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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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주십일기》는 청나라 순치 2년(1645년) 양주성 전투와 그 이후 청군에 의한 학살을 기록한 책이다. 당시 양주성에 거주하던 왕수초가 저술했으며, 청군의 잔혹한 행위를 묘사하여 청 왕조 치하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신해혁명 이전에는 반청 운동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일본으로 전래되어 혁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내용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지만,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1645년 청나라(淸)가 양주(揚州)를 공격했을 때, 이 지역은 명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있었다. 당시 양주는 명의 사가법(史可法)이 방어하고 있었으나, 청의 아이신기오로 도도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공격받았다. 양주성은 청군이 침입하기 전부터 이미 남명군의 약탈로 인해 기강이 무너진 상태였다.[6]
양주에 살던 왕수초는 청 순치(順治) 2년(1645년) 당시 양주성 공방전과 그 이후 청군에 의한 학살과 약탈 행위를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양주십일기》에 기록하였다.[6]
2. 시대적 배경
청군은 양주성을 함락시킨 후, 음력 4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대규모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여 80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청군의 잔혹 행위는 《양주십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었으며, 이 책은 청나라 지배 하에서 금서로 지정되었으나 필사본 형태로 비밀리에 유통되었다. 1808년 이전에는 일본에도 전래되었다.[3]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이전에는 "멸만흥한(滅滿興漢)" 구호와 함께,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4][5]
2. 1. 명나라 말기의 혼란
1645년, 청(淸) 순치(順治) 2년에 양주(揚州)성 공방전과 그 이후 청군에 의한 학살 및 약탈 행위가 벌어졌다. 당시 양주는 명의 사가법(史可法)이 지키고 있었으나, 청의 예친왕(予親王) 아이신기오로 도도의 공격으로 처절한 전투 끝에 함락되었다. 양주는 청군 침입 전부터 이미 남명군의 침략으로 규율이 무너진 상태였다.[6]
청 순치 2년 음력 4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청군은 대규모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고, 80만 명에 달하는 양주성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청군은 5월 2일(함락 8일째) 명령을 내려 사찰에서 시신을 거두어 화장했다.
2. 2. 양주성 전투 이전의 상황
사가법(史可法)이 지키고 있던 양주성은 청의 아이신기오로 도도에 의해 공격당했다. 양주성은 남명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는데, 청군이 침입하기 전부터 이미 남명 군대의 기강이 무너져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다.[6]
3. 양주성 전투와 대학살
《양주십일기》는 청 왕조의 지배 아래서 금서로 지정되어 공적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사본 형태로 비밀리에 유통되었다. 가경(嘉慶) 13년 이전에 일본에도 전래되었다.[7] 다만, 일본에서 유학한 혁명파 지식인들이 현지 도서관에서 발굴하여 역수입했고 만주족을 학살하자는 선전선동에 쓰였던 사실과 저자가 만주족 병사들과 의사소통이 자연스럽게 통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이전에는 청 왕조를 타도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이른바 '멸만흥한'(滅満興漢)의 구호와 함께 《양주십일기》가 일종의 바이블 역할을 하기도 했다.
3. 1. 양주성 전투
1645년(순치 2년), 청의 누르하치의 15남인 예친왕(도도)의 군대가 양주에서 사가법 휘하의 명 잔여 군을 함락시켰다.[6] 처절한 전투 끝에 함락된 양주성은 청군이 침입하기 전부터 이미 규율이 무너진 남명군의 침략을 먼저 받은 상태였다. 함락 후, 청군은 음력 4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대규모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으며, 사망자 수는 80만 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7]
사원에서 화장된 시신은 약 80만 구에 달했다. 원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初二日|초이일중국어(5월 2일)에, 청은 전부도주현(傳府道州縣)에 관리를 배치하고, 안민패(安民牌)를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 두려워하지 않게 했다. 또한 각 사찰의 승려들에게 쌓인 시신을 화장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사찰에 숨어 있던 부녀자들 또한 적지 않았으며, 놀라 굶어 죽은 자도 적지 않았다. 시체 소각 장부를 조사한 결과 그 수가 앞뒤로 약 80만여 명에 달했으며, 우물에 빠져 죽거나, 강에 투신하거나,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불태워 죽거나, 깊숙이 들어가 목을 매어 자살한 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3. 2. 청군에 의한 학살과 약탈
1645년(순치 2년), 청의 도도가 이끄는 군대가 양주를 함락시킨 후, 음력 4월 25일부터 5월 5일까지 열흘 동안 대규모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6] 《양주십일기》는 당시 청군이 저지른 이러한 잔혹한 행위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청군에 의한 양주성 함락 이후 열흘 동안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원문의 기록에 따르면, 사찰에서 화장된 시신만 약 80만 구에 달했다고 한다. 우물이나 강에 투신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다.[7]
4. 《양주십일기》의 전래와 영향
1645년 양주에서 벌어진 청군과 명군 간의 공방전과 그 이후 청군에 의한 학살 및 약탈 행위를 기록한 왕수초의 《양주십일기》는 청나라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으나, 필사본 형태로 비밀리에 유통되었다.[3] 이 책은 1808년 이전에 일본에도 전래되었으며,[3] 1911년 신해혁명 당시에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바이블 역할을 하기도 했다.[4][5] 다만, 저자가 만주족 병사들과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어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7]
4. 1. 금서 지정과 비밀 유통
청나라 정부는 《양주십일기》에 묘사된 청군의 잔혹 행위 때문에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공식적인 간행을 금지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주십일기》는 필사본 형태로 민간에 비밀리에 유통되었다.[3]4. 2. 일본 전래와 신해혁명
揚州十日記중국어는 1808년 이전에 일본으로 전래되었다.[3] 일본에서 유학하던 혁명파 지식인들은 현지 도서관에서 揚州十日記중국어를 발굴하여 역수입[7]했고, 이는 만주족을 학살하자는 선전선동에 쓰였다. 1911년 신해혁명 이전에는 청 왕조를 타도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멸만흥한'(滅満興漢) 구호와 함께 揚州十日記중국어가 일종의 바이블 역할을 하였다.[4][5]5. 내용의 진위 논란
저자 왕수초가 만주족 병사와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하는 것처럼 묘사된 점 등은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주십일기》는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중요한 사료로서 가치를 지닌다.
참조
[1]
문서
デジタル大辞泉
[2]
서적
揚州十日記・嘉定屠城紀略
広文館
1923
[3]
백과사전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日立ソリューションズ・クリエイト
[4]
웹사이트
プロパガンダとしての南京事件
https://web.archive.[...]
2014-03-11
[5]
간행물
戊戌変法前における「民智を開く」ことを中心とした梁啓超の民権論
http://petit.lib.yam[...]
山口大学
2016-03
[6]
서적
대운하와 중국 상인: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민음사
2014
[7]
웹사이트
http://yonseisino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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