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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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가 씨는 고대 일본의 유력 씨족으로, 다케우치노 스쿠네를 시조로 하며, 가와치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쳤다. 소가 씨는 황실과의 혼인을 통해 외척 세력을 형성하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특히 소가노 이나메, 에미시, 이루카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권력을 독점하며 전성기를 누렸지만, 을사의 변으로 인해 몰락했다. 이후 소가 씨의 방계 후손들이 정치적 역할을 이어갔으나, 임신의 난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다. 소가 씨는 멸망 이후에도 가문은 분파되어 각지에서 활동했으며, 도래인 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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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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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족 이름 (한국어) | 소가 씨 |
씨족 이름 (일본어) | 蘇我氏 (소가 시) |
씨족 이름 (로마자 표기) | Soga uji |
씨성 | 소가 오미 |
거점 지역 | 야마토국 다카이치군 소가 읍 |
창시자 | 소가노 이시카와 |
마지막 통치자 | 소가노 에미시 |
해체 시기 | 645년, 을사의 변 |
주요 활동 시기 | 3세기 - 8세기 (야마토 시대) |
가문 형태 | 씨족 |
씨족 구분 | 황별 |
씨족 신사 추정 | 소가지사 소가쓰히코 신사 (나라현가시하라시) |
가계 | |
부모 가문 | 일본 황실 |
시조 | 다케우치노 스쿠네 ( 고겐 천황의 후손) |
후손 씨족 | 이시카와 아손, 아오키 씨 (지하가) |
주요 인물 | |
주요 인물 | 소가노 이나메 소가노 우마코 소가노 에미시 소가노 이루카 소가노 아카에 소가노 구라야마다 이시카와마로 |
2. 출자와 표기
소가 씨의 기원(출자)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과 설이 존재한다. 고사기나 일본서기 등에서는 전설적인 인물 다케우치노 스쿠네를 시조로 언급하며, 『신찬성씨록』에서는 황별(皇別) 씨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16]
본격적인 활동은 6세기 중엽 소가노 이나메 때부터 확인되며, 초기에는 가와치국 이시카와군이나 야마토국 타카이치군 소가노사토 일대를 기반으로 한 토착 호족 세력으로 추정된다. 소가 씨는 백제로부터 전래된 불교 수용을 둘러싸고 전통 신토 세력인 모노노베 씨와 대립하였다.
2. 1. 출자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전설적인 인물인 다케우치노 스쿠네(武内宿禰)를 소가 씨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16]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서는 소가 씨를 황별(皇別), 즉 역대 천황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씨족으로 분류한다.[16] 다른 기록에서는 고겐 천황의 증손자인 소가노 이시카와가 소가 씨를 창시했다고도 전해진다.소가 씨의 구체적인 활동이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6세기 중엽의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 때부터이며, 그 이전 시기의 소가 씨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적다. 다만, 초기 소가 씨는 가와치(河内)의 이시카와(石川, 현재 오사카부 이시카와강 유역) 또는 야마토국 타카이치군 소가노사토(蘇我里, 현재 나라현 가시와라시 소가정 일대)를 본거지로 삼았던 토착 호족 세력으로 추정된다.
야마토국 타카이치군 소가를 본거지로 보는 설은 현재 해당 지역에 소가니마스 소가츠히코 신사가 위치하고 있으며, 『기씨 가첩』(紀氏家牒)에 "소가노 이시카와 숙네의 집은 야마토국 타카이치군 소가 마을에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다. 또한 소가 씨 종가의 거처와 동족 세력의 본거지가 이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7]
반면, 가와치국 이시카와군을 본거지로 보는 설은 『일본삼대실록』 간교 원년(877년) 조에 이시카와 기무라(石川木村)가 스스로 "소가노 이시카와는 가와치국 이시카와 별업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한 기록에 기반한다.[7] 하지만 이는 소가 씨 종가가 멸망한 후, 소가노 쿠라 씨(蘇我倉氏)가 씨족의 우두머리 자리를 계승하고 후에 이시카와 씨(石川氏)로 성을 바꾼 뒤에 만들어진 조상 전승일 가능성도 제기된다.[7]
한편, 원래 소가 씨는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공통 시조로 하여 거세 씨(巨勢氏), 하타 씨(波多氏) 등 기노카와(紀ノ川) 유역을 기반으로 한반도와 교류하던 세력들을 아우르는 동족 관계를 형성했으며, 이후 7세기 후반경에 기씨(紀氏), 헤구리 씨(平群氏)까지 포함하는 다케우치노 스쿠네 계보를 만들었다는 설도 존재한다.[7]
2. 2. 표기
오늘날 소가 씨족을 지칭하는 이름 '소(Soga)'는 한자로 蘇我(소가)라고 표기한다. 이 표기는 『일본서기』에서 주로 사용된 방식에서 유래했다.[1] 다만 다른 역사 문서에서는 씨족 이름을 다른 방식으로 표기하기도 했다.[2] 이 이름에 사용된 두 글자(蘇, 我)는 소리만 빌려 쓴 아테지이며, 글자 자체의 의미(蘇: 되살아나다, 我: 나)는 이름의 본래 의미와는 관련이 없다.다른 역사서에 나타나는 표기는 다음과 같다.
- '''일본서기''': 蘇我 (소가)
- '''고사기''': 宗家 (종가)
- '''선대구사본기''' 천손본기, '''상궁성덕법왕제설''', '''일본삼대실록''': 宗我 (종아)
- '''원흥사연기장''' (元興寺縁起帳): 巷奇 (항기)
3. 역사
소가 씨는 고대 일본의 야마토 시대 후기부터 아스카 시대에 걸쳐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던 호족 씨족이다. 그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다케우치노 스쿠네나 고겐 천황의 후손이라는 전승이 있으며, 야마토국 소가(현 나라현 가시와라시 일대) 또는 가와치국 이시카와(현 오사카부 이시카와강 유역)를 본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백제 등 한반도와의 교류를 통해 성장한 것으로 보이며, 도래인 세력과의 연관성도 제기된다.
본격적인 역사 기록은 6세기 중반 소가노 이나메로부터 시작된다. 이나메는 대신으로서 긴메이 천황의 외척이 되어 정치적 기반을 다졌으며, 특히 백제로부터 전래된 불교 수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전통 신앙을 중시하던 모노노베 씨, 나카토미 씨 등과 대립하였다. 이는 일본 고대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이나메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는 정미의 변을 통해 경쟁 세력인 모노노베 씨를 제거하고 소가 씨의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그는 스슌 천황을 암살하고 스이코 천황을 옹립하는 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그의 대에 소가 씨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우마코 사후 아들 소가노 에미시와 손자 소가노 이루카가 권력을 세습하였으나, 점차 전횡이 심화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이루카는 유력 황위 계승자였던 야마시로노오에 왕을 제거하는 등 강압적인 정치를 펼쳤고, 이는 결국 나카노오에 황자(훗날 덴지 천황), 나카토미노 카마타리(훗날 후지와라노 카마타리) 등이 주도한 645년 을사의 변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이루카와 에미시가 살해되면서 소가 씨 본종가는 몰락하였다.
을사의 변 이후 소가 씨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이는 다이카 개신과 같은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 강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소가 씨의 일부 후예는 이시카와 씨 등으로 성을 바꾸어 명맥을 유지했으나 과거의 위상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계를 통해서 소가 씨의 혈통은 후대 천황가와 후지와라 씨 등 주요 귀족 가문으로 이어졌다.
3. 1. 소가노 이나메 이전
『고사기』나 『일본서기』에는 다케우치노 스쿠네(武内宿禰)를 소가 씨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서는 소가 씨를 황별(皇別), 즉 역대 천황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씨족으로 분류하고 있다.[16] 일설에는 고겐 천황의 증손자인 소가노 이시카와가 소가 씨족을 창시했다고도 여겨진다.소가씨의 구체적인 활동이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6세기 중반의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부터이며, 그 이전의 소가씨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적다. 다만, 가와치 이시카와(石川, 현재의 오사카부 이시카와강 유역) 및 야마토국 다카이치군(高市郡) 소가노사토(蘇我里, 현재의 나라현 가시와라시 소가정 일대)를 본거지로 삼았던 토착 호족 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거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 '''야마토국 다카이치군 소가 설''': 현재 해당 지역에 소가니마스 소가츠히코 신사가 위치하며, 『기씨 가첩』에 "소가노 이시카와노 스쿠네의 집은 야마토국 다카이치군 소가 마을에 있었다"는 기록이 주요 근거이다. 또한 소가 씨 종가의 거주지가 이 주변의 카루, 토요우라, 오하리다, 아스카 등지에 분포했던 점으로 미루어 소가 씨에게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7]
- '''가와치국 이시카와군 설''': 『일본삼대실록』 간교 원년(877년) 조에 이시카와 기무라(石川木村)가 "소가노 이시카와는 가와치국 이시카와 별업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한 기록에 근거한다. 그러나 이는 소가 씨 본종가가 멸망한 후, 소가노 쿠라 우지가 씨족의 우두머리 자리를 계승하고 후에 이시카와 씨로 성을 바꾼 뒤에 만들어진 전승일 가능성도 제기된다.[7]
한편, 소가 씨의 기원에 대해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원래 카츠라기노 소츠히코를 공통 시조로 하여 소가 씨, 거세 씨, 하타 씨 등 기노카와(紀ノ川) 유역을 기반으로 한반도와 교류했던 세력들을 아우르는 동족 계보가 소가 씨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후 7세기 후반에는 기씨, 헤구리 씨까지 포함하는 다케우치노 스쿠네 계보로 확장되었다는 설이다.[7] 이는 소가 씨가 도래인과의 관계 및 대외 교류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백제에서 전래된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일본 고유 신토를 중시하는 모노노베 씨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3. 2. 전성기 (소가노 이나메 ~ 소가노 이루카)
소가노 이나메는 6세기 중엽부터 활동이 기록된 인물이다. 그 이전 소가씨는 가와치 이시카와와 가쓰라기현 소가노사토를 본거지로 한 토착 호족으로 추정된다. 『신찬성씨록』은 소가씨를 역대 천황에서 갈라져 나온 황별 씨족으로 분류한다.[16]소가노 이나메는 536년부터 570년 사망할 때까지 대신을 지냈으며, 황실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두 딸(소가노 기타시히메, 소가노 오아네노키미)을 긴메이 천황에게 시집보냈고, 그중 한 명은 요메이 천황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후 여러 천황이 이나메의 후손을 아내나 어머니로 두게 되면서, 소가씨는 천황가의 외척으로서 권력 기반을 다졌다. 이 시기 소가씨는 오토모씨, 모노노베씨와 함께 3대 세력을 이루었으며, 오토모노 가네무라가 실각한 후에는 모노노베씨(모노노베노 오코시)와 양대 세력을 형성했다.
소가씨는 백제를 비롯한 외국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으며, 불교와 중국 유교에 기반한 선진적인 정부 및 문화 모델 도입을 선호했다.[3] 특히 이나메는 백제에서 전래된 불상을 숭배할 것을 주장하며 불교 확산을 지원했다.[4] 그는 불교 수용이 씨족의 독립성을 약화시키고 천황 중심의 새로운 통치 체제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전통 신앙(신토)을 중시하던 모노노베씨와 나카토미씨는 불교가 외래 사상이며 토착 신(가미)에 대한 모독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불상 도착 후 역병이 돌자, 이들은 이를 신들의 분노 탓으로 돌리며 소가씨의 사찰을 불태우는 등 갈등이 격화되었다. 약 50년간의 이념 대립 끝에 소가씨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불교는 일본 사회에 점차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나메 사후, 그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가 권력을 계승하여 모노노베씨와의 대립을 이어갔다. 요메이 천황 사후 벌어진 후계자 분쟁에서 우마코는 모노노베씨가 지지하던 아나호베 황자를 암살하고, 정미의 변에서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토벌함으로써 경쟁 세력을 제거했다. 이후 다른 씨족에서는 대련이 임명되지 못하면서 소가씨의 일극 체제가 확립되었다.
우마코는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스슌 천황을 암살하고, 스이코 천황에게 가쓰라기 현의 할양을 요구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스이코 천황 18년(610년) 신라 사신 접견 시, 우마코는 정청 앞에서 직접 보고를 받고 사신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등 외교권을 장악한 모습을 보였다.[7]
우마코 사후에는 아들 '''소가노 에미시'''와 손자 '''소가노 이루카'''가 권력을 이어받았다. 에미시는 스이코 천황 18년(610년) 신라 사신 접견 의례에서 오토모노 구이, 사카모토노 누카테, 아베노 토리와 함께 '4대 부' 중 한 명으로 참여했는데, 소가씨는 대신과 부를 각각 배출하며 다른 씨족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했음을 보여준다.[7] 에미시와 이루카는 모노노베씨의 씨족신을 모시는 이소노카미 신궁의 제사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여겨진다.[8]
그러나 에미시 대부터 소가씨의 권력 남용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에미시는 천황을 업신여기는 행동을 했으며, 644년경 에미시와 이루카 부자는 스스로를 "국왕"이라 칭하고 화려한 궁궐과 무덤을 건설하는 등 천황가를 능가하는 위세를 과시했다. 소가노 이루카는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였던 야마시로노오에 왕을 비롯한 가미노미야 왕가를 토멸하고, 숙부이자 자신들의 전횡에 반대하던 사카이베노 마리세를 실각시키는 등 강압적인 정치를 펼쳤다.
다만 우마코 이후 소가씨의 행적에 대해서는, 단순히 권력욕에 의한 횡포라기보다 커지는 반발 속에서 정치 기반을 안정시키려 한 강권 정치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는 소가씨에 비판적인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 대한 반론이다.
3. 3. 을사의 변 이후 ~ 임신의 난까지
을사의 변으로 소가노 이루카는 고교쿠 천황 앞에서 삼국 시대의 사신을 맞이하는 의식이 진행되던 중 나카노오에 황자(훗날 덴지 천황)에게 공격당했고, 결국 황자의 경호원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 역시 자신의 저택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중요한 궁정 문서들이 소실되었다.이 사건으로 소가씨 본종가는 몰락하였고, 그들을 따르던 세력은 흩어지거나 제거되었다. 사건 직후 고교쿠 천황은 퇴위하고 그녀의 동생이 고토쿠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수대에 걸쳐 강력한 권력을 누렸던 소가씨의 황실에 대한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훗날 후지와라노 카마타리)와 나카노오에 황자와 함께 이루카 암살에 가담했던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노 마로의 가계가 소가씨의 명맥을 잇게 되었으나, 소가씨의 정치적 위상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을사의 변 2년 후 다이카 개신이 단행되어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를 강화하려는 개혁이 시작되었다. 소가씨의 몰락은 이러한 고대 일본의 정치적 격변과 변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소가씨를 계승한 이시카와 아손(石川朝臣)은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하급 귀족 가문으로 남게 되었다. 육국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시카와 씨 가문에서는 3위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르는 인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대부분 5위 정도의 관직에 머물렀다고 한다.[7] (다만, 기록에 남지 않은 6위 이하의 하급 관인은 다수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7]). 또한 이시카와 사네모리를 제외하면 의정관이나 변관과 같은 중앙 정부의 핵심 요직에도 거의 임명되지 못했다.[7]
3. 4. 소가계 이시카와 아손
여계를 통해서 소가씨의 혈통은 후대에 이어졌다. 소가노 키시오히메의 손녀인 키비노히메노미코토는 코교쿠 천황을 낳았으며, 이후의 천황들은 모두 그의 자손이다. 또한,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 시집간 소가노 쇼시는 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세 아들을 낳았다. 이후 귀족 가문으로 명맥을 유지한 후지와라 난케, 후지와라 호쿠케, 후지와라 시키케는 이들의 자손이다.3. 5. 헤이안 시대
소오카 씨(宗岡氏)의 후예로는 아오키 씨 등이 있다.도사국의 고쿠진 영주였던 아키 씨는 소가노 아카에의 자손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아키 씨의 선조로 여겨지는 아래 인물들은 헤이안 시대 중기에 활동했으며, 이들은 소가 씨가 아니라 소오가베 씨의 후예로 추정된다[7].
연도 | 인물 | 비고 |
---|---|---|
조호 2년(1000년) | 소가노 카네히로 | 도사국 아키군 다이료(大領), 보타락 도해 |
- | 소가노 카네자네 | 카네히로의 아들 |
조토쿠 2년(996년) | 소오가노 히로노리 | 우에몬시(右衛門志) 겸 겐비이시(検非違使)로 사망 |
조토쿠 2년(996년) | 소오가베노 뇨지 | 에치젠 곤다이죠(権大掾) 추정 |
조호 2년(1000년) | 소오가베노 뇨세츠 | 스모 선수 추정 |
초와 4년(1015년) | 소오가베노 아키토키 | 우칸쇼(右官掌) 임명 |
초겐 원년(1028년) | 소오가베노 뇨코 | 도사 곤노스케(権介) 추정 |
에이쇼 5년(1050년) | 소오가베노 마사토 | 도사노스케(介) 추정 |
한편, 소가 씨의 혈통은 여계를 통해서도 이어졌다. 소가노 키시오히메의 손녀인 키비노히메노미코토는 코교쿠 천황을 낳았으며, 이후의 천황들은 모두 키비노히메노미코토의 자손이다. 또한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 시집간 소가노 쇼시(蘇我娼子)는 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세 아들을 낳았다. 이들은 각각 헤이안 시대의 주요 귀족 가문인 후지와라 난케, 후지와라 호쿠케, 후지와라 시키케의 선조가 되었다.
4. 소가씨의 분파
소가씨는 본가를 중심으로 교통의 요충지에 일족을 배치하여 각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7] 아스카데라, 도요우라데라, 야마다데라, 오쿠야마 폐사, 와다 폐사, 다나카 폐사, 휴가데라와 같은 소가씨 계통의 사찰들이 아스카 지역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아스카 남쪽에서 서쪽 구릉 지대에는 도래인 계통 씨족의 사찰이 분포하여 고대 교통로의 요충지를 장악했다는 분석도 있다.[7] 이러한 씨족 사찰은 담장 등으로 둘러싸여 있어, 유사시에는 요새로 활용될 수 있는 시설이었다.[7]
『신찬성씨록』에는 소가씨와 동족(同族) 관계에 있는 여러 씨족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시카와 아손(石川朝臣) 동족"으로 다구치(田口) 아손, 사쿠라이(桜井) 아손, 기(紀) 아손, 하야시(林) 아손, 이쿠에(生江) 아손, 야구치(矢口) 아손, 야타(箭田) 아손, 거세(巨勢) 아손, 헤구리(平群) 아손, 다카무쿠(高向) 아손, 다나카(田中) 아손, 오바리다(小墾田) 아손, 가와베(川辺) 아손, 기시다(岸田) 아손, 구메(久米) 아손, 미소기(御炊) 아손, 호시카와(星川) 아손, 에누마(榎井) 신(眞人)의 18개 씨족이 언급된다. 그러나 이 중에서 야구치 아손, 다카무쿠 아손, 다나카 아손, 오바리다 아손, 가와베 아손, 기시다 아손, 구메 아손, 미소기 아손은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후예로 여겨져, 소가씨의 직접적인 동족에는 포함되지 않는다.[7] 따라서 『신찬성씨록』에 언급된 씨족 중 다구치 아손, 사쿠라이 아손, 기 아손, 하야시 아손, 이쿠에 아손, 야타 아손, 거세 아손, 헤구리 아손, 호시카와 아손, 에누마 신의 10개 씨족이 소가씨의 동족으로 분류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한때 유력한 소가계 동족이었으나 항쟁으로 멸망했으며 외교 부문을 담당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카이베씨(境部氏)와 소가 쿠라씨(蘇我倉氏, 후의 이시카와씨)를 포함하면 총 12개 씨족이 소가씨의 주요 동족으로 파악된다.[7]
이시카와씨는 가와치국 이시카와군을 근거지로 삼았다. 소가노 쿠라마로가 하내 지역으로 진출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 이시카와마로(石川麻呂) 대에는 하내 지역 소가씨 동족의 중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씨족 이름에 창고를 의미하는 '창(倉)'자가 들어가는 점으로 미루어, 소가씨 내에서 재정 관리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집단으로 추정된다.[7] 실제로 야마토에서 하내로 이어지는 요코오지나 타케우치 가이도 주변에는 창고 관리와 관련된 씨족의 거주지가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 지역에는 왕권의 재정을 관리하는 창고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7]
소가씨가 이처럼 많은 동족을 분립시킨 것은 단순히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유력 씨족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합의체인 마헤츠키미(大臣) 회의 등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7] 하지만 이러한 체제는 각 동족 씨족들이 점차 본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를 시도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실제로 스이코 사후의 천황 계승 문제, 야마시로노 오에노 왕 토벌 사건, 그리고 잇시의 변과 같은 주요 정치적 격변기에는 일부 동족 세력이 본가와 대립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7]
5. 소가베와 분포
소가씨(蘇我氏)는 본가를 중심으로 교통 요충지에 일족을 배치하여 각 지역의 지배력을 강화했다.[7] 아스카데라, 도요우라데라, 야마다데라, 오쿠야마 폐사, 와다 폐사, 다나카 폐사, 휴가데라와 같은 소가씨 계통의 사찰들이 아스카를 중심으로 원 모양으로 분포하며, 아스카 남쪽에서 서쪽 구릉 지대에는 도래인계 씨족의 사찰이 분포하여 고대 교통로의 요충지를 장악했다는 지적이 있다.[7] 이러한 씨족 사찰들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어 유사시 요새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다.[7]
『신찬성씨록』에는 이시카와 아손(石川朝臣)의 동족으로 다구치 아손(田口朝臣), 사쿠라이 아손(櫻井朝臣), 기 아손(紀朝臣), 하야시 아손(林朝臣), 이쿠에 아손(生江朝臣), 야구치 아손(矢口朝臣), 야타 아손(箭田朝臣), 거세 아손(巨勢朝臣), 헤구리 아손(平群朝臣), 다카무쿠 아손(高向朝臣), 다나카 아손(田中朝臣), 오하리다 아손(小墾田朝臣), 가와베 아손(川邊朝臣), 기시다 아손(岸田朝臣), 구메 아손(久米朝臣), 미소기 아손(御炊朝臣), 호시카와 아손(星川朝臣), 에누마노 스쿠네(榎井倭) 등 18개 씨족이 기재되어 있다. 이 중 야구치 아손, 다카무쿠 아손, 다나카 아손, 오하리다 아손, 가와베 아손, 기시다 아손, 구메 아손, 미소기 아손은 타케우치노 스쿠네의 후예로 여겨지며 소가씨 동족에는 포함되지 않는다.[7] 그 외에 항쟁으로 멸망한 유력한 소가계 동족이자 외교를 담당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카이베씨(境部氏)와, 후의 이시카와씨가 되는 소가 쿠라씨(蘇我倉氏)도 존재하여, 이들을 합하면 총 12개의 소가씨 동족 씨족이 된다.[7]
이시카와씨는 가와치국 이시카와군을 기반으로 삼았다. 소가노 쿠라마로가 가와치로 진출했으며, 그의 아들 소가노 이시카와마로 대에는 가와치 지역 소가씨 동족의 중심이 되었다. 씨족 이름에 '창(倉)' 자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소가씨에게 중요한 재정 관리를 분담했던 집단으로 추정된다.[7] 야마토에서 가와치의 요코오지나 타케우치 가이도를 따라 창고 관리인들의 본거지가 집중되어 있었으며, 이 지역에는 왕권의 정치적 창고가 설치되었다.[7]
소가씨가 많은 동족을 분가시키고 각 대표를 마에츠키미 회의 등에 참여시킨 것은 군사적,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마에츠키미 회의를 장악하려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7] 하지만 이 체제는 각 씨족이 본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 행보를 보일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실제로 스이코 천황 사후의 천황 계승 문제, 야마시로노 오에노 왕 토벌, 잇시의 변 때에는 본가와 대립하는 움직임을 보인 인물들이 나타났다.[7]
소가베(蘇我部)는 소가씨의 부민(部民)이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소기베노 오비토(蘇宜部首)는 주아이 천황의 황자 호무야와케노미코의 후예라고 한다. 소가베는 기나이(畿内)의 야마시로국, 가와치국을 비롯하여, 도카이도의 도토미국, 가즈사국, 시모사국, 도산도의 미노국, 시나노국, 무쓰국, 호쿠리쿠도의 에치젠국, 산인도의 단바국, 다지마국, 오키국, 산요도의 스오국, 난카이도의 아와국, 사누키국, 도사국, 사이카이도의 쓰쿠시국, 히고국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소규모로 분산되어 존재했다.
소가씨가 동국(東国)과 호쿠리쿠 지방에 부민을 소유하게 된 정확한 시기와 경위는 불분명하다. 다만, 소가씨의 시조로 여겨지는 타케우치노 스쿠네(실존 여부는 불확실)가 게이코 천황 때 호쿠리쿠와 동방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에미시 땅의 정벌을 건의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소가씨가 이들 지역에 부민을 소유하고 있던 현실을 반영한 설화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소가노 에미시가 에미시를 자신의 저택에서 접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다이카 개신 이후 이러한 접대는 조정에서 전담하게 되었으므로, 이는 당시 소가씨의 강력한 세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진다.
더 나아가 『일본서기』에는 소가노 에미시가 항상 50명의 병사에게 신변 보호를 맡겼으며 이들을 "동방의 사인(東方の舎人, 아즈마노 토네리)"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동방(東方)'이라는 표현에서 이 병사들의 다수가 동국 출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이는 소가씨의 동국 부민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에미시의 신변을 보호하는 대가로 부민 관계가 성립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러한 관계는 에미시 이전의 소가노 우마코나 소가노 이나메 시대부터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부민이 동국이나 무쓰 같은 먼 지역에 분포하는 점으로 미루어 아주 오래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아와, 사누키, 스오, 쓰쿠시 등 세토 내해 연안 지역에 분포하는 부민은 소가씨와 한반도와의 관계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지역들은 한반도와의 교역로 상에 위치한다.
도사국 가미군에는 소가고(蘇我郷)가 있었고, 인접한 나가오카군에도 소베고(宗部郷)가 존재했다. 가미군에는 모노노베고(物部郷)도 있었는데, 모노노베씨 계열 인물이 군지를 맡았다. 『일본서기』에는 "소가 대신의 아내는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신의 여동생이었다. 대신(우마코)이 아내의 계책을 써서 모리야 대신을 죽였다. 난을 평정한 후 셋쓰국에 시텐노지를 짓고 모리야 대신의 노비 절반과 저택을 나누어 절의 노비와 장(荘)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모노노베씨의 사유 재산 처분이 소가노 우마코에게 위임되었고, 그 결과 도사국에도 소가씨가 진출하여 소가베가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13]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대신(에미시)의 할머니는 모노노베노 유게노 오무라지(物部弓削大連)의 여동생이다. 그러므로 어머니 쪽의 재산을 기반으로 세력을 떨쳤다"는 기록도 있어, 모노노베씨의 재산 전부가 소가씨에게 흡수된 것이 아니라, 일부는 모노노베씨의 유산으로 구별되어 소가씨 내에서 계승되었음을 시사한다.[13] 따라서 가미군에서는 소가베와 모노노베씨 계열 인물이 공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3]
헤이안 시대의 소가베 또는 소가베 출신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7]
인물 | 활동 시기 및 내용 |
---|---|
소가노 카네히로 (蘇我兼広) | 도사국 아키군 대령(大領). 조호 2년(1000년) 보타락 도해(補陀落渡海)를 행함. |
소가노 카네자네 (蘇我兼実) | 카네히로의 아들. 대령직 계승. |
소가노 히로노리 (蘇我広則) | 조토쿠 2년(996년) 우에몬노조(右衛門志) 겸 게비이시(検非違使)로 재직 중 사망. |
소부에노 요시모치 (宗部養餅) | 조토쿠 2년(996년) 에치젠국 곤노다이조(権大掾)로 추정됨. |
소부에노 스케타다 (宗部助忠) | 조호 2년(1000년) 스모인(相撲人)으로 추정됨. |
소부에노 아키토키 (宗部明時) | 조와 4년(1015년) 우칸쇼(右看督)에 임명됨. |
소카베노 스케타카 (曾我部助高) | 조겐 원년(1028년) 도사 곤노카미(権介)로 추정됨. |
소카베노 마사타다 (曾我部正忠) | 에이쇼 5년(1050년) 도사노카미(介)로 추정됨. |
또한, 『일본삼대실록』 조간 10년(868년) 윤12월 21일 조에는 "도사국(土左国)의 무위(無位) 소가 신(蘇我神)에게 종5위하(従五位下)를 서수한다"는 기록이 있다.
아키군 (고치현)에 있는 다케치사카모토 신사(多気坂本神社)는 소가씨의 동족인 사카모토씨나 아게나씨(上げな氏)가 건립했다는 설이 있다.[14]
『가마쿠라 유문서』(鎌倉遺文) 제8105호에는 오호 원년(1161년)에 "도사국 하타군의 군지(郡司)였던 소가베씨(宗我部氏)가 멸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가이온지 조고로는 조소카베씨의 조상이 소가베의 관리인이었던 진씨(秦氏) 혹은 소가베 그 자체의 후예라는 설을 제창했다.[15]
6. 도사국의 소가씨
아키시의 역사서인 『아키시사』에 수록된 「아키씨 계도」에 따르면, 도사국 아키군의 고쿠진 영주였던 아키씨는 스스로 소가노 아카에의 후손이라고 칭하며 다음과 같은 계보를 전하고 있다.
계보는 소가노 아카에에서 시작하여 유이소 유키미, 유키치카, 유키츠네, 유키하루, 유키카네, 카네자네, 사네치카, 츠네도오, 사네히로, 히로사다, 히로야스, 사네츠네, 사네키요, 사네쿠니, 사네타다를 거쳐 아키 사네노부에 이른다.
아키 사네노부 이후의 계보는 아키씨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7. 소가씨 도래인설과 그 부정
카도와키 테이지가 1971년에 소가씨 도래인설을 제창했다. 카도와키가 제창한 설은 응신 천황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온 백제의 고관 목만치와 소가 마치가 동일 인물이라는 내용으로, 스즈키 야스미와 야마오 사치히사 등이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 학설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어, 목만치와 소가 마치가 동일 인물임을 증명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는다.
# 『일본 서기』에 등장하는 목만치(응신 천황 25년, 서기 414년으로 해석됨)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목협만치(개로왕 21년, 서기 475년) 사이에는 활동 시기 차이가 크다.
# 백제의 명문 귀족인 목(木)씨 가문 출신인 목만치가 자신의 성씨를 버리고 소가(蘇我)라는 새로운 씨성(氏姓)을 사용했다는 점이 자연스럽지 않다.
# 일본에서 도래인 계통 호족이 자신의 출신 배경을 바꾸는 경우는 주로 8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 『삼국사기』에 목협만치가 '남쪽으로 갔다'(南行)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반드시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의미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 백제 명문가 출신 인물의 손자 이름이 고구려를 뜻하는 '고려(高麗, 고마)'인 점도 설명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소가씨 도래인설은 현재 일본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8. 현대의 연구
2005년 11월 13일, 나라 문화재 연구소는 아마카시 언덕 동쪽 기슭 유적에서 소가노 이루카의 저택으로 여겨지는 "계곡의 궁문" 터로 보이는 유구를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견은 『일본서기』의 관련 기록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로 주목받고 있다.[6]
또한, 고분 연구를 통해 소가씨의 영향력을 추정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구 가즈사국 무사군(현재의 지바현 산무시)의 이타쓰케 고분군에 있는 다노쓰카 고분이나 다노쓰카니시 고분, 인바군에 있는 류가쿠지 이와야 고분과 같은 방분(네모난 무덤)은 소가씨와 연관된 세력이 축조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나라현 지역에서 가스가노미야마 고분(요메이 천황릉), 야마다 다카쓰카 고분(스이코 천황·다케다 황자릉), 이시부타이 고분(소가노 우마코의 묘로 추정) 등 소가씨 또는 소가씨와 관계 깊은 인물들의 무덤이 주로 방분 형태인 것과 연결된다. 반면, 마키노 고분과 같은 원분(둥근 무덤)은 소가씨와 거리가 있는 세력이 축조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12]。
류가쿠지 고분군 부근에 있는 류가쿠지는 호키지식 가람 배치를 보이며, 출토된 기와의 양상이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건립한 야마다데라의 것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이 지역에 기나이(수도권)의 소가씨와 관계를 맺은 재지 호족이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참조
[1]
웹사이트
Soga
http://nihonshoki.wi[...]
2023-07-01
[2]
위키백과
Soga clan
[3]
웹사이트
Japan - KOFUN AND ASUKA PERIODS
http://countrystudie[...]
[4]
웹사이트
History of Nara
http://www.pref.nara[...]
[5]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Ponsonby Memorial Society
[6]
뉴스
Soga no Iruka house believed found
http://heritageofjap[...]
Japan Times Weekly
2005-11-14
[7]
서적
蘇我氏 古代豪族の興亡
中央公論新社
[8]
서적
蘇我氏の研究
雄山閣
[9]
서적
蘇我氏 古代豪族の興亡
中央公論新社
[10]
간행물
古人大兄皇子論
2013-11
[11]
문서
日本三代実録
元慶元年12月27日
[12]
서적
千葉県駄ノ塚古墳発掘調査報告
国立歴史民俗博物館学
[13]
서적
古代交通研究 第9号
八木書店
[14]
서적
国史論纂
大日本図書
[15]
서적
海音寺潮五郎全集 第17巻
朝日新聞社
[16]
위키백과
蘇我氏와 曽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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