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 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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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티엔 겔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낙하산 부대원으로 참전했으며, 1948년 런던 올림픽 마라톤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벨기에의 육상 선수이다. 그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선두로 달리다 막판에 역전당하며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선수 경력이 단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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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엔 겔리 | |
|---|---|
| 기본 정보 | |
|  | |
| 본명 | 에티엔 가이 | 
| 출생 | 1922년 11월 26일 | 
| 사망 | 1981년 10월 22일 (58세) | 
| 국적 | 벨기에 | 
| 직업 | 장거리 달리기 선수 | 
| 경력 | |
| 종목 | 육상 | 
| 주요 대회 | 올림픽 | 
| 메달 기록 | |
| 메달 | 올림픽 | 
| 동메달 | 1948년 런던 - 마라톤 | 
| 로마자 표기 | |
| 프랑스어 | Étienne Gailly | 
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겔리는 제2차 세계 대전에 낙하산 부대 소속 군인이었다.[2] 그는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거나, 실패하더라도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1944년 후반, 벨기에 해방 작전에 참여하면서 전쟁으로 황폐해진 고향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2] 
에티엔 겔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낙하산병으로 복무한 벨기에인이다. 1944년 말 고국 해방에 참여하면서 고향의 참혹한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올림픽 금메달을 따거나 실패하더라도 노력하겠다고 맹세했다.[2]
3. 1948년 런던 올림픽 마라톤
겔리는 런던의 벨그레이브 해리어스 육상 클럽 소속 선수였다.[3] 전쟁 후에도 꾸준히 훈련했으나,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는 아니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였으나, 우승 후보로는 주목받지 못했다.[2]
3. 1. 경기 진행
겔리는 마라톤 풀코스 경험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더운 날씨 속에서 초반부터 강하게 레이스를 시작했다. 이 거리에 익숙하지 않았고, 심하고 이례적인 더위와 습도가 탈수 증세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여 코스 중간 지점에서 30초 이상 앞서 나갔다.[3] 32 킬로미터 지점 이후, 한국의 최윤칠 선수와 아르헨티나의 델포 카브레라 선수에게 추격을 당했다.[2] 최윤칠 선수는 곧 지쳐서 레이스를 포기했고, 겔리는 카브레라 선수로부터 선두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역주를 펼쳤다.[2]
경기장과 결승선에 가까워지면서 겔리는 갑자기 힘이 다 떨어졌다. 겔리가 뒤처지자 델포 카브레라와 영국의 톰 리차드가 그를 따라잡았다.[3] 겔리는 선두로 경기장에 들어섰지만, 기진맥진하여 비틀거렸고, 관중들의 응원을 받으며 마지막 랩에서 카브레라에게 추월당했다. 그는 넘어졌고, 그 후 리차드에게도 추월당했다. 다시 넘어졌지만,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워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는 기립 박수를 받으며 3위로 경기를 마쳤다.[4] 카브레라는 2:34:51.6, 리차드는 2:35:07.6, 겔리는 2:35.33.6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5]
3. 2. 극적인 동메달
겔리는 절반 지점에서 선두를 달렸고, 한동안 선두를 유지했다. 32km 지점 이후, 한국의 최윤칠에게 추월당했고, 그 후 아르헨티나의 델포 카브레라에게도 추월당했다. 최윤칠은 곧 지쳐서 경기를 포기했고, 겔리는 카브레라로부터 선두를 다시 찾기 위해 역주했다. 경기장으로 들어오면서 그는 쓰러졌고, 영국의 톰 리처즈에게 추월당했다. 그리고 3위를 하였다.[2]
경기장과 결승선에 가까워지면서 겔리는 갑자기 힘이 다 떨어졌다. 겔리가 뒤처지자 델포 카브레라(아르헨티나)와 톰 리차드(영국)가 그를 따라잡았다. 선두로 경기장에 들어섰지만, 기진맥진하여 비틀거렸고, 관중들의 응원을 받으며 마지막 바퀴에서 카브레라에게 추월당했다. 그는 넘어졌고, 그 후 리차드에게도 추월당했다. 다시 넘어졌지만,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워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는 기립 박수를 받으며 3위로 경기를 마쳤다.[4] 카브레라는 2h 34분 51.6초, 리차드는 2h 35분 07.6초, 겔리는 2h 35분 33.6초로 결승선을 통과했다.[5]
겔리는 탈진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4]
4. 한국 전쟁 참전
겔리와 그의 형제 피에르는 유엔군 소속 벨기에 유엔군 부대원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2] 학당리 전투에서 피에르는 전사하고, 겔리는 부비트랩을 밟아 부상을 입었다.[7] 이 사건은 그의 선수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쳐,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이 단축되었다.[6]
4. 1. 학당리 전투
1951년 학당리 전투에서 겔리는 부비트랩을 밟아 경미한 부상을 입었고,[7] 그의 형제 피에르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2] 겔리와 그의 형제 피에르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5. 은퇴 이후
가이는 1950년 유럽 선수권 마라톤에 출전했고, 그 후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으로 가이는 선수 생활을 조기에 마감해야 했다.
참조
[1] 
서적
 
Un siècle d'histoires en Brabant wallon
 
2007
 
[2] 
서적
 
Les dessous de la régence, 1944-1950
 
2003
 
[3] 
웹사이트
 
Étienne Gailly
 
http://belgraveharri[...] 
2019-01-05
 
[4] 
웹사이트
 
H2g2 – the 1948 London Olympics – Edited Entry
 
https://www.bbc.co.u[...] 
[5] 
웹사이트
 
Athletics at the 1948 London Summer Games: Men's Marathon
 
https://www.sports-r[...] 
2019-01-05
 
[6] 
웹사이트
 
Londres 1948
 
http://marathoninfo.[...] 
[7] 
서적
 
Bérets Bruns en Corée 1950-1953 (Vécu Par Des Bel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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