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야스나야 폴랴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야스나야 폴랴나는 16세기 말부터 존재해 온 러시아의 영지로, 작가 레프 톨스토이가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곳이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8세에 상속받아 낭비적인 생활을 하다 27세에 돌아와 농민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했으며, 만년에는 사유 재산을 포기하고 농민과 같은 삶을 살고자 했다. 톨스토이 사후, 야스나야 폴랴나는 국립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보존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에 점령되기도 했지만, 이후 복원되어 현재는 톨스토이의 유품과 저택, 묘지 등을 포함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톨스토이의 소설, 비디오 게임, 영화 등의 배경으로도 활용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레프 톨스토이 - 톨스토이 운동
    톨스토이 운동은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적 가치관을 중심으로 금욕주의, 비폭력주의 등을 실천하며 제도적인 교회와 정부를 비판하는 사회 운동이다.
  • 톨스토이가 - 알렉세이 콘스탄티노비치 톨스토이
    알렉세이 콘스탄티노비치 톨스토이는 러시아 낭만주의 후기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로, 시, 소설,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문학에 큰 영향을 남겼다.
야스나야 폴랴나

2. 역사

야스나야 폴랴나는 16세기 말부터 이러한 형태로 존속해 왔다. 레프 톨스토이의 외할아버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발콘스키는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고위 관직을 지냈으며, 1821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나폴레옹 전쟁(1803년–1815년) 참전 용사였던 톨스토이의 아버지는 발콘스키의 딸 마리야와 결혼하여 이곳을 신혼집으로 삼았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었지만,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영지에는 두 개의 검문소가 있는 정문이 있고, 자작나무 가로수길을 지나면 본채가 있었지만,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의 아버지는 이 영지에 세 개의 늪지가 있는 영국식 정원을 만들었다.

레프 톨스토이는 18세에 이 영지를 상속받았다. 당시 영지에는 1800ha의 토지와 세 개의 마을, 300명의 농노가 있었다. 톨스토이는 낭비적인 생활로 21세가 될 때까지 상속 재산의 대부분을 탕진했다. 27세에 코카서스 전쟁에서 돌아온 후, 그는 농민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학교 운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본채도 팔았다. 그는 교회에서 파문되었기 때문에 야스나야 폴랴나의 소박한 묘지에 묻혔다.

2. 1. 초기 역사

야스나야 폴랴나는 16세기 말부터 이러한 형태로 존속해 왔다. 원래 카르체프 가문이 소유하고 있었으며, 18세기에는 육군 소장 세르게이 볼콘스키 공작이 매입했다. 작가의 할아버지인 총사령관 니콜라이 볼콘스키 공작[7]은 영지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현재 '볼콘스키 가의 집'으로 알려진 주요 단층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마구간, 마차고, 목욕탕, 정자, 갤러리로 연결된 두 개의 오렌지 농장을 건설[1]했고, 프랑스식 정원과 영국식 정원을 조성했다.[9]

이 집은 니콜라이 볼콘스키에서 그의 외동딸이자 레프 톨스토이의 어머니인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볼콘스카야 공주에게 넘어갔다.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 일리치 톨스토이 백작은 1812년 나폴레옹 전쟁 참전 용사였으며, 집에 2층을 추가하여 대가족을 위한 숙소를 제공했다.[10]

2. 2. 레프 톨스토이와 야스나야 폴랴나

자작나무 가로수가 야스나야 폴랴나의 문에서 톨스토이의 집으로 이어진다.


레프 톨스토이는 1828년 9월 9일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2] 그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친척들의 손에서 자랐다. 1854년, 톨스토이는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집의 중앙 부분을 이웃에게 팔았다.[11] 1862년 결혼 후 아내를 야스나야 폴랴나로 데려왔다.

톨스토이가 야스나야 폴랴나에 살 당시, 이 영지는 4000acre에 달하는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했으며, 위쪽에는 울창한 원시림이 있었고, 여러 층에 걸쳐 네 개의 연못이 있었다. 영지에는 약 350명의 농민들이 살면서 일하는 네 개의 농가 단지가 있었다.[4]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전쟁과 평화』(1862-1869)와 『안나 카레니나』(1873-1877)를 집필했다. 그는 매우 작은 글씨로 손으로 자신의 서재에서 소설을 썼으며, 그의 아내는 밤에 깨끗한 사본을 만들었고, 톨스토이는 다음날 다시 썼다. 각 장은 다섯, 여섯 번의 초고를 거쳤고, 아내는 『전쟁과 평화』를 완성하기 전에 일곱 번이나 다시 베꼈다. 모든 초고는 그의 아내에 의해 보존되었으며 현재 모스크바의 루мян체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12]

톨스토이의 13명의 자녀는 모두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으며, 그중 4명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살고 일할 때, 오전 7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 공원을 산책했다. 수확기에는 종종 농민들과 함께 밭에서 일했는데, 이는 육체적인 운동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농민 생활에 대한 그의 글을 더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농민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다.[13]

톨스토이는 안톤 체호프, 이반 투르게네프,[14] 막심 고리키, 화가 발렌틴 세로프일리야 레핀 등 당대 러시아 문화 예술계 인사들과 교류했다.[15]

톨스토이의 외할아버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발콘스키는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고위 관직을 지냈으며, 1821년 사망할 때까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여생을 보냈다. 톨스토이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전쟁(1803년–1815년)에서 돌아온 후 발콘스키의 딸 마리야와 결혼하여 이곳을 신혼집으로 삼았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었지만,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톨스토이는 18세에 이 영지를 상속받았다. 당시 영지에는 1800ha의 토지와 세 개의 마을, 그리고 300명의 농노가 있었다. 톨스토이는 낭비적인 생활로 21세가 될 때까지 상속 재산의 대부분을 탕진했다. 27세에 코카서스 전쟁에서 돌아온 후, 그는 농민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다. 학교 운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본채도 팔았다. 그는 교회에서 파문되었기 때문에 야스나야 폴랴나의 소박한 묘지에 묻혔다.

2. 3. 톨스토이 사후

1911년, 톨스토이의 미망인 소피아 알렉산드로브나는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야스나야 폴랴나를 국립 박물관으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차르는 이를 거절했지만, 가족에게 연금을 지급하여 저택과 영지가 원래 모습대로 보존될 수 있도록 했다.[25]

1919년, 소련 정부는 공식적으로 야스나야 폴랴나를 국가의 보호 아래 두었고, 1921년 6월 야스나야 폴랴나는 국유화되어 국립 박물관이 되었으며, 첫해에 3,147명의 방문객을 맞이했다.[25]

1941년 10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이 모스크바에 접근하자 박물관 소장품이 담긴 110개의 상자가 모스크바를 거쳐 톰스크로 대피했다. 영지는 독일군에 의해 45일 동안 점령당했는데, 독일군은 레오 톨스토이의 집을 병원으로 사용했고, 병원에서 사망한 독일 군인들은 톨스토이의 묘지 주변에 매장되었다. 점령 기간 중 발생한 화재로 인해 집의 윗층이 손상되었다. 전쟁 이후 영지는 백작 톨스토이가 살던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소련의 선전은 1942년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 ''모스크바 반격전''에서 독일군이 저택의 문화적 가치를 무시한 점을 활용했다.[25]

3. 주요 시설

레프 톨스토이가 살았던 당시 야스나야 폴랴나 영지는 약 4000acre 크기로,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영지 위쪽에는 '구질서의 숲'이라 불리는 울창한 원시림이 있었고, 여러 층에 걸쳐 네 개의 연못이 있었다. 영지에는 약 350명의 농민들이 살면서 일하는 네 개의 농가 단지가 있었다.[4]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1862년에서 1869년 사이에 『전쟁과 평화』를, 1873년에서 1877년 사이에 『안나 카레니나』를 썼다. 그는 매우 작은 글씨로 손으로 소설을 썼으며, 많은 수정과 메모를 덧붙였다. 그의 아내는 초고를 밤에 깨끗하게 베껴 썼고, 톨스토이는 다음 날 다시 수정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각 장은 다섯, 여섯 번의 초고를 거쳤으며, 아내는 『전쟁과 평화』를 완성하기 전에 일곱 번이나 다시 베꼈다. 모든 초고는 그의 아내가 보존하여 현재 모스크바의 루мян체프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12]

톨스토이의 13명의 자녀는 모두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으며, 그중 4명은 어린 시절에 사망했다. 톨스토이 자신이 태어난 가죽 소파는 현재 그의 서재 책상 옆에 보관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살면서 글을 쓸 때, 오전 7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공원을 산책한 후 글쓰기를 시작했다. 수확기에는 농민들과 함께 밭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이는 육체적인 운동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농민 생활에 대한 글을 더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또한 농민 아이들을 위해 세운 학교를 방문하여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13]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안톤 체호프, 투르게네프,[14] 막심 고리키 등 당대의 주요 러시아 문화 및 예술 인물들을 접대했다. 화가 발렌틴 세로프일리야 레핀도 이곳을 방문했다.[15]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 저택이 독일군에 점령되어 훼손되었다.[25] 그러나 가장 귀중한 유품 등은 그 이전에 소비에트 정부가 다른 곳으로 옮겨 보관했다. 종전 후 저택은 톨스토이가 생전에 살았던 모습과 똑같이 복원되었으며, 야스나야 폴랴나는 현재 러시아 국내에서 인기 있는 관광 명소이다.

3. 1. 쿠즈민스키 별관

쿠즈민스키 별관은 레프 톨스토이의 집과 마찬가지로 원래 톨스토이의 아버지가 지었던 대저택의 일부였다가 나중에 철거되었다. 1859년 톨스토이는 이곳을 영지 내 농민 자녀들을 위한 학교로 만들었다.[20] 1862년 이후에는 톨스토이 아내의 여동생인 타티야나 안드레예브나 쿠즈민스키와 그녀의 가족이 거처했다. 1897년까지는 낡은 상태가 되었다.[20]

3. 2. 볼콘스키 하우스

볼콘스키 하우스(모스크바의 볼콘스키 하우스와 혼동하지 말 것)는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한때 카펫 공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톨스토이 시대에는 이 저택의 하인들이 거주했다.[21]

3. 3. 레프 톨스토이의 묘

톨스토이는 죽기 오래전에 자신이 묻히고 싶어하는 장소를 발표했다. 그곳은 "녹색 지팡이의 장소"라고 불리는 작은 숲속 빈터로, 낡은 숲의 일부인 구질서의 숲() 옆의 긴 협곡 옆이었다. 구질서의 숲은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나무를 베는 것이 금지되었고, 많은 나무들이 100년이 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녹색 지팡이의 장소'라는 이름은 톨스토이의 형인 니콜라이가 지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마법 지팡이를 찾은 사람은 결코 죽거나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생과 함께 종종 빈터의 어둠 속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22]

야스나야 폴랴나의 숲에서 "녹색 지팡이의 장소"에 있는 톨스토이의 묘.

3. 4. 기타

박물관에는 톨스토이의 장서 22,000권을 소장한 도서실을 비롯하여 다양한 유품과 가구, 비품 등이 보존되어 있다.[15]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했던 서재와 집필 당시 사용했던 가구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15]

4. 교통

툴라의 모스크바 역에서 5번 트롤리 버스를 타고 "페딘스티투트(교육대학)" 정류장까지 이동한다. 그 후 114번, 117번, 280번 버스를 타고 "야스나야 폴랴나" 정류장에서 하차한다.[26] 과거 모스크바 쿠르스키 역에서 야스나야 폴랴나 역을 경유하는 급행 열차 "야스나야 폴랴나호"가 주말에만 운행되었으나,[27] 현재는 운행하지 않는다. 야스나야 폴랴나 역에서 셔틀 버스로 약 10분 거리이다.

5. 문화적 영향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볼콘스키 공작의 영지 발트산은 야스나야 폴랴나를 모델로 하였다.[23] 제이 파리니의 소설 마지막 역과 이를 원작으로 한 2009년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야스나야 폴랴나는 비디오 게임 플레이어언노운스 배틀그라운드의 에란겔 맵에 등장하는 주요 도시 중 하나이다.

스티븐 콘테의 소설 ''톨스토이 저택''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기에 병원으로 사용된 야스나야 폴랴나를 배경으로 한다.[24]

참조

[1] 서적 Bartlett
[2] 백과사전 Tolstoy, Leo
[3] 서적 Bartlett
[4] 서적 Massie
[5] 웹사이트 The Tolstoys family: Modern-day descendants of the great author https://www.rbth.com[...] 2023-07-30
[6] 뉴스 Living with Leo: Tolstoy's impressive dynasty https://www.independ[...] The Independent 2010-11-20
[7] 서적 Bartlett
[8] 서적 Bartlett
[9] 웹사이트 Official site of Yasnaya Polyana Museum
[10] 서적 Bartlett
[11] 서적 Bartlett
[12] 서적 Massie
[13] 구전자료 Narrative of tour guides at Yasnaya Polyana 2010-06-01
[14] 서적 Bartlett
[15] 서적 Bartlett
[16] 웹사이트 Official website of Yasnaya Polyana
[17] 구전자료 Narrative of excursion guides at Yasnaya Polyana
[18] 서적 The Case Against the Nazi War Criminals: Opening Statement for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A. Knopf 1946
[19] 서적 One World, Big Screen: Hollywood, the Allies, and World War II https://books.google[...] UNC Press Books 2012-11-01
[20] 서적 Bartlett
[21] 서적 Bartlett
[22] 웹사이트 Official website of Yasnaya Polyana
[23] 서적 Bartlett
[24] 웹사이트 Steven Conte, The Tolstoy Estate https://newtownrevie[...] 2021-06-29
[25] 서적 The Case Against the Nazi War Criminals: Opening Statement for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A. Knopf 1946
[26] 뉴스 文学的なヤースナヤ・ポリャーナの週末 https://jp.rbth.com/[...] ロシアNOW
[27] 간행물 地球の歩き方(A31)ロシア ウクライナ ベラルーシ コーカサスの国々 2008年〜2009年版 ダイヤモンド・ビッグ社/ダイヤモンド社 2008-01-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