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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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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는 1769년 뤼겐 섬에서 태어난 독일의 민족주의 작가이자 역사가이다. 그는 예나 대학교에서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의 영향을 받았으며, 유럽 여행 중 프랑스 군의 만행을 목격하고 민족주의와 반(反) 프랑스 감정을 키웠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독일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작품을 발표했으며, 본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의 부르셴샤프트 운동을 지지했다. 1848년 혁명 당시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프로이센 왕의 제관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반(反) 폴란드주의와 반유대주의적 사상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1860년 본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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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
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
본명에른스트 모리츠 아른트
출생1769년 12월 26일
출생지뤼겐,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신성 로마 제국
사망1860년 1월 29일
사망지본, 라인 주, 프로이센 왕국
국적독일
직업작가, 시인
활동 기간알 수 없음
대표 작품독일인의 조국은 어디인가
서명Ernst Moritz Arndt Signature.gif
경력
직업작가, 시인, 역사가, 정치인
교수본 대학교
정치 활동
정치 성향독일 민족주의
기타 정보
영향독일 민족주의 운동
관련 인물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
카를 테오도어 쾨르너
요한 고트프리트 피히테

2. 생애

아른트의 노년 시절; 율리우스 뢰팅의 초상화


1848년의 아른트


아른트가 1819년부터 살았던 의 집


슈트랄준트에 있는 아른트의 책상


1769년 뤼겐 섬(당시 스웨덴령)의 쇼리츠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7년 가족과 함께 슈트랄준트로 이주했고, 1791년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에서 신학과 역사학을 공부했다. 2년 후 예나 대학교로 옮겨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에게 사사받으며 그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학업을 마친 후 잠시 가정교사로 일하다 유럽 각지를 여행했는데, 라인 강 유역에서 프랑스 군에 의해 역사적 건조물이 파괴된 것을 보고 민족주의와 반(反) 프랑스 감정이 커졌다.

1806년 나폴레옹 군의 대륙 제패에 맞서 『시대 정신』(Geist der Zeit)을 저술, 독일 민족주의를 고취하여 스웨덴으로 망명해야 했다. 1809년 쉴이 대(對) 프랑스 전쟁에서 전사하자 독일로 돌아와 팸플릿 등으로 전의를 고취했으며, "Was ist das deutsche Vaterland?" 등의 작품은 독일 민족주의와 독일 통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아른트가 원했던 독일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18년 본 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학생들의 부르셴샤프트 운동 지지와 보수 반동 정치 체제 비판으로 1840년까지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848년 혁명으로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의원이 되었고,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황제 즉위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후에도 저술 활동을 계속하다 1860년 본에서 91세로 사망했다.[4]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아른트는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에 속했던 뤼겐 섬의 가르에 있는 그로스 쇼리츠에서 태어났다.[2] 그는 부유한 농부이자 이 지역 영주인 푸트부스 가문 백작에게서 해방된 농노의 아들이었다.[3] 그의 어머니는 유복한 독일 자영농 출신이었다. 1787년, 아른트의 가족은 슈트랄준트로 이사했고, 아른트는 그곳에서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었다. 개인적인 학습 기간을 거친 후, 1791년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에 신학과 역사 학생으로 입학했으며, 1793년에는 예나 대학교로 옮겨 독일 관념론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의 영향을 받았다.[4]

대학교 졸업 후 그는 귀향하여 2년 동안 뤼겐의 비토우 목사인 루드비히 코스가르텐(Ludwig Koscgarten, 1758–1818)의 가족에게 개인 교사로 있으면서, 신학 후보생으로서 목회 자격을 얻어 교회 봉사를 도왔다. 1800년, 그는 그라이프스발트에서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2]

2. 2. 유럽 여행과 반(反) 프랑스 감정의 형성

1791년에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에서 신학 및 역사학을 공부했고, 2년 후에는 예나 대학교로 옮겨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에게 배웠다. 여기서 피히테의 사상적 영향을 받게 된다. 학업을 마친 후 잠시 가정교사로 일했으며, 이후 유럽 각지를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라인 강 유역에 들렀을 때, 프랑스 군에 의해 역사적 건조물이 파괴된 것을 보고 마음 아파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민족주의와 반(反) 프랑스 감정을 키워나갔다.

2. 3. 나폴레옹 전쟁 시기 활동

아른트는 원래 프랑스 혁명의 사상을 지지했지만, 공포 정치가 자코뱅에 의해 명백해지자 그 사상에서 벗어났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기 시작했을 때, 이러한 사상의 포기는 본능적인 혐오로 변했다.[5]

1800년 아른트는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에서 역사학 강사(''사강사'')로 가르쳤으며, 같은 해에 ''고대 공화국의 자유에 관하여''를 출판했다. 1803년에는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그의 견해를 담은 ''게르마니아와 유럽''을 출판했다. 이어서 그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 중 하나인 ''포메른과 뤼겐의 농노제 역사''(베를린, 1803)가 출판되었는데, 이는 포메라니아와 뤼겐의 농노제에 대한 역사로, 그 비판이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스웨덴의 구스타브 4세 아돌프 국왕은 1806년에 농노제를 폐지했다.[4]

아른트는 ''사강사''에서 특별 교수로 승진했고, 1806년에는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그는 ''시대 정신''의 첫 부분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그는 나폴레옹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동포들에게 일어나 프랑스의 멍에를 벗어던지라고 촉구했다. 그가 일으킨 흥분은 너무 커서 아른트는 나폴레옹의 복수를 피해 스웨덴으로 피신해야 했다. 스톡홀름에 정착하여 정부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팸플릿, 시, 노래를 통해 독일의 독립에 대한 열정을 동포들에게 전달했다. 쉴이 슈트랄준트에서 영웅적으로 죽자 그는 독일로 돌아가, 변장한 채 12월에 베를린에 도착했다.[4]

1810년 그는 그라이프스발트로 돌아왔지만 몇 달 동안만 머물렀다. 그는 다시 모험적인 여행을 떠나 게브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아우구스트 폰 그나이제나우,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카를 슈타인과 같은 동시대의 저명한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1812년에는 슈타인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소환되어 프랑스에 맞선 최종 투쟁의 조직을 도왔다. 한편, 팸플릿이 잇따라 출판되었고, ''독일인의 조국은 무엇인가?'', ''철을 자라게 하신 하느님'', ''나팔은 무엇을 부는가?''와 같은 그의 감동적인 애국가가 널리 인기를 얻었다.[4] 파울리네 폴크슈타인과 같은 작곡가도 그의 가사에 곡을 붙였다.

2. 4. 애국시와 노래


  • Sind wir vereint zur guten Stundede ("우리가 행복한 시간에 함께할 때")
  • Was ist des Deutschen Vaterland?de ("독일인의 조국은 무엇인가?")[13]
  • "독일인의 조국은 무엇인가?" 독일 고전 1900 윌리엄 클리버 윌킨슨[14]
  • Vaterlandsliedde(아른트 작사), Der Gott, der Eisen wachsen ließde ("철을 자라게 한 신")은 알베르트 메트페셀(1785–1869)이 작곡했다.
  • Zu den Waffen, zu den Waffende ("무기를, 무기를")[15]
  • Kommt her, ihr seid geladende(EG 213de) (현재 독일 개신교 찬송가 《에반겔리셰스 게장부흐de》의 213번)
  • Ich weiß, woran ich glaubede ("나는 내가 무엇을 믿는지 안다", EG 357de)
  • Die Leipziger Schlachtde ("라이프치히 전투", Deutsches Lesebuch für Volksschulende(초등학교 독일어 독본))

2. 5. 반동 시기 활동과 복권

1818년 본 대학교 교수가 된 아른트는 학생들의 부르셴샤프트 운동을 지지했다. 칼스바트 칙령으로 운동이 억압되자, 보수 반동적인 당시 정치 체제를 비판했다. 이러한 자세 때문에 반체제 인사로 간주되어 일시 체포되었고, 1840년까지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다양한 저술 활동을 했다.

2. 6. 1848년 혁명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아른트는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1] 그는 헌법 초안을 작성하고,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대표단 중 한 명이었지만, 프로이센 왕의 제관 거부로 좌절되었다.[1]

2. 7. 사망과 유산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아른트는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헌법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대표단의 일원이었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제관을 거부하면서 좌절되었다. 이후에도 저술 활동을 정력적으로 이어갔으며, 1860년 본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사상



아른트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에게 사사받았으며, 그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5] 얀과 마찬가지로 아른트는 독일 민족을 민족적 동질성을 가진 사회로 구상하기 시작했고, 특히 중세 시대의 독일 민족의 역사를 참고했다.[5] 그의 저술에는 구체적인 정치 강령은 없지만 외부의 적들을 언급했다. 아른트가 구상한 "자유"는 다원주의적인 사회의 자유가 아니라 낭만적인 민족 공동체의 자유였다.

그는 프랑스인들을 쇠약하고 여성적이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폄하했고, 반면 독일의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찬양했다.[5]

3. 1. 민족주의와 반(反) 프랑스주의

원래 프랑스 혁명의 사상을 지지했던 아른트는 공포 정치가 자코뱅 클럽에 의해 명백해지자 그 사상에서 벗어났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기 시작했을 때, 이 사상 포기는 본능적인 혐오로 변했다.[5]

피히테나 얀과 마찬가지로 아른트는 독일 민족을 민족적 동질성을 가진 사회로 구상하기 시작했고, 특히 중세 시대의 독일 민족의 역사를 참고했다. 그의 저술에는 구체적인 정치 강령은 없지만 외부의 적들을 언급하고 있다. "자유"가 자주 언급되지만, 아른트가 구상한 자유는 다원주의적인 사회의 자유가 아니라 낭만적인 민족 공동체의 자유였다. 프랑스인들은 쇠약하고 여성적이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폄하되었고, 반면 독일의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찬양받았다.[5]

이러한 생각은 아른트가 독일 국가에 대한 나폴레옹의 정복 동안 반(反) 프랑스 선전을 하도록 이끌었다.

아른트는 또한 폴란드인과 다른 슬라브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1831년에 폴란드 "야만성과 거친성"을 비난하는 반(反) 폴란드 팸플릿을 출판했다.[8] 1848년 혁명 동안, 프랑크푸르트에서 폴란드 국가의 부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아른트는 슬라브족과 벤드족의 "부족"은 "국가, 과학 또는 예술과 관련하여 지속적인 것을 결코 하지 못했고 할 수 없었다"고 선언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나는 세계 역사가 심판을 내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폴란드인과 모든 슬라브족은 독일인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한다."[9]

그는 또한 유대교와의 밀접한 접촉을 경고했다. 그는 "러시아의 폭정으로 인해 폴란드에서 더욱 넘쳐날 수천[명의 유대인]" - "동쪽에서 온 불순한 물결"을 경고했다.[10] 더욱이, 그는 유대인이 문학의 절반을 "찬탈"했다고 주장하며 유대 지식인 음모에 대해 경고했다.[10]

아른트는 자신의 반유대주의와 반(反) 프랑스적인 견해를 결합하여 프랑스인을 "유대인"("das Judenvolk") 또는 "세련된 나쁜 유대인"("verfeinerte schlechte Juden")이라고 불렀다.[11] 1815년 그는 프랑스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유대인... 나는 그들을 유대인 목록과 구두쇠 같은 탐욕뿐만 아니라 유대인처럼 똘똘 뭉치는 것 때문에 다시 부른다."[12]

3. 2. 반(反) 폴란드주의와 반유대주의

얀이나 피히테와 같이 아른트는 독일 민족을 민족적으로 동질적인 사회로 구상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중세 시대 독일 민족의 역사를 참고했다. 그의 저술에는 구체적인 정치 강령은 없지만 외부의 적들을 언급하고 있다. "자유"가 자주 언급되지만, 아른트가 구상한 자유는 다원주의적인 사회의 자유가 아니라 낭만적인 민족 공동체의 자유였다. 프랑스인들은 쇠약하고 여성적이며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폄하되었고, 반면 독일의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찬양받았다.[5]

이러한 생각은 아른트가 독일 국가에 대한 나폴레옹의 정복 동안 반(反) 프랑스 선전을 하도록 이끌었다.

아른트는 또한 폴란드인과 다른 슬라브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1831년에 폴란드 "야만성과 거친성"을 비난하는 반(反) 폴란드 팸플릿을 출판했다.[8] 1848년 혁명 당시, 프랑크푸르트에서 폴란드 국가의 부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아른트는 슬라브족과 벤드족의 "부족"은 "국가, 과학 또는 예술과 관련하여 지속적인 것을 결코 하지 못했고 할 수 없었다"고 선언하면서 "나는 세계 역사가 심판을 내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폴란드인과 모든 슬라브족은 독일인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한다."라고 결론지었다.[9]

그는 또한 유대교와의 밀접한 접촉을 경고했다. 그는 "러시아의 폭정으로 인해 폴란드에서 더욱 넘쳐날 수천[명의 유대인]" - "동쪽에서 온 불순한 물결"을 경고했다.[10] 더욱이, 그는 유대인이 문학의 절반을 "찬탈"했다고 주장하며 유대 지식인 음모에 대해 경고했다.[10]

아른트는 자신의 반유대주의와 반(反) 프랑스적인 견해를 결합하여 프랑스인을 "유대인"("das Judenvolk") 또는 "세련된 나쁜 유대인"("verfeinerte schlechte Juden")이라고 불렀다.[11] 1815년 그는 프랑스인에 대해 "유대인... 나는 그들을 유대인 목록과 구두쇠 같은 탐욕뿐만 아니라 유대인처럼 똘똘 뭉치는 것 때문에 다시 부른다."라고 썼다.[12]

4. 주요 저서


  • Geschichte der Leibeigenschaft in Pommern und Rügende (포메라니아와 뤼겐의 농노제의 역사, 미번역)
  • Geist der Zeitde (시대정신, 1806년)
  • ''스웨덴 기행''(1797)
  • ''네벤슈투덴, 셰틀랜드 및 오크니 제도의 설명과 역사''(1820)
  • ''네덜란드 문제''(1831)
  • ''외부 생활의 회고록''(1840)
  • ''라인강과 아르강 유역 방랑기''(1846)
  • ''제국 자유 남작 하인리히 카를 프리드리히 폰 슈타인과 함께 한 나의 방랑과 변신''(1858)
  • Pro Populo Germanicode (1854)

참조

[1] 서적 Unended Quest: An Intellectual Autobiography Routledge
[2] 서적 National Monuments and Nationalism in 19th Century Germany Peter Lang
[3] 서적 The Life and Times of Louisa, Queen of Prussia: With an Introductory Sketch of Prussian History, Vol. 1 W. Isbister & Company
[4] EB1911
[5] 간행물 Einheit durch Reinheit
[6] 서적 Weltgeschichte im Aufriss Verlag Diesterweg
[7] 서적 Geist der Zeit http://www.ernst-mor[...]
[8] 문서 Germany and Eastern Europe: Cultural Identity and Cultural Differences Keith Bullivant, Geoffrey Giles, Walter Pape, page 144 Jurgen Lieskounig "Branntweintrinkende Wilde" Beyond Civilization and Outside History: The Depiction of the Poles in Gustav Freytag's "Soll und Haben"
[9] 문서 The apocalypse in Germany [[Klaus Vondung]] and Stephen D. Ricks page 112, University of Missouri Press 2001
[10] 뉴스 Fataler Patron http://www.zeit.de/z[...] 2009-09-07
[11] 서적 Noch ein Wort über die Franzosen und über uns
[12] 서적 Das Wort von 1814 und das Wort von 1815 über die Franzosen
[13] 웹사이트 Ernst Moritz Arndt: Gedichte – Frühlingslied an die Frömmler http://gutenberg.spi[...] 2017-02-14
[14] 웹사이트 German Classics Book Reader https://archive.org/[...] 2017-02-14
[15] 웹사이트 Ernst Moritz Arndt: Gedichte – Frühlingslied an die Frömmler http://gutenberg.spi[...] 201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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