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트 루도비카 폰 바이에른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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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폰 바이에른 왕녀는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 1세와 카롤리네 폰 바덴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작센 왕비 아말리에 아우구스테 폰 바이에른과 쌍둥이 자매이다. 1823년 프로이센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결혼하며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즉위한 후 프로이센 왕비가 되었으며, 남편의 예술 활동을 지지하고 오스트리아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남편 사후에는 자선 사업에 헌신하다가 1873년 작센 드레스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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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 루도비카 폰 바이에른 왕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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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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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프로이센 왕비 |
배우자 | 프로이센 왕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
출생일 | 1801년 11월 13일 |
출생지 | 뮌헨, 바이에른 선제후국, 신성 로마 제국 |
사망일 | 1873년 12월 14일 |
사망지 | 드레스덴, 작센 왕국, 독일 제국 |
매장지 | 포츠담, 프리덴스키르헤 지하 묘지 |
종교 | 가톨릭교회 → 개신교 (루터교) |
가문 | |
가문 | 비텔스바흐 가 |
아버지 | 바이에른 왕막시밀리안 1세 |
어머니 | 카롤리네 폰 바덴 |
결혼 정보 | |
결혼일 | 1823년 11월 29일 |
왕비로서의 통치 | |
재위 기간 | 1840년 6월 7일 ~ 1861년 1월 2일 |
2. 생애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카롤리네 폰 바덴 사이에서 태어났다. 쌍둥이 자매로는 훗날 작센 왕비가 된 아말리에 아우구스테 폰 바이에른가 있다.
1823년, 프로이센의 왕세자였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결혼하며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부부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남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동생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 왕위를 계승했다. 엘리자베트 루도비카는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후인 1873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엘리자베트는 뮌헨에서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카롤리네 폰 바덴 사이에서 태어났다.[3] 그녀에게는 일란성 쌍둥이 자매인 작센의 아말리에 아우구스테가 있었는데, 그녀는 훗날 작센의 국왕 요한 1세의 왕비가 되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대공녀 조피(프란츠 요제프 1세와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어머니)와 루도비카(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 일명 '시시'의 어머니) 공주와도 자매 관계였다.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는 그녀의 대녀였으며, 이름도 그녀에게서 따온 것이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엘리제'''라는 애칭으로 불렸다.1823년, 엘리자베트는 재종조부(할머니끼리 자매 관계)인 프로이센의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결혼했다. 이 결혼을 계기로 그녀는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개신교로 개종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동생인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 왕위를 이었다. 왕태후가 된 엘리자베트 루도비카는 독일 통일 이후인 1873년 12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2. 2. 프로이센 왕세자비 시절
1823년 11월 29일, 엘리자베트 루도비카는 훗날 프로이센의 국왕이 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3]와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의 예술 활동과 지적 관심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결혼 당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결혼 조건으로 개신교로 개종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미래의 국왕이 될 남편 옆에서 왕비가 되기 위해 스스로 개혁 신앙의 장점을 연구한 뒤, 확신이 설 경우에만 개종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4] 결국 결혼 7년 만인 1830년 5월 5일, 엘리자베트는 공식적으로 개신교로 개종했다.[5] 그녀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고 전해지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828년에 한 차례 유산을 겪은 후, 엘리자베트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6]2. 3. 프로이센 왕비 시절
18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즉위하면서 프로이센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프로이센 정치에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특히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제국 사이의 긴밀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데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는 헌신적인 아내였으며, 남편이 오랜 기간 병상에 있을 때 정성껏 간호했다. 처음에는 조카며느리인 영국의 빅토리아 공주 (가족 내에서는 비키로 불림)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엘리자베트가 남편을 잃고 힘든 시기를 보낼 때 빅토리아 공주가 그녀를 돌보고 위로하면서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다. 엘리자베트는 빅토리아 공주의 친절을 잊지 않았고, 유언을 통해 당시의 관례를 깨고 빅토리아 공주에게 자신의 보석을 남겼다. 이 보석들은 본래 프로이센의 왕비이자 독일 황후였던 시누이 아우구스타에게 상속될 예정이었기에, 이 일로 아우구스타는 빅토리아 공주를 용서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엘리자베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동생인 빌헬름 1세가 프로이센 왕위를 계승했다. 왕태후가 된 엘리자베트 루도비카는 독일 통일 이후인 1873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
2. 4. 왕태후 시절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1861년 1월 2일에 사망한 후, 엘리자베트는 왕태후로서 상수시와 샤를로텐부르크, 슈톨첸펠스 성 등지에서 조용히 생활했다. 그녀는 남편을 기리는 자선 사업에 헌신했으며, 왕위를 계승한 시동생 빌헬름 1세 (독일 황제)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빌헬름 1세는 그녀를 진정한 친구로서 존경했다.엘리자베트는 1873년 12월 14일, 쌍둥이 여동생인 아말리에 아우구스테 작센 여왕을 만나기 위해 드레스덴을 방문하던 중 사망했다.[3] 같은 해 12월 21일, 그녀의 유해는 포츠담의 평화교회에 안장되어 남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곁에 묻혔다.[1]
3. 가계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프리드리히 미하엘
크리스티안 3세
나사우-자르브뤼켄의 카롤리네
마리아 프란치스카
요제프 카를
엘리자베트 아우구스테 조피
카롤리네 폰 바덴
카를 루드비히
카를 프리드리히
헤센-다름슈타트의 카롤리네 루이제
아말리에 폰 헤센다름슈타트
루트비히 9세
츠바이브뤼켄의 카롤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