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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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무라지(大連)는 고대 일본의 관직으로, 각 오키미(大王, 천황)가 임명했으며, 《선대구사본기》에는 제5대 고쇼 천황 때 오키쓰요소(瀛津世襲)가 최초의 오무라지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스이닌 천황 때의 모노노베노 토치네(物部十千根)가 최초의 오무라지로 등장한다. 유랴쿠 천황 때부터 오오미(大臣)와 함께 상설직이 되었고, 6세기에는 오토모 씨와 모노노베 씨가 오무라지 자리를 두고 경쟁했다. 6세기 후기, 모노노베 씨의 모리야가 오무라지로 임명되었으나, 소가노 우마코와의 대립에서 패배하면서 오무라지 직은 폐지되었다. 1980년대 이후, 오무라지 직제의 존재에 대한 이설이 제기되었다.
오무라지(大連)는 고대 일본 야마토 왕권의 최고위 직책 중 하나로, 오오미(大臣)와 함께 국정을 총괄했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는 제5대 고쇼 천황 때의 오키쓰요소(瀛津世襲)를,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제11대 스이닌 천황 때의 모노노베노 도오치네(物部十千根)를 최초로 언급한다. 다만 이 초기 기록들의 역사적 실재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안칸 천황 원년 3월 조에 안칸 천황의 비는 모노노베노 키렌시 오무라지의 딸 타쿠히메라고 기록)
2. 역사
본래 각 천황(오키미)의 치세마다 임명되었으나, 유랴쿠 천황 때 오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와 모노노베노 메(物部目)가 함께 임명된 이후 오오미와 더불어 상설직화된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전반에는 오토모노 가네마로(大伴金村)와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麁鹿火) 등이 오무라지를 맡았으며, 특히 오토모노 가네마로는 게이타이 천황 옹립에 기여하며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한반도 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오토모노 가네마로가 실각한 후,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와 그의 아들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가 연이어 오무라지에 오르며 모노노베 씨가 그 지위를 독점했다. 하지만 6세기 후반, 불교 수용과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오오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의 대립 끝에 모노노베노 모리야가 멸망하면서 오무라지 제도는 폐지되었고, 이후 소가씨(蘇我氏)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2. 1. 초기 오무라지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의 「천손본기」에 따르면, 오와리씨의 먼 조상인 오키쓰요소(瀛津世襲)가 제5대 고쇼 천황의 오무라지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오무라지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제11대 스이닌 천황 때의 모노노베노 도오치네(物部十千根)이다. 이들 초기 기록 속 인물들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오무라지는 각 천황이 자신의 치세마다 임명하는 방식이었으나, 유랴쿠 천황 때 오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와 모노노베노 메(物部目)가 함께 오무라지로 임명된 이후에는 오오미(大臣)와 함께 상설직이 된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전반, 부레쓰 천황의 치세에는 오토모노 가네마로(大伴金村)와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麁鹿火)가 오무라지로 임명되었다. 특히 게이타이 천황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오토모노 가네마로가 큰 권력을 누렸다.
센카 천황 때 모노노베노 아라카히가 사망하자, 그의 동족(아버지의 사촌 형제라는 설도 있음)인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가 긴메이 천황에 의해 오무라지로 임명되었다. 이후 오토모노 가네마로는 한반도에서의 외교 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탄핵을 받아 실각했다. 이로써 모노노베씨가 단독으로 오무라지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6세기 후반, 비다쓰 천황과 요메이 천황의 시대에는 오코시의 아들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가 오무라지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요메이 천황 사후, 불교 수용 문제와 황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오오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모리야는 소가노 우마코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공격받아 멸망하였고, 이를 계기로 오무라지 제도는 폐지되었다. 이후 소가씨(蘇我氏)가 오오미로서 궁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2. 2. 오무라지의 상설화
오무라지는 본래 각 오키미(大王)가 자신의 치세마다 임명하는 직책이었으나, 유랴쿠 천황(雄略天皇) 때 오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와 모노노베노 메(物部目)가 함께 오무라지로 임명된 이후에는 오오미(大臣)와 더불어 상설직이 된 것으로 보인다.
부레쓰 천황(武烈天皇)의 치세에 해당하는 6세기 전반에는 오토모노 가네마로(大伴金村)와 모노노베노 아라카히(物部麁鹿火)가 오무라지로 임명되었다. 특히 게이타이 천황(継体天皇) 옹립에 공을 세운 오토모노 가네마로가 한동안 권세를 떨쳤다. 센카 천황(宣化天皇) 시대에 모노노베노 아라카히가 사망하자, 그의 동족(아버지의 사촌으로 여겨짐)인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가 긴메이 천황(欽明天皇)에 의해 오무라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오토모노 가네마로는 한반도 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탄핵으로 실각하였고, 이후 모노노베 씨가 단독으로 오무라지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비다쓰 천황(敏達天皇)과 요메이 천황(用明天皇)의 치세인 6세기 후기에는 오코시의 아들인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가 오무라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요메이 천황 사후, 불교 수용 문제 및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오오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결국 소가노 우마코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모리야는 공격받아 멸망하였고, 이를 계기로 오무라지 직책은 폐지되었다. 이후 소가씨(蘇我氏)의 오오미가 궁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2. 3. 모노노베 씨의 독점과 몰락
유랴쿠 천황 시대에 오토모노 무로야와 모노노베노 메가 함께 오무라지로 임명된 이후, 오무라지는 대신(오오미)과 함께 상설직이 되었다. 부레쓰 천황의 치세에 해당하는 6세기 전반에는 오토모노 가네무라와 모노노베노 아라카히가 오무라지로 임명되었다. 특히 게이타이 천황 옹립에 공을 세운 오토모노 가네무라가 권세를 떨쳤다.
센카 천황 시대에 모노노베노 아라카히가 사망하자, 그의 동족(아버지의 사촌으로 추정)인 모노노베노 오코시가 긴메이 천황에 의해 오무라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오토모노 가네무라는 한반도에서의 외교 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탄핵을 받아 실각하였다. 이로 인해 모노노베씨가 단독으로 오무라지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비다쓰 천황과 요메이 천황의 치세에 해당하는 6세기 후기에는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아들인 모노노베노 모리야가 오무라지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요메이 천황 사후, 불교 수용 문제와 황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대신 소가노 우마코와 모노노베노 모리야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발생했다. 결국 소가노 우마코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모노노베노 모리야 세력은 멸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무라지 직책은 폐지되었고, 이후 소가씨 출신의 대신이 궁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3. 오무라지 목록
모노노베노 아라카히 모노노베노 키렌시의 손자 모노노베노 오코시 모노노베노 메의 손자 모노노베노 니에코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아들 모노노베노 모리야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