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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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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르제(Hergé)는 1907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만화가로, 본명은 조르주 레미(Georges Remi)이다. 그는 《땡땡의 모험》 시리즈를 통해 유럽 만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클레르 라인' 스타일을 확립했다. 1920년대 초부터 만화가로 활동하며, 1929년 《소비에트에 간 땡땡》을 시작으로 땡땡 캐릭터를 개발했다. 초기 작품은 논란을 겪었지만, 후기에는 인종, 문화, 정치에 대한 포용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다. 에르제는 1983년 사망했으며, 1990년대 애니메이션, 2011년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그를 기념하여 에르제 박물관이 설립되었고, 소행성 1652 에르제가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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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제
기본 정보
에르제, 틴틴과 스노위 흉상과 함께
에르제, 틴틴 흉상과 함께 (조각가: 나트 뇌장)
본명조르주 프로스페르 레미
출생일1907년 5월 22일
출생지에테르베이크, 브뤼셀, 벨기에
사망일1983년 3월 3일
사망지볼뤼베생랑베르, 브뤼셀, 벨기에
배우자제르멘 키에켄스 (1932년 결혼, 1977년 이혼)
파니 블라민크 (1977년 결혼)
직업만화가
에르제의 서명
서명
대표 작품땡땡의 모험
조, 제트, 조코의 모험
퀴크와 플뤼프케
수상수상 목록
웹사이트에르제 공식 웹사이트
발음
프랑스어 발음 (본명)fr
영어 발음 (본명)ɛər
로마자 표기 (본명)에어제이
프랑스어 발음 (예명)fr
로마자 표기 (예명)에르제
일본어
이름エルジェ
본명조르주 프로스페르 레미 (Georges Prosper Remi)
활동 기간
활동 기간(정보 없음)
장르
장르모험
기타
출처 필요(정보 없음)

2. 어린 시절

에르제는 1907년 5월 22일 벨기에 브뤼셀 에테르비크에서 중산층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며, 브뤼셀에 있는 생-보니파스라는 가톨릭 보수계 학교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9]

1921년 고등학생 때 보이 스카우트에 입단하여 '호기심 많은 여우'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고등학교 보이 스카우트 잡지 〈Jamais assez〉에 꾸준히 일러스트레이션과 만화를 연재했으며, 1923년 벨기에의 보이 스카우트 잡지 〈벨기에 보이 스카우트(LE BOY-SCOUT BELGE))〉에도 만화를 그렸다. 이 무렵부터 이름의 머리글자를 거꾸로 한 RG(프랑스어 문자)에서 따온 '에르제'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9]

3.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

1921년 고등학생 때 보이 스카우트에 입단하여 '호기심 많은 여우(Renard curieux)'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고등학교 보이스카우트 잡지 〈Jamais assez〉에 꾸준히 일러스트레이션과 만화를 연재했으며, 1923년 벨기에의 보이스카우트 잡지 〈벨기에 보이스카우트(LE BOY-SCOUT BELGE))〉에도 만화를 그렸다. 이 무렵부터 이름의 머리글자를 거꾸로 한 RG(프랑스어 문자)에서 취한 '에르제'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중등 교육을 수료한 에르제는 과거 경험을 살려서 일간 신문인 〈20세기(Le Vingtième XXe Siècle)〉신문의 예약 구독부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벨기에 보이스카우트〉에서 땡땡의 기본 골격을 갖춘 만화라고 할 수 있는 《풍뎅이 순찰대장 토토르(Totor, C.P. Des Hannetons)》시리즈를 계속 연재했다. 그 무렵 에르제는 만화 실력을 더 쌓아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껴서 벨기에의 유명한 만화 학교인 생 뤽(Saint-Luc)학교에 다녔지만, 오래 다니지는 못하고 1926년부터 1927년까지 군 복무를 했다.[2]

4. 《땡땡의 모험》 시리즈 탄생

1929년 1월 10일, 〈소년 20세기(Le Petit Vingtième)〉에 《소비에트에 간 땡땡》을 연재하면서 《땡땡의 모험》 시리즈가 시작되었다.[9] 당시 연재 제목은 《소비에트 땅에서의 소년 20세기 기자 땡땡과 밀루의 모험》이었다. 이 만화는 당시 유럽에서 금단의 땅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인기에 힘입어 땡땡의 모험 시리즈는 계속 연재되었다.

에르제의 초기 땡땡 시리즈는 〈20세기〉라는 신문과 신문사의 이사 노르베르 발레즈의 성향인 가톨릭 극우 성향에 맞춰 만화가 전개되었고, 그 당시 유럽의 사회적 분위기는 제국주의적 입장을 옹호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에르제 스스로 자신이 극우적인 만화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훗날 이런 연재만화들은 유치한 반공만화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는데, 특히 《콩고에 간 땡땡》은 당시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현 콩고 민주 공화국)의 원주민들이 무지하여 백인들이 개화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백인 우월주의제국주의를 정당화하여 많은 논란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당연한 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극동에 간 땡땡》시리즈 연재를 앞두었을 때 에르제가 잡지에 "다음 만화는 땡땡이 무지하고 비열한 중국인들을 상대하는 내용의 만화입니다."라고 예고했었던 것이다. 이런 예고 공지에 대해 벨기에에 있던 중국 유학생들이 반발하였는데, 이 가운데 장충런이라는 유학생이 에르제에게 접근했다. 장충런은 에르제와 중국의 문화, 학문, 중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 등을 이야기하였고, 이후로 에르제와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장충런과의 만남은 에르제에게 있어 중대한 전환기가 되었다. 장충런과 대화하면서 에르제는 스토리 라인의 중요성과 참고 자료 조사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의 만화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에 창은 땡땡의 모험 시리즈 중 《푸른 연꽃》에 등장하는 땡땡의 인간적인 친구 창의 모델이 된다.

5. 전환기

1934년, 에르제는 벨기에에 있던 중국 유학생 장충런(張充仁)을 만났다. 장충런은 에르제에게 중국의 문화, 학문, 국제 정세 등을 알려주었고, 둘은 친구가 되었다. 장충런과의 만남은 에르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에르제는 장충런과의 대화를 통해 스토리 라인의 중요성과 참고 자료 조사의 필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만화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1] 장충런은 훗날 《푸른 연꽃》에 등장하는 땡땡의 친구 '창' 캐릭터의 모델이 되었다.[1]

한편, 에르제는 신문 성향에 얽매이는 만화 연재의 부정적인 측면을 고민하던 중, 땡땡의 모험 판권을 원했던 카스테르만(Casterman) 출판사와 계약하여 판권을 넘겼다.[1]

6.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활동

1940년 5월 10일, 독일군벨기에를 침공하면서 에르제는 실직했다. 〈소년 20세기〉가 폐간되었기 때문이다. 에르제는 친독 성향의 신문 〈저녁(Le soir)〉에 취직하여 새 땡땡 시리즈인《황금 집게발 달린 게》를 연재했다.[9] 이 때문에 에르제는 나중에 친나치 전력을 가졌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지만, 한편으론 〈저녁〉신문의 짧은 만화 연재 규격에 맞춰 만화를 그리면서 더 유머와 박진감이 넘치는 땡땡 시리즈를 그리게 되었다.[10] 1942년, 카스테르만 출판사는 컬러 규격 책(64 페이지) 출판을 희망하여, 기존의 흑백 발행과 달리 컬러 발행을 시작했는데, 그 최초의 스타일은 1942년에 출간된 《신기한 별똥별》이다.

7.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활동

1944년 9월 3일, 벨기에 해방으로 〈저녁〉신문에 연재되던 땡땡의 모험 이야기는 종료되었다. 해방 이후 친나치 세력을 척결하려는 벨기에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에르제는 독일군에 의해 관리되었던 신문에 그림을 게재하고 나치스에게 저항하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벨기에 사람들에게 냉대받았다.[10] 따라서 에르제는 2년 정도 실직자로 지내야 했고, 만화계로 복귀할 길도 막막해졌다. 하지만 레지스탕스 계열 출판업자 레이몽 르블랑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만화계 복귀를 도왔다. 그와 함께 작업한 땡땡 잡지 제1호가 1946년 9월 26일에 출간되었다. 〈땡땡〉잡지는 에드가 피에르 자코브나 자크 코랑탱 같이 유럽 만화를 이끌어가는 역량 있는 만화가들을 등단시키고 배출했다.

8. 개인적인 고뇌와 위기

전쟁 이후 에르제는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초판을 새로운 가이드라인에 맞춰 개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전쟁 이후 에르제의 동생(군인)에 대한 염려로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다가 사망했으며, 결혼 생활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1]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에르제는 신경 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밤마다 하얀 악몽을 꾸는 백색 공포증까지 생겨 만화를 그리는 데 지장을 받았다.[1] 스위스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정신분석학자의 만화를 그리지 말라는 조언을 따르지 않고, 1960년에 《티베트에 간 땡땡》을 완성했다.[1] 이 작품은 땡땡과 창의 재회를 통해 인종을 초월한 우정의 가치를 보여주며, 에르제의 땡땡 시리즈 중 걸작으로 꼽힌다.[1] 그러나 이 만화의 배경이 스위스이고, 하얀 악몽으로 땡땡이 소스라쳐서 깨는 장면, 설산이 하얀색이라는 점은 당시 에르제의 정신적 고뇌를 암시한다.[1]

8. 1. 에르제 스튜디오 설립

에르제는 섬세한 기술적 작업과 방대하고 치밀한 조사, 세부적인 일이 요구되는 《달나라에 간 땡땡》을 그리기 위해 공동 작업자를 모집하여 1950년 4월 6일에 에르제 스튜디오를 설립했다.[9] 에르제 스튜디오에서는 《달나라에 간 땡땡》 등 기술적으로 복잡한 작품을 제작하고, 초기 작품을 개작했다.

8. 2. 파니 블라민크와의 관계

1956년, 에르제는 에르제 스튜디오에서 컬러 작업을 맡았던 파니 블라민크와 사랑에 빠지면서 결혼 생활에 위기를 겪었다.[1]

9. 말년 생애

포스트모더니즘 분위기 속에서 에르제는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고 앤디 워홀 등 팝아트 거장들과 교류했다. 1963년 출간된 《카스타피오레의 보석》은 이전의 모험 형식과는 다른 안티 어드벤처 형식으로, 에르제가 과거의 갈등을 청산했다는 점을 보여준다.[9] 1971년에는 미국 원주민과 만나고 중화민국을 방문하는 등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9] 1977년 사실혼 관계였던 파니 블라민크와 재혼했다.[9] 1981년 3월 18일 브뤼셀에서 에르제와 창총젠이 재회했다.[9] 1982년 에르제의 75세 생일을 기념하여 벨기에 항공 우주국이 소행성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9] 1983년 3월 3일, 백혈병폐렴 합병증으로 브뤼셀에서 사망했다.[9]

10. 에르제의 다른 만화들


  • 퀵과 플륍크(Quick et Flupke)》 시리즈
  • 포폴과 비르지니(Popol & Virginie)》
  • 조,제트,조코의 모험(Les Aventures De Jo, Zette Et Jocko》 시리즈

11. 평가 및 영향

에르제는 '클레르 라인' 스타일을 확립하여 유럽 만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제국주의백인 우월주의를 정당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콩고에 간 땡땡》은 당시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현 콩고 민주 공화국)의 원주민들을 무지한 존재로 묘사하여 많은 논란이 되었다.[9]

하지만, 장충런과의 만남 이후 에르제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장충런은 에르제에게 중국의 문화와 학문, 그리고 중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 등을 알려주었고, 이는 에르제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푸른 연꽃》에서 에르제는 중국 문화를 존중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한국 독자들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분이다.[4]

에르제의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계속되었지만, 이로 인해 종전 후 비판을 받기도 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레지스탕스 출신인 레이몽 르블랑의 도움으로 주간지 《땡땡》을 창간하고 연재를 재개할 수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는, 에르제가 초기에는 보수적인 입장이었지만, 점차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2. 기타


  • 에르제(Hergé)라는 필명은 본명 조르주 레미(Georges Remi)의 이니셜 G.R.을 거꾸로 하여 R.G.로 만들고, 이를 프랑스어로 읽은 "에르제"에 "Hergé"라는 글자를 붙인 것이다.[9]
  • 에르제에게는 폴(Paul)이라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벨기에 점령군 사령관을 역임하기도 한 직업 군인이었다. 『땡땡의 모험』 시리즈에서 주인공 땡땡과 스폰츠 대령의 외모는 그가 모델이라고 한다.
  • 그를 기념하여 소행성 에르제가 있다.
  • 2009년 벨기에 오티니 루방라누브에 [http://www.museeherge.com/ 에르제 박물관](Musée Hergé)이 개관했다.
  • 2012년에 에르제의 일생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땡땡과 나』가 공개되었다.

참조

[1] LPD null
[2] 서적 Essay RG. Het fenomeen Hergé
[3] 서적 Hergé. Levenslijnen
[4] 뉴스 What Tintin Taught Europeans About China https://www.wsj.com/[...] 2020-12-26
[5] 뉴스 Opinion {{!}} My Young Mind Was Disturbed by a Book. It Changed My Life. https://www.nytimes.[...] 2022-01-29
[6] 웹사이트 Hergé http://www.casterman[...] Casterman 2016-06-15
[7] 웹사이트 Belgium marks 100th anniversary of Tintin creator https://www.abc.net.[...] 2007-05-23
[8] 웹사이트 Hergé Belgian cartoonist https://www.britanni[...]
[9] 서적 ブリュッセル歴史散歩 中世から続くヨーロッパの十字路 日経BP企画
[10] 기타
[11] 웹사이트 Hergé dans l'ombre de Tintin? http://www.lesoir.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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