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에다 괴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다 괴링은 헤르만 괴링의 외동딸로, 1938년 6월 2일에 태어났다. 그녀는 "작은 공주"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나치 정권의 특권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에다는 부모와 함께 연합군에 억류되었고, 아버지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자살한 후에는 법학을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에다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며 그의 유산과 관련된 소송에 참여했고, 2018년에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독일의 기독교인 - 오토 폰 게리케
    오토 폰 게리케는 진공 펌프와 정전기 발전기를 발명하고 마그데부르크 반구 실험을 통해 기압의 힘을 입증하며 진공과 대기압, 정전기 연구에 기여했으며, 저서 『신기한 실험들』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기록했다.
  • 독일의 기독교인 - 카롤루스 대제
    카롤루스 대제는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을 통치하며 서유럽 대부분을 통합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800년에 서로마 황제로 대관된 인물이다.
  • 괴링가 - 카린 괴링
    카린 괴링은 헤르만 괴링의 첫 번째 부인으로 나치당 초기 활동에 기여했으며, 남편의 정치적 성공을 도왔고, 1931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 괴링가 - 에미 괴링
    에미 괴링은 1893년 배우로 활동하다 1935년 헤르만 괴링과 결혼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를 위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으며, 전쟁 후 징역형을 선고받고 자서전을 출간한 후 1973년 사망했다.
  • 독일의 여자 정치인 -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독일의 정치인으로, 2019년부터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임하며, 독일 연방의회 의원과 독일 정부의 여러 장관을 역임했고, 유럽 그린 딜, 코로나19 대응 등 주요 정책을 추진했다.
  • 독일의 여자 정치인 - 말루 드라이어
    말루 드라이어는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 2013년부터 라인란트-팔츠주의 총리를 맡아 주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으며, 독일 연방상원 라인란트팔츠 주 대표와 ZDF 이사회 의장 등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며 높은 지지율로 2016년과 2021년 주 선거에서 승리했다.
에다 괴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4년경의 수업 여행 중인 에다 괴링(왼쪽)
1954년경의 수업 여행 중인 에다 괴링(왼쪽)
본명에다 카린 빌헬미네 괴링
로마자 표기Edda Carin Wilhelmine Göring
출생1938년 6월 2일
출생지베를린, 제3제국
사망2018년 12월 21일
사망지뮌헨, 독일
학력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
부모헤르만 괴링 (아버지)
에미 조네만 (어머니)
친척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 (할아버지)
알베르트 괴링 (삼촌)

2. 출생과 유년 시절

에다 괴링은 1938년 6월 2일에 헤르만 괴링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에다'라는 이름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지만, 에다의 어머니는 이를 부인했다.[4][5] 1938년 11월 4일 카린할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고, 아돌프 히틀러가 대부가 되었다.[6]

2. 1. 출생과 축하

헤르만 괴링의 외동딸인 에다 괴링은 1938년 6월 2일에 태어났다.[1] 그녀의 아버지 헤르만 괴링에게는 딸의 출생을 축하하는 약 628,000통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는데, 여기에는 할리팩스와 런던데리를 포함한 영국 귀족들의 전보도 있었다.[2] 역사가 자일스 맥도노프는 에다의 출생에 대한 독일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제3제국은 6월 2일에 환호했다. 영부인 에미 괴링이 여자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이름은 에다였다. 배우였던 에미는 45세였고, 남편은 맥주 홀 폭동 때 사타구니에 총상을 입었기 때문에 처녀 출산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열흘 뒤 헤르만이 아내와 아이를 요양원에서 데려왔을 때, 거리는 환호하는 인파로 가득했다."[3]

에다라는 이름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딸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4][5] 1938년 11월 4일, 에다는 카린할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으며, 아돌프 히틀러가 그녀의 대부가 되었다. 이 사건은 ''라이프''에 보도되었으며, 에다와 그녀의 부모, 그리고 이 행사를 매우 즐거워했던 히틀러의 많은 사진이 실렸다.[6] 그녀의 세례 선물에는 루카스 크라나흐의 그림 두 점이 포함되어 있었다.[7]

2. 2. 나치 왕가의 공주

에다는 카린할에서 성장했으며, 다른 고위 나치 지도자와 관리들의 딸들처럼 "작은 공주"라는 뜻의 Kleine Prinzessin|클라이네 프린체신de으로 불렸다.[1] 그녀가 한 살 때, 언론인 더글러스 리드는 라이프에 그녀를 "일종의 나치 왕세녀"라고 썼다.[2]

1940년, 루프트바페는 그녀가 놀 수 있도록 카린할의 과수원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상수시 궁전의 소규모 복제품을 짓기 위해 비용을 지불했다.[3] 약 50m 길이, 7m 너비, 3.5m 높이의 이 건물 안에는 무대와 커튼이 완비된 소형 극장이 있었고, Edda-Schlösschen|에다 슐뢰셴de ("에다의 작은 궁전")으로 알려졌다.[4]

1940년, 잡지 데어 슈튀르머는 에다가 인공 수정으로 잉태되었다는 이야기를 실었다. 이미 편집장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를 혐오했던 격분한 괴링은 나치당의 최고 규제자인 발터 부흐에게 그에 대한 조치를 요구했다. 부흐는 "저 병든 정신을 완전히 막을"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지만, 히틀러가 슈트라이허를 구하기 위해 개입했고, 그 결과 그는 몇몇 명예를 박탈당했지만, 뉘른베르크 근처의 자신의 농장에서 데어 슈튀르머를 계속 출판할 수 있었다.[5]

2. 3. 인공 수정 논란

1940년, 잡지 데어 슈튀르머는 에다가 인공 수정으로 잉태되었다는 이야기를 실었다. 이미 편집장인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를 혐오했던 격분한 괴링은 나치당의 최고 규제자인 발터 부흐에게 그에 대한 조치를 요구했다. 부흐는 "저 병든 정신을 완전히 막을"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했지만, 히틀러가 슈트라이허를 구하기 위해 개입했고, 그 결과 그는 몇몇 명예를 박탈당했지만, 뉘른베르크 근처의 자신의 농장에서 데어 슈튀르머를 계속 출판할 수 있었다.[3]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8년, 에다 괴링은 어머니, 이모 엘제 조네만과 함께 헤르스브루크 근처에 살면서 바이에른주 술츠바흐-로젠베르크에 있는 ''St. 안나-메르헨오베르레알슐레''("성 안나 여고")에 입학하여 아비투어를 취득했다. 1948년 11월, 가족은 학교와 더 가까운 에첼방으로 이사했다.

1949년, 에미 괴링은 귀중한 소유물과 관련된 법적 문제에 직면했는데, 그중 많은 부분을 당시 10세였던 에다의 소유라고 설명했다.

3. 1. 종전과 억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무렵, 괴링은 에미와 에다를 데리고 오버잘츠베르크에 있는 자신의 산장으로 피신했다.[3] 1945년 5월 8일, 유럽 전승 기념일에 독일 국방군은 무조건 항복했고, 에다는 7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5월 21일, 어머니와 함께 룩셈부르크 몽도르-레-뱅에 있는 미국이 관리하는 팰리스 호텔(캠프 애쉬칸)에 억류되었다. 1946년까지 둘은 풀려나 뉘른베르크 근처 노이하우스 안 데어 페그니츠에 있는 벨덴슈타인 성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에다를 만난 미국 장교 존 E. 돌리보이스는 에다를 "그녀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인 아름다운 아이. 밝고 쾌활하며, 예의 바르고 훈련이 잘 되어 있다."라고 묘사했다.[3]

뉘른베르크 재판 동안 에다는 아버지의 감옥 면회를 허락받았다.[3] 괴링은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에다가 "하늘에서 아빠를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괴링은 울었다.[3] 1946년 10월 15일, 사형 집행 전날 밤, 괴링은 청산가리 알약을 삼켜 자살했다.[3] 1946년 4월까지 에미와 에다 괴링은 자크딜링의 작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4]

3. 2. 뉘른베르크 재판과 아버지의 죽음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무렵, 헤르만 괴링은 아내 에미 괴링과 딸 에다를 오버잘츠베르크에 있는 자신의 산장으로 피신시켰다.[3] 1945년 5월 21일, 에다는 어머니와 함께 룩셈부르크 몽도르-레-뱅에 있는 미국 관리하의 팰리스 호텔 (캠프 애쉬칸)에 억류되었다. 1946년에 풀려나 뉘른베르크 근처 벨덴슈타인 성에서 살았다.[3]

뉘른베르크 재판 동안 에다는 아버지 헤르만 괴링의 감옥 면회를 허락받았다.[3] 그는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에다가 "하늘에서 아빠를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괴링은 울었다고 한다.[3] 1946년 10월 15일, 사형 집행 전날 밤, 괴링은 청산가리 알약을 삼켜 자살했다.[3]

3. 3. 법학 공부와 사회생활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에다는 뮌헨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법률 서기가 되었고, 나중에는 의사를 위해 일했다.[5] 1959년 한 미상의 친척이 보낸 사적인 편지에는 "아기는 이제 젊은 숙녀가 되었고, 날씬하고 금발에 예쁩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뮌헨 시내 중심부에 있는 현대식 아파트 블록의 5층에서 살고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5]

3. 4.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옹호

에다 괴링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아버지가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매우 사랑했으며 아버지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만을 간직했다. 그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를 호의적으로 본다고 믿었으며, 아버지 헤르만 괴링이 자신에게 좋은 아버지였다고 회고했다.[6]

뉘른베르크 재판 동안 에다는 아버지의 면회가 허락되었고, 괴링은 "하늘에서 아빠를 만났으면 좋겠다"라는 에다의 말을 듣고 울었다고 한다.[3] 괴링은 사형 집행 전날 밤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

에다는 아버지의 제3제국이나 홀로코스트에서의 역할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1990년대 인터뷰에서 "저는 아버지를 매우 사랑했고, 아버지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분명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저의 유일한 기억은 그런 사랑스러운 기억뿐이며, 달리 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6]

또한 에다는 삼촌 알베르트 괴링에 대해 언급하며, 삼촌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때 아버지의 지원을 받았다고 말했다.[7]

4. 유산 분쟁

루카스 크라나흐의 성모자와 아기예수 그림은 1938년 에다 괴링의 세례 선물로 쾰른 시에서 வழங்கப்பட்டது. 전쟁 이후 쾰른 시는 헤르만 괴링의 압력을 이유로 그림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3]

1954년 쾰른 고등 법원은 쾰른 시장이 괴링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림을 선물했다고 판결하며 에다의 손을 들어주었다.[6] 그러나 1968년 독일 연방 대법원은 쾰른 시의 승소로 최종 판결을 내렸고,[5] 그림은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으로 반환되었다.[1]

4. 1. 크라나흐의 성모화

1938년 11월, 에다는 세례 당시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성모자와 아기예수 그림을 포함한 여러 미술 작품을 선물로 받았다. 이 그림은 쾰른 시에서 준 선물이었다.[1] 이 그림은 쾰른의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으며, 당시 쾰른 시장 사무실에 위탁된 공식 소장품의 일부였다.[2] 당시 시장인 카를 게오르크 슈미트는 1923년부터 나치 당원이자 헤르만 괴링의 정치적 동맹이었다.

전쟁 후, 쾰른 시는 괴링의 압력으로 에다에게 원치 않게 그림을 선물했음을 근거로 그림 반환을 요구했다.[3] 필리프 아우어바흐 검찰총장이 괴링이 획득한 많은 예술 보물을 반환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크라나흐의 '성모자'를 둘러싼 법적 분쟁은 15년 동안 지속되었다.[4] 쾰른 지방 법원의 첫 번째 심리에서 시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당시 법학을 공부하던 에다는 이 판결에 대해 쾰른 고등 법원에 항소했고, 1954년 고등 법원은 하급 법원의 판결을 뒤집었다.[5] 역사가 안나 지그문트는 항소 법원이 "헤르만 괴링이 어떤 압력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오히려" 당시 시장(슈미트)이 "크라나흐 그림을 증여함으로써 쾰른 시에 호의를 얻으려 했다"고 보고했다.[6] 이것은 1954년 에다 괴링의 두 번째 법적 승리였다. 그녀는 이미 바이에른 주가 압류했던 150000DEM 상당의 보석을 반환하도록 강제하는 데 성공했었다.

당국은 크라나흐 그림 사건을 계속 추적했고, 1968년 1월 카를스루에의 독일 연방 대법원은 쾰른 시에 유리한 최종 판결을 내렸다.[5] 그 시점까지 바이에른 주와 독일 연방 공화국 모두 그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으며, 그림은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으로 반환되었다.[1]

참조

[1] 웹사이트 GOERING's DAUGHTER CHRISTENED - SOUND | AP Archive http://www.aparchive[...]
[2] Youtube Interview mit Edda Göring https://www.youtube.[...]
[3] 서적 The Struggle for a Soul https://archive.org/[...] Doubleday & Co. 1963
[4] 서적 Hitlers Nibelungen Samples Grafenau 2015
[5] 뉴스 Edda Göring: Hitlers Patentochter diskret beerdigt – Lage ihres Grabs am Waldfriedhof bleibt geheim https://www.tz.de/mu[...] 2019-03-08
[6] 웹사이트 Edda Goering http://www.hitlersch[...] 2017-08-10
[7] 뉴스 Hermann Goering's daughter fails to win back his looted assets from German state https://www.telegrap[...] 2017-08-10
[8] 웹사이트 Hitler's goddaughter Edda Goering dead at 80, buried secretly in unmarked grave in Germany https://www.foxnews.[...] 2019-03-12
[9] 뉴스 Tochter von Hermann Göring auf dem Münchner Waldfriedhof beerdigt https://www.abendzei[...] 2019-03-08
[10] 웹인용 GOERING's DAUGHTER CHRISTENED - SOUND | AP Archive http://www.aparchive[...]
[11] Youtube Interview mit Edda Göring https://www.youtub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