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페이 하바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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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로페이 하바로프는 17세기 러시아의 탐험가로,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을 탐험하며 아무르 강 유역을 러시아에 귀속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1649년부터 1653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아무르 강을 탐험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청)과의 충돌을 겪었다. 하바로프는 야쿠츠크 총독의 지시를 받아 다우르족에게 러시아 차르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했으나, 중국 황제를 만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후 지휘권 문제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고 시베리아로 돌아갔으며, 아무르 강 지도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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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로페이 하바로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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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예로페이 파블로비치 하바로프-스뱌티츠키 |
| 출생 | 1603년경 |
| 출생지 | 아르한겔스크 주 코틀라스키 군 |
| 사망 | 1671년 |
| 사망지 | 이르쿠츠크 주 브라츠크 또는 키렌스크 |
| 국적 | 러시아 차르국 |
| 활동 | |
| 분야 | 탐험가 |
2. 생애
유럽 러시아 북부, 백해로 흘러드는 북드비나 강 연안에 있는 벨리키 우스튜크 부근에서 태어났다.[9]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스뱌티츠키라는 별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스뱌티차 마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9] 벨리키 우스튜크 부근에서는 세묜 데즈뇨프나 블라디미르 아틀라소프 등 시베리아나 극동으로 향하는 상인이나 탐험가를 많이 배출했다.
하바로프는 근처의 솔리체고르스크 마을에서 스트로가노프 가문이 운영하는 제염소의 관리인이 되었지만[9], 이내 시베리아에서의 무역에서 활로를 찾았다. 1625년, 하바로프는 서시베리아의 토볼스크에서 오비 강을 따라 하구에 있는 항구 도시 망가제야로 배를 타고 건너갔다.[9] 3년 후, 하바로프는 망가제야에서 탐험대를 이끌고 강 배를 타고 동쪽으로 향해 언덕을 넘어 헤타 강(타이미르 반도의 남동쪽 기슭으로 흐름)에 도달했다.[9] 1630년에는 망가제야에서 토볼스크로 돌아왔다.
동시베리아로 향해, 1632년부터 1641년에 걸쳐 레나 강 상류에 살면서 모피 등을 거래했다.[9] 또한, 레나 강에 쿠타 강과 키렌가 강이 합류하는 지점(현재의 우스티쿠트 부근)에 농업과 제염을 하는 마을을 건설하여 경영을 했다. 1641년에는 제분소도 설치했지만, 이내 현지의 보예보다(총독) 표트르 골로빈과 대립하여 야쿠츠크의 감옥에 갇히는 등 했다.
1649년, 그는 바실리 포야르코프(1643–1646)에 이어 아무르를 탐험한 두 번째 러시아인이 되었다. 포야르코프가 알단강을 따라 올라간 경로는 실용적이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어느 시점에서 하바로프는 비팀강을 통해 아무르에 도달하려 했다.[2] 1647년, 한 사냥꾼이 올료크마강에서 야쿠츠크로 돌아와 이곳이 아무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했다. 1649년 봄, 하바로프는 사비를 들여 올료크마강을 거슬러 올라간 다음 지류인 퉁기르강을 거쳐 운반로를 통해 실카강으로 이동했다. 1650년 초 아무르 상류(다우리아)에 도착한 그는 코사크의 명성이 먼저 퍼져 거의 버려진 땅임을 발견했다. 그는 좋은 길을 개척하고 1650년 5월 야쿠츠크로 돌아와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그 땅을 칭찬하고, 중국(청)의 개입 위험을 경고했으며, 전문 군인과 함께 더 큰 원정을 제안했다.
1648년, 골로빈을 대신하여 드미트리 프란츠베코프가 야쿠츠크로 부임했다. 하바로프는 새로운 총독에게 야쿠츠크 남쪽의 다우리야(자바이칼 및 아무르강 서부 지역의 옛 이름)는 레나강 유역보다 농업에 적합한 곳이라며 다우리야 탐험을 청원하여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하바로프는 바실리 포야르코프가 1643년부터 1646년까지 진행한 러시아인 최초의 아무르강 탐험에 이어 두 번째 아무르강 탐험을 이끌게 되었고, 1649년 봄에 사비를 들여 대원과 무장을 갖춰 야쿠츠크를 출발했다.
이전에 포야르코프가 거쳤던 길은 레나강 중류의 지류인 알단강을 따라 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여러 번 배를 짊어지고 산을 넘는 어려운 여정이었기에 실용적인 경로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바로프는 레나강 상류의 지류인 비침강을 따라 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쉽게 아무르강 유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0].1647년에는 야쿠츠크의 사냥꾼이 비침강의 동쪽을 병행하는 올료크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르강 상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보고를 했고, 하바로프는 이를 토대로 올료크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로를 선택했다. 하바로프 일행은 레나강에서 올료크마강으로 들어와 지류인 퉁굴강을 거슬러 올라간 뒤, 그 상류에서 배를 짊어지고 언덕을 넘어 아무르강 상류의 실카강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1650년 초에는 다우리야에 들어갔지만, 이미 코사크들이 레나강 유역에서 날뛰고 있다는 소문이 이 지역에도 퍼져 주민들은 도망쳤다.
좋은 땅과 좋은 경로를 발견했다는 성과를 거두고, 하바로프는 1650년 5월에 야쿠츠크로 돌아왔다. 그는 보고서에서 다우리야를 칭찬했지만, 중국(청)의 간섭 위험을 경고하며, 다음 탐험은 직업 군인이 대규모로 수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바로프는 1650년 가을에 산을 넘어갔고, 이번에는 무장 저항에 직면했다. 그는 아무르강 최북단인 알바진에 겨울 숙소를 지었다. 1651년 6월에 증원을 받은 후 아무르강을 따라 내려갔다. 9월까지 그들은 쑹화강의 어귀에 도달했다. 9월 29일까지 그들은 현재의 하바롭스크 근처 아찬스크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10월 8일, 그들은 약 1,000명의 현지인들에게 공격을 받았고, 패배한 그들은 그들의 만주 지배자들에게 호소했다.[14][15] 1652년 3월 24일, 닝구타에서 포병으로 무장한 2,000명의 만주족과 한국인들이 도착하여 아찬스크를 공격했다. 하바로프는 어떻게든 그들을 물리쳤다. 그 지역에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더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그는 4월 22일에 아무르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6,000명의 다른 중국군과 마주쳤지만 안개와 어둠을 틈타 그들을 우회할 수 있었다.[17] 더 상류에서 그는 증원으로 파견된 117명의 코사크 병력을 만났다. 그는 포로로부터 새로운 만주군이 쑹화강에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월 1일 그는 제야강의 어귀에 도달했다. 여기서 그의 부하 136명이 반란을 일으켜 212명만 남았다. 제야강에서 그는 마을을 불태우고,[18] 원주민을 학살하고 포로를 고문하는 내용을 야쿠츠크 보예보드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
1653년 가을, 드미트리 지노비예프 휘하의 150명의 증원이 나타났다. 귀족인 지노비예프는 전적인 지휘권을 요구했다. 하바로프가 거부하자 그는 체포되었다. 하바로프의 부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만주족을 상대할 적절한 방법이 없었던 지노비예프와 병력의 일부는 아무르강에서 철수했다. 오누프리 스테파노프는 남아있는 사람들을 지휘하게 되었다.
하바로프는 지위와 재산을 박탈당하고 모스크바로 재판을 위해 보내졌다. 15개월에 걸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한 하바로프는 재판을 받았지만, 1년 후에 무죄 방면을 획득했다.[20] 그는 차르로부터 시베리아 탐험의 공적을 칭찬받아 하급 귀족의 지위를 받고 레나강 상류의 개척지로 돌아갔다.[20]
그 후 하바로프에 관해서는, 1667년에 새로운 보이보드인 고두노프에게 보낸 문서가 남아 있다. 하바로프는 이 문서에서 자비로 100명부터의 이주대를 조직하여, 아무르강 유역에 전초 기지와 마을을 건설하고 밭을 개척하여 곡물을 생산하여 차르에게 헌상하겠다는 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20] 이 문서에 대해 하바로프가 어떤 대답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후 그의 운명도 알려져 있지 않다.[20]
그의 몰락지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키렌스크나 브라츠크 등에는 그의 묘가 있다는 전설이 있다.
예로페이 파블로비치는 하바로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2. 1. 초기 생애와 시베리아 진출
유럽 러시아 북부, 백해로 흘러드는 북드비나 강 연안에 있는 벨리키 우스튜크 부근에서 태어났다.[9]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스뱌티츠키라는 별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스뱌티차 마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9] 벨리키 우스튜크 부근에서는 세묜 데즈뇨프나 블라디미르 아틀라소프 등 시베리아나 극동으로 향하는 상인이나 탐험가를 많이 배출했다.하바로프는 근처의 솔리체고르스크 마을에서 스트로가노프 가문이 운영하는 제염소의 관리인이 되었지만[9], 이내 시베리아에서의 무역에서 활로를 찾았다. 1625년, 하바로프는 서시베리아의 토볼스크에서 오비 강을 따라 하구에 있는 항구 도시 망가제야로 배를 타고 건너갔다.[9] 3년 후, 하바로프는 망가제야에서 탐험대를 이끌고 강 배를 타고 동쪽으로 향해 언덕을 넘어 헤타 강(타이미르 반도의 남동쪽 기슭으로 흐름)에 도달했다.[9] 1630년에는 망가제야에서 토볼스크로 돌아왔다.
동시베리아로 향해, 1632년부터 1641년에 걸쳐 레나 강 상류에 살면서 모피 등을 거래했다.[9] 또한, 레나 강에 쿠타 강과 키렌가 강이 합류하는 지점(현재의 우스티쿠트 부근)에 농업과 제염을 하는 마을을 건설하여 경영을 했다. 1641년에는 제분소도 설치했지만, 이내 현지의 보예보다(총독) 표트르 골로빈과 대립하여 야쿠츠크의 감옥에 갇히는 등 했다.
2. 2. 아무르 강 탐험 (1649년 ~ 1653년)
=== 1차 탐험 (1649년 ~ 1650년) ===
1649년, 예로페이 하바로프는 바실리 포야르코프(1643–1646)에 이어 아무르 강을 탐험한 두 번째 러시아인이 되었다. 포야르코프가 알단강을 따라 올라간 경로는 실용적이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하바로프는 비팀강을 통해 아무르 강에 도달하려 했다.[2] 1647년, 한 사냥꾼이 올료크마강에서 야쿠츠크로 돌아와 이곳이 아무르 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했다. 1649년 봄, 하바로프는 사비를 들여 올료크마 강을 거슬러 올라간 다음 지류인 퉁기르강을 거쳐 운반로를 통해 실카강으로 이동했다. 1650년 초 아무르 강 상류(다우리아)에 도착한 그는 코사크의 명성이 먼저 퍼져 거의 버려진 땅임을 발견했다. 그는 좋은 길을 개척하고 1650년 5월 야쿠츠크로 돌아와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그 땅을 칭찬하고, 청의 개입 위험을 경고했으며, 전문 군인과 함께 더 큰 원정을 제안했다.
1648년, 골로빈을 대신하여 드미트리 프란츠베코프가 야쿠츠크로 부임했다. 하바로프는 새로운 총독에게 야쿠츠크 남쪽의 다우리야(자바이칼 및 아무르강 서부 지역의 옛 이름)는 레나 강 유역보다 농업에 적합한 곳이라며 다우리야 탐험을 청원하여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하바로프는 바실리 포야르코프가 1643년부터 1646년까지 진행한 러시아인 최초의 아무르 강 탐험에 이어 두 번째 아무르 강 탐험을 이끌게 되었고, 1649년 봄에 사비를 들여 대원과 무장을 갖춰 야쿠츠크를 출발했다.
이전에 포야르코프가 거쳤던 길은 레나 강 중류의 지류인 알단강을 따라 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여러 번 배를 짊어지고 산을 넘는 어려운 여정이었기에 실용적인 경로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바로프는 레나 강 상류의 지류인 비침강을 따라 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쉽게 아무르 강 유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0] 1647년에는 야쿠츠크의 사냥꾼이 비침강의 동쪽을 병행하는 올료크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르 강 상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보고를 했고, 하바로프는 이를 토대로 올료크마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로를 선택했다. 하바로프 일행은 레나 강에서 올료크마 강으로 들어와 지류인 퉁굴강을 거슬러 올라간 뒤, 그 상류에서 배를 짊어지고 언덕을 넘어 아무르 강 상류의 실카강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1650년 초에는 다우리야에 들어갔지만, 이미 코사크들이 레나 강 유역에서 날뛰고 있다는 소문이 이 지역에도 퍼져 주민들은 도망쳤다.
좋은 땅과 좋은 경로를 발견했다는 성과를 거두고, 하바로프는 1650년 5월에 야쿠츠크로 돌아왔다. 그는 보고서에서 다우리야를 칭찬했지만, 청의 간섭 위험을 경고하며, 다음 탐험은 직업 군인이 대규모로 수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 2차 탐험 (1650년 ~ 1653년) ===
모스크바와의 통신 지연으로 인해 야쿠츠크 보예보다 드미트리 프란츠베코프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하바로프를 더 많은 병력과 함께 남쪽으로 보냈다. 보예보드는 또한 하바로프에게 다우르족의 알바진의 라브카이 공작과 "보그도이 공작"()에게 보내는 국왕 알렉세이의 편지를 주어, 러시아 차르에게 복종할 것을 요청하고 복종하지 않으면 6,000명의 군대를 보낼 것이라고 위협했다.[3][4][5]
프란츠베코프는 이 보그도이 공작이 또 다른 시베리아 족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실 중국 황제였다.
하바로프는 1650년 가을에 산을 넘어갔고, 이번에는 무장 저항에 직면했다. 그는 아무르 강 최북단인 알바진에 겨울 숙소를 지었다. 1651년 6월에 증원을 받은 후 아무르 강을 따라 내려갔다. 9월까지 그들은 쑹화강의 어귀에 도달했다. 9월 29일까지 그들은 현재의 하바롭스크 근처 아찬스크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10월 8일, 그들은 약 1,000명의 현지인들에게 공격을 받았고, 패배한 그들은 그들의 만주 지배자들에게 호소했다.[14][15] 1652년 3월 24일, 닝구타에서 포병으로 무장한 2,000명의 만주족과 한국인들이 도착하여 아찬스크를 공격했다. 하바로프는 어떻게든 그들을 물리쳤다. 그 지역에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더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그는 4월 22일에 아무르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6,000명의 다른 중국군과 마주쳤지만 안개와 어둠을 틈타 그들을 우회할 수 있었다.[17] 더 상류에서 그는 증원으로 파견된 117명의 코사크 병력을 만났다. 그는 포로로부터 새로운 만주군이 쑹화강에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월 1일 그는 제야강의 어귀에 도달했다. 여기서 그의 부하 136명이 반란을 일으켜 212명만 남았다. 제야 강에서 그는 마을을 불태우고,[18] 원주민을 학살하고 포로를 고문하는 내용을 야쿠츠크 보예보드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
1653년 가을, 드미트리 지노비예프 휘하의 150명의 증원이 나타났다. 귀족인 지노비예프는 전적인 지휘권을 요구했다. 하바로프가 거부하자 그는 체포되었다. 하바로프의 부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만주족을 상대할 적절한 방법이 없었던 지노비예프와 병력의 일부는 아무르 강에서 철수했다. 오누프리 스테파노프는 남아있는 사람들을 지휘하게 되었다.
2. 2. 1. 1차 탐험 (1649년 ~ 1650년)
1649년, 그는 바실리 포야르코프(1643–1646)에 이어 아무르를 탐험한 두 번째 러시아인이 되었다. 포야르코프가 알단강을 따라 올라간 경로는 실용적이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어느 시점에서 하바로프는 비팀강을 통해 아무르에 도달하려 했다.[2] 1647년, 한 사냥꾼이 올료크마강에서 야쿠츠크로 돌아와 이곳이 아무르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했다. 1649년 봄, 하바로프는 사비를 들여 올료크마강을 거슬러 올라간 다음 지류인 퉁기르강을 거쳐 운반로를 통해 실카강으로 이동했다. 1650년 초 아무르 상류(다우리아)에 도착한 그는 코사크의 명성이 먼저 퍼져 거의 버려진 땅임을 발견했다. 그는 좋은 길을 개척하고 1650년 5월 야쿠츠크로 돌아와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그 땅을 칭찬하고, 중국(청)의 개입 위험을 경고했으며, 전문 군인과 함께 더 큰 원정을 제안했다.1648년, 골로빈을 대신하여 드미트리 프란츠베코프가 야쿠츠크로 부임했다. 하바로프는 새로운 총독에게 야쿠츠크 남쪽의 다우리야(자바이칼 및 아무르강 서부 지역의 옛 이름)는 레나강 유역보다 농업에 적합한 곳이라며 다우리야 탐험을 청원하여 허가를 받았다. 이렇게 하바로프는 바실리 포야르코프가 1643년부터 1646년까지 진행한 러시아인 최초의 아무르강 탐험에 이어 두 번째 아무르강 탐험을 이끌게 되었고, 1649년 봄에 사비를 들여 대원과 무장을 갖춰 야쿠츠크를 출발했다.
이전에 포야르코프가 거쳤던 길은 레나강 중류의 지류인 알단강을 따라 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여러 번 배를 짊어지고 산을 넘는 어려운 여정이었기에 실용적인 경로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바로프는 레나강 상류의 지류인 비침강을 따라 남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쉽게 아무르강 유역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0].1647년에는 야쿠츠크의 사냥꾼이 비침강의 동쪽을 병행하는 올료크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르강 상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보고를 했고, 하바로프는 이를 토대로 올료크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로를 선택했다. 하바로프 일행은 레나강에서 올료크마강으로 들어와 지류인 퉁굴강을 거슬러 올라간 뒤, 그 상류에서 배를 짊어지고 언덕을 넘어 아무르강 상류의 실카강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 1650년 초에는 다우리야에 들어갔지만, 이미 코사크들이 레나강 유역에서 날뛰고 있다는 소문이 이 지역에도 퍼져 주민들은 도망쳤다.
좋은 땅과 좋은 경로를 발견했다는 성과를 거두고, 하바로프는 1650년 5월에 야쿠츠크로 돌아왔다. 그는 보고서에서 다우리야를 칭찬했지만, 중국(청)의 간섭 위험을 경고하며, 다음 탐험은 직업 군인이 대규모로 수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2. 2. 2. 2차 탐험 (1650년 ~ 1653년)
하바로프는 1650년 가을에 산을 넘어갔고, 이번에는 무장 저항에 직면했다. 그는 아무르강 최북단인 알바진에 겨울 숙소를 지었다. 1651년 6월에 증원을 받은 후 아무르강을 따라 내려갔다. 9월까지 그들은 쑹화강의 어귀에 도달했다. 9월 29일까지 그들은 현재의 하바롭스크 근처 아찬스크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10월 8일, 그들은 약 1,000명의 현지인들에게 공격을 받았고, 패배한 그들은 그들의 만주 지배자들에게 호소했다.[14][15] 1652년 3월 24일, 닝구타에서 포병으로 무장한 2,000명의 만주족과 한국인들이 도착하여 아찬스크를 공격했다. 하바로프는 어떻게든 그들을 물리쳤다. 그 지역에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더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그는 4월 22일에 아무르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6,000명의 다른 중국군과 마주쳤지만 안개와 어둠을 틈타 그들을 우회할 수 있었다.[17] 더 상류에서 그는 증원으로 파견된 117명의 코사크 병력을 만났다. 그는 포로로부터 새로운 만주군이 쑹화강에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월 1일 그는 제야강의 어귀에 도달했다. 여기서 그의 부하 136명이 반란을 일으켜 212명만 남았다. 제야강에서 그는 마을을 불태우고,[18] 원주민을 학살하고 포로를 고문하는 내용을 야쿠츠크 보예보드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1653년 가을, 드미트리 지노비예프 휘하의 150명의 증원이 나타났다. 귀족인 지노비예프는 전적인 지휘권을 요구했다. 하바로프가 거부하자 그는 체포되었다. 하바로프의 부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만주족을 상대할 적절한 방법이 없었던 지노비예프와 병력의 일부는 아무르강에서 철수했다. 오누프리 스테파노프는 남아있는 사람들을 지휘하게 되었다.
2. 3. 이후 생애
하바로프는 지위와 재산을 박탈당하고 모스크바로 재판을 위해 보내졌다. 15개월에 걸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한 하바로프는 재판을 받았지만, 1년 후에 무죄 방면을 획득했다.[20] 그는 차르로부터 시베리아 탐험의 공적을 칭찬받아 하급 귀족의 지위를 받고 레나강 상류의 개척지로 돌아갔다.[20]그 후 하바로프에 관해서는, 1667년에 새로운 보이보드인 고두노프에게 보낸 문서가 남아 있다. 하바로프는 이 문서에서 자비로 100명부터의 이주대를 조직하여, 아무르강 유역에 전초 기지와 마을을 건설하고 밭을 개척하여 곡물을 생산하여 차르에게 헌상하겠다는 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20] 이 문서에 대해 하바로프가 어떤 대답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후 그의 운명도 알려져 있지 않다.[20]
그의 몰락지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키렌스크나 브라츠크 등에는 그의 묘가 있다는 전설이 있다.
예로페이 파블로비치는 하바로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3. 청과의 관계 및 갈등
예로페이 하바로프는 1650년 가을, 드미트리 프란츠베코프의 지시를 받아 아무르강 유역으로 다시 파견되었다. 프란츠베코프는 하바로프에게 다우르족의 알바진의 라브카이 공작과 "보그도이 공작"에게 러시아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하도록 했다. 프란츠베코프는 보그도이 공작이 시베리아의 다른 족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는 중국 황제였다.[3][4][5]
하바로프는 알바진에서 겨울을 보낸 후, 1651년 6월 증원군과 함께 아무르강을 따라 내려갔다. 9월에는 쑹화강 어귀에 도달했고, 현재의 하바롭스크 근처 아찬스크에서 겨울을 보냈다. 1652년 3월 24일, 닝구타에서 온 만주족과 조선인 연합군이 아찬스크를 공격했으나, 하바로프는 이들을 물리쳤다.[6] 그러나 더 많은 중국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하바로프는 아무르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안개와 어둠을 틈타 중국군을 우회한 그는 증원 부대를 만났지만, 부하들의 반란에 직면하기도 했다.[7]
1653년 가을, 드미트리 지노비예프가 이끄는 증원군이 도착했으나, 지휘권 문제로 하바로프는 체포되었다. 이후 오누프리 스테파노프가 남은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다. 하바로프는 재판을 위해 모스크바로 압송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고 소규모 귀족 작위를 받았다. 1658년, 시베리아 사무소는 하바로프에게 아무르로 가는 새로운 원정을 안내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그의 행적은 기록에서 사라졌다. 하바로프는 아무르강의 지도를 작성했다.
4. 평가
참조
[1]
서적
East of the Sun
https://archive.org/[...]
Poseidon Press
[2]
간행물
Russia's Conquest of Siberia
[3]
웹사이트
Грамата, данная из Якутска, для вручения ея, через Хабарова, Князю Богдою, после перваго возвращения Хабарова с Амура, в 1650 г.
http://ostrog.ucoz.r[...]
[4]
논문
ИСТОРИЧЕСКИЕ АКТЫ О ПОДВИГАХ ЕРОФЕЯ ХАБАРОВА, НА АМУРЕ, В 1649–1651 ГГ. (Historical acts concerning Yerofei Khabarov's Amur exploits in 1649-1651)
http://ostrog.ucoz.r[...]
[5]
간행물
[6]
문서
[7]
간행물
[8]
서적
世界地誌シリーズ 9 ロシア
朝倉書店
[9]
서적
East of the Sun
Poseidon Press
1992
[10]
간행물
Russia's Conquest of Siberia
[11]
웹사이트
Грамата, данная из Якутска, для вручения ея, через Хабарова, Князю Богдою, после перваго возвращения Хабарова с Амура, в 1650 г.
http://ostrog.ucoz.r[...]
[12]
논문
ИСТОРИЧЕСКИЕ АКТЫ О ПОДВИГАХ ЕРОФЕЯ ХАБАРОВА, НА АМУРЕ, В 1649–1651 ГГ. (Historical acts concerning Yerofei Khabarov's Amur exploits in 1649-1651)
http://ostrog.ucoz.r[...]
[13]
간행물
[14]
웹사이트
АРХЕОЛОГИ ОБНАРУЖИЛИ НА АМУРЕ ТАИНСТВЕННЫЙ ГОРОДОК. Возможно, это первое русское поселение в данном регионе
http://www.inauka.ru[...]
[15]
웹사이트
Загадка Ачанского городка
http://www.amursk.ru[...]
[16]
웹사이트
Изветная челобитная С. В. Полякова 1653 г. и ее значение для археологов Приамурья
http://www.vostlit.i[...]
[17]
서적
The Conquest of a Continent
[18]
간행물
[19]
웹사이트
朝鮮・韓国歴史用語解説
https://web.archive.[...]
[20]
웹사이트
Biografija.ru — Хабаров Ерофей Павлович
http://www.biografi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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