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응룡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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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응룡의 난은 명나라 시기, 사천과 귀주를 잇는 요충지인 보주 지역의 토사(土司)였던 양응룡이 일으킨 반란이다. 양응룡은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 했고, 이에 반발한 오사칠성(五司七姓) 세력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명나라는 양응룡을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1597년부터 양응룡은 주변 지역을 침략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599년 명나라는 이화룡을 총독으로 임명하여 진압 작전을 펼쳤고, 1600년 양응룡이 자결하면서 난은 종식되었다. 이 반란으로 명나라는 막대한 국력을 소모했으며, 보주 토사 제도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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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응룡의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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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분쟁 | 보저우 반란 |
일부 | 먀오족 반란 |
날짜 | 1589년 – 1600년 |
장소 | 보저우 (쭌이시, 구이저우성) |
결과 | 명나라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보저우 토사 |
교전 세력 2 | 명나라 |
교전 세력 3 | 수이시 토사 스주 토사 |
지휘관 | |
지휘관 1 | 양응룡 양차오둥 양웨이둥 양자오룽 마첸시 양주 |
지휘관 2 | 리화룽 싱제 궈쯔장 류팅 천린 |
지휘관 3 | 안장천 룽청 (안야오천) 마첸성 친량위 |
병력 규모 | |
병력 1 | 140,000명 |
병력 2 | 200,000–240,0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사망 22,687명, 포로 6,663명 |
사상자 2 | 알려지지 않음 |
기타 |
2. 배경
보주(播州)는 사천(四川)과 귀주(貴州)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험준한 산악 지대와 비옥한 농토를 가진 곳이었다. 주민 대부분은 중국 문화에 익숙한 묘족(熟苗)이었으며, 한족 풍습에 따라 성명을 사용하고 문화를 이해하며 마을을 이루어 농업을 했다. 또한 산간 지역에는 중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원시적인 수렵과 농업을 하는 묘족(生苗)도 있었다.[1]
명나라는 이 지역을 간접 통치하기 위해 토착 세력의 부족 지도자와 한족계 지방 세력을 세습적인 토사(土司)로 임명했다. 양씨(楊氏)는 당(唐)나라 때부터 송(宋), 원(元)나라,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보주(播州)를 근거지로 삼아, 한족과 묘족을 통치하는 유력한 토사 가문이었다.[1]
16세기 말, 양응룡(楊應龍)은 1572년(융경(隆慶) 6년)에 선위사(宣慰使) 직위를 계승하여 명나라에 봉사하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 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1]
2. 1. 토사 제도
토사(土司) 제도는 명나라가 소수민족 지역을 간접 통치하기 위해 시행한 제도이다. 명나라는 소수민족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토착 세력의 부족 지도자와 한족계 지방 세력을 세습적으로 토사(土司)/토관(土官)으로 임명하여 간접 통치를 실시했다.[1] 토사는 중앙 정부로부터 명목상의 조공, 정액의 납세, 그리고 상시적인 파병을 의무로 부과받았다.[1] 명나라 중앙 군제가 쇠퇴하면서 지방 토착 토사의 전력 비중이 커졌다.[1]양응룡(楊應龍)이 지배하던 播州(보주) 선위사는 황평(黄平), 초당(草塘)의 2안부사(安撫司)와 진주(眞州), 播州(보주), 백니(白泥), 여경(余慶), 중안(重安), 용산(容山)의 6장관사(長官司)를 관할했고, 양응룡의 현지 권한은 상당히 컸다.[1]
2. 2. 양응룡의 세력 확장
양응룡은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오사칠성(五司七姓)이라 불리는 다른 지방 세력들과 갈등을 빚었다. 오사칠성은 황평(黄平), 초당(草塘), 백니(白泥), 여경(余慶), 중안(重安)의 5사와 田, 張, 袁, 盧, 譚, 羅, 吳의 7성을 말한다.[1] 이들은 양응룡이 반역했다고 조정에 상소했다.[1]1590년(만력(萬曆) 18년), 귀주(貴州) 순무(巡撫) 도어사(都御史) 엽몽웅(葉夢熊)은 양응룡을 조사하려 했으나, 사천(四川) 순안(巡按) 이화룡(李化龍)은 播州(보주) 토병(土兵)의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1] 1591년(만력 19년), 엽몽웅은 播州(보주) 오사를 중경(重慶)으로 이관하려 했으나, 이화룡이 자신의 사임을 대가로 이를 막았다.[1]
중앙 정부의 갈등 속에서, 양응룡은 첩인 田氏(전씨)의 사주를 받아 정처인 張氏(장씨)와 그의 어머니를 살해했다.[1] 이 사건으로 유족들이 양응룡을 반란 혐의로 고발했다.[1]
1592년(만력 20년), 양응룡은 중경(重慶)으로 소환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은 2만 냥을 내고 임진왜란에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참전하겠다고 하여 풀려났다.[1] 그러나 명나라에서 참전이 불필요하다는 통보를 받고 播州(보주)로 돌아왔다.[1] 귀국 후에도 횡포가 계속되자 다시 고발을 당했지만, 조선에서의 상황 때문에 명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져 조사를 거부했다.[1]
1594년(만력 22년), 명나라는 회유 정책을 바꾸어 남경(南京) 시랑(侍郎) 형개(邢玠)를 통해 진압하려 했다.[1] 형개는 양응룡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양응룡의 실각을 노리는 오사칠성이 중간에 방해했다.[1] 결국 양응룡은 황원(黄元) 등 12명을 처형하고, 4만 냥을 바치고, 자재를 제출하고, 차남 양가동(楊可棟)을 인질로 보내고, 선위사를 적장자인 양조동(楊朝棟)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다시 사형을 면했다.[1]
1596년(만력 24년), 인질이었던 양가동(楊可棟)이 죽자 양응룡은 태도를 강경하게 바꾸고 속죄금 지불을 거부했다.[1] 또한 적대 세력을 약탈하고, 원주민 묘족을 우대하며 독립적인 성향을 강화했다.[1] 같은 해, 양응룡은 여경(余慶), 초당(草塘)에서 약탈을 하고, 흥륭(興隆), 편진(偏鎮), 도운(都勻) 등의 위소(衛所)를 공격했으며, 오사 중 황평(黄平), 중안(重安)의 일족을 죽였다.[1]
1597년(만력 25년), 양응룡은 강진(江津), 남천(南川), 합강(合江)을 침략하여 칠성 중 원자승(袁子升)을 처형했다.[1] 또한 귀주(貴州)의 홍두(洪頭), 고평(高坪), 신촌(新村) 등을 침략하고, 호광(湖廣)의 사십팔둔(四十八屯)을 점령하여 송세신(宋世臣), 나승은(羅承恩) 등을 처형했다.[1] 귀주(貴州) 순안(巡按) 응조경(應朝卿)은 양응룡이 오사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일 뿐 명나라에 배반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1]
3. 전개
楊應龍之亂|양응룡의 난중국어은 1589년부터 1600년까지 명나라 만력제 시기에 사천성 준의시 일대의 토사(土司)였던 양응룡(楊應龍)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 반란은 초기에 보주(播州) 지역 내 7개 토사 족장들 간의 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규모가 커져 사천과 호광(湖廣) 지역까지 번지며 약탈과 파괴를 일으켰다.[1]
1593년, 만력제는 양응룡에게 임진왜란 참전을 조건으로 사면을 제안했고, 양응룡은 이를 수용하여 조선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중도에 귀환했다. 이후 사천(四川) 순무 왕직광(王繼光)이 양응룡을 법정에 세우려 했으나, 양응룡은 이에 불응했고, 1594년 명나라 지방군의 진압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1]
1596년 아들 양가동(楊可棟)이 인질로 잡혀 있다가 사망하자, 양응룡은 명나라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속죄금 지불을 거부하고, 원주민 묘족(苗族)을 우대하며 독립적인 세력을 강화했다.[1] 이후 양응룡은 여경(余慶), 초당(草塘)을 약탈하고, 흥륭(興隆), 편진(偏鎮), 도운(都勻) 등의 위소(衛所)를 공격했으며, 오사 중 황평(黄平), 중안(重安)의 일족을 살해했다.[1]
1597년에는 강진(江津), 남천(南川), 합강(合江)을 침략하여 칠성 중 한 명인 원자승(袁子升)을 처형하고, 귀주(貴州)의 홍두(洪頭), 고평(高坪), 신촌(新村) 등을 침략, 호광(湖廣)의 사십팔둔(四十八屯)을 점령하여 숙적 송세신(宋世臣), 나승은(羅承恩) 등을 찾아내 처형했다.[1]
1599년, 조선에서의 상황이 해결되자 명나라는 이화룡(李化龍)을 호광(湖廣) 천귀(川貴) 군무 총독 겸 사천(四川) 순무로 임명하고, 국자장(郭子章)과 함께 보주 진압에 나섰다. 이화룡은 양응룡의 군세가 14만 5천 명에 달하며, 이에 대항하기 위해 증세를 실시했다.[1]
1600년, 양응룡이 용천(龍泉)을 점령하자 이화룡은 중경(重慶)에 주둔하며 8로(路)에서 각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병력은 관병(官兵) 3할, 토병(土兵) 7할로 구성되었다.[1] 명나라 군대에는 임진왜란에서 활약했던 유정(劉綎), 진린(陳璘)이 포함되었으며, 항복한 일본군도 철포 부대로 편입되어 조총 등의 화기를 사용, 양응룡군의 궁시(弓矢)를 압도했다.[2]
3. 1. 초기 갈등 (1589년 ~ 1594년)
1589년, 보주(播州) 지역 내 7개 토사(土司) 족장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양응룡(楊應龍)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으로 확대되어 사천(四川)과 호광(湖廣) 지역까지 번지며 약탈과 파괴를 일으켰다.[1]1593년, 만력제(萬曆帝)는 양응룡에게 임진왜란 참전을 조건으로 사면을 제안했다. 양응룡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으로 향했으나,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중도에 귀환했다. 양응룡이 귀주(貴州)로 돌아오자, 사천(四川) 순무(巡撫) 왕직광(王繼光)은 그를 법정에 세울 것을 요구했다. 양응룡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1594년 명나라 지방군이 진압을 시도했으나 전투에서 패배했다.
3. 2. 반란의 격화 (1596년 ~ 1599년)
1596년(만력(萬曆) 24년) 7월, 인질로 잡혀 있던 아들 양가동(楊可棟)이 죽자 양응룡은 명나라에 대한 태도를 강경하게 바꾸었다. 그는 속죄금 지불을 거부하고, 적대 세력을 약탈했으며, 원주민 묘족(苗族)을 우대하면서 독립적인 세력을 강화했다.[1] 이 해, 양응룡은 여경(余慶), 초당(草塘)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흥륭(興隆), 편진(偏鎮), 도운(都勻) 등의 위소(衛所)를 공격했으며, 오사 중 황평(黄平), 중안(重安)의 일족을 살해했다.[1]1597년(만력 25년), 양응룡은 더 나아가 강진(江津), 남천(南川), 합강(合江)을 침략하여 칠성 중 한 명인 원자승(袁子升)을 처형했다. 또한 귀주(貴州)의 홍두(洪頭), 고평(高坪), 신촌(新村) 등을 침략하고, 호광(湖廣)의 사십팔둔(四十八屯)을 점령하여 숙적 송세신(宋世臣), 나승은(羅承恩) 등을 찾아내 처형했다.[1] 귀주 순안(巡按) 응조경(應朝卿)은 이러한 양응룡의 행동이 명나라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는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1]
1599년(만력 27년), 조선에서의 상황이 해결 국면에 접어들자, 명나라는 요동(遼東) 순무로 전출되었던 이화룡(李化龍)을 호광(湖廣) 천귀(川貴) 군무 총독 겸 사천(四川) 순무로 임명하고, 국자장(郭子章)과 함께 播州(보주) 진압에 나서게 했다. 이화룡은 양응룡의 군세가 14만 5천 명에 달하며,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사천, 귀주, 호광의 재원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그 해 전비를 위한 증세를 실시했다.[1]
3. 3. 명나라의 진압 작전 (1599년 ~ 1600년)
1599년(만력(萬曆) 27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명나라는 이화룡(李化龍)을 호광(湖廣)·천귀(川貴) 군무 총독 겸 사천(四川) 순무로 임명하고, 국자장(郭子章)과 함께 播州(보주) 진압에 나섰다. 이화룡은 양응룡의 군세가 14만에서 15만 명에 달하며,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사천, 귀주, 호광의 재원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그해 전비를 위한 증세를 실시했다.[1]1600년(만력 28년), 양응룡이 용천(龍泉)을 점령하자 이화룡은 중경(重慶)에 주둔하며 8로(路)에서 각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병력은 관병(官兵) 3할, 토병(土兵) 7할로 구성되었다.[1]
3. 3. 1. 조선 참전 병력의 활용
임진왜란에서 활약했던 유정(劉綎), 진린(陳璘)이 명나라 군대에 포함되었다.[2] 항복한 일본군(降倭)도 철포 부대로 편입되어 조총 등의 화기를 사용, 양응룡군의 궁시(弓矢)를 압도했다.[2]4. 결과
1600년, 양응룡은 해룡(海龍)에서 포위되어 고성전을 벌이다 6월에 애첩 2명과 함께 자결하여 반란은 종식되었다.[1] 그의 가족은 북경으로 이송되어 처형되었다.[1] 보주 토사는 폐지되었고, 그 지역은 준의와 평월 부로 개편되었다.[1] 명나라는 진압 작전에 총 1500억위안을 소모했다.[1]
5. 의의 및 영향
양응룡의 난은 명나라의 국력 소모와 토사 제도의 한계를 드러냈으며, 조선과 일본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599년 명나라는 양응룡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전비를 증세했고[1], 2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하여 의 작전 비용을 소모했다. 이 난은 임진왜란과 거의 동시에 발생하여 명나라의 재정과 군사력에 큰 부담을 주었다.
명나라는 토사 제도를 통해 토착 세력과 한족계 지방 세력을 간접 통치했으나,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 토사들의 권력이 커졌다. 양응룡의 난은 이러한 토사 제도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1]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들과 항복한 일본군(降倭)이 양응룡의 난 진압에 참여하기도 했다. 1592년 양응룡은 임진왜란에 참전할 것을 요청하여 사형을 면제받았으나, 명나라에서 참전이 불필요하다는 통보를 받고 보주(播州)로 돌아갔다.[1] 1600년 명나라가 양응룡을 공격할 때 유정(劉綎)과 진린(陳璘)이 동원되었고, 이들의 부대에는 조선에서 항복한 일본군이 철포병력으로 편입되어 조총(佛郎機砲) 등의 화기를 사용했다.[2]
5. 1. 명나라 국력 소모
1599년(만력(萬曆) 27년), 임진왜란이 해결 국면으로 접어들자 명나라는 요동(遼東)순무(巡撫)였던 이화룡(李化龍)을 호광(湖廣) 천귀(川貴) 군무 총독 겸 사천(四川) 순무로 임명하고, 국자장(郭子章)과 함께 播州(보주) 진압에 나서게 했다. 이화룡은 양응룡의 군세가 14만 5천 명에 달하며, 대항하기 위해서는 사천(四川), 귀주(貴州), 호광(湖廣)의 재원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그 해 전비를 위한 증세를 실시했다.[1]1598년 양응룡의 반군은 14만 명으로 불어났고, 명나라는 여러 지역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20만 명의 대군을 파견해야 했다. 명나라의 진압 작전 비용은 총 이었다.
이처럼 보주 반란은 임진왜란과 거의 동시에 발생하여 명나라의 재정과 군사력에 큰 부담을 주었다.
5. 2. 토사 제도의 한계
명나라는 토착 세력과 한족계 지방 세력을 토사(土司)와 토관(土官)으로 임명하여 간접 통치하는 토사 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 토사들의 권력이 커지는 결과를 낳았다. 양응룡(楊應龍)의 난은 이러한 토사 제도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1]5. 3. 조선과 일본의 간접적 영향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들과 항복한 일본군(降倭)이 양응룡의 난 진압에 참여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592년 양응룡은 임진왜란에 5,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참전할 것을 명나라에 요청하여 사형을 면제받았으나, 명나라에서 참전이 불필요하다는 통보를 받고 보주(播州)로 귀국하였다.[1]1600년 명나라가 8로(路)에서 군사를 이끌고 양응룡을 공격할 때, 이들 군세에는 조선에서 싸운 유정(劉綎)과 진린(陳璘)이 동원되었고, 그들의 부대에는 조선에서 항복한 일본군(降倭)이 철포병력으로 편입되어 조총(佛郎機砲) 등의 화기와 함께 양응룡 군대의 궁시(弓矢)를 압도했다.[2]
참조
[1]
논문
明末播州における楊応竜の乱について
1971
[2]
논문
16世紀末、日本式鉄砲の明朝への伝播--万暦朝鮮の役から播州楊応龍の乱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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