월 1일 래글랜드의 미망인이 저택을 뉴욕주 나이아가라폭포의 마이런 던랩에게 10000USD에 매각했다. 던랩과 동료 투자자들은 이 집의 명성을 이용해 돈을 벌 여러 계획을 세웠다. 그 중 하나는 집을 분해하여 시카고까지 운반해 1893년 만국 박람회에 전시하는 것이었다. 높이와 부재 명세서를 포함한 측정 그림이 만들어지고 집을 분해하여 운송을 위한 포장까지 했지만, 1893년 공황이 발생했다. 자금 부족과 법적인 문제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집은 부품이 쌓인 채로 수집가들의 먹이가 되어 50년간 방치되었다.
4. 3. 맥린 하우스의 재건
1940년 4월 10일, 미국 의회는 약 3.9km2 지역을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 국립 역사 유적지’로 지정했다. 1941년 2월 덤불이나 서양 인동 덩굴로 덮여 있던 이곳에서 발굴이 시작되었다. 오래된 데이터를 모으고 건축 작업 계획을 만들어 조심스럽게 재건을 시작했으나,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일시 중단되었다.
세계 대전 후 이 계획은 높은 우선 순위로 재개되었다. 1947년 11월 25일, 맥린 하우스의 재건에 대한 입찰이 있었다. 재건을 위해 남아 있던 5,500개의 벽돌을 사용하여 이 새 집 벽 곳곳에 벽돌을 사용하였다. 1949년 4월 9일, 미국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역사적인 회담이 열린 날로부터 정확하게 84년 후에, 국립공원청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1950년 4월 16일에 열린 준공식에는 로버트 E. 리 4세와 율리시스 S. 그랜트 3세가 테이프를 잘랐다. 약 2만명의 군중 앞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가 더글러스 사우스올 프리먼이 연설을 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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