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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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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성대군은 조선 환조의 장남으로, 고려 말 추밀에 임명되어 발란건공으로 완성군에 봉해졌다. 정몽주, 길재 등과 교류했으나 이성계를 꺼려 반란을 모의하다 실패했다. 권세가를 구타하여 사망케 한 죄로 옥사했으며, 사후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불천지위로 추서되었다. 1871년 효민의 시호가 추서되었고, 1872년 영성대군 영종정경에 추봉되었다. 완창대군 이자흥의 아들 이교주와 동일인물로 해석되기도 했으나, 《태조실록》에는 이천계가 환조의 적사로 기록되어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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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대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천계 (李天桂)
군호완성군 (完城君)
시호효민 (孝愍)
추증 시호영성대군 (永城大君)
생몰년1315년 (1344년 이전 출생) ~ 1376년
가계
아버지 (생부)이자춘
아버지 (양부)이자흥
어머니한산 이씨 부인
배우자밀양 박씨 부인
자녀아들 5명, 딸 3명 (이난, 이섭, 이척, 이실, 이종)
기타 정보
추증1872년 고종에 의해 영성대군으로 추증됨
존숭태조가 환조의 적장손인 이천계를 극진히 대우함

2. 생애

환조 이자춘과 그의 첫 부인 한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친형으로는 이원계가 있었고, 이복 동생으로는 태조 이성계, 의안대군 이화 등이 있었다.[1] 그는 본래 환조의 아들이었으나, 후일 완창대군(完昌大君)으로 추증된 큰아버지 이자흥(塔思不花)의 양자가 되었다.[1] 이자흥에게는 아들 교주(咬住)가 있었으나 어려서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1]

고려 말에는 추밀(樞密) 벼슬에 임명되었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데 공을 세워(撥亂建功)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1]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등 당대의 명망 높은 인물들과 도의로서 교류하였다.[1]

2. 1. 이성계와의 관계

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이다. 《태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이천계는 환조 이자춘이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이 적사(嫡嗣)임을 내세우며 마음속으로 이성계를 꺼렸다고 한다.[1]

이천계는 누이인 강우(康祐)의 처 이씨와 함께 이성계를 상대로 반란을 모의하기도 했다. 이성계의 종이었으나 양민임을 주장하는 사람과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1] 그러나 이성계는 이를 문제 삼지 않고 이전과 같이 대우하였다.[1]

1376년 여름, 어떤 권세가가 이천계 부하의 아내를 빼앗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격분한 이천계가 그 권세가를 구타하여 죽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옥에 갇히게 되었다.[1] 이천계는 과거에 권세 있는 재상을 비판한 적이 있었는데, 이 재상이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다.[1] 이성계는 이천계를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석방을 요청했으나, 재상의 반대로[1]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이천계는 옥중에서 사망하였다.[1]

이성계는 이천계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으며, 남겨진 그의 자녀들을 직접 돌보아 길렀고 혼인까지 주관하였다.[1] 또한 생활이 어려웠던 강우의 처에게도 노비를 내려 생계를 도왔다.[1] 조선 건국 후에는 이천계의 아들들을 모두 높은 관직에 임명하였다.[1] 이성계는 특별히 이천계에게 의정부좌찬성의 벼슬을 추증하고 제수를 내렸으며, 불천지위로 삼았다.

2. 2. 사망

1376년 여름, 어떤 권세가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영성대군 이천계 부하 관료의 아내를 빼앗는 사건이 발생했다.[1] 이에 분노한 이천계는 그 권세가를 직접 구타하였는데, 그 사람이 사망하면서 이천계는 살인죄로 투옥되었다.[1]

이천계는 과거에 권세를 부리던 어떤 재상을 꾸짖어 욕보인 적이 있었는데, 이 일로 감정을 품고 있던 재상이 이천계가 투옥되자 그를 죽이려 하였다.[1] 이복동생인 이성계는 이천계를 변호하고 구원하기 위해 힘써 노력했으나, 다른 대신들의 반대로 결국 그를 구해내지 못했다.[1] 결국 이천계는 옥중에서 사망하였다.[1]

태조실록》 총서에는 이 사건에 대해 "병진년(1376년) 여름에 이르러 어느 사람이 천계의 관하 사람의 이미 혼인한 아내를 빼앗으므로, 천계가 노하여 구타해 죽이니, 천계를 마침내 옥에 내려 가두었다. 천계가 일찍이 권세를 부리는 재상(宰相)을 꾸짖어 욕하였으므로, 재상이 드디어 그전 감정으로써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태조가 변명하여 구원하고 힘써 청하였으나, 마침내 구원하여 내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이를 슬피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1]

이성계는 형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그의 자녀들을 직접 돌보았고, 혼인 등 대소사를 주관하였다.[1]

2. 3. 사후

이성계는 특별히 이천계에게 의정부 좌찬성추증하고 제수를 하사하였으며 불천지위를 내렸다. 1871년(고종 8년)에는 효민(孝愍)이라는 시호가 추서되었고, 1872년에는 태조의 4대조상 추존왕의 자손들을 추서할 때 영성대군(瀛城大君) 영종정경에 추봉되었다.

묘는 함흥 주동사 축전동(州東社 木丑田桐) 자좌(子坐)에 안장되었으며, 비석이 퇴락하여 1866년(고종 3년)에 비석과 신도비를 개수(改竪)하니 성균관 좨주 금곡(錦谷) 송래희가 신도비명을 지었다. 세덕사(世德祠)에 배향되었다.

3. 이교주와의 동일인물 논란

영성대군 이천계는 한때 양아버지 완창대군 이자흥의 아들 이교주와 동일 인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자흥에게는 교주라는 아들이 있었으나 어려서 요절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천계가 그의 양자가 되면서 혼란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자춘의 신도비명에는 아들로 이원계, 이성계, 이화 세 명만 언급하고 있어 후대에 혼란을 더했다. 《태조실록》 총서에는 이천계를 환조가 세상을 떠난 뒤 스스로 적사(嫡嗣)라 여겨 마음속으로 태조를 꺼렸다고 기록하면서도, 글 말미에는 '천계는 곧 교주(咬住)이다'라고 덧붙여 기록 자체에 모순이 존재한다. 이러한 《태조실록》 기록의 불일치와 이자춘 신도비명의 기록 부재 등으로 인해 이천계와 이교주가 동일 인물인지에 대한 논란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900년(광무 4년) 7월 7일, 종정원경(宗正院卿) 완순군 이재완은 고종에게 "영성대군 이천계는 완창대군 이자흥의 소생임이 판명되었다"고 주장하며, 영성대군의 작위에서 '대(大)' 자를 제외해야 한다고 상주하였다. 이는 이천계를 이자흥의 친아들인 이교주와 동일시한 해석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태조실록》 원문에서 이천계를 환조의 적사(嫡嗣), 즉 적통을 이은 아들이라고 명확히 기록한 부분이 확인되면서, 이재완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한편, 1455년(세조 1년) 세조는 즉위 초 신하들에게 공물을 지급하는 문제를 논의하던 중, "이천계는 태조의 서제(庶弟)인데도 스스로 정통파(正派)인 것처럼 행세하며 태조를 모해(謀害)하려 하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는 이천계에 대한 당시 왕실 내부의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4. 가족 관계


  • '''아버지''' : 환조(桓祖, 1315 ~ 1360)
  • '''어머니''' : 한산 이씨(韓山 李氏, ? ~ 1333)
  • * 부인 : 부부인 밀양 박씨(府夫人 密陽朴氏) - 판부사(判府事) 박종건(朴宗健)의 딸.
  • ** 장남 : 밀양군 이란(密陽君 李蘭, 1357 ~ 1428)
  • ** 차남 : 밀은군 이섭(密恩君 李攝)
  • ** 삼남 : 밀춘군 이척(密春君 李陟)
  • ** 사남 : 밀릉군 이실(密陵君 李實)
  • ** 오남 : 밀선군 이종(密善君 李種)
  • ** 장녀 : 전주 이씨 - 판서(判書) 최천보(崔天寶)에게 출가.
  • ** 차녀 : 전주 이씨 - 참판(參判) 최천봉(崔天奉)에게 출가.
  • ** 삼녀 : 전주 이씨 - 참판(參判) 태석란(太石蘭)에게 출가.

참조

[1] 서적 https://books.google[...] National Culture Promotion Council
[2]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2023-04-20
[3]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023-04-20
[4]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023-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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