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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하노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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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는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아들이자 하노버의 마지막 국왕이었다. 그는 1771년 영국에서 태어나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1799년 컴벌랜드 공작으로 임명되었으며, 정치 활동을 통해 보수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1837년 윌리엄 4세의 사망으로 하노버 왕위를 계승하여, 1833년 제정된 자유주의 헌법을 폐지하고 반동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는 1851년 사망했으며, 아들 게오르크 5세가 하노버 왕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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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 (하노버)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의 군복 초상화
에드문트 코켄이 1842년 이후 그린 초상화
이름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다른 이름아네스트 오거스터스
로마자 표기Ernest Augustus
칭호컴벌랜드 공작
왕호하노버 국왕
출생일1771년 6월 5일
출생지영국 런던 버킹엄궁
사망일1851년 11월 18일
사망지하노버 왕국 하노버
매장일1851년 11월 26일
매장지헤렌하우젠 정원, 하노버
종교개신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의 서명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국왕의 서명
통치
즉위1837년 6월 20일
퇴위1851년 11월 18일
전임자윌리엄 4세
후임자게오르크 5세
가문
왕가하노버 가문
아버지조지 3세
어머니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샬럿
배우자프레데리케 폰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녀 (1815년 결혼, 1841년 사망)
자녀게오르크 5세
군 경력
소속하노버 육군
영국 육군
복무 기간1791년 - 1813년 (실제 복무)
계급육군 원수 (실제 복무)
참전 전투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투르쿠앵 전투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라이프치히 전투
지휘세번 지구
남서부 지구
의회 경력
직위귀족원 의원 / 세속 귀족
임기 시작1799년 4월 23일
임기 종료1851년 11월 18일

2. 초기 생애 (1771–1799)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조지 3세와 샬럿 왕비의 다섯째 아들로, 1771년 6월 5일 런던의 버킹엄 하우스에서 태어났다.[1] 1771년 7월 1일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세례를 받았다.[2] 어린 시절, 그는 두 남동생 아돌퍼스 왕자(훗날 케임브리지 공작), 아우구스투스 왕자(훗날 서식스 공작)와 함께 가정교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큐 궁전 근처 큐 그린의 집에서 살았다.

토머스 게인즈버러가 그린 젊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782년


15세가 되던 해, 에른스트는 두 남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영지인 하노버에 있는 괴팅겐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1] 이는 에른스트의 형인 조지 왕세자의 방탕한 생활 방식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2] 에른스트는 독일어를 배우며 1년간 개인 교습을 받은 후 대학 강의에 참여하는 등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비록 왕자들의 가정은 군대식으로 운영되고 대학 규칙을 따라야 했지만, 하노버 상인들은 왕자들에게 신용을 제공했고 세 왕자는 모두 빚을 지게 되었다.[3]

1790년, 에른스트는 프로이센군에서 훈련받기를 원했지만, 1791년 1월 아돌퍼스 왕자와 함께 하노버로 보내져 빌헬름 폰 프라이타크 원수의 감독하에 군사 훈련을 받았다.[4] 괴팅겐을 떠나기 전, 에른스트는 대학에 감사 편지를 보내며 아버지에게 "괴팅겐과 그 교수들에게 빚진 모든 것을 잊는다면 저는 가장 불감사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썼다.[4]

컴벌랜드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자,


에른스트는 퀸즈 라이트 드래곤 연대에서 기병 훈련과 전술을 배우며 뛰어난 기수이자 사격수로 성장했다.[5] 훈련 시작 두 달 만에 프라이타크는 그의 능력에 감탄하여 기병대 대위직을 주었다. 국왕 또한 아들의 기량에 감탄하여 그가 기병대에 남는 것을 허락했다.[6] 1792년 3월, 에른스트는 하노버 제9 경기병 연대 대령으로 임명되었다.[7]

1793년, 에른스트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 참전하여 저지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투르네 근처 전투에서 머리에 사벨 부상을 입어 얼굴에 흉터가 남았다.[8] 1794년 투르쿠앵 전투에서는 포탄 파편에 왼팔을 다치고 왼쪽 눈의 시력이 약해졌다.[9] 6월, 그는 요양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9]

제임스 길레이가 1799년에 그린 에른스트의 채색 스케치. 특이하게도 에른스트의 왼쪽 측면의 흉터를 묘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후대 초상화는 오른쪽 측면을 보여주거나 흉터를 생략한다.


1795년 2월, 에른스트는 하노버에 도착하여 복귀했다. 그는 눈 치료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1796년 초가 되어서야 국왕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10] 영국에서 에른스트는 안과 의사 조나단 웨이든 월러를 찾아갔지만, 수술 불가능 판정을 받았다.[11] 그는 영국군에 합류하려 했으나 국왕과 요크 공작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에른스트는 당시 전투에 참여하지 않던 하노버 군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프라이타그의 후임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폰 발모덴 백작 밑에서 복무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12]

2. 1. 출생과 교육

조지 3세와 샤를로테 왕비의 다섯째 아들로 1771년 6월 5일 런던의 버킹엄 하우스(현 버킹엄 궁전)에서 태어나, 7월 1일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세례를 받았다.[21] 세례명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대부 중 한 명이었던 Duke Ernest Gottlob of Mecklenburg영어에서 유래한다.[21] 괴팅겐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786년 6월 2일 가터 훈장을 받았다.[21]

윌리엄 비치의 1802년 초상화를 바탕으로 한 1823년 미니어처 초상화 속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799년 4월 24일 그레이트브리튼 귀족인 '''컴벌랜드-티비오트데일 공작''', 아일랜드 귀족인 '''아머 백작'''에 서임되었고, 6월 5일 영국의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되었다.[21] 1815년 1월 2일 바스 훈장 나이트 그랜드 크로스를, 같은 해 8월 12일 Royal Guelphic Order영어 나이트 그랜드 크로스를, 1821년 8월 20일 성 패트릭 훈장을 받았으며, 1828년 4월 24일 왕립 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21] 1805년부터 1851년 사망할 때까지 더블린 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21]

프리메이슨이었다.

2. 2. 군사 경력

에른스트는 1790년 영국 육군에 중위로 입대하여, 1793년에 중령, 1794년 2월에 소장으로 진급했다.[21] 프랑스 혁명 전쟁 중이던 1794년 5월 투르네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고, 같은 해 말 나이메헌 포위전에서 공을 세웠다.[21] 1798년에는 중장, 1803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했다.[21]

1813년, 에른스트는 총선 이후 웨이머스의 선거 경쟁에 휘말려 정치적 스캔들의 중심에 섰다. 그는 웨이머스에서 의회 대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세 명의 수탁자 중 한 명으로 밝혀졌다. 귀족이 하원 선거에 간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영국 정부는 그를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 중인 하노버 군대의 옵서버로 유럽에 파견했다.[21] 비록 실질적인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에른스트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라이프치히 전투에 참관했다.[1] 이후 1813년 11월 26일, 에른스트는 영국군 원수로 최종 진급했다.[1]

3. 컴벌랜드 공작 (1799-1837)

에른스트는 1813년 중반, 사촌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카 공녀와 사랑에 빠졌다. 프리데리카는 당시 솔름스브라운펠스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와 결혼한 상태였고, 이전에 프로이센의 루이 왕자와 결혼했다가 사별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프리데리카가 재혼할 수 있게 되면 결혼하기로 합의했다.[21] 프리데리카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결혼은 원만하지 못했고, 남편은 이혼에 동의했지만 1814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혼은 불필요해졌다. 일각에서는 프리데리카가 남편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21] 에른스트의 어머니 샤를로테 왕비는 프리데리카가 에른스트의 동생 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와 약혼했다가 파혼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 결혼을 반대했다.[21]

1815년 5월 29일 독일에서 결혼한 후,[21] 샤를로테 왕비는 며느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큐(Kew)에서 열린 컴벌랜드 부부(에른스트 부부)의 재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에른스트의 네 명의 형제들은 참석했다. 1811년부터 섭정왕이었던 웨일스 왕자(훗날의 조지 4세)는 컴벌랜드 부부가 영국에 머무는 것을 불편하게 여겨, 그들이 대륙으로 떠날 경우 돈과 하노버 총독직을 제안했다. 에른스트는 거절했고, 컴벌랜드 부부는 큐와 세인트 제임스 궁에서 시간을 보냈다. 왕비는 프리데리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21] 이러한 가족 문제에도 불구하고, 컴벌랜드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21]

리버풀 경 정부는 1815년 공작(에른스트)의 수당을 연간 6,000파운드 증액해 줄 것을 의회에 요청했는데, 이는 결혼으로 인한 증가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작의 웨이머스 선거 개입이 문제가 되어 법안은 한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리버풀은 1817년 다시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7표 차이로 부결되었다.[21]

1815년 에른스트의 결혼 당시, 영국 왕위 계승 문제는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섭정왕의 외동딸인 웨일스의 샬럿 공주는 국왕의 유일한 적출 손녀였다. 샬럿 공주가 1816년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 왕자와 결혼하면서, 왕위 계승을 이을 아이를 낳을 것으로 기대되었다.[21] 섭정왕과 요크 공작 프레더릭은 모두 결혼했지만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다음 두 형제인 클라렌스 공작 윌리엄 왕자와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는 미혼이었다.[21] 그러나 1817년 11월 6일, 샬럿 공주가 사산아를 출산한 후 사망하면서, 조지 3세는 12명의 자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출 손주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에 대부분의 미혼 왕자들은 서둘러 결혼하여 왕위 계승을 확보하려 했다.[21]

왕비가 며느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컴벌랜드 부부는 1818년 독일로 이주했다. 그들은 영국에서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독일의 생활비가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샤를로테 왕비는 1818년 11월 17일에 사망했지만, 컴벌랜드 부부는 독일에 남아 주로 베를린에 거주했다. 1817년 공작 부인은 사산아를 낳았고, 1819년에는 컴벌랜드의 조지 왕자(훗날의 게오르크 5세)를 낳았다. 에른스트는 가끔 영국을 방문하여 맏형과 함께 지냈는데, 맏형은 1820년 조지 4세로서 영국과 하노버의 왕위를 계승했다.[21]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켄트 공작은 아버지보다 6일 먼저 사망했지만, 딸인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공주를 남겼다. 조지 3세의 사망으로 에른스트는 요크 공작(1827년 사망), 클라렌스 공작, 그리고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공주에 이어 영국 왕위 계승 순위 4위가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다시 커졌다.[3]

에른스트와 프리데리케 부부 사이에는 1남 1녀가 태어났다.[22]

이름출생사망비고
여자1817년 1월 27일1817년 1월 27일요절[22]
게오르크 5세1819년 5월 27일1878년 6월 12일하노버 왕[21]



1826년, 영국 의회는 에른스트의 수당을 인상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리버풀 정부는 에른스트가 조지 왕자의 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 수당 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휘그당 의원들은 이에 반대했다.[1] 하원에서 120대 97로 통과된 이 법안은 에른스트가 수당을 받으려면 조지 왕자가 영국에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포함시켰다.[2]

1828년, 에른스트는 윈저 성에서 국왕과 함께 머물던 중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소요가 발생하자,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대의를 지지하며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정부가 아일랜드 문제를 단호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믿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3] 1829년 1월, 웰링턴 정부는 가톨릭 해방 법안을 도입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에른스트는 이에 반대하여 런던으로 돌아와 1829년 로마 가톨릭 구제법의 주요 반대자 중 한 명이 되었다.[3] 그는 조지 4세에게 법안에 반대하도록 영향을 미쳤다.[3] 에른스트가 도착한 지 며칠 만에 국왕은 그의 가정부 장교들에게 법안에 반대하도록 지시했고, 웰링턴은 국왕에게 완전한 지지를 보장하지 않는 한 총리직에서 사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왕은 처음에 웰링턴의 사임을 받아들였고 에른스트는 가톨릭 해방에 반대하는 통합 정부를 구성하려고 시도했으나, 하원에서 지지를 얻지 못해 포기했다. 결국 국왕은 웰링턴을 다시 불렀고, 법안은 상원을 통과하여 법이 되었다.[4]

웰링턴 정부는 에른스트가 독일로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그는 1829년에 아내와 아들을 영국으로 이주시켰다.[5] 이때 에른스트의 누이인 소피아 공주의 사생아로 여겨지는 토마스 가스가 에른스트의 친자라는 소문이 돌았고, 에른스트가 이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여 국왕을 협박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이러한 소문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6]

1830년, 에른스트는 그레이브스 부인과의 불륜설에 휩싸였고, 그의 침실 시종이었던 그레이브스 남작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7] 《타임스》는 처음에는 두 사건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고 암시했지만, 곧 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에른스트가 자살에 책임이 있거나, 심지어 살인을 저질렀다고 믿었다.[7] 에른스트의 전기 작가들은 이러한 소문이 휘그당에 의해 정치적 목적으로 퍼졌다고 주장한다.[8] 웰링턴 공작은 에른스트가 영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9]

개혁법(Reform Act 1832)을 지지하는 정치 풍자 만화: 윌리엄 4세는 구름 위에 앉아 휘그당(Whigs) 정치인들로 둘러싸여 있고, 아래쪽에서는 브리타니아(Britannia)와 영국의 사자가 토리당(Tories)(에른스트는 왼쪽에서 두 번째)을 도망치게 한다.


1830년 조지 4세가 사망하고 윌리엄 4세가 즉위하면서 에른스트의 궁정 내 영향력은 약화되었다.[10] 윌리엄 4세는 에른스트가 윈저에 권력 기반을 유지하는 것을 경계했고, 에른스트는 근위기병대 수장 직책과 왕실 마구간 문제로 윌리엄 4세와 갈등을 빚었다.[10] 그러나 에른스트와 윌리엄 4세는 윌리엄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11]

에른스트는 시민적 및 종교적 자유의 확대에 반대했으며,[3] 1832년 개혁법에 반대하는 "강경파" 동료 의원 중 한 명이었다.[12] 그는 군대에 오렌지 협회 로지를 선호한다는 제안으로 인해 더욱 인기가 떨어졌다.[3]

1832년, 에른스트는 두 명의 젊은 여성을 마차로 치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그는 사건 당일 큐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있었다고 주장했다.[13] 같은 해, 에른스트는 그의 집사 닐이 셀리스를 죽였다고 비난하는 책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13]

에른스트는 윌리엄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상원에서 성실하게 활동했다.[14] 그는 연설로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온화하고 달래는 태도를 보였으며, 여러 의원들에게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14]

1836년, 오렌지 협회가 윌리엄 4세 사후 에른스트를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논쟁이 일어났다.[15] 하원은 로지 해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에른스트는 상원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빅토리아 공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영국 내 로지 해산 의향을 밝혔다.[16] 이 사건은 에른스트가 빅토리아를 살해하고 영국 왕위를 차지하려 했다는 널리 퍼진 소문의 근원이 되었다.[16]

하노버 왕국의 국장 (1848년부터)

3. 1. 정치 활동

1826년, 영국 의회는 에른스트의 수당을 인상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리버풀 정부는 에른스트가 조지 왕자의 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 수당 인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휘그당 의원들은 이에 반대했다.[1] 하원에서 120대 97로 통과된 이 법안은 에른스트가 수당을 받으려면 조지 왕자가 영국에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포함시켰다.[2]

1828년, 에른스트는 윈저 성에서 국왕과 함께 머물던 중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소요가 발생하자,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대의를 지지하며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정부가 아일랜드 문제를 단호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믿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3] 1829년 1월, 웰링턴 정부는 가톨릭 해방 법안을 도입할 것이라고 발표했고, 에른스트는 이에 반대하여 런던으로 돌아와 1829년 로마 가톨릭 구제법의 주요 반대자 중 한 명이 되었다.[3] 그는 조지 4세에게 법안에 반대하도록 영향을 미쳤다.[3] 에른스트가 도착한 지 며칠 만에 국왕은 그의 가정부 장교들에게 법안에 반대하도록 지시했고, 웰링턴은 국왕에게 완전한 지지를 보장하지 않는 한 총리직에서 사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왕은 처음에 웰링턴의 사임을 받아들였고 에른스트는 가톨릭 해방에 반대하는 통합 정부를 구성하려고 시도했으나, 하원에서 지지를 얻지 못해 포기했다. 결국 국왕은 웰링턴을 다시 불렀고, 법안은 상원을 통과하여 법이 되었다.[4]

웰링턴 정부는 에른스트가 독일로 돌아가기를 바랐지만, 그는 1829년에 아내와 아들을 영국으로 이주시켰다.[5] 이때 에른스트의 누이인 소피아 공주의 사생아로 여겨지는 토마스 가스가 에른스트의 친자라는 소문이 돌았고, 에른스트가 이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여 국왕을 협박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이러한 소문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6]

1830년, 에른스트는 그레이브스 부인과의 불륜설에 휩싸였고, 그의 침실 시종이었던 그레이브스 남작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7] 《타임스》는 처음에는 두 사건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고 암시했지만, 곧 철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에른스트가 자살에 책임이 있거나, 심지어 살인을 저질렀다고 믿었다.[7] 에른스트의 전기 작가들은 이러한 소문이 휘그당에 의해 정치적 목적으로 퍼졌다고 주장한다.[8] 웰링턴 공작은 에른스트가 영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9]

1830년 조지 4세가 사망하고 윌리엄 4세가 즉위하면서 에른스트의 궁정 내 영향력은 약화되었다.[10] 윌리엄 4세는 에른스트가 윈저에 권력 기반을 유지하는 것을 경계했고, 에른스트는 근위기병대 수장 직책과 왕실 마구간 문제로 윌리엄 4세와 갈등을 빚었다.[10] 그러나 에른스트와 윌리엄 4세는 윌리엄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11]

에른스트는 시민적 및 종교적 자유의 확대에 반대했으며,[3] 1832년 개혁법에 반대하는 "강경파" 동료 의원 중 한 명이었다.[12] 그는 군대에 오렌지 협회 로지를 선호한다는 제안으로 인해 더욱 인기가 떨어졌다.[3]

1832년, 에른스트는 두 명의 젊은 여성을 마차로 치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그는 사건 당일 큐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 있었다고 주장했다.[13] 같은 해, 에른스트는 그의 집사 닐이 셀리스를 죽였다고 비난하는 책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했다.[13]

에른스트는 윌리엄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상원에서 성실하게 활동했다.[14] 그는 연설로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온화하고 달래는 태도를 보였으며, 여러 의원들에게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14]

1836년, 오렌지 협회가 윌리엄 4세 사후 에른스트를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논쟁이 일어났다.[15] 하원은 로지 해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에른스트는 상원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빅토리아 공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영국 내 로지 해산 의향을 밝혔다.[16] 이 사건은 에른스트가 빅토리아를 살해하고 영국 왕위를 차지하려 했다는 널리 퍼진 소문의 근원이 되었다.[16]

3. 2. 셀리스 사건 (1810)


3. 3. 결혼과 왕위 계승 문제

1813년 중반, 에른스트는 그의 사촌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프리데리카 공녀와 사랑에 빠졌다. 프리데리카는 당시 솔름스브라운펠스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와 결혼한 상태였고, 이전에 프로이센의 루이 왕자와 결혼했다가 사별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프리데리카가 재혼할 수 있게 되면 결혼하기로 합의했다.[21] 프리데리카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결혼은 원만하지 못했고, 남편은 이혼에 동의했지만 1814년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혼은 불필요해졌다. 일각에서는 프리데리카가 남편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21] 에른스트의 어머니 샤를로테 왕비는 프리데리카가 에른스트의 동생 캠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와 약혼했다가 파혼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 결혼을 반대했다.[21]

1815년 5월 29일 독일에서 결혼한 후,[21] 샤를로테 왕비는 며느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큐(Kew)에서 열린 컴벌랜드 부부(에른스트 부부)의 재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에른스트의 네 명의 형제들은 참석했다. 1811년부터 섭정왕이었던 웨일스 왕자(훗날의 조지 4세)는 컴벌랜드 부부가 영국에 머무는 것을 불편하게 여겨, 그들이 대륙으로 떠날 경우 돈과 하노버 총독직을 제안했다. 에른스트는 거절했고, 컴벌랜드 부부는 큐와 세인트 제임스 궁에서 시간을 보냈다. 왕비는 프리데리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21] 이러한 가족 문제에도 불구하고, 컴벌랜드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21]

리버풀 경 정부는 1815년 공작(에른스트)의 수당을 연간 6,000파운드 증액해 줄 것을 의회에 요청했는데, 이는 결혼으로 인한 증가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공작의 웨이머스 선거 개입이 문제가 되어 법안은 한 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리버풀은 1817년 다시 시도했지만, 이번에는 7표 차이로 부결되었다.[21]

1815년 에른스트의 결혼 당시, 영국 왕위 계승 문제는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섭정왕의 외동딸인 웨일스의 샬럿 공주는 국왕의 유일한 적출 손녀였다. 샬럿 공주가 1816년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 왕자와 결혼하면서, 왕위 계승을 이을 아이를 낳을 것으로 기대되었다.[21] 섭정왕과 요크 공작 프레더릭은 모두 결혼했지만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다음 두 형제인 클라렌스 공작 윌리엄 왕자와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는 미혼이었다.[21] 그러나 1817년 11월 6일, 샬럿 공주가 사산아를 출산한 후 사망하면서, 조지 3세는 12명의 자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출 손주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에 대부분의 미혼 왕자들은 서둘러 결혼하여 왕위 계승을 확보하려 했다.[21]

왕비가 며느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컴벌랜드 부부는 1818년 독일로 이주했다. 그들은 영국에서 생활비를 감당하기 어려웠고, 독일의 생활비가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다. 샤를로테 왕비는 1818년 11월 17일에 사망했지만, 컴벌랜드 부부는 독일에 남아 주로 베를린에 거주했다. 1817년 공작 부인은 사산아를 낳았고, 1819년에는 컴벌랜드의 조지 왕자를 낳았다. 에른스트는 가끔 영국을 방문하여 맏형과 함께 지냈는데, 맏형은 1820년 조지 4세로서 영국과 하노버의 왕위를 계승했다.[21] 조지 3세의 넷째 아들인 켄트 공작은 아버지보다 6일 먼저 사망했지만, 딸인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공주를 남겼다. 조지 3세의 사망으로 에른스트는 요크 공작(1827년 사망), 클라렌스 공작, 그리고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공주에 이어 영국 왕위 계승 순위 4위가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어 보였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다시 커졌다.[3]

에른스트와 프리데리케 부부는 1815년에 결혼했으며, 프리데리케에게는 세 번째 결혼이었다.[21] 결혼식은 5월 29일 노이슈트렐리츠에서, 8월 29일 런던의 칼턴 하우스에서 거행되었다.[21] 두 사람 사이에는 1남 1녀가 태어났다.[22]

이름출생사망비고
여자1817년 1월 27일1817년 1월 27일요절[22]
게오르크 5세1819년 5월 27일1878년 6월 12일하노버 왕[21]


4. 하노버 국왕 (1837–1851)

1837년 윌리엄 4세가 서거하면서 켄트 공작 에드워드의 딸인 빅토리아가 영국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하노버의 왕위는 살리카 법에 따라 에드워드의 남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계승하게 되어,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연합은 해소되었다.[21]

하노버 왕국에서는 1833년에 자유주의 헌법이 제정되었으나, 하노버의 국왕이 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즉위 초기에 새 헌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였다.[21] 이로 인해 그림 형제를 비롯한 괴팅겐 대학교 교수 7명이 추방 또는 해임되는 괴팅겐 칠교수 사건이 발생하였다. 1840년에는 반동적인 헌법을 제정하였는데, 『완전 귀족 요람』 제2판에서는 이 헌법 덕분에 하노버가 1848년 혁명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기술하였다.[21]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국내 정책에서 하노버 시의 현대화에 힘썼다. 가스등 설치, 위생 시설 개선, 새로운 주거 지역 개발 등을 지원했으며, 철도 건설을 통해 하노버가 주요 철도 교차점이 되도록 했다. 오페라 하우스 건설을 승인하여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청원 기회를 제공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고위직에 임명하는 등 열린 행보를 보였다. 종교적으로도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가톨릭 신자를 정부 관리에 임명하고, 하노버의 유대인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대외적으로는 프로이센 주도의 관세 동맹(Zollverein)에 반대하며 하노버의 독립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1850년 하노버는 유리한 조건으로 관세 동맹에 가입하게 된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빅토리아 여왕과의 관계에서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아파트 문제, 작센 코부르크 고타 공 알베르트의 우선순위 문제, 샬럿 여왕의 보석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었다.

1851년 11월 18일 헤렌하우젠 궁전에서 사망하여 26일에 같은 장소에 매장되었다.[21] 아들 게오르크 5세가 하노버 왕위와 영국의 작위를 계승하였다.[21]

4. 1. 즉위와 헌법 폐지

1837년 6월 20일, 윌리엄 4세가 사망하자 빅토리아가 영국 여왕이 되었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하노버의 국왕이 되었다. 1837년 6월 28일, 에른스트는 개선문을 통과하며 새로운 영토에 입성했다.[21] 1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처음으로 하노버에는 거주하는 통치자가 생겼다. 많은 하노버 주민들은 자유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인기 있는 총독인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왕자를 국왕으로 선호했지만, 서식스 공작과 케임브리지 공작은 형보다 자신들이 국왕이 되는 어떤 움직임에도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국왕을 묘사한 1849년 5탈러 동전


하노버는 1819년 섭정 왕세자에 의해 최초의 헌법을 부여받았다. 케임브리지 공작은 윌리엄 4세의 하노버 총독으로서 하노버 정부의 철저한 재편을 권고했다. 윌리엄 4세는 1833년 새로운 헌법에 동의했지만, 컴벌랜드 공작(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동의는 구하지도 않았고, 그는 자신의 동의 없이 헌법이 채택된 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헌법의 한 조항은 하노버 영지를 군주로부터 국가로 이전하여 군주의 권력을 약화시켰다.[21]

국왕은 하노버에 도착하자마자 논쟁의 여지가 있는 헌법에 따라 소집된 하노버 의회를 해산했다. 7월 5일, 그는 자신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고, 헌법이 왕국의 필요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헌법 정지령을 선포했다. 1837년 11월 1일, 국왕은 칙령을 발표하여 헌법의 무효를 선언했지만, 헌법에 따라 통과된 모든 법률은 유지했다. 1819년 헌법이 복원되었다. 그의 아들인 조지 왕세자는 이러한 행동을 지지했다.

국왕의 칙령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내각은 모든 공직자( 괴팅겐 대학교의 교수 포함)에게 국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갱신하도록 요구했다. 괴팅겐 7인(그림 형제 포함)은 맹세를 거부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의 법령에 항의하도록 선동했다. 맹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7명은 직위를 잃었고, 국왕은 책임이 가장 큰 3명(야코프 그림 포함)을 하노버에서 추방했다. 7명 중 동방학자인 하인리히 에발트만이 하노버 시민이었고 추방되지 않았다. 국왕 재위 말년에 세 사람은 귀환하도록 초청받았다. 에른스트는 매부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이 사건에 대해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는 유럽, 특히 영국에서 널리 비난받았다. 영국 하원에서 MP인 콜로넬 토마스 페로넷 톰슨은 아직 자녀가 없는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여 에른스트가 영국 국왕이 될 경우, 의회가 에른스트 국왕이 자신의 행동으로 영국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833년 헌법 폐지에 대한 더 중요한 항의는 여러 도시들이 의회 의원을 임명하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그러나 1840년까지 국왕이 의회를 소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의원이 임명되었고, 의회는 8월에 2주 동안 회합하여 1819년 헌법의 수정된 버전을 승인하고 예산을 통과시켰으며 국왕에게 감사를 표명하는 결의안을 보냈다. 의회는 다음 해에 다시 회합하여 3년 예산을 통과시키고 다시 휴회했다.

4. 2. 국내 정책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하노버 왕으로 즉위했을 당시, 하노버 시는 인구 밀도가 높은 주거 도시였으며 다른 많은 독일 수도들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즉위 초기의 정치적 위기가 진정되자, 그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시작했다.[21] 에른스트의 지원으로 하노버 시가지에는 가스등이 설치되었고, 위생 시설이 개선되었으며, 새로운 주거 지역이 개발되었다. 그는 철도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통해 하노버가 주요 철도 교차점이 되도록 하여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844년, 왕은 게오르크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라베스(Georg Ludwig Friedrich Laves)가 제안한 오페라 하우스 건설을 승인했고, 오페라 하우스는 왕이 사망한 지 1년 후인 1852년에 문을 열었다.

왕은 매주 비서와 함께 왕국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누구든 그에게 청원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했다. 비록 에른스트는 비서에게 청원서를 검토하게 하여 사소한 불만은 처리하지 않도록 했지만, 고위직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임명하여 능력 있는 여러 장관들을 확보했다.

에른스트는 하노버에서 정부 관리직에 가톨릭 신자들을 임명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들의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영국에서와 달리 하노버에는 가톨릭 신자들을 제한할 역사적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국 의회에 유대인의 입장을 계속 반대했지만, 하노버의 유대인들에게는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왕은 독일 여러 주들 사이의 우편 연합과 공통 통화를 지지했지만,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관세 동맹인 관세 동맹(Zollverein)에는 반대했다. 그는 프로이센의 지배와 하노버의 독립국 지위 상실을 우려하여, 1834년 하노버와 다른 서독 주들이 결성한 슈타이어파인(Steuerverein)을 지지했다. 1845년 브룬스비크, 하노버, 프로이센은 무역 협정을 체결했고, 1850년 에른스트는 마지못해 하노버가 관세 동맹에 가입하도록 허용했지만, 유리한 조건으로 가입했다.

하노버는 1848년 혁명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소규모 소요는 기병대에 의해 유혈 사태 없이 진압되었다. 에른스트는 시위대의 요구가 부적절할 경우, 왕세자와 함께 영국으로 떠날 것이라고 경고하여 선동을 종식시켰다. 그 후 왕은 1819년 문서보다 다소 자유로운 새로운 헌법을 공포했다.

4. 3. 대외 관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즉위 후 빅토리아 여왕과의 관계에서 여러 갈등을 겪었다. 웰링턴 공작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에게 "쫓겨나기 전에 떠나라"라고 조언했지만, 버드는 웰링턴 공작의 왕실 존중과 에른스트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에른스트는 1840년 11월 빅토리아 공주가 태어날 때까지 빅토리아 여왕의 왕위 계승 예정자였다.[5]

하노버로 간 직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빅토리아 여왕과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아파트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인 켄트 공작 부인 빅토리아를 위해 아파트를 요청했지만,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영국을 자주 방문할 계획이었고, 그의 형인 윌리엄 국왕과 자주 다투었던 켄트 공작 부인에게 아파트를 양보하는 것을 꺼렸다.[6]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작센 코부르크 고타 공 알베르트에게 우선순위를 주는 것 또한 거부했다. 그는 여러 왕족의 지위가 빈 회의에서 정해졌으며, 하노버 국왕이 "종이 왕족 전하"에게 굴복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7] 알베르트를 영국 국민으로 귀화시킨 법률은 그의 우선 순위 문제를 미결로 남겼다.[7]

1843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하노버 국왕으로서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궁궐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환영받았다.[8] 캠브리지 공주 아우구스타의 결혼식에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알베르트 왕자보다 상석을 주장하려 했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강한 밀침"으로 상황을 해결했고, 여왕의 이름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아내의 이름에 매우 가깝게 써서 국왕의 서명 공간을 남기지 않았다.[9]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빅토리아 여왕은 샬럿 여왕이 남긴 보석을 두고도 갈등을 겪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보석이 영국 왕실에 속한다고 주장했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장남인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중재에 들어갔지만, 중재자 중 한 명이 사망하여 결정이 무효화되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새로운 패널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여왕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11]

4. 4. 빅토리아 여왕과의 관계

1837년 윌리엄 4세가 서거하자, 켄트 공작 에드워드의 딸인 빅토리아가 영국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하노버 왕위 계승은 살리카 법에 따라 에드워드의 남동생인 컴벌랜드 공작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계승하게 되면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은 해소되었다.[21]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빅토리아 여왕 즉위 후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웰링턴 공작에게 조언을 구했고, 웰링턴 공작은 "쫓겨나기 전에 떠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버드는 웰링턴 공작의 왕실에 대한 평소 존중과 에른스트가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던 점을 고려할 때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일축한다. 윌리엄 왕의 죽음 직후, 에른스트는 린드허스트 경으로부터 코튼햄 경(대법관)이 외국 군주에게 충성 맹세를 거부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왕은 하노버로 떠나기 전에 서둘러 상원에 출석하여 서기관장 앞에서 의례적으로 맹세에 서명했다. 에른스트는 1840년 11월 빅토리아 공주가 태어날 때까지 빅토리아 여왕의 왕위 계승 예정자였다. 클래런던 경(재무장관)은 "국가가 신경 쓰는 것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왕위 계승과 하노버 국왕 사이에 한 명이 더 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하노버로 간 직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국왕은 조카 빅토리아 여왕과 분쟁에 휘말렸다.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인 켄트 공작 부인 빅토리아와 불편한 관계였고, 체면 때문에 어머니에게 자신의 근처에 거처를 제공하고 싶어 했지만, 너무 가까이 있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 목적으로 그녀는 국왕에게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아파트를 공작 부인에게 양보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국왕은 영국을 자주 방문할 것을 예상하여 런던에 아파트를 유지하고 싶어했고, 그의 형인 윌리엄 국왕과 자주 다투었던 여성에게 양보하는 것을 꺼려했기에 거절했고, 여왕은 화가 나서 어머니를 위해 집을 임대했다. 여왕이 아버지의 빚을 갚으려고 애쓰던 시기에 그녀는 이것을 불필요한 지출로 여겼다. 빅토리아 여왕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자신의 요청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의 두 살아남은 형제들에게도 거절하도록 조언한 것에 대해 더욱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빅토리아 여왕의 예비 남편인 작센 코부르크 고타 공 알베르트에게 우선순위를 주는 것을 거부했다. 에른스트는 여러 왕족의 지위는 빈 회의에서 정해졌고 하노버 국왕이 "종이 왕족 전하"라고 묘사한 사람에게 굴복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알베르트를 영국 국민으로 귀화시킨 법률은 그의 우선 순위 문제를 미결로 남겼다.

상황은 에른스트가 하노버 국왕으로서 영국을 방문한 유일한 방문이 된 1843년 방문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궁궐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따뜻하게 환영받았다. 캠브리지 공주 아우구스타의 결혼식에서 그는 알베르트 왕자보다 상석을 주장하려고 했다. 에른스트보다 48세나 어린 알베르트 왕자는 알베르트가 "강한 밀침"이라고 묘사한 것으로 상황을 해결했고, 여왕의 이름 아래에 그의 이름을 아내의 이름에 매우 가깝게 써서 국왕의 서명할 공간을 남기지 않았다. 국왕은 그에게 원한을 품지 않은 듯 공원에서 산책을 하자고 왕자를 초대했다. 알베르트가 군중에게 떠밀릴 수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자 국왕은 "내가 여기 살았을 때는 당신만큼 인기가 없었고, 그들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소"라고 대답했다. 결혼식 직후 국왕은 낙상으로 부상을 입었고, 알베르트는 동생에게 "다행히도 그는 큐에서 돌에 넘어져 갈비뼈가 다쳤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이 부상으로 그는 빅토리아와 알베르트와의 더 이상의 접촉을 피할 수 있었다. 방문 중 국왕은 상원에서 컴벌랜드 공작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일지에 국왕이 상원에서 연설할 것이냐는 질문에 "아니오, 악마가 나를 부추기지 않는 한 그럴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여왕은 또한 국왕이 토론을 듣는 것을 매우 즐겼지만 자신은 연설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두 군주는 샬럿 여왕이 남긴 보석을 놓고 또 한 번 갈등을 겪었다. 보석을 소유하고 있던 빅토리아 여왕은 보석이 영국 왕실에 속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에른스트 국왕은 보석이 장남인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중재되었고, 중재자들이 하노버에 유리한 결정을 내리려고 하던 바로 그때 중재자 중 한 명이 사망하여 결정이 무효화되었다. 국왕이 새로운 패널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여왕은 국왕 생전에는 새로운 패널을 허용하지 않았고 보석을 착용할 모든 기회를 이용했으며, 이로 인해 국왕은 그의 친구인 스트랭퍼드 경에게 "작은 여왕은 내 다이아몬드로 가득 차서 매우 아름다워 보였습니다."라고 편지를 썼다. 국왕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조지 5세는 이 문제를 추진했고, 1858년 하노버에 유리한 또 다른 결정 이후 보석은 하노버 대사에게 넘겨졌다.

5. 사망과 유산

1851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는 독일 전역을 여행했다. 프로이센 왕비의 초대로 베를린 근교의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을 방문했다.[1] 대공의 아들 세례식을 위해 메클렌부르크를, 옛 연대를 시찰하기 위해 뤼네부르크를 방문했다. 6월에는 80세 생일을 맞아 프로이센 국왕을 초대하여 축하연을 열었다. 그해 여름 후반에는 괴팅겐을 방문하여 새로운 병원을 개원하고 횃불 행렬을 구경했다.[2]

국왕은 영국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계속 유지했고, 스트랭퍼드 경에게 1851년 만국 박람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편지를 썼다.

These exhibitions are really too absurd ... The folly and absurdity of the Queen in allowing this trumpery must strike every sensible and well-thinking mind, and I am astonished the ministers themselves do not insist on her at least going to Osborne영어 during the Exhibition, as no human being can possibly answer for what may happen on the occasion. The idea ... must shock every honest and well-meaning Englishman. But it seems everything is conspiring to lower us in the eyes of Europe.영어

이 박람회들은 정말 너무나 터무니 없습니다... 이런 유치한 일을 여왕이 허락한 어리석음과 불합리함은 분별 있고 생각이 깊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을 것이며, 장관들조차도 박람회 기간 중에 여왕이 적어도 오스본으로 가도록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 놀랍니다.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아무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은... 모든 정직하고 선량한 영국인에게 충격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럽의 눈에 우리의 위상을 떨어뜨리기 위해 공모하는 것 같습니다.한국어[3]

헤렌하우젠 정원 베르가르텐에 있는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국왕의 묘소


국왕은 약 한 달간의 병고 끝에 1851년 11월 18일에 사망했다. 하노버에서는 크게 애도했지만, 영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타임스》는 1면에 관례적인 검은 테두리를 생략하고 "왕족의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좋은 점은 거의 또는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4] 그와 프레데리카 왕비는 헤렌하우젠 정원 베르가르텐에 있는 묘소에 안장되어 있다.[5]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국왕의 대형 기마상은 하노버 중앙역 앞 그의 이름을 딴 광장에 있으며, "충성스러운 백성으로부터 조국 아버지께"라는 독일어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인기 있는 만남의 장소이며, 현지 표현으로 사람들은 "슈반츠 밑에서"(unterm Schwanz) 만날 약속을 한다.[6]

《타임스》가 컴벌랜드 공작으로서 에른스트의 경력을 폄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노버 국왕으로서의 그의 시대와 1848년 하노버의 안정을 유지한 그의 성공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Above all, he possessed a resolute decision of character, which, had it been unfortunately exerted under other conditions, might have produced a very different impression, but which was of the utmost advantage in the crisis of continental thrones. Startled by the din of revolution, and oscillating ignominiously between terror and wrath, and resistance and concession, the royalties of the Continent suffered no little in contrast with a Prince who at least knew his own mind, and was prepared to abide by his opinions. Thus, in the convulsion of Europe, King Ernest maintained the stability of his throne and the tranquility of his people without damage from revolution or reaction. As Continental Kings are actually estimated, he was an able and a popular sovereign, and his memory may find, perhaps, in his ancestral dominions a sympathy which it would be vain to expect in the scenes of his youth or the land of his birth.영어

무엇보다도 그는 단호한 결단력을 지녔는데, 이것은 다른 조건 하에서는 불행하게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대륙 왕좌의 위기에는 매우 유리하게 나타났습니다. 혁명의 소음에 당황하고, 공포와 분노, 저항과 양보 사이에서 수치스럽게 동요하던 왕족들은,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자신의 의견을 고수할 준비가 되어 있던 군주와 대조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유럽의 격변 속에서 에른스트 국왕은 혁명이나 반동의 피해 없이 왕좌의 안정과 백성의 평온을 유지했습니다. 실제로 대륙에서 국왕들이 평가받는 방식으로 볼 때 그는 유능하고 인기 있는 군주였으며, 그의 기억은 아마도 그의 조상의 영토에서 그의 청년 시절의 장면이나 그의 출생지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동정심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한국어[7]

6. 가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는 1815년에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의 딸이자 그의 사촌인 프리데리케(1778년 3월 2일 ~ 1841년 6월 29일)와 결혼했다.[21] 프리데리케에게는 세 번째 결혼이었으며, 결혼식은 5월 29일 노이슈트렐리츠에서, 8월 29일 런던의 칼턴 하우스에서 거행되었다.[21]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의 자녀
이름출생사망비고
(이름 미상)1817년 1월 27일요절[22]
게오르크 5세1819년 5월 27일1878년 6월 12일하노버 왕[21]



두 사람 사이에는 1남 1녀가 태어났다.[22]

7. 칭호 및 영예

1837년 이전 영국 왕자로서의 문장

  • 1771년 6월 5일 – 1799년 4월 23일: 전하 엉스트 아우구스트 왕자[5]
  • 1799년 4월 23일 – 1837년 6월 20일: 전하 컴벌랜드와 테비오트데일 공작[6]
  • 1837년 6월 20일 – 1851년 11월 18일: 폐하 하노버 국왕[7]


훈장수여 국가날짜
가터 훈장영국1786년 6월 2일[1]
영국 국왕의 밀사(후에 영국연합왕국의 밀사)영국1799년 6월 5일[1] (184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영국연합왕국의 최고위 밀사였다.)
엉겅퀴 훈장영국
욕조 훈장영국1815년 1월 2일[1]
왕립 Guelphic 훈장하노버 왕국1815년 8월 12일[1] (1837년 6월 20일 하노버 왕위 계승 후 훈장 수장)
성 패트릭 훈장영국1821년 8월 20일[1]
성 조지 훈장하노버 왕국1839년 4월 23일 (훈장 설립자이자 수장)[8]
왕립 학회 회원영국1828년 4월 24일[1]
알베르트 곰 훈장 대십자장아스카니아 공국1839년 1월 13일[9]
성 스테판 훈장 대십자장오스트리아1839년[10]
충성 훈장 대십자장바덴1829년[11]
코끼리 훈장 기사덴마크1838년 7월 7일[12]
작센-어네스틴 가문 훈장 대십자장어네스틴 공국1839년 8월[13]
검은 독수리 훈장 기사프로이센1815년 5월 21일[14]
붉은 독수리 훈장 대십자장프로이센[1]
루트비히 훈장 대십자장헤세 대공국[15]
황금 사자 훈장 대십자장헤세-카셀1818년 9월 20일[16]
성 후베르투스 훈장 기사바이에른1826년[17]
윌리엄 군사 훈장 대십자장네덜란드1849년 7월 3일[18]
성 안드레아 훈장 기사러시아1819년 9월[19]


참조

[1] 서적 The Complete Peerage St Catherine Press
[2] 간행물 London Gazette 1771-06-29
[3] 백과사전 Ernest Augustus
[4] 서적 A Journal of the Reigns of King George IV and King William IV https://archive.org/[...] Longmans, Green & Co, London 1874
[5] 웹사이트 The London Gazette, Issue 12756, Page 241 https://www.thegazet[...] 1786-05-30
[6] 웹사이트 The London Gazette, Issue 18848, Page 1869 https://www.thegazet[...] 1831-09-13
[7] 웹사이트 The London Gazette, Issue 20798, Page 4295 https://www.thegazet[...] 1847-11-24
[8] 웹사이트 Hanover: Order of St. George 24 http://www.medals.or[...] 2006-12-24
[9] 서적 Staats- und Adreß-Handbuch für die Herzogthümer Anhalt-Dessau und Anhalt-Köthen: 1851 https://books.google[...] Katz
[10] 웹사이트 "A Szent István Rend tagjai" http://tornai.com/re[...]
[11] 서적 ''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 Baden'' https://digital.blb-[...] (not specified)
[12] 서적 Riddere af Elefantordenen, 1559–2009 https://books.google[...] Syddansk Universitetsforlag
[13] 서적 Adreß-Handbuch des Herzogthums Sachsen-Coburg und Gotha Meusel 2020-03-12
[14] 서적 ''Liste der Ritter des Königlich Preußischen Hohen Ordens vom Schwarzen Adler'' https://www.digitale[...] (not specified)
[15] 서적 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s Hessen: für das Jahr ... 1841 https://books.google[...] Staatsverl.
[16] 서적 Kurhessisches Staats- und Addreß-Handbuch: auf das Jahr ... 1827 https://books.google[...] Verlag des Waisenhauses
[17] 서적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s Bayern: 1839 https://books.google[...] Landesamt
[18] 웹사이트 Militaire Willems-Orde: Ernst August https://www.defensie[...]
[19] 서적 Order of the Holy Apostle Andrew the First-called (1699-1917). Order of the Holy Great Martyr Catherine (1714-1917)
[20]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21] 서적 Complete peerage of England, Scotland, Ireland, Great Britain and the United Kingdom, extant, extinct or dormant (Canonteign to Cutts) https://archive.org/[...] The St. Catherine Press, Ltd. 1913
[22] 서적 The Peerage of the British Empire as at Present Existing https://catalog.hath[...] Hurst and Blackett 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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