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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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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균관은 고려 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시대에 최고 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은 유서 깊은 교육 기관이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현재 서울)에 위치하며, 유교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왕조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성균관은 문묘, 명륜당, 기숙사, 도서관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자, 음서 등을 통해 입학한 학생들에게 유교 경전, 역사, 문학 등을 교육했다. 학생들은 자치 기구인 재회를 통해 운영에 참여하고, 정치적 문제에 대해 상소하는 등 유생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학원으로 격하되었으나, 광복 후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하며 현재까지 유교 문화 계승과 학문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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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서울 문묘와 성균관
한자成均館
로마자 표기Seonggyungwan
종류사적
지정 번호143
지정일1964년 11월 10일
면적81,673m²
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1
소유국유
시대조선 시대
문화재청 번호13,01430000,11
건물 정보
지정 명칭서울 문묘 및 성균관 〈대성전·동무·서무·삼문·명륜당〉
종류보물
지정 번호141
지정일1963년 1월 21일
수량5동
문화재청 번호12,01410000,11
명륜당
명륜당
문묘 대성전
문묘 대성전
역사
설립 시기고려 시대 국자감 (國子監)
조선 시대 명칭성균관 (成均館)
역할조선 시대 최고 교육 기관
주요 시설
문묘공자를 모시는 사당
명륜당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

2. 연원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은 개경에 있던 국자감이었다. 고려 충렬왕 24년(1298년)에 국자감은 '''성균감'''(成均監)으로, 충선왕 즉위년(1308년)에는 성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8] 공민왕 5년(1356년)에는 국자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으로 복구되었다.[8]

'성균'은 주례의 대사악에 나오는 용어로, 음악을 조율하는 것처럼 어그러짐을 바로잡고,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 때부터 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을 가리키던 이름인 태학(太學)으로도 불렸다.

2. 1. 고려 시대

개경에 세워진 국자감이 고려 충렬왕 24년(1298년) '''성균감'''(成均監)으로 바뀌었다가[8] 충선왕 즉위년(1308년)에 성균관으로 바뀌었다.[8] 공민왕 5년(1356년)에는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복구되었다.[8]

공민왕 초까지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의 기술학부도 성균관에서 교육하였으나, 이후 분리되어 성균관은 유학 교육기관만 전담하는 기관이 되었다.[8]

'성균'은 주례의 대사악에 나오는 용어로, 음악을 조율하는 것과 같이 어그러짐을 바로잡고, 지나치고 모자라는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고구려 때부터 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을 가리키던 이름인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다.

2. 2. 조선 시대

고려 충렬왕 24년(1298년) 개경에 세워진 국자감이 '''성균감'''(成均監)으로 바뀌었다가[8] 충선왕 즉위년(1308년)에 성균관으로 바뀌었다.[8] 공민왕 5년(1356년)에는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복구되었다.[8]

공민왕 초까지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의 기술학부도 성균관에서 교육하였으나, 그때부터 따로 분리하여 성균관은 유학 교육기관만 전담하는 기관이 되었다.[8]

조선 시대에는 성균관이 한양과 개성에 한 곳씩 두 개가 있었다. 지사와 동지사가 있으나 실질적으로 정삼품 대사성이 최고 책임자이다. 태조 4년(1395년)에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숭교방(崇敎坊) 부근(현재의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터를 잡고 성균관을 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완공하였다.[8]

'성균'은 주례의 대사악에 나오는 용어로, 음악을 조율하는 것과 같이 어그러짐을 바로잡고, 지나치고 모자라는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 때부터 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을 가리키던 이름인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다.

태조 7년(1398년)에 성균관을 한양으로 옮겨 유교 교육 기관으로 삼았다.[4] 조선이 성균관을 설립한 목적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조선의 성현을 제사하고, 뛰어난 유생들을 모아 유학을 강론하여 유교 국가인 조선 왕조를 교육적으로 뒷받침하는 데 있었다.[4]

조선 시대에는 수도 한양(현재 서울특별시종로구 명륜동)의 숭교방과 개경(고려 시대의 옛 수도)에 있었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로 이루어진 문묘(공자와 석학들의 사당), 명륜당(강의실), 동재·서재(기숙사), 존경각(도서관)으로 구성되었다.[4]

연산군(1494~1506년) 재위 시에는 사간원경연이 폐지된 것과 더불어 성균관 또한 유희 장소로 전락하였다.[3] 1887년에는 경학원을 설치하였고, 1894년갑오개혁을 거쳐 이듬해 성균관 관제(칙령 136호)가 반포되었으나 개혁은 순조롭지 못하였고, 일제강점기에 경학원으로 계승되었다.[5]

성균관대학교는 성균관을 전신으로 하고 있다.[6]

대한민국의 1000 지폐 도안으로 채택되어 있다.

3. 명칭의 유래

고려 충렬왕 24년(1298년) 개경에 세워진 국자감이 '''성균감'''(成均監)으로 바뀌었다가[8] 충선왕이 즉위한 1308년에 성균관으로 바뀌었다.[8] 공민왕 5년(1356년)에는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복구되었다.[8]

'성균'은 주례의 대사악에 나오는 용어로, 음악을 조율하는 것과 같이 어그러짐을 바로잡고, 지나치고 모자라는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고구려 때부터 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을 가리키던 이름인 태학(太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 성(成, RR영어: Seong) – 이루다, 달성하다. 능력 있고 성공적인 사람이 되거나 승리하다. “인성을 완성하거나 발전시키다”.
  • 균(均, RR영어: Gyun) – 균형, 존재하다. 사회적 기준이나 규범에 따라 문화를 강화하다. “좋은 사회를 건설하다”.
  • 관(館, RR영어: Gwan) – 기관, 학원, 대학교.

4. 입학 자격 및 교육 과정

성균관 유생은 '학생' 또는 '성균관 학생'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기숙사인 '재(齋)'에 머물며 학령(學令)을 엄격히 지켜야 했다. 학생 자치 활동으로 재회(齋會)가 있었고, 장의(掌議)·색장(色掌) 등이 회장과 간부를 맡았다. 장의는 재회를 이끌고 학령 위반 유생을 출재(黜齋, 퇴학)시킬 권한이 있었다. 사문유사(斯文有事)나 토역(討逆) 시에는 장의 발의로 연명(聯命) 상소인 유소(儒疏)를 올렸고, 이 모임을 대의사(大議事)라 했다. 유소 시 사학(四學)에서 호응, 궐문 앞에 연좌하여 왕의 비답(批答)을 기다렸다. 유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식사를 거부하는 권당(捲堂)이나, 성균관을 비우는 공관(空館)이라는 동맹 휴학을 했다. 이는 식자층 여론을 환기하는 역할을 하였다.[1]

성균관 학생들은 재회(斎會)라는 자치 회의를 통해 여러 문제를 논의했다. 장의(掌議), 색장(色掌), 조사(曹司), 당장(堂長) 등의 임원이 있었고, 기숙사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나뉘었다. 성적 우수 상급생과 신입생은 각각 전방(前榜)과 신방(新榜)으로 회의에 참여했다. 재회는 학생 처벌 권한이 있었고, 심하면 출재(黜齋, 제적)했다. 때로는 정치에 관여,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식사와 수업을 거부하는 공재(空齋)를 하기도 했다.[7]

4. 1. 입학 자격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우선적으로 성균관 입학 기회가 주어졌다. 그 외에 선발시험인 승보(升補)나 음서를 통해서도 입학할 수 있었다. 성균관 입학 시험은 매우 어려웠으며, 조선 시대 상류층인 양반이나 왕족의 자제만 응시할 수 있었다. 성균관에 입학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 두 차례의 입학 시험에 합격하거나, 승보(陞補)와 음서(蔭敍) 두 가지 시험 중 하나를 통해 입학하는 것이었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입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정원은 200명이었으나 유동적이었다.[1]

4. 2. 교육 과정

성균관의 주요 서면 언어는 한자였다. 성균관의 교육은 주로 유교 관련 내용이었으며, 학생들을 관직에 진출시키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학생들은 법, 의학, 통역, 회계, 궁술, 수학, 음악, 예절 등도 공부했지만, 주된 목표는 학생들이 높은 단계의 국가 공무원 시험(과거)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과거제와 마찬가지로, 이 시험들은 글쓰기 능력,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 그리고 국가 운영(통치)에 대한 제안을 평가했다. 의학, 통역, 회계, 법률 분야의 전문가를 선발하기 위해 기술 과목도 포함되었다. 성균관 설립 당시 학생 수는 150명이었고, 1429년에는 200명으로 증가했다. 모든 학생은 남성이었으며 여성은 출입이 금지되었다.

성균관 입학 시험은 매우 어려웠으며, 조선 시대 상류층인 양반이나 왕족의 자제만 응시할 수 있었다. 성균관에 입학하는 방법은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 두 차례의 입학 시험에 합격하거나, 승보(陞補)와 음서(蔭敍) 두 가지 시험 중 하나를 통해 입학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었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입학할 기회가 주어졌다.

학생들은 전액 장학금을 받고 매우 편안하게 생활했으며, 하인들이 시중을 들었다.[1] 교육 방법에서는 일제 강의보다 개별 지도가 중시되었다. 사서오경의 “강독”, 독서를 통해 배운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기르는 “제술”, 특히 의(疑), 의(義), 논(論), 부(賦), 표(表), 송(頌), 명(銘), 대책(對策), 기(記) 등이 중요하였다. 고전의 독해와 작문 능력이 개별 지도 방식으로 함양되었고, “강”(진급 시험)을 매일 실시함으로써 학생들 간의 경쟁을 유도하였다. 이러한 지육과 더불어, 선현의 가르침에 따라 예의를 중시하는 덕육을 중요시함으로써, 유교적 교양인을 양성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7]

성균관의 학생은 斎生(재생)이라 불렸다. 특히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자는 상재생이라 불렸고, 선발 시험인 승보나 음서로 합격한 자는 하재생이라 불렀다. 재생의 정원은 초기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부터 20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말기에는 100명으로 줄었다. 과거(소과)에 합격하면 입학할 수 있었다(정원에 미달하는 경우에는 추가 시험으로 충원하였다). 성적 우수자는 대과의 1차 시험(초시)이 면제되었다. 재생들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국가로부터 '''섬학전'''(贍学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를 받았고, 학비 등은 양현고가 지급하였다. 또한, 성균관에는 원점제(原點制)가 있어, 이는 제대로 된 생활을 하는지에 따라 점수를 매기는 제도로, 아침과 저녁을 먹으면 1점씩이며, 300점을 얻으면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또한 재생들이 하는 자치 회의를 재회(斎會)라 불렀고, 장의(掌議), 색장(色掌), 조사(曹司), 당장(堂長) 등의 임원을 두고, 성균관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였다. 또한, 기숙사 운영 면에서는 동재(東齋), 서재(西齋)를 두었고, 그 외에도 상급생 성적 우수자는 전방(前榜)으로, 신입생 성적 우수자는 신방(新榜)으로 회의에 참여하였다. 또한 재회는 재생을 처벌할 권한이 있었고, 최악의 경우 출재(黜齋) 즉, 제적되었다. 때로는 정치에 관여하여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식사와 수업을 거부하는 공재(空齋)를 하기도 하였다.

5. 역사

성균관은 1398년(태조 7) 조선 건국과 함께 한양(서울)에 설립된 조선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이었다. 고려 시대 개경(개성)에 있던 성균관을 한양으로 옮겨 유교 교육 기관으로 삼았다.[4] 조선 시대 성균관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제사하고, 유생들에게 유학을 가르쳐 유교 국가의 이념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4]

조선 시대 성균관은 수도 한양(서울특별시종로구 명륜동)의 숭교방과 개경에 위치했다. 주요 시설로는 대성전과 동무·서무(문묘), 명륜당(강의실), 동재·서재(기숙사), 존경각(도서관) 등이 있었다.[4]

연산군 대(1494~1506년)에 이르러 성균관은 유희 장소로 전락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3] 이후 갑오개혁(1894년)을 거쳐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개편을 시도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경학원으로 격하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5]

해방 이후 성균관은 원래 이름을 되찾고, 성균관대학교가 설립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6] 성균관의 역사와 전통은 대한민국의 1000원 지폐 도안에도 반영되어 있다.

5. 1. 조선 전기

비천당


1398년(태조 7) 조선 태조는 숭교방(崇敎坊 : 명륜동)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고려 제도대로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다.

그러나 성균관이 완성된 다음 달인 1398년 8월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태조는 퇴위하고 정종이 즉위하였다. 정종은 재변이 일어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유생의 교육은 개성의 성균관에서 실시하였다.

태종은 즉위 후 친히 문묘에서 제사지내고, 개성 성균관을 중수하고, 땅과 노비를 지급하였으며, 성균관에서 벽송연이 있을 때 술과 고기를 하사하여 격려하였다. 또한 왕세자를 성균관에 입학시키고 가르치게 하였는데 이후 상례가 되었다.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한 이후 문묘를 재건하였다. 1407년(태종 7) 명륜당을 중건하고, 묘정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동, 서재를 수리, 보완하고 새로 식당을 지었다. 1425년(세종 7) 동, 서재를 수리하여 온돌로 개수하였다. 1472년(성종 3)에는 전사청을 세웠고, 1475년(성종 6)에는 존경각을 세워 수만 권을 보관하였다. 1490년(성종 21)에는 정록청 북쪽에 향관청을 세웠다. 1407년에 문묘가 재건된 후 성종 때 대체적으로 보완 공사가 완성되었다.

성균관 옛 캠퍼스 배치도


1785년 성균관 지도


성균관(成均館)은 1398년 9월 25일 한양(서울)에 설립되었다.

5. 2. 조선 중기

태조는 1398년 숭교방(崇敎坊 : 명륜동)에 성균관 건물을 준공하고 고려 제도대로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재(齋)를 두었다.[1] 그러나 성균관이 완성된 다음 달인 1398년 8월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태조는 퇴위하고 정종이 즉위하였다. 정종은 재변이 일어나는 것을 불길하게 여겨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유생의 교육은 개성의 성균관에서 실시하였다.[1]

태종은 즉위 후 친히 문묘에서 제사지내고, 개성 성균관을 중수하고, 땅과 노비를 지급하였으며, 성균관에서 벽송연이 있을 때 술과 고기를 하사하여 격려하였다. 또한 왕세자를 성균관에 입학시키고 가르치게 하였는데 이후 상례가 되었다.[1] 태종은 한양으로 재천도한 이후 문묘를 재건하였다. 1407년(태종 7) 명륜당을 중건하고, 묘정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동, 서재를 수리, 보완하고 새로 식당을 지었다. 1425년(세종 7) 동, 서재를 수리하여 온돌로 개수하였다. 1472년(성종 3)에는 전사청을 세웠고, 1475년(성종 6)에는 존경각을 세워 수만 권을 보관하였다. 1490년(성종 21)에는 정록청 북쪽에 향관청을 세웠다. 1407년에 문묘가 재건된 후 성종 때 대체적으로 보완 공사가 완성되었다.[1]

국립 최고교육기관인 성균관은 유학교육 최고의 전당으로서 유학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조선왕조의 지원에 힘입어 계속 발전하여 성종대까지는 인재의 양성이라는 교육기능을 그런대로 발휘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유학교육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면서 성균관을 비롯하여 서울의 4부학당과 지방의 향교 등 국립교육기관의 교육이 모두 쇠퇴하게 되었다.[1]

연산군은 한글로 쓰여진 비난벽보가 나붙는다 하여 한글의 교수•학습을 금지시키고, 성균관 유생들이 국정을 비판하는 일을 금지시켰으며, 방화벽을 세우거나 유생을 벌주기도 하였다. 결국에는 성균관을 철거하고 사냥과 연회의 장소로 삼았으며, 성균관의 관원을 줄이기도 하였다.[1]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침체된 성균관 등의 학교교육을 진흥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연산군 때 폐지된 교육관례들을 복구시키고, 성균관과 4학도 수리 복구하도록 하였다. 1517년(중종 12)에는 밭 100결을 성균관의 학전으로 하사하고, 경작을 위해 노비 80구를 성균관에 주도록 명하여 성균관 교육 진흥의 재원으로 보태도록 하였다. 이렇듯 중종 시기 관학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좋은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문반직에 나아가는 것이 정치적으로 출세를 보장받고, 사회적으로 특권적 지위를 누리며,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학문 탐구에 열중하기 보다는 남보다 빨리 관직을 얻는 방법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조선왕조 교육제도의 결함, 즉 각급학교의 이수연한과 상급학교로의 진학에 관한 규정의 부재 및 교육제도와 과거제도의 유기적 연관 장치의 부재 때문이다.[1]

명종 재위 중에 교육기능은 유지하고 있었으나 학교교육은 별로 호전되지 못하였다. 중종대와 마찬가지로 유생이 정원에 미달하는 경우가 많았고 교육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과 4학이 계속 부진을 면치못하고, 지방의 향교가 교육기능조차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쇠퇴하게 되자 지방에서는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하여 계속 증설되어 갔다.[1]

5. 3. 조선 후기

태종이 한양으로 재천도한 이후 1407년(태종 7) 명륜당을 중건하고 묘정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동, 서재를 수리, 보완하고 새로 식당을 지었다. 1425년(세종 7) 동, 서재를 수리하여 온돌로 개수하였다. 1472년(성종 3)에는 전사청을 세웠고, 1475년(성종 6)에는 존경각을 세워 수만 권을 보관하였다. 1490년(성종 21)에는 정록청 북쪽에 향관청을 세웠다. 1407년에 문묘가 재건된 후 성종 때 대체적으로 보완 공사가 완성되었다.[1]

학교 교육의 부진을 해결하기 위해 1582년(선조 15)에 선조이이에게 선비를 양성하는 방법을 만들라고 하였다. 이에 이이는 「학교사목」을 정하여 올렸으며, 일종의 교육 헌장과 유사한 「학교모범」을 지어 학령의 미비점을 보완하였다. 그러나 이를 시행하는 데 주역을 담당하였던 이이가 2년 후 사망하였고, 10년 뒤인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성균관 등의 학교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학교 교육은 한동안 공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1]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군이 철수한 다음 해인 1601년 성균관 대사성 이수광의 주관 하에 공사가 진행되어 1602년 대성전이 중건되었다. 재력 부족으로 문묘 시설은 1603년에, 명륜당은 1606년에 이르러서야 완공되었다. 그리고 1626년(인조 4)에 이르러 존경각, 정록청, 식당 등의 부속 건물과 문묘의 묘정비도 복구되었다.[1]

17세기에도 선비들의 관직 추구열은 더욱 고조되었다. 과거 시험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유생들이 많아지면서, 인조, 효종 대에는 성균관에 거주하는 유생의 수가 적을 때는 20~30명, 많을 때는 50~60명을 넘지 않았으며, 그나마 명문가 자제는 없고 지방에서 온 가난한 선비밖에 없었다.[1]

이에 대한 대책으로 1634년(인조 12)에는 예조에서 「학교권장조목」을 올렸고, 1663년(현종 4)에는 관학 유생들의 학업을 권장하기 위해 고강과 시제를 다시 실시하고, 우등자 5명을 뽑아 성균관이 그들의 점수를 기록하여 예조에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문과 초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1]

1664년(현종 5)에는 비천당이 새로 건립되고, 일양재와 벽입재가 신축되었다. 1701년(숙종 27)에는 계성사가 세워졌다. 1742년(영조 18)에는 탕평비와 그 비각이 건립되고, 1743년에는 육일각이 세워졌다.[1]

영조 대에는 대폭적인 재정 지원과 권학책이 보완됨으로써 성균관 교육이 재흥의 기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영조는 쌀, 콩, 붓, 먹, 종이 등 각종 운영 경비와 재정 지원을 강화하고, 유생의 정원을 늘렸다. 필요한 경우에는 수시로 선혜청미나 사섬목, 호조전, 병조포 등을 성균관에 보내어 지원하였다.[1]

정조 대에는 문과 응시의 허용 문제가 큰 진전을 보이면서 서얼 출신의 생원, 진사가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서원의 확대, 집권층의 불공정한 과거 제도 운영, 재정 기초였던 학전의 감소 등의 영향으로 교육 기능이 약화되었다.[1]

1869년(고종 6) 부진해진 성균관의 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의정부에서 「태학별단서」를 제출하였다. 대원군은 1865년부터 서원 철폐를 단행하다 반발이 심하여 중단하였는데, 이 점을 미루어볼 때 「태학별단서」는 서원을 철폐하고 성균관을 명실상부한 교육 기관으로 다시 정비하기 위한 준비 작업의 일환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871년 신미양요와 1873년 대원군의 하야 등으로 성균관 교육 강화 작업은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1]

1880년대에는 개화 분위기 속에서 육영공원과 같은 신학문을 가르치는 국립 교육 기관은 재정 지원이 충분했지만, 성균관 재정은 넉넉하지 않았다. 1887년(고종 24)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성균관에 경학원(經學院)을 설립하였으나, 재정이 궁핍하여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1]

5. 4. 근대 시기

1894년 조선에서 갑오개혁을 통해 교육의 근대화 작업이 추진되면서, 기존의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을 근대적인 교육기관으로 개편하고자 했다. 우선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성균관의 입학 자격자가 없어졌고, 인재를 양성하여 관리로 배출한다는 기존의 교육 기능도 더 이상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정부는 성균관 관제를 새로 제정하고 경학과(經學科)를 설치하여 근대적 고등 교육 기관으로 개편하고자 하였다.[5]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개편된 후에는 사서삼경 외에도 본국지리, 본국사, 세계지리, 세계사, 수학, 역사, 문학 등의 교과목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입학 시험과 졸업 시험을 치렀고, 3년제 학교로 2학기제였다. 졸업생에게는 붉은 종이에 크게 쓴 졸업 증서를 수여하였다. 성균관에서는 매년 연말 시험이 끝나고 졸업 시기가 되면 신입생 모집 광고를 하였는데, 성균관 정문이나 시내 여러 곳에 방을 붙이거나 관보를 통해 지방에도 널리 알렸다.

1905년에는 관제가 개정되어 교수의 수가 2명에서 3명으로 늘어나고, 박사를 3명 두었다. 1907년에는 박사를 사업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08년에는 경학 외에 역사, 지리, 수학 등 기타 학과를 명시, 분화하고, 1909년에는 교과 과정과 교수 시수를 규정하고 교원을 새로 채용하였다.

1907년 관제를 일부 개정하여 지방 유생을 더 많이 흡수하고 40세 이상의 관록과 명망 있는 자를 선발하고자 하였다.

1908년 성균관 관제를 새로 제정하여 경학과 기타 학과(역사, 지리, 수학 등)와의 분과를 분명히 하였다. 1909년에는 학칙을 개정하여 교육을 위해 교원 수를 7명으로 늘리고 학과목과 교과 과정을 세분화하였다. 이 시기에는 경학은 1학년 7시간, 2·3학년은 모두 9시간으로 25시수였고, 그 다음으로 국어와 일본어가 비중이 높았다. 역사·지리 교과목도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1학년에서 본국의 역사와 지리, 2학년에서 동양의 역사와 지리, 3학년에서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교육하였다. 또한 수학뿐만 아니라 물리, 화학 등 자연과학 교과목도 개설하고, 체조를 정규 학과에 넣는 등 근대적 양상이 구체화되었다.

5. 5. 일제강점기

1910년 한국을 합병한 일제는 1911년 경학원 규정을 두어 성균관에 경학원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성균관은 수백 년간 유지해오던 교육 기능이 크게 제한받게 되었고, 경학원은 일제의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 경학을 연구하고 문묘에 제사하며 재산을 관리하는 일만 맡게 되었다.[5] 1911년에서 1913년 등에 걸쳐 조선총독부는 경학원에 성균관 건물과 명륜당 후원 등을 대부하고, 서적·기구·교육품 등을 증여하고, 이왕직으로부터 문묘 향사에 쓸 제기, 악기, 설비품 등을 인계하였다. 경학원의 강연회는 강사의 순회강연, 직원의 출장강연이 있었는데, 대개는 부제학이 사성 등 직원을 대동하고 출장을 가서 하였다. 또한 이 당시에 경학원에서는 <경학원잡지>를 1년에 4회씩 발행하기로 하였는데 실제로는 연 2회 발행이 고작이었고 뒤로 갈수록 제대로 발행하지 못했다. 석전은 경학원 행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며, 석전행사는 대개 조선조에 하던 바를 따랐으나 약간 달라진 것도 있었다. 석전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거행되어 왔다. 1922년 사소한 개정으로 석전을 기하여 강연을 하는 것과 지방 향교에 강사를 파견하여 순회 강연을 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여전히 교육기능은 크게 제한되었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자 존경각의 고서들 중 3만여 권이 경성제대 도서관으로 강제 이관되었다. 강제 이관된 고서는 해방 후에 다시 환수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1930년 노동자, 농민들의 투쟁이 증가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는 정신 강화로 사회 교화에 치중하겠다는 발상과 성균관의 교육 기능이 되살아나야 한다는 유림들의 끊임없는 요구가 맞물려 명륜학원의 설립이 승인되었다. 명륜학원은 경학원에 부설되었고, 경학원 대제학은 명륜학원 총재를 겸하게 되었다. 명륜학원의 유지비는 향교 재산으로부터 갹출하였고 조선총독부 보조금으로 운영되었다. 정과를 두었으며 수업 연한은 2년이고 교과목은 유학 및 유학사, 국어(일본어), 동양철학, 한문학, 공민과였다. 신입생은 30명 정하고 정과의 생도 수는 60인 이내로 정하였다. 총재와 학감을 두었고 학감은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무과장이 겸임하였다. 이 당시 명륜학원의 강사의 절반은 일본인이었다. 1932년에는 수업 연한 1년의 보습과를 두었고, 1933년에는 3년제로 승격하고 정원도 60명에서 90명으로 늘었다. 학과목도 꾸준히 변하였다. 이 당시에는 경학, 유학사, 지나철학, 한문학, 국어(일본어), 공민과, 체조가 교과목이었다. 명륜학원 졸업생은 대개 보통학교 교원이나 훈도, 사회 교화 촉탁 등으로 풀려나갔다. 1939년에는 명륜학원이 명륜전문학원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민족의식을 말살시키려는 총독부의 의지로 소위 황도유학을 강요하거나 일본어, 일본사 등을 보강하고 조선 유학 등은 제외되며 학교 인사도 총독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1941년 전선유림대회에서는 명륜전문학원을 승격시켜, 전문학교령에 의해 명륜전문학교로 설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향교 재산의 일부를 기부하게 하고 '재단법인 명륜전문학교'의 설립 수속을 밟아 총독부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았다. 지금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국 경학원에 설치된 명륜학원이 '재단법인 명륜전문학교'로 바뀌었다. 또한 명륜전문학교 설립에 수반하여 유학연구소를 설치하여 1942년 개소식을 가졌고, 1943년 유학연구소 수료생 19명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태평양전쟁으로 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조치 방안,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 규칙 등을 의결하여, 조선, 일본, 만주에 있는 대학과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거나 갓 졸업한 사람을 학병으로 강제 징발하였고 명륜전문학교 학생들도 학병으로 끌려갔다. 1943년 9월 명륜전문학교는 1회 졸업생도 못 내고 폐교 조치를 당하고, 청년연성소로 바뀌게 되어 1년 수료제로 바뀌었다. 1944년에는 청년연성소는 명륜연성소로 변경되면서 단기 1개월 수련제로 바뀌었다.

5. 6. 현대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미군정 학무국이 교육 사무를 시작하면서 명륜연성소가 명륜전문학교로 부활하였다. 명륜전문학교는 철학정치과(철정과)로 운영되었으며, 학생 수는 70여 명이었다. 10월 16일에는 경학원이 성균관으로 이름을 되찾았다. 11월 30일에는 전국 유림대회가 명륜당에서 열려 유교 혁신과 성균관대학교 설치를 결의하였다.[9]

1946년 김창숙이 성균관장이 되고 성균관대학 기성회를 결성하였다. 미군정의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으로 명륜전문학교는 국립대학의 전통을 되찾지 못했다. 성균관대학 기성회는 이석구의 '재단법인 학린사' 재산을 출연받아 '재단법인 성균관대학' 설립을 인가받았다. 9월 25일 명륜전문학교가 해체되고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었으며, 초대 학장으로 김창숙이 취임하였다.[9]

1947년 전문부와 예과 신입생 모집을 중지하고, 1948년 문학부와 정경학부를 신설하였다.[9]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 1951년 부산고등학교에서 피난대학 시절을 보냈다. 1952년 종합대학 승격을 계획, 1953년 2월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대학원 설립 후 서울로 환도하였으나, 전쟁 중 인민군이 건물 일부를 창고로 사용하고 불을 질러 비천당과 임시시설, 도서 7만여 권, 존경각의 고서 일부가 전소되었다. 명륜당을 수리하여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석조전 건설을 재개했다.[9]

1954년 심리학과, 수학과, 물리학과를 신설하고 교사 확장 계획을 세웠다. 1956년 석조전, 1957년 제1과학관, 1958년 중앙도서관, 1959년 구내식당, 1960년 법정대학관, 제2과학관이 완공되었다.[9]

1950년대에는 필답고사, 구술시험, 신체검사로 신입생을 선발,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1954년 「주간성대」 창간, 1955년 성대방송실 설치, 1960년 양현고 부활이 결의되었다.[9]

1950년대 중후반 재단과 유도회 간 분규가 발생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대학 정비, 1962년 문교부는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진 승인을 취소했다. 1963년 「사립학교법」 공포로 '재단법인 성균관'은 교화사업,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교'는 교육사업을 담당하게 되었다.[9]

1963년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교' 첫 이사진 승인, 이사장에 김두종 박사가 선출되었다. 1965년 삼성문화재단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기로 결정, 이병철 이사장이 선출되어 1979년까지 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1996년 삼성그룹이 다시 재단에 참여했다.[9][10][11][12]

1961년 문화재관리국 발족,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 1964년 성균관과 문묘 건물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재단법인 성균관'의 관리권이 문화재관리국으로 이양, 2005년 유학동양학부 학생들은 양현재에서 퇴거하였다.[9]

오늘날 성균관은 '재단법인 성균관', 성균관대학교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교'로 분리 운영된다. 성균관과 문묘는 국유재산이며 종로구청이 관리, 성균관대학교 재단은 삼성재단이 인수하여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9]

현재 성균관은 문묘향사, 유교문화 활성화 사업, 사회봉사 활동,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출판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1986년 석전대제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1988년 비천당이 중건되었다.[9]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는 여전히 많은 행사를 함께 주최하거나 후원한다. 성균관대학교 입학식, 졸업식, 총장 취임식 등에 고유례를 행하며, 석전에는 성균관대학교가 후원하고 성균관대학교 총장이 헌관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성균관대학교는 공부자탄강일에 휴무하며, 성균관에서 작헌례를 행한다.[9]

2022년 10월 25일 홍유후 설총선생 문묘봉안 천년 기념식을 치렀다.[9]

6. 시설

성균관의 시설은 크게 문묘 시설과 교육 시설로 나뉜다.[7]

대성전


문묘 시설에는 문묘, 대성전, 동무와 서무, 제기고, 묘정비, 신삼문, 동삼문, 동고, 동·서말문, 수복청, 전사청, 포주, 악기고, 차장고, 악생청, 향관청, 동·서월랑, 서리청, 비복청, 계성사가 있다. 교육 시설로는 명륜당, 존경각, 정록청, 양현고, 벽송정, 동재와 서재, 비천당, 일량재, 벽입재, 육일각, 식당, 어서비각(탕평비각), 하마비가 있다.

옛 캠퍼스는 풍수지리를 기반으로 설계되었다. 성균관은 뒤쪽에 산을 등지고 북쪽을 향하게 하고, 앞쪽은 남쪽을 향하여 한강과 캠퍼스 앞을 흐르던 반수를 바라보도록 지어졌다. 이는 미신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측면도 고려된 것이었다. 건물을 이렇게 배치하면 햇빛과 바람의 패턴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겨졌다.

성균관에는 다음과 같은 관직이 있었다.

관위관직정수비고
정이품지사1인대전통편에서는 대제학이 겸임
종이품동지사2인
정삼품당상대사성1인실질적으로 최고 책임자
정삼품당상제주1인
종삼품사성1인경국대전에서는 2인, 속육전에서는 1인
정사품사예2인경국대전에서는 3인, 속육전에서는 2인
정사품사업1인
정오품직강4인
정육품전적13인이 중 4인은 승문원의 참외관
정칠품박사3인
정팔품학정3인
정구품학록3인
종구품학유3인



이조의 서사 28인이 부속되었다. 또한 고직이 1인, 수복이 6인, 사령이 40인, 군사가 7인 있었다.

6. 1. 문묘 시설


  • 문묘
  • 대성전
  • 동무와 서무
  • 제기고
  • 묘정비
  • 신삼문
  • 동삼문
  • 동고
  • 동·서말문
  • 수복청
  • 전사청
  • 포주
  • 악기고
  • 차장고
  • 악생청
  • 향관청
  • 동·서월랑
  • 서리청
  • 비복청
  • 계성사

6. 2. 교육 시설

명륜당, 존경각, 정록청, 양현고, 벽송정, 동재와 서재, 비천당, 일량재, 벽입재, 육일각, 식당, 어서비각(탕평비각), 하마비

옛 캠퍼스는 풍수지리를 기반으로 설계되었다. 성균관은 뒤쪽에 산을 등지고 북쪽을 향하게 하고, 앞쪽은 남쪽을 향하여 물(한강과 캠퍼스 앞을 흐르던 반수)을 바라보도록 지어졌다. 이는 미신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측면도 고려된 것이었다. 건물을 이렇게 배치하면 햇빛과 바람의 패턴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겨졌다.

7. 학생 자치 활동 (재회)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 활동으로는 재회(齋會)라는 학생 회의가 있었다. 재회에는 장의(掌議)·색장(色掌) 등의 회장과 간부진이 있었다. 장의는 재회를 이끌며 학령(學令)을 어긴 유생을 문책하여 출재(黜齋, 퇴학)할 권한을 가졌다.[7] 사문유사(斯文有事)나 토역(討逆)이 있을 때 장의의 발의로 연명(聯命) 상소를 올렸는데, 이를 유소(儒疏)라 하며 이 모임을 대의사(大議事)라 하였다.[7] 유소시에는 사학(四學)에서 호응하며 궐문 앞에 연좌하여 왕의 비답(批答)을 기다렸다.[7] 유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식사를 거절하는 권당(捲堂)을 하거나, 성균관을 비워버리는 공관(空館)이라는 동맹 휴학을 했다.[7] 이는 식자층의 여론을 환기하는 역할을 하였다.[7]

재회는 모든 재생(齋生)이 참석해야 했고 불참하면 처벌했다.[7] 회의에 참석한 재생들은 나이순으로 서쪽을 바라보고 앉고, 장의는 동쪽을 바라보고 재생들과 마주 앉았다.[7] 성균관 학생들은 대내적인 문제를 재회를 통하여 자치적으로 해결하였다.[7]

재회의 임원으로는 장의, 색장, 조사, 당장 등이 있었다.[7] 장의는 회장 격으로 동·서재에 1명씩 두었고 현임 장의의 추천과 전임 장의들의 합의로 선출되었다.[7] 장의는 문벌이 좋아야 했으나, 영조 때에는 서울 명문대가의 자제는 천거하지 못하게 하고 시골 유림으로서 사대 조상 중 드러난 관직을 지내지 않은 자를 천거하게 했다.[7] 그러나 정조 때에는 다시 복구되어 동재의 장의는 소론, 서재의 장의는 노론이 맡았다.[7] 색장은 4명을 두어 식당의 검찰을 맡았다.[7] 조사는 최연소자를 뽑아 회의 때 서기 역할을 맡겼고, 당장은 회의석장에서 선출되어 임시 의장 역할을 하였다.[7]

재생들은 입재할 때 자기와 친근한 사람을 찾아 들게 했다.[7] 상재생은 하재에 들리지 못하게 하였고, 상재생은 하재생에게 과실이 있으면 벌을 주기도 하였다.[7] 벌의 종류로는 식손, 출재 등이 있었다.[7] 식손은 식당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경중에 따라 그 날수를 달리하였다.[7] 출재는 재에서 퇴거시키는 것으로 퇴학과 같다.[7] 이런 규칙은 학생들의 자치에 의하여 운영되었다.[7]

때로는 정치에 관여하여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식사와 수업을 거부하는 공재(空齋)를 하기도 하였다.[7]

8. 유생 운동

성균관 유생들은 조선시대 최고 학부인 성균관의 학생으로서, 집단 행동을 통해 국정을 비판하거나 왕에게 상소하는 운동을 펼쳤다. 성균관은 1398년 유학 교육 기관으로 설립되어 성종 때 체제를 갖추었으며, 역대 왕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대제학 이하 석학들이 성균관과 깊이 관련되었고, 이후 고관과 대학자들이 대부분 성균관 출신이었기 때문에 성균관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정주학의 입장에서 국정에 대한 비판자 역할을 했으며, 이교(異敎)를 사도(邪道)라 하여 배척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국란이 있을 때는 충의지심에서 집단 저항 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때로는 당파 싸움에 이용되기도 하였고, 보수적인 편견으로 새로운 종교나 사상의 등장을 막는 부정적인 역할도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주요 유생 운동은 다음과 같다.

시기내용
1519년기묘사화 때 성균관 유생들은 조광조의 사면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1]
1611년정인홍이언적·이황의 문묘 종사를 비판하자 성균관 유생들은 정인홍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하였다.[1]
1893년동학교도들이 교조 최제우의 신원 운동(伸寃運動)을 전개하자 성균관 유생들은 동학 탄압을 상소하였고, 동학교도들은 이에 대항하여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訴)·보은대시위를 하였다.[1]
1902년성균관 유생 신채호 등은 이하영 등의 매국 음모를 규탄하였다.[1]


9. 재단법인

재단법인 '성균관'은 윤리 정신에 기초하여 도의를 밝히고, 윤리를 북돋우며, 문화를 발전시키고, 공덕을 진흥하기 위해 1963년 12월 1일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재단법인이다.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3가 53이다. 주요 사업은 문묘 제사, 성균관 및 유도회 유지 관리, 지방 향교 통할 관리, 학술 및 문예 연구 보급, 교화 및 사회사업 경영 및 보조, 유도신문 간행 등이다.

10. 성균관 관련 유명 역사적 인물

안향을 시작으로, 정도전, 정인지, 권근, 김반, 류방선, 정극인, 김수온, 최항, 문종, 세조, 안평대군, 서거정, 조려, 김종직, 홍귀달, 단종, 표연말,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이현보, 정희량, 이목, 조광조, 김구, 상진, 성수침, 송순, 임억령, 백인걸, 이준경, 이황, 김인후, 노수신, 허엽, 휴정, 조목, 기대승, 이이, 김성일, 최경창, 류성룡, 조헌, 심희수, 이항복, 이귀, 기자헌, 이정구, 이안눌, 김집, 임숙영, 김육, 이경여, 최명길, 윤선도, 허목, 송준길, 윤선거, 소현세자, 효종, 김수항, 박세채, 김석주, 권상하, 김창협, 김창흡, 숙종, 영조, 홍봉한, 사도세자, 정조, 남공철, 정약용, 김려, 홍석주, 이항로, 박규수, 최익현, 박정양, 민영환, 이인영, 김창숙, 신채호, 조소앙 등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성균관과 관련을 맺었다.

이 외에도 이개, 황희, 신숙주, 김장생, 윤휴, 박문수, 김옥균, 박은식, 이돈녕 등이 성균관과 관련이 있다.

11. 성균관을 배경으로 하는 TV 프로그램

12. 참고 이미지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59호)는 아마도 1398년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3. 성균관대학교

성균관대학교는 성균관을 전신으로 하고 있다.[6]

참조

[1] 웹사이트 Sung Kyun Kwan http://www.exploring[...] Exploring Korea 2014-04-16
[2] 서적 고려사 제76권
[3] 웹사이트 燕山君とは https://kotobank.jp/[...] 2023-01-04
[4] 서적 한국근대대학의 성립과 전개
[5] 서적 한국근대대학의 성립과 전개
[6] 웹사이트 성균관대학교 http://www.skku.edu/[...]
[7] 서적 한국근대대학의 성립과 전개
[8] 웹사이트 성균관 http://encykorea.aks[...]
[9] 웹사이트 자랑스런 성균관 꽃피우는 유교문화 올바른 인성교육 성균관 예절교실 http://www.skkok.com[...]
[10] 웹사이트 성균관의 역사 http://www.skkok.com[...]
[11] 뉴스 성대재단분리인가 http://newslibrary.n[...] 1963-12-13
[12] 뉴스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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