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시게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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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우치 시게히로는 1300년 아버지 오우치 히로이에의 사망으로 가문을 계승한 인물이다. 그는 가마쿠라 막부의 로쿠하라 단다이 효조슈를 맡았고, 스오의 재청관인 맹주로서 교토 치안 유지에 기여했다. 13세기 말부터 도다이지 승병과의 분쟁에 휘말려, 로쿠하라 단다이의 지위를 이용하여 승려 신겐을 파면시키는 등 재청관인의 입장을 옹호했다. 1320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는 적남 히로유키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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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우치 시게히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씨족 | 다타라성(多々良姓) 오우치씨(大内氏) |
| 이름 | 오우치 시게히로 |
| 원어 이름 | 大内重弘 |
| 가몬 | Japanese Crest Oouchi Hisi.svg |
| 가몬 설명 | 오우치 마름모(大内菱) |
| 시대 |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
| 출생 | 생년 미상 |
| 사망 | 겐오(元応) 2년 3월 6일(1320년 4월 15일) |
| 별명 | 오우치노스케(大内介) |
| 계명 | 승복사전본주대별가도산정혜대선정문(乗福寺殿本州大別駕道山浄恵大禅定門) |
| 묘소 | 일본 야마구치 현(山口県) 야마구치 시(山口市) 오우치고호리(大内御堀) 4초메(丁目) 6-33 죠후쿠지(乗福寺) |
| 관위 | 정6위상(正六位上)、스오노곤노스케(周防権介) |
| 막부 |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 효조슈(評定衆) |
| 주군 | 모리쿠니 친왕(守邦親王)→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다카우지(足利尊氏)→고무라카미 천황(後村上天皇)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오우치 히로이에(大内弘家) |
| 형제자매 | 시게히로(重弘) 딸 와시즈 나가히로(鷲頭長弘) 히로카게(弘景) 히로우지(弘氏) 에겐 시자(恵源侍者) 슌토쿠마루(春徳丸) 야다 모리카타(矢田盛賢) |
| 자녀 | 히로유키(弘幸) 딸(하타노도노波野殿) 히로나오(弘直) 모로나오(師直) |
2. 생애
오우치 시게히로는 선대 당주 히로이에의 아들로, 쇼안 2년(1300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그는 가마쿠라 막부의 교토 주재 기관인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에서 효조슈(評定衆)를 맡기도 했다.[1] 당시 오우치 가문은 스오의 유력 재청관인이자 막부의 고케닌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1]
시게히로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스오의 고쿠가령(国衙領) 지배를 둘러싸고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 세력과 재청관인들 사이에 갈등이 깊어졌는데, 시게히로 역시 이 분쟁에 깊이 관여하였다.[1] 그는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가문의 입지를 지키고자 노력했으며, 이 과정은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중요한 활동 중 하나였다.
겐오(元応) 2년(1320년) 3월 6일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뒤는 아들인 히로유키(弘幸)가 이었다.
2. 1. 가독 상속과 로쿠하라 단다이 효조슈 취임
선대 히로이에의 아들로, 쇼안 2년(1300년) 아버지의 사망 후 가독을 상속받았다. 『오우치 계도』(大内氏系図)에 따르면, 시게히로는 가마쿠라 막부 휘하의 교토 주재 기관인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의 효조슈(評定衆)를 역임했다고 한다.[1]오우치 가문은 본래 스오의 재청관인이었으나 점차 세력을 키워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御家人)이 되었으며, 쇼겐(正元) 연간에는 로쿠하라 단다이 산하에서 교토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재경인'(在京人)의 지위를 확보하였다.[1] 또한, 스오 지역의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했던 다타라 씨(多々良氏) 일족의 수장으로서, 스오 재청관인 세력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시게히로가 가독을 계승한 13세기 말부터,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 세력이 스오 내 고쿠가령(国衙領) 지배에 개입하면서 재청관인들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1] 시게히로는 이러한 분쟁 속에서 로쿠하라 단다이 효조슈로서의 지위를 활용하여 가문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2. 2. 도다이지와의 분쟁
시게히로가 가독을 이은 13세기 말부터, 나라 도다이지(東大寺)의 대권진(大勧進) 직책이 이권화되면서 문제가 생겨났다. 도다이지 소속 승병(衆徒, 주도)들이 스오국 내 국아령(国衙領) 지배에 개입하고 폭력적으로 변하자, 이에 재청관인(在庁官人)들이 맞서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시게히로 역시 이러한 다툼에 휘말리게 되었다.쇼와 원년(1312년) 이후, 대권진직이자 고쿠시 쇼닌(国司上人)이었던 승려 신겐(心源)과 모쿠다이(目代)로 파견된 죠겐(承元)이 재청관인들과 전면적으로 충돌했다. 신겐과 죠겐은 국아령 내의 재청관인 소유지나 다른 사사령(寺社領)까지 모두 국아령에 포함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재청관인 측은 도다이지의 말사(末寺)였던 아미타지(阿弥陀寺)의 소유지까지 포함된 점을 지적하며, 대권진직이 아미타지를 폐사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시게히로는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의 효조슈(評定衆)라는 지위를 이용해 막부와 조정을 압박했다. 또한, 실겐(実玄)을 중심으로 한 승병들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신겐을 몰아내기 위한 강소(強訴)를 일으키도록 사주했다. 이에 신겐 측 승병들도 실겐의 유배를 요구하는 강소를 일으켰으나, 당시 교토에 머무르고 있던 시게히로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후 시게히로는 일단 국아령으로 편입했던 아미타지의 영지를 다시 기증하며 사태 수습을 시도했다.
하지만 시게히로를 비롯한 재청관인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결국 분포 2년(1318년) 말에 신겐을 파면시키는 데 성공했다.
2. 3. 사망
겐오(元応) 2년(1320년) 3월 6일에 사망하였다. 그 뒤를 적남(嫡男)인 히로유키(弘幸)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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