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프리소는 베아트릭스 여왕과 클라우스 공의 차남으로, 1968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델프트 공과대학교에서 항공 공학 석사 학위를, 에라스무스 대학교 로테르담에서 경영 경제학 석사 학위를, INSEAD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맥킨지, 골드만삭스 인터내셔널 등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URENCO의 최고 재무 책임자(CFO)로 재직했다. 2004년 메이벌 위세 스미트와 결혼하며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2012년 눈사태 사고로 뇌 손상을 입고, 2013년 4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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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프리소 베른하르트 크리스티안 다비드는 1968년 9월 25일[6]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 있는 위트레흐트 대학교 병원(현재의 위트레흐트 대학교 의료센터)에서 태어났다.[7] 그는 베아트릭스 공주와 클라우스 공의 차남이었으며,[8] 율리아나 여왕과 베른하르트 공의 손자였다.[9] 형으로는 현 국왕인 빌럼알렉산더르 국왕(1967년생)이 있었고, 남동생으로는 콘스탄테인 공(1969년생)이 있었다.[8] 그는 태어날 때 네덜란드 왕국의 왕자, 오라녜나사우 공자, 그리고 암스베르크의 용커르라는 칭호를 받았다.[6]
1968년 12월 28일 위트레흐트의 돔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10] 그의 대부모는 노르웨이의 하랄 국왕, 요한 크리스티안 남작 폰 예니쉬, 헤르만 판 로이옌, 율리아나 여왕, 그리고 크리스티나 폰 암스베르크였다.[11]
|thumb|upright|1986년의 프리소 공]]
1986년, 헤이그에 있는 중등학교인 ''Eerste Vrijzinnig Christelijk Lyceum''을 졸업했다.[6] 이후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기계 공학을 공부했다.[6] 1988년부터는 델프트 공과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94년 항공 공학에서 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는 에라스무스 대학교 로테르담에도 다녔으며, 1995년 경영 경제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6] 그 후, INSEAD(퐁텐블로, 프랑스)에 다녔으며, 1997년 MBA 학위를 받았다.[12]
3. 경력
요한 프리소 왕자는 1995년부터 1996년까지 국제 경영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의 암스테르담 지점에서 근무했다.[13]INSEAD에서 MBA 과정을 마친 후,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런던의 골드만삭스 인터내셔널에서 부사장으로 근무했다.[13] 2004년에는 TNO 우주 부문에서 델프트의 파트타임 공동 사장이 되었다.[13] 2006년 10월부터는 런던 지사에서 사모 투자 및 자문 회사인 울펜손 & 컴퍼니(Wolfensohn & Company)의 전무 이사로 재직했다.[13]
요한 프리소 왕자는 암스테르담의 MRI 센터 공동 설립자였으며, 동유럽 최대 저가 항공사인 위즈 에어의 창립 주주이기도 했다. 그는 클라우스 프린스 문화 개발 기금의 명예 회장이었으며, 이 직책은 그의 남동생인 콘스탄틴 왕자와 함께 맡았다.[14]
사고 전에는 우라늄 농축 회사인 URENCO의 최고 재무 책임자(CFO)로 근무하고 있었다.[15]
4. 결혼 및 자녀
2003년 6월 30일, 요한 프리소 공자가 메이벌 위세 스미트와 결혼할 예정이라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메이벌 위세 스미트가 네덜란드의 마약상인 클라스 브루인스마와의 관계에 대한 이전 진술이 완전하고 정확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 문제가 되었다.[16] 얀 페테르 발케넨데 총리는 메이벌 위세 스미트와의 대화를 통해 이와 같이 결정되었다고 설명했다. 메이벌 위세 스미트는 이전에 브루인스마와 몇 달 동안 가벼운 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친밀하거나 사업적인 관계가 아니었고, 브루인스마의 직업을 알게 된 후 관계를 끊었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신뢰 위반"이 정부가 의회 승인을 구하지 않은 이유였으며, 이는 부부의 뜻을 존중한 것이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2004년 4월 24일 오우데 케르크 (델프트)에서 결혼했고, 메이벌 위세 스미트는 네덜란드 왕족의 일원이 되었지만 네덜란드 왕가의 일원은 아니었다. 요한 프리소는 의회 승인 없이 결혼해 네덜란드 왕자라는 직함 및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다.[42]
2010년 부인 메이벌과 딸들과 함께 있는 요한 프리소 공자
결혼 후, 요한 프리소 공자와 그의 부인 메이벌 공주는 큐 교외의 런던에 거주지를 마련했다.[19]
4. 1. 결혼 관련 논란
2003년 6월 30일, 요한 프리소 공자가 메이벌 위세 스미트와 결혼할 예정이라고 발표되었다. 그러나 메이벌 위세 스미트가 네덜란드의 마약상인 클라스 브루인스마와의 관계에 대한 이전 진술이 완전하고 정확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 문제가 되었다.[16] 얀 페테르 발케넨데 총리는 메이벌 위세 스미트와의 대화를 통해 이와 같이 결정되었다고 설명했다. 메이벌 위세 스미트는 이전에 브루인스마와 몇 달 동안 가벼운 관계를 맺었으며, 이는 친밀하거나 사업적인 관계가 아니었고, 브루인스마의 직업을 알게 된 후 관계를 끊었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신뢰 위반"이 정부가 의회 승인을 구하지 않은 이유였으며, 이는 부부의 뜻을 존중한 것이었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2004년 4월 24일 오우데 케르크 (델프트)에서 결혼했고, 메이벌 위세 스미트는 네덜란드 왕족의 일원이 되었지만 네덜란드 왕가의 일원은 아니었다. 요한 프리소는 의회 승인 없이 결혼해 네덜란드 왕자라는 직함 및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다.[42]
결혼 후, 요한 프리소 공자와 그의 부인 메이벌 공주는 큐 교외의 런던에 거주지를 마련했다.[19]
5. 눈사태 사고와 사망
2012년2월 17일 요한 프리소는 오스트리아 서부 포어아를베르크주 레흐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눈사태를 만나 20분 가량 깔려 있다가 구조되었다.[38] 헬기로 인스브루크의 대학병원에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2월 24일 그를 담당한 의사 볼프강 콜러 박사는 네덜란드에 생중계되는 기자회견에서 요한 프리소가 눈 속에 오래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산소 부족으로 인한 심각한 뇌 손상이 발생했다고 밝혔다.[38]2012년3월 1일, 요한 프리소 왕자는 자신이 살던 영국의 웰링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39]
요한 프리소 왕자의 사고는 어머니 베아트릭스 여왕의 퇴위 결심에도 영향을 미쳤다.[40]
사고 당시, 레흐에서는 눈사태 경보가 발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 프리소는 친구와 오프 피스테에서 스키를 타다가 사고를 당했다.[34] 구조 후 치료를 통해 목숨은 건졌지만, 저산소뇌증으로 인해 지속적 식물 상태가 계속되었다.[35]
2013년7월 9일, 요한 프리소 공자는 네덜란드의 호이텐보스 궁전으로 옮겨졌고, 혼수상태는 최소의식상태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이상 병원 수준의 의료 관리가 필요하지 않게 되면서 그는 가족과 함께 지냈다.[28] 결국 오랜 기간 동안 의식불명 상태였던 그는 2013년8월 12일 4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1]
5. 1. 사고 및 사망 관련 논란
2012년2월 17일 요한 프리소는 오스트리아 서부 포어아를베르크주 레흐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눈사태를 만나 20분 가량 깔려 있다가 구조되었다.[38] 헬기로 인스브루크의 대학병원에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2월 24일 그를 담당한 의사 볼프강 콜러 박사는 네덜란드에 생중계되는 기자회견에서 요한 프리소가 눈 속에 오래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산소 부족으로 인한 심각한 뇌 손상이 발생했다고 밝혔다.[38]2012년3월 1일, 요한 프리소 왕자는 자신이 살던 영국의 웰링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39]
요한 프리소 왕자의 사고는 어머니 베아트릭스 여왕의 퇴위 결심에도 영향을 미쳤다.[40]
사고 당시, 레흐암아르베르크에서는 눈사태 경보가 발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 프리소는 친구와 오프 피스테에서 스키를 타다가 사고를 당했다.[34] 구조 후 치료를 통해 목숨은 건졌지만, 저산소뇌증으로 인해 지속적 식물 상태가 계속되었다.[35]
2013년7월 9일, 요한 프리소 공자는 네덜란드의 호이텐보스 궁전으로 옮겨졌고, 혼수상태는 최소의식상태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이상 병원 수준의 의료 관리가 필요하지 않게 되면서 그는 가족과 함께 지냈다.[28] 결국 오랜 기간 동안 의식불명 상태였던 그는 2013년8월 12일 4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1]
6. 기타
7. 칭호 및 영예
요한 프리소는 1968년 9월 25일부터 2004년 3월 19일까지는 '''전하'''(His Royal Highness) 오라녜나사우 공자 요한 프리소 전하, 오라녜나사우 공자, 암스베르크 남작으로 불렸다. 2004년 3월 19일, 왕실 칙령에 따라 '반 오라녜나사우 반 암스베르크'라는 성과 세습 귀족 칭호인 남작 (여남작) 반 암스베르크, 세습 칭호 '오라녜나사우 백작'을 부여받았다. 같은 칙령에 의해 개인적이고 세습되지 않는 칭호인 '오라녜나사우 공자'와 '전하'라는 존칭은 유지되었다.
2002년 왕실 구성원 자격에 관한 법률에 따라, 프리소 공자는 의회의 동의 없이 결혼함으로써 '네덜란드 공자'라는 칭호를 잃었다. 2004년 왕실은 그가 이후 "프리소 공자"로 불리기를 요청했다고 발표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존칭과 칭호의 여성형을 예우 칭호로 얻었는데, 왕족 구성원의 부인이 남편의 칭호를 따르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부부에게서 태어난 모든 자녀는 '반 오라녜나사우 반 암스베르크'라는 성을 받고 '오라녜나사우 백작(여백작)'이 되며, '남작 (여남작) 반 암스베르크'라는 귀족 칭호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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