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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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다이지는 728년에 창건된 일본 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사찰로, 쇼무 천황의 명에 따라 대불상 건립을 위해 세워졌다. 741년에는 고쿠분지로 지정되어 일본 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대불전, 남대문, 법화당 등 다양한 건축물과 국보 및 중요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특히, 대불전은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매년 다양한 행사와 의식이 거행된다. 하지만 대불 건립 과정에서 수은 오염으로 헤이조쿄가 멸망했다는 가설도 제기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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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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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도다이지 |
로마자 표기 | Tōdai-ji |
일본어 표기 | 東大寺 |
별칭 | 금광명사천왕호국지사 |
위치 | 나라현나라시 자소시초 1 |
종교 | 화엄종 |
주존불 | 비로자나불 (비루샤나-부쓰) |
국가 | 일본 |
설립자 | 쇼무 천황 |
창건 시기 | 8세기 초 |
재건 완료 | 1709년 |
공식 웹사이트 | 화엄종대본산 도다이지 공식 홈페이지 |
![]() | |
지도 | [[파일:Japan Mapplot.svg|256px|thumb|도다이지 지도]] |
문화재 정보 | |
국보 | 금당 (대불전) 남대문 노사나불 |
중요문화재 | 중문 염불당 대탕옥 석조 사자 |
사찰 정보 | |
산호 | 없음 |
사격 | 대본산 |
개산 | 료벤 |
창건주 | 쇼무 천황 |
공식 명칭 | 없음 |
순례지 | 법연상인25영적 제11번 (지시도) 야마토 북부 88개소 영장 제12번 (진언원) 남도칠대사 제1번 신불령장순배의 길 제14번 (나라 제1번) |
기타 정보 | |
지도 좌표 | 34 |
일본어 위키백과 | 東大寺 |
영어 위키백과 | Tōdai-ji |
2. 역사
도다이지는 8세기 나라 시대에 쇼무 천황의 발원으로 건립된 후, 여러 차례 화재와 재건을 겪으며 일본 불교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 건립 초기: 쇼무 천황은 어린 나이에 죽은 황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와카쿠사야마 기슭에 금종사(金鐘寺)를 건립했는데, 이것이 도다이지의 기원이다. 이후 금종사는 야마토국의 고쿠분지 겸 총국분사로 지정되었고, 747년 대불 주조가 시작되면서 '도다이지'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743년 쇼무 천황은 대불 조립 조서를 발표하고 자향락궁에서 조성을 시작했으나, 745년 수도가 헤이조쿄로 돌아오면서 현재의 도다이지 위치에서 대불 조립이 재개되었다. 752년 대불 개안공양이 거행되었고, 758년 대불전이 준공되었다.
- 나라 시대: 남도육종(화엄종, 법상종, 율종, 삼론종, 성실종, 구사종)을 겸학하는 중심 사찰이었다. 간진은 도다이지에서 고켄 천황, 쇼무 천황 등에게 계를 수여하며 일본 불교에 수계 제도를 정착시켰다.
- 헤이안 시대 이후: 간무 천황의 남도 불교 억압책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구카이가 진언종을, 사이초가 천태종을 전파하며 "팔종겸학의 절"이 되었다. 이후 황족과 귀족의 존경을 받으며 성장했으나, 1181년 다이라노 시게히라의 남도소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고시라카와 법황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지원으로 재건되었으나, 1567년 도다이지 대불전 전투로 다시 소실되었다.
- 에도 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에 호코지(방광사) 대불을 조성했지만, 도다이지 대불 재건에는 착수하지 않았다. 에도 막부는 방광사 대불·대불전 수리에는 적극적이었으나, 도다이지 재건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1691년 승려 고케이의 노력으로 대불 수리가 완료되었고, 1709년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게이쇼인의 지원으로 대불전이 재건되었다. 현존하는 대불전은 호코지(방광사) 2대 대불전을 참고하여 설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시대 신불분리 정책으로 데무케야마 하치만궁이 도다이지에서 독립했다.
2. 1. 기원
도다이지 부지에 건물을 놓기 시작한 것은 728년 쇼무 천황이 어린 나이에 죽은 황태자 명복을 빌기 위해 기쇼센지(金鐘山寺)를 세웠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덴표 시대 일본은 거듭되는 재해와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다. 이러한 일을 겪은 후에, 쇼무 천황은 부처 힘으로 국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전국 곳곳에 고쿠분지(国分寺) 건설을 장려하는 칙령을 내렸다. 도다이지(이때는 여전히 기쇼센지)는 야마토국의 고쿠분지로 지정했고 일본의 모든 고쿠분지를 총괄하는 사원이 되었다. 729년 나가야 왕의 정변과 735~737년 천연두 창궐[7], 연이은 흉작과 740년 후지와라노 히로쓰구의 반란으로 일본은 곧 혼란한 상황에 빠졌고, 이로 말미암아 쇼무 천황은 수도를 네 번이나 옮겼는데, 이는 당시 불안정한 상황을 잘 나타낸다.[8]
쇼무 천황은 728년부터 749년 사이에 나라에 절을 짓도록 승려 건축가 로벤(盧般)에게 명령했다.[4] 도다이지는 나라 대불(奈良大仏), 즉 비루샤나불(毘盧遮那仏)의 불상으로 유명하다.[1]

8세기 전반에는 대불전 동쪽, 와카쿠사야마 기슭에 전신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대사요록에 따르면, 733년 와카쿠사야마 기슭에 창건된 금종사(金鐘寺)가 도다이지의 기원이라고 한다. 한편, 속일본기에 따르면, 728년 쇼무 천황과 고묘 황후가 어린 나이에 죽은 황자 기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와카쿠사야마 기슭에 "산방"을 설치하고 9명의 승려를 거주시켰던 것이 알려져 있으며, 이것이 금종사의 전신으로 보인다. 금종사에는 8세기 중반에는 권속당, 천수당이 존재했던 것이 기록에서 알 수 있으며, 이 중 권속당은 현재의 도다이지 법화당(법화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741년에는 국분사 건립의 조서가 발표되었고, 이에 따라 다음 해인 742년 금종사는 야마토국(현재의 나라현)의 국분사 겸 총국분사로 정해졌으며[50], 사명은 금광명사로 개칭되었다.
대불의 주조가 시작된 것은 747년이며, 이 무렵부터 "도다이지"라는 사호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다이지 건설을 위한 관청인 "조동대사사"가 사료에 보이는 것은 748년이 처음이다.
쇼무 천황이 대불 조립의 조서를 발표한 것은 그보다 이전인 743년 10월 15일이다. 당시 수도는 산배국의 궁인경(현・교토부키즈가와시)로 옮겨져 있었지만, 천황은 궁인경의 북동쪽에 위치한 자향락궁(현・시가현고카시시가라키정)에 있었고, 대불 조립도 여기서 시작되었다. 쇼무 천황은 단기간에 수도를 여러 번 옮겼지만, 2년 후인 745년 수도가 헤이조쿄로 돌아오면서 대불 조립도 현재 도다이지의 땅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이러한 대사업을 추진하려면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조정으로부터 탄압받던 행기를 대승정으로 맞아 협력을 얻었다. 또한, 749년에는 진수사로서 테무케야마 하치만구가 창건되었다.
난공사 끝에 마침내 대불의 주조가 완료되었고, 천축(인도) 출신의 브라만 승정 보리선나를 도사로 하여 대불개안공양(개안회)가 거행된 것은 752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대불 주조가 끝난 후 대불전의 건설 공사가 시작되어, 준공된 것은 758년이었다.
도다이지에서는 대불 창건에 힘썼던 량변, 쇼무 천황, 행기, 보리선나를 "사성(ししょう)"이라고 부른다.[51]
불상 조립 및 대불전 건립과 같은 대규모 건설 공사는 국고를 낭비하여 일본의 재정 상황을 악화시키는 등, 쇼무 천황에게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현실을 제시했다. 실제로 귀족과 사찰이 부유하고 번영하는 한편, 농민층의 부담이 급증하여, 헤이조쿄 내에서는 부랑자와 아사자가 끊이지 않았고, 조용조 세제도 붕괴 직전에 이르는 지방도 생기는 등, 율령 정치의 큰 모순점을 드러냈다.
756년 5월 2일, 쇼무 상황이 붕어한다. 그 해 7월에 일어난 것이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이다. 7월 4일에 체포된 타치바나노 나라마로는 후지와라 나가테의 심문에 대해 "도다이지 등을 조영하여 백성이 고생하고 있다. 정치가 무도하기 때문에 반란을 기도했다"라고 모반을 자백했다. 여기서, 나가테는 "애초에 도다이지의 건립이 시작된 것은 당신의 아버지(타치바나노 모로에) 시대이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으며, 애초에 당신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다"라고 반론하자, 나라마로는 대답에 막혔다고 한다.
2. 2. 초기 일본 불교에서의 역할
나라 시대 율령 체제 하에서 불교는 국가에 의해 소고(僧綱, 불교 승려들을 관리하기 위해 두어진 승관직)로 체계화되었다. 이 무렵 도다이지는 난토 6종 (법상종, 화엄종, 성실종, 삼론종, 율종, 구사종)의 고쿠분지들을 위한 총괄 지도자격인 사원 역할을 했다. 나라 시대에 도다이지는 "6종 겸학의 절"로 여겨져 대불전 내에는 각 종파의 경론을 넣어둔 "6종 주자"가 있었다. '6종 주자'는 일종의 도서관과 같은 것으로, 이 곳에서 부처를 모실 뿐만 아니라 교리에 관한 토론을 하거나 서적들을 보관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일본 불교는 율의 계통을 유지하고 있었고,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모든 승려들은 도다이지에서 율에 따라 수계를 받아야 했다. 754년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승려 감진은 도다이지에서 고켄 천황과 쇼무 천황을 포함한 황족들이 보살계를 받을 수 있게 하였고 일본 불교에 수계 제도를 정착시켰다. 이후 구카이, 사이초 등의 불교 승려들도 이곳에서 수계를 받았다.

율령 시대 나라 시대 정부 체제 하에서 불교는 국가에 의해 엄격히 규제되었다. 이 시기에 도다이지는 지방 사찰[10]과 당시 일본의 육종(호소, 케곤, 조지쓰, 산론, 리쓰, 쿠샤)의 중앙 행정 사찰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대의 서한들은 육종 모두가 도다이지에 행정관, 사당, 자체 도서관을 갖춘 사무소를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0]

이 시대 일본 불교는 율장의 계보를 유지했으며, 모든 공식적으로 인가받은 승려는 도다이지에서 율장에 따라 계를 받아야 했다. 754년, 중국에서 12년 이상 항해를 거쳐 6차례나 바다를 건너는 시도 끝에 일본에 도착한 감진은 고켄 천황, 쇼무 천황 등에게 계를 수여했다. 후대의 불교 승려들인 쿠카이와 사이초도 이곳에서 계를 받았다.[11] 쿠카이가 승강을 관리하는 동안 보살계( 범망경에 나오는)와 쿠카이가 새로 설립한 진언종의 비밀 계율인 삼마야를 포함한 추가적인 계율 의식이 도다이지에 추가되었다. 쿠카이는 829년까지 육종 승려들에게 비밀 가르침을 전수하기 위해 아비셰카당을 추가했다.[12]
나라 시대 이른바 남도육종(화엄종, 법상종, 율종, 삼론종, 성실종, 구사종)은 '종파'라기보다는 '학파'에 가까운 것이었고, 일본 불교에서 '종파'라는 개념이 확립된 것은 중세 이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사찰에서는 여러 종파를 겸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도다이지의 경우, 근대 이후로는 소속 종파를 명시할 필요가 생겨 화엄종을 표방했지만[52], 나라 시대에는 '육종 겸학의 사찰'로 여겨졌고, 대불전 안에는 각 종파의 경론을 봉안한 '육종 厨子'가 있었다.
2. 3. 중세 시대
일본 불교의 중심이 나라에서 히에이 산과 천태종으로 이동하고, 일본의 권력 중심이 가마쿠라로 이동하면서 도다이지의 권위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몇 세대 후에 도다이지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율의 계통은 소멸되었고 더 이상 도다이지에서 수례식이 행해지지 않았다.[47]헤이안 시대에 간무 천황은 남도 불교 억압책으로 “조동대사소”를 폐지하는 등 압박을 가했지만, 당나라에서 귀국한 구카이가 별당이 되어 절 안에 진언원을 열고, 사이초가 전한 천태종을 더하여 “팔종겸학의 절”이 되었다. 화엄경 세계의 상징인 비로자나불(대불) 앞에서 리슈경이 읽히는 것은 구카이가 남긴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47]
강당과 삼면 승방이 화재로, 서탑이 낙뢰로 소실되거나, 폭풍우로 남대문, 종루가 붕괴되는 등의 사건이 발생했지만, 후에 황족·귀족의 존경을 받아 쿠로다 쇼엔을 대표로 하는 많은 쇼엔을 기증받거나, 스스로 개발하여 가람 복원에 힘썼다. 나라의 유력 곤몬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많은 승병을 거느리고, 고후쿠지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조정에 쿄우소를 행하였다.[47]

도다이지는 인근의 고후쿠지와 함께 1181년 다이라노 시게히라에 의한 남도소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대불전을 비롯한 많은 당탑을 잃었다. 이후, 고시라카와 법황은 승려 슌죠보 쥬겐(쵸겐)을 대권진직에 임명하여 대불과 제당 재건에 착수하게 했다. 쥬겐의 활동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지원으로 재건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185년에는 대불개안법요가, 1190년에는 상동식이 거행되었다. 1195년에는 재건 대불전이 완성되어 낙경법요가 거행되었다.[47]
전국 시대 1567년 미요시 삼인중과 마쓰나가 히사히데에 의한 도다이지 대불전 전투로 인해 대불전을 포함한 도다이지의 주요 당탑은 다시 한번 소실되었다. 1573년 오다 노부나가는 도다이지를 전란에 휘말리게 하는 것과 난폭한 행위를 하는 자에 대한 엄벌을 통달하는 서장을 보냈다.[56]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6년에 소실된 도다이지 대불을 대신할 새로운 대불 조성을 발원하고[57], 교토에 방광사 대불(교토의 대불)을 조성했지만, 도다이지 대불 재건에는 착수하지 않았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도다이지 대불 재건에 신속하게 지원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방광사 대불은 도다이지 대불을 대신할 대불로 발원되었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리 시대에는 사찰 이름을 "도다이지"로 할 것도 구상되어 조정과의 협의가 이루어졌다.[58] 이 건은 오사카의 진에서 패배한 도요토미 씨의 멸망으로 중단되었다.[47]
도다이지는 파손된 대불에 응급 처치로 녹은 대불의 머리에 새롭게 동판으로 임시 머리를 만들어 붙이고, 임시 대불전도 지었지만, 1610년 폭풍으로 임시 대불전은 붕괴되었다. 이후 대불은 노천에 방치되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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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케이는 도다이지 대불의 수리와 대불전 복구를 위해 권진을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의 시주를 받아 대불 수리를 1691년에 완료하고, 이듬해 대불개안공양을 거행했다.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게이쇼인에게서 많은 기증을 받아 1709년 대불전을 완성했다.[47]
현존하는 3대째 도다이지 대불전은 높이와 깊이는 텐표 시대와 거의 같지만, 너비는 11칸에서 7칸으로 축소되었다. 3대째 도다이지 대불전은 방광사 2대 대불전을 참고하여 설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62] 도다이지 대불전 내부 벽에 장식된 「도다이지 대불전 건지할판도」는 적외선 촬영 결과, 대불전 계획이 너비 11칸에서 7칸으로 축소되기 이전의 설계도면이며, 방광사 대불전에 더 가깝다는 것이 밝혀졌다.[47]
2대 도다이지 대불전 소실 후, 방광사 대불전 조성이 이어지면서 대불전 조립 기법이 계승될 수 있었다. 3대 도다이지 대불전 기둥재는 기목재(철륜으로 고정한 집성재)인데, 이 기법은 2대 방광사 대불전에서 확립되어 도다이지 대불전에도 도입된 것으로 여겨진다.[63]
1709년부터 1798년까지 나라(도다이지)와 교토(방광사)에 대불·대불전이 병립했다. 에도 시대에는 방광사 대불이 규모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양쪽 대불을 실견하고, 도다이지 대불·대불전은 교토의 것보다 작지만 높게 보여 멋있고, 경치가 좋다고 기록했다. 방광사 대불은 매우 커서 눈이 놀랄 정도라고 적었다.[47] 방광사의 3대 대불은 1798년 낙뢰로 소실되었다.[47]
메이지 시대 신불분리로 데무케야마 하치만궁은 도다이지로부터 독립했다.[47]
2. 4. 근세 이후
일본 불교의 중심이 히에이 산과 천태종으로, 일본의 정치적 권력 중심이 겐페이 전쟁 이후 쇼군의 근거지인 가마쿠라로 옮겨가면서 도다이지의 권위는 약해졌다. 이후 여러 차례 부활을 시도했으나, 승려 서품식은 더 이상 도다이지에서 거행되지 않게 되었다.[53]헤이안 시대에 간무 천황의 남도 불교 억압책으로 “조동대사소”가 폐지되는 등 압박을 받았지만, 당나라에서 귀국한 쿠카이가 별당이 되어 절 안에 진언원이 열리고, 사이초가 전한 천태종을 더하여 “팔종겸학의 절”이 되었다. 화엄경 세계의 상징인 비루사나불(대불) 앞에서 리슈경이 읽히는 것은 쿠카이가 남긴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강당과 삼면 승방이 화재로, 서탑이 낙뢰로 소실되거나, 폭풍우로 남대문, 종루가 붕괴되는 등의 사건이 발생했지만, 황족·귀족의 존경을 받아 쇼엔(荘園)을 기증받거나 스스로 개발하여 가람 복구에 힘썼다. 나라(남도)의 유력 곤몬(権門)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승병을 거느리고 코후쿠지 등과 함께 조정에 쿄우소(強訴)를 행하였다.

1181년 1월 15일, 다이라 시게히라에 의한 남도소각으로 대불전을 비롯한 많은 당탑을 잃었다. 이후 고시라카와 법황은 승려 슌죠보 쥬겐(쵸겐)을 대권진직에 임명하여 대불과 제당 재건에 착수하게 했다. 쥬겐의 활동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지원으로 재건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185년에는 대불개안법요가, 1190년에는 상동식이 거행되었다. 1195년에는 재건 대불전이 완성되어 낙경법요가 거행되었다.
1567년, 미요시 삼인중과 마쓰나가 히사히데에 의한 도다이지 대불전 전투로 인해 대불전을 포함한 도다이지의 주요 당탑은 다시 한번 소실되었다. 1573년 오다 노부나가는 도다이지를 전란에 휘말리게 하는 것과 난폭한 행위를 하는 자에 대한 엄벌을 통달하는 서장을 보냈다.[56]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6년에 소실된 도다이지 대불을 대신할 새로운 대불 조립을 발원하고[57], 교토에 방광사 대불(교토의 대불)을 조립했지만, 도다이지 대불 재건에는 착수하지 않았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도다이지 대불 재건에 신속하게 지원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오사카 전투에서 패배한 도요토미 씨의 멸망으로 방광사를 도다이지의 계승 사찰로 하려던 계획은 중단되었다.[58]
도다이지는 파손된 대불에 응급 처치를 하고 임시 대불전을 지었지만, 1610년 폭풍으로 붕괴되었다. 이후 대불은 노천에 방치되었다.
에도 막부는 방광사의 대불·대불전 수리 공사에는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는 조선 통신사의 여정에 방광사가 포함되어 있어 일본 측의 체면 유지·국위 선양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59]
1662년 칸분 오미·와카사 지진으로 방광사 대불이 손상되었을 때도 에도 막부의 주도로 신속하게 재건되었다.[59]
도다이지 대불·대불전 소실 후 재건이 더디게 진행된 원인에 대해, 에도 시대에는 방광사에 옛 도다이지 대불·대불전에 필적하는 규모의 것이 이미 조립되어 있었고, 승려와 민중 사이에서 도다이지 대불·대불전을 복원하려는 기운이 고조되기 어려웠다는 점이 있다. 그러나 1600년대 후반에 도다이지 승려 코케이가 도다이지 대불 수리와 대불전 복구를 위한 권진을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의 시주를 받아 대불 수리가 1691년에 완성되었고 이듬해 대불개안공양이 거행되었다. 코케이는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게이쇼인에게 많은 기증을 받아 1709년에 대불전을 완성했다.
현존하는 3대째 도다이지 대불전은 높이와 깊이는 템표 시대와 거의 같지만, 너비는 템표 창건시의 11칸에서 약 3분의 2인 7칸으로 축소되었다. 3대째 도다이지 대불전은 관상창 채용, 관상창 상부의 당파풍 설치 등 종전의 대불전과 외관이 크게 다르다. 동시대에 존재했던 방광사 2대 대불전의 설계도를 보면 너비가 줄어든 것 외에는 거의 건물의 외관이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코케이 등 도다이지 대불전 재건에 임한 자들이 방광사 대불전의 의장·기법을 참고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62] 도다이지 대불전 내부 벽에 장식된 거대한 「도다이지 대불전 건지할판도」는 적외선 촬영 조사 결과, 대불전 계획이 너비 11칸에서 7칸으로 축소되기 이전의 당초 설계도면이며, 현존하는 도다이지 대불전보다 방광사 대불전에 더 가깝다는 것이 판명되었다.[47]
2대 도다이지 대불전 소실 후 방광사 대불전들이 조립되며 대불전 조립 기법이 계승되었다. 3대 도다이지 대불전 기둥재에 사용된 기목재(철륜으로 고정한 집성재) 기법은 2대 방광사 대불전에서 확립된 것으로 여겨지며[63] 도다이지 대불전에도 도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광사 1대 대불전 조영 시 거목을 많이 벌채하여 삼림 자원이 고갈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63]
1709년부터 1798년까지 나라(도다이지)와 교토(방광사)에 대불·대불전이 병립하고 있었다. 에도 시대에는 방광사 대불이 규모(대불 높이, 대불전 높이·면적)에서 우위에 있었다. 방광사 대불은 도카이도추시즈가리케에서 야지키타가 그 거대함에 놀라는 장면이 묘사될 정도였지만, 1798년 낙뢰로 소실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신불분리가 이루어지면 진수사 데무케야마 하치만궁은 도다이지로부터 독립했다.
3. 건축
743년 쇼무 천황은 백성들이 불교 사찰 건립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교키는 제자들과 함께 기부를 요청했고, 2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불과 대불전 건립에 참여했다.[13] 16m 높이의 불상은 3년에 걸쳐 8번 주조되었고, 751년에 완성되었다. 752년 불입식(개안식)에는 1만 명의 승려와 4천 명의 무용수가 참석했으며, 인도 승려 보리선이 쇼무 천황을 위해 의식을 거행했다.[19]
도다이지의 초기 구조물에는 본당 뒤편에 두 개의 탑, 도서관, 강당, 식당, 승려 숙소 등이 있었다. 도다이지는 예배 장소일 뿐만 아니라 고등 교육과 연구의 장소이기도 했다. 원래 사찰에는 높이 100m의 탑 두 개가 있었는데, 당시 가장 높은 건축물 중 하나였다. 서탑(西塔)과 동탑(東塔)이 사찰 양쪽에 있었고[22], 네 개의 문이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지진으로 파괴되었다.[23]
쇼무 천황은 728년부터 749년 사이에 나라에 절을 짓도록 승려 건축가 로벤에게 명령했다.[4] 도다이지는 비루샤나불상으로 유명하며[1], 현재 불상은 1692년 수리되었다.[1] 준조보 쵸겐 주지 시대에 도다이지의 많은 건물들이 1180년 중국 남송 양식으로 재건되었다.[1]
덴표 시대에 일본은 재해와 전염병을 겪었고, 쇼무 천황은 741년 전국에 사찰 건립을 촉구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743년에는 대불 건립을 명령했다.[6] 도다이지는 국립 사찰이자 모든 국립 사찰의 중심지로 임명되었다.
나라 시대 도다이지 가람은 남대문, 중문, 금당(대불전), 강당이 남북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나란히 서 있었고, 강당 북쪽에는 동·북·서쪽으로 「コ」자 모양으로 승방(승려들의 거처)이 있었으며, 승방 동쪽에는 식당(직당)이 있었다. 남대문과 중문 사이 좌우에는 동서 2기의 칠중탑이 회랑에 둘러싸여 있었다. 745년 착공하여 가람이 대략 완성될 때까지는 4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헤이안 시대에 간무 천황의 남도 불교 억압책으로 “조동대사소”가 폐지되었으나, 쿠카이가 별당이 되어 절 안에 진언원이 열리고, 진언종, 사이초가 전한 천태종을 더하여 “팔종겸학의 절”이 되었다. 화엄경 세계의 상징인 비루사나불(대불) 앞에서 리슈경이 읽히는 것은 쿠카이가 남긴 흔적이다.
강당과 삼면 승방이 화재로, 서탑이 낙뢰로 소실되거나, 폭풍우로 남대문, 종루가 붕괴되는 등의 사건이 발생했지만, 황족·귀족의 존경을 받아 많은 쇼엔을 기증받거나, 스스로 개발하여 가람 복흥에 힘썼다. 나라시(남도)의 유력 곤몬(권문)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승병을 거느리고, 고후쿠지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조정에 강소(쿄우소)를 행하였다.
경내는 헤이조쿄 동쪽 끝의 동칠방대로(현 국도 169호선)를 서쪽 끝으로 하고, 서남쪽은 고후쿠지 경내와 접해 있었다. 남대문을 지나면 중문(남중문), 대불전(금당)이 있고, 대불전 앞에는 창건 당시 조립된 팔각등롱이 있다. 중문에서 동서로 회랑이 뻗어 대불전 좌우에 이른다. 회랑은 현재 남쪽에만 있지만, 당초에는 북쪽에도 있었고, 회랑 북면 중앙에는 "북중문"이 있었다.
남대문에서 중문으로 이어지는 참도 동쪽에는 본방, 서쪽에는 복지료육병원 등이 있다. 대불전 동쪽에는 준승당, 행기당, 염불당, 종루 등이 있으며, 동쪽 산록은 "상원" 지역으로, 개산당, 삼매당(사월당), 2월당, 법화당(3월당) 등이 있고, 남쪽에는 데무카이야마 하치만구가 있다.
대불전 서쪽에는 지도당, 권진소, 계단원 등이 있다. 대불전 북쪽, 약간 서쪽에는 쇼소인의 고창조 보고와 철근콘크리트조 동보고·서보고가 있다. 경내 북서쪽 끝에는 나라 시대 유구인 전해문이 있다.
과거에는 대불전 북쪽에 강당과 승방, 동쪽에는 식당이 있었다. 승방은 강당의 북·동·서 3면에 코자형으로 설치되어 "삼면승방"이라고 불렀다.
2024년 9월 19일, "삼면승방 터"에서 개울을 약 90미터 조사한 결과, 승방 동동 위치 강바닥에서 지름 약 1미터의 12기 초석과 3회 화재 흔적이 발견되었다. 정창원 보존 창건 당시 "전당평면도"에 따르면 승방은 동서 221미터, 남북 126미터, 강당은 폭 54미터, 깊이 약 28.5미터였다. 강당과 삼면승방은 917년, 1180년 남도소각, 1508년 3회 소실 후 재건되지 않았다.[76]
서쪽 동칠방대로에 면해 3개 문이 있었지만, 북쪽 문(전해문)만 현존한다. 매년 1월 1일 0시부터 8시까지 중문(중요문화재)이 열려 금당(대불전·국보) 내부에 무료 입당이 가능하다.
- 대불전(금당, 국보): 1709년 재건.
- 동락문(중요문화재): 1722년 재건.
- 동회랑(중요문화재): 1716년부터 1737년에 재건.
- 서락문(중요문화재): 1719년 재건.
- 서회랑(중요문화재): 1716년부터 1737년에 재건.
- 중문(중요문화재): 1716년 9월 재건. 대불전 앞 이리모야조 누문(2층 건물). 지국천과 다문천이 봉안되어 있지만, 다문천이 두발비사문천이 되어 드문 형식이다. 중문 양옆에서 "코"자형 회랑이 뻗어 금당 좌우에 이른다.
- 상륜: 1970년 일본 만국 박람회 고가 파빌리온에 세워진 동대사 칠중탑 상륜 부분. 박람회 후 동대사에 기증되어 현재 위치로 이설되었다.
대불전 앞 동서에는 동탑·서탑(모두 칠중탑)이 있었다. 이들은 회랑으로 둘러싸고, 회랑 동서남북 4곳에 문을 설치한 "동탑원", "서탑원"이었다.[77]
- 동탑지(跡): 칠중탑 터. 토단만 남아 있고, 초석은 없다. 『東大寺要録』에는 753년 완공, 764년 노반을 높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 무렵 완공으로 보인다.
- 서탑지(跡): 칠중탑 터. 『東大寺要録』에는 753년 윤3월 완공이지만, 윤3월은 전년 752년이므로 동탑과 비슷한 시기 완공으로 보인다.
서탑은 934년 소실 후 복흥 계획 중 1000년 재소실,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동탑은 1181년 남도소토로 소실, 1227년 완공, 1362년 낙뢰로 소실 후 재건되지 않았다. 2010년 동탑 재건 발표,[78] 2015년 기단 터 발굴, 가마쿠라 시대 기단은 한 변 27미터, 건물 17미터로 국내 최대급 추정, 창건 당시 유구는 한 변 24미터였다.[79][80][81] 재건 시 약 650년 만에 동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 동탑·서탑 높이 논쟁
동탑·서탑 높이는 『東大寺要録』,『南都七大寺巡礼記』에 23장, 『조야군재』,『부소략기』에 33장으로 기록. 1909년 아마누마 슌이치는 23장에 노반 높이 8장을 더해 약 94미터로 복원.[82]
아다치 야스시는 상륜 포함 높이가 당시 관례, 23장에 상륜 8장은 균형 부족 이유로 "33장"(약 100미터) 주장.[82] 90~100미터 통설.
나라문화재연구소 하코자키 카즈히사는 2003년 논문에서 동시대 불탑, 발굴된 대형 불탑 비교, 아마누마 복원도 건축 어려움, 겐코지 소탑 모델로 총높이 약 70미터, 상륜부 약 26미터 추정.[82][83] 2024년 4월 25일, 「대불전비문」 기재를 「23장」으로 판단, 약 70미터 결론.[82][84] "33장" 견해는 오기, "23장" 상륜 균형 부족은 다른 탑 비교로 부자연스럽지 않다고 했다.[82][85] 동대사는 천평 동탑 모습에 대한 답, 복흥 고려 연구 성과라고 했다.[86][87]
나라문화재연구소는 가마쿠라 시대 재건 동탑은 32장(96미터)으로 추정.[82] 일본만국박람회 (1970년) 후루카와 파빌리온에서 높이 86미터 동대사 칠중탑 외관 재현, 상륜만 보존, 대불전 회랑 동쪽에 있다. 오사카시 후지타 미술관 정원에 동대사 동탑 심초 추정 초석 존재, 확증 없다.
- 열취신사: 데무카이야마 하치만구 말사.
- 하쿠산신사: 데무카이야마 하치만구 말사.
- 관음원: 탑두.
- 데무카이야마 하치만구: 옛 동대사 鎮守社. 1871년 신불분리로 독립.
- 고발탑: 십이중석탑.
- 법화당경고(중요문화재): 헤이안 시대 건립.
- 법화당(삼월당, 국보): 740년부터 748년 건립.
- 법화당수수야(중요문화재): 1335년 건립.
- 법화당북문(중요문화재): 1240년 건립.
- 부동당
- 사월당(삼매당, 중요문화재): 1681년 건립. 기와지붕 이중, 본기와. 부현당으로도 불리며, 삼월당 서쪽에 있다. 원래 보형조였으나 에도 시대 개수로 현재 모습. 본존 십일면관음입상(중요문화재), 아미타여래좌상(중요문화재), 보현보살기상상 등 안치. 구 본존 천수관음입상(중요문화재)은 동대사 박물관으로 이동.
- 2월당(국보): 1669년 재건.
- 식도신사
- 서국삼십삼소석불군
- 온후쿠신사
- 야마테관음당
- 북참롱소
- 료벤스기: 료벤이 아기 때 솔개에게 납치, 이 삼나무에 걸렸다고 한다.
- 고세이신사
- 아카이이야(중요문화재): 가마쿠라 시대 건립. 와카사이야로도 불린다. 오미즈토리 때 사용.
- 등랑
- 2월당참롱소(중요문화재): 1277년부터 1282년 건립.
- 귀자모신당
- 2월당유야(나라현 지정 유형문화재): 에도 시대 중기 건립. 탑두 킨주인이기도 하다.
- 2월당붓쇼노야(부쇼노야, 공구소, 중요문화재): 가마쿠라 시대 건립.
- 조가미보: 탑두.
- 개산당(국보): 개산 료벤 초상 안치. 내진은 1200년, 외진은 1250년 건축, 남대문과 함께 대불양 건축 유작. 본존 목조료벤승정좌상(국보)은 1018년 료벤기 제작, 비불로 채색이 잘 남아 있다. 료벤상 배후에는 료벤 고제 짓추상 안치. 12월 16일 공개.
- 염불당(중요문화재): 1237년 건립. 코세이 제작 지장보살좌상(중요문화재) 안치. 원래 지장당. 지붕은 1688년-1704년 시코로야네로 개수.
- 영령전: 염불당 배후 납골당. 제2차 세계 대전 나라현 전몰자 유골 약 3만 주 안치, 매달 5일 법요와 8월 11일 영령우란분회법요 거행.[89]
- 깅키당: 교키 상 안치. 원래 슌죠당, 현재 슌죠당 건립 후 깅키좌상 안치, 깅키당으로 변경. 지쿠린지 상 본떠 교호 연간 제작 추정.
- 종루(국보): 1207년-1211년 재건. 에이사이 선사 재건. 범종(국보)은 752년 제작, 중세 이전 최대(높이 385cm, 구경 271cm). "나라지로"로 불린다.[88] 매일 오후 8시 종 울림.[89] 2002년 NHK 하청업자 못 박는 사건 발생. "동대사 종"은 난토팔경 중 하나. 주변은 "종루가오카", "종루노오카"로 불린다.
- 슌죠당: 1704년 건립. 주겐 봉안. 대불전 동쪽 "종루가오카" 위치, 옛날 주겐 복흥 거점 동대사 별소와 정토당 있었으나, 1567년 소실, 1704년 주겐 500년 원기 정토당 터에 슌죠당 건립, 슌죠상인좌상(국보) 이전.[89] 좌상은 86세 사망 직후 제작, 가마쿠라 시대 초상 조각 걸작. 가이케이 작 아미타여래상, 헤이안 시대 아이젠묘오좌상(모두 중요문화재) 안치. 편액 "슌죠당"은 주겐 필적, 2006년 설치. 7월 5일(주겐 기일), 12월 16일 특별 공개.[89]
- 대유야(중요문화재): 12세기 말 주겐 재건. 1239년 개수, 1408년부터 다음 해 대개수.[89] 2월당 뒤 참도. 정면 이리모야조, 배면 기리즈마조, 동서로 긴 건물, 전면 욕실 전실, 중앙 욕실, 배면 가마장. 욕실 당파풍 목욕탕 형태, 1197년 제작 철제 욕조(중요문화재) 존재. 가마장 옥상 연출구 누각, 중세 욕실 모습 전하는 유구. 비공개.
- 신국사
- 강당지: 초석 잔존. 옛날 대불전 북쪽 폭 54미터, 깊이 약 28.5미터 강당, 동서북 3면 외회랑 따라 승방.[76] 강당 756년 완공, 천수관음 본존, 917년 소실. 재건 당 1181년 소실, 복흥, 1508년 소실 후 미재건.
- 시안신사
- 시즈도: 에도 시대 후기 재건. 대불전 서쪽. 호넨 화상 봉안. 주겐, 호넨 추거로 대불 복흥 대권진직. 복흥 대불전 지도 납입, 시즈도 명칭 유래. 정토교 관심 강했던 주겐 초대로 호넨 정토삼부경 강설. 목조석가여래좌상(가마쿠라 시대, 중요문화재)은 동대사 박물관 이동. 건물 1852년 경, 법연상인이십오영장 제11번 찰소, 정토종 재건 협력. 2022-2023년 수리, 2020년 인접 구리 개축, 사경도장.
- 권진소: 주겐 권진(기증금 모금) 본거지 곡옥. 대불전 서쪽 담, 표문, 코케이당, 아미타당, 하치만덴, 경고(중요문화재).
- * 구리
- * 코케이당: 코케이상인 상(중요문화재) 안치. 1706년 작품. 4월 12일, 10월 5일 공개.
- * 아미타당: 주겐 송나라 전승 고교사유아미다상(중요문화재) 안치. 10월 5일 공개.
- * 하치만덴: 1201년 가이케이 제작 승형하치만신좌상(국보) 안치. 동대사 진수 데무카이야마 하치만구 신체, 메이지 신불분리 후 동대사 이동. 채색 선명, 카이케이 대표작. 10월 5일 공개.
- * 권진소경고(중요문화재): 헤이안 시대 건립.
- * 종루
- * 표문(적문)
- 동대사학원유치원
- 계단원: 출가자 수계 시설, 755년 간진 초청 창건.
- * 계단당(나라현 지정 유형문화재): 1733년 재건. 법화경견보탑품 기초 다보탑, 다보여래·석가여래 봉안, 국보 사천왕상 수호.
- ** 조상사천왕입상(국보): 법화당 일광보살상·월광보살상, 집금강신상과 함께 나라 시대 조상 최고 걸작. 지국천, 증장천 분노 표정, 광목천, 다문천 분노 내면. 창건 당시 계단원 사천왕상 동조, 현재 사천왕상 중문당에서 이동.
- ** 동조석가다보여래좌상(중요문화재): 다보탑 내부 원래 안치 소상. 간진 당나라 지참 전승, 작풍은 나라 시대 일본 제작 추정. 평소 에도 시대 목조 모조품 안치, 본상 동대사 박물관 수장. 수계 때 본상 계단원 복귀.
- * 천수당 - 계단당 서쪽 소당. 1567년 소실, 1596년-1615년 재건, 1998년 화재 전소, 2002년 복원. 1998년 화재 시 불상군 구출, 손상, 수리. 히노키 요기조리. 가마쿠라 시대 후기 작품 추정.
- ** 목조천수관음입상(중요문화재): 천수당 명칭 유래, 본존. 중요문화재 목조사천왕입상, 흑칠 츄시(중요문화재) 수납.
- ** 츄시(중요문화재): 본존, 사천왕 수납 흑칠 츄시. 본존과 동시기 추정. 정면, 양측면 개폐, 문 안쪽 극채색 불화. 정면 문 천수관음관속 이십팔부중, 풍신·뢰신, 우측면 문 부동명왕·두 동자, 구리가라켄, 좌측면 문 부동명왕 외 오대명왕, 본존 배면 보달락정토. 1998년 화재 오손, 소실 면함. 현재 모사 참배, 오리지널 2010년-3년 수리, 보관.
- ** 목조아이젠묘오좌상(중요문화재): 가마쿠라 시대 후기- 남북조시대 작품 추정. 히노키 요기조리.
- ** 목조간진화상좌상(중요문화재): 1733년 도쇼다이지 건칠상 모각.
- 화엄료
- 중고문지: 별명 소문. 1606년 소실, 초석 잔존.
- 쇼소인: 궁내청 쇼소인사무소 관리. 쇼무 천황·고묘 황후 유품 등 덴표 시대 중심 미술 공예품 수장.
- * 쇼소인정창: 교쿠라조 고상창고.
- * 스기모토신사
- * 동보고: 1952년 축조.
- * 서보고: 1962년 축조.
- 텐가이몬(국보): 757년-765년 건립. 경내 북서, 쇼소인 서쪽 팔각문. 1181년, 1567년 대화에도 타지 않은 몇 안 되는 건물. 가마쿠라 시대 수리, 기본 나라 시대 모습. 명칭 유래는 동쪽 텐가이(碾磑, 석우). 별명 사호지몬(헤이조쿄 일조통 면함), 카게키요몬(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암살 타이라노 가게키요 잠복 전승).[89] 2004년
3. 1. 대불전 (금당)


국보이다. 처음 건립된 대불(루사나불)과 대불전은 쇼무 천황의 발원으로 8세기에 건립되었으나, 이후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대불전은 에도 시대에 재건된 것이다. 대불은 대좌와 소매, 다리 등 일부에 초기 부분만 남아있고, 몸체의 대부분은 중세 시대 작품이며, 머리는 에도 시대 작품이다.
덴표 15년(743년), 쇼무 천황은 대불 조성에 대한 조서를 발표하였다. 처음에는 시가현 시가라키 근처의 고가사에서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이후 현재 위치인 나라에서 다시 조성을 시작하여 덴표쇼호 4년(752년)에 개안공양이 거행되었다. 지쇼 4년(1181년)의 난토소토 화재로 대불전이 소실되고, 대불도 대좌와 하반신 일부만 남고 불타 없어졌다. 이후, 대불과 대불전은 중원의 노력으로 재건되어 분지 원년(1185년)에 대불의 개안공양, 겐큐 원년(1190년)에는 대불전 상량식, 겐큐 6년(1195년)에는 대불전 낙성공양이 거행되었다. 이 가마쿠라 시대에 재건된 대불도 에이로쿠 10년(1567년)의 도다이지 대불전 전투로 다시 불탔다. 대불전의 재건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불은 임시 수리 상태로 노천에 방치된 채 수십 년이 흘렀으나, 에도 시대에 공경 상인의 노력으로 대불과 대불전 모두 복원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대불의 머리는 겐로쿠 3년(1690년)에 주조된 것이며, 겐로쿠 5년(1692년)에 개안공양이 거행되었다. 대불전은 호에이 6년(1709년)에 낙성하였다.
분화 3년(1806년), 하층의 지붕이 기와 등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물결치듯 처지기 시작하여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을 설치하였다. 1877년(메이지 10년)부터 수리 계획이 검토되었으나 쉽게 진행되지 못하다가, 1903년(메이지 36년)부터 11년에 걸쳐 대수리가 이루어졌다. 주요 목적은 홍량의 보강과 지붕을 지탱하기 위한 강화 및 지붕 하중 감소였는데, 그 당시 대지붕을 지탱하는 두 개의 홍량 하단에 영국 쉘턴 스틸사 제작의 철골트러스를 덧대어 양쪽 끝을 내진주에 리벳과 볼트로 고정하였다. 또한 경행 방향[68]에도 흔들림 방지를 겸한 소형 트러스를 가로지르게 설치하였다. 이로써 대량의 무게와 그에 가해지는 지붕의 무게를 내진주에 분산시키는 방법이 채택되었다.[69] 동시에 기와의 수를 줄였다. 1915년(다이쇼 4년), 대불전 낙성공양이 거행되었다.
대불전은 팔작지붕, 본기와葺이다. 2층으로 보이지만, 구조적으로는 1층 외층(모꼬시)가 붙은 형태이며, 정면 5칸, 측면 5칸의 신사(모야) 주위에 1칸의 외층을 두르고 있다. 폭 57미터, 깊이 50.5미터, 높이 46.8미터로, 깊이와 높이는 창건 당시와 거의 변함이 없지만, 폭은 약 3분의 2로 축소되었다. 건축 양식은 가마쿠라 시대에 송의 건축 양식을 받아들여 성립된 대불양식(다이부츠요)을 기본으로 하며, 수평 방향으로 관(누키)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야리 부자에 의한 초대·2대 호코지 대불전의 연이은 조영으로 인해, 대형 목재에 적합한 거목을 다량 벌채하여 이 무렵에는 이미 거목 조달이 어려워져 기둥에는 심재 주위에 통 모양으로 별도의 재료를 감싼 적층재가 사용되었다.
대불의 좌우에는 협시로 목조 여의륜관음좌상과 허공장보살좌상을 안치한다. 당내 북서쪽과 북동쪽 구석에는 사천왕 중 광목천상과 다문천상을 안치한다. 모두 에도 시대 복원기의 상이다. 사천왕 중 나머지 두 상(지국천, 증장천)은 미완성으로 끝났고, 두 상의 머리만 대불전 내에 놓여 있다. 당내에는 그 외에도, 대불 앞에 높이 207센티미터의 동제 대화병이 있는 8개의 다리가 있는 호랑나비로 유명하며, 겐로쿠 5년 개안공양회에 이케바나 문하인 이가이 미에와 후지가케 지스이 양일문으로부터 약 9미터의 입화 두 개가 봉납되었으나, 회후, 후지가케 지스이로부터 화병에 동련이 붙여져 불화로 기증되었다[70]. 이 8개의 다리가 있는 호랑나비는 많은 화제가 되지만, 도다이지는 "절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기증품으로 의미는 모른다"라고 답하고 있다. 또한, 1909년(메이지 42년)의 일영박람회용으로 제작된, 도다이지 구가람의 모형이 있다.
- '''대불(루사나불상)'''
국보. 지정 명칭은 “동조 루사나불좌상(금당 안치) 1구”이다. 상의 높이는 14.7미터이다. 대불은 『화엄경』에 설하는 루사나불이라는 이름의 부처이다. 루사나불은 “연화장 세계” (『화엄경』의 세계관)의 중심에 위치하며, 대우주의 존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이다.
- '''목조 여의륜관음좌상·허공장보살좌상(중요문화재)'''
대불의 좌우에 협시로 안치된다. 이들 불상은 대불(동조)과 달리 목조의 끼워맞춤식이다. 대관진 공준 시대, 교토의 불상장인 야마모토 준케이 일문과, 오사카의 불상장인 츠바이이 켄케이 일문 등에 의해 30년 이상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불교 조각이다. 여의륜관음상은 겐분 3년(1738년)경 완성되었고, 허공장보살상은 늦게 보레이 2년(1752년)에 완성되었다.
- '''금동팔각등롱(국보)'''
대불전 정면에 서 있는 등롱이다. 전체 높이 464센티미터. 여러 번 수리가 되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나라 시대 창건 당시의 것이다. 화두는 사방에 문을 단 팔각형이며, 문의 4면에는 구름 속을 달리는 4마리의 사자가, 다른 4면에는 각기 다른 악기(횡적, 적, 발자, 생)를 연주하는 음성보살(온죠보삿스)이 철창살과 당초문양의 투각 위에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봉 부분에는 연등불의 공덕 등을 설한 경전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75]. 4면의 판자 중 북서면과 남서면이 당시의 것이며, 북동면과 남동면은 레플리카이다. 북동면의 판자는 1962년(쇼와 37년)에 도난당했으나 곧 발견되었지만, 이후 원본은 별도로 보관하고 등롱에는 레플리카를 부착하고 있다. 남동면의 판자 원본은 일찍 유실되었다[71].

3. 2. 남대문
현존하는 남대문(南大門)은 헤이안 시대에 태풍으로 원래 문이 파괴된 후 12세기 말 가마쿠라 시대에 재건되었다. 도다이지 중흥의 조상인 슌죠보 주겐(俊乗房重源)이 송나라에서 전래한 건축 양식인 대불양(大仏様)(다이부츠요, 천축양(天竺様)이라고도 함)을 채용한 건축으로 유명하다. 대불양의 특징은 기둥을 관통하는 수평재인 관(貫)을 많이 사용하여 구조를 견고하게 한 것, 천장을 두르지 않고 구조재를 그대로 드러내 장식으로 삼은 것 등을 들 수 있다.
남대문에는 8.5m 높이의 금강역사상 두 점이 있는데, 운케이, 가이케이와 작업 인부들이 세웠다.[25] 이 두 금강역사상은 하나는 입을 벌리고(아형(阿形)), 다른 하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데(웅형(吽形)), 이는 일본식 전통을 따른 것이다.
이 두 상은 1988년부터 1993년까지 해체 및 복원 작업을 거친 뒤 다시 조립되었다. 이 복원 작업에는 교토 문화재 전문가 15명이 투입되었고, 470만달러가 소요되었다.[26]
문 안 좌우에는 금강역사상과 석조 사자상 1쌍(중요문화재)이 안치되어 있다. 상층 정면 중앙에는 "대화엄사(大華厳寺)"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2006년 10월 10일에 거행된 "주겐 상인 팔백년 원기 법요(重源上人八百年御遠忌法要)"에 맞춰 새로 제작된 것이다.
- 목조 금강역사입상(국보)
: 높이 8.4m의 거대한 목상으로, 1203년에 불과 69일 만에 만들어졌다. 문을 향해 오른쪽에 웅형(입을 다문 모습), 왼쪽에 아형(입을 벌린 모습)을 안치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인왕상의 배치와는 좌우가 반대이다.
: 『동대사별당차례(東大寺別当次第)』에 따르면, 본 상은 1203년 대불사 운경(運慶), 비추 법교(湛慶), 안아미타불(快慶), 에치고 법교(정각(定覚))에 의해 조립되었다고 알려져 있다.[72] 아형상의 소지인 금강저 안쪽에는 1203년 연호와 함께 "대불사 법안 운경(大仏師法眼運慶)", "अं(안, 범자) 아미타불(阿弥陀仏)"(쾌경의 것)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웅형상 안에 납입된 『보갑인다라니경(宝篋印陀羅尼経)』의 속서에는 대불사 "정각(定覚)", "담경(湛慶)"의 이름과 소불사 12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73] 운경이 제작 총지휘를 맡았다는 점에서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만, 아형상과 웅형상의 현장 제작을 운경, 쾌경, 정각, 담경이 어떻게 분담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나뉜다.[74]
- 석조 사자상(중요문화재)
: 남대문 북면 동서 사이에 안치되어 있다. 1196년 송나라 사람 자육랑(字六郎)이 제작했다. 원래는 대불전 중문에 있었지만, 무로마치 시대에 남대문으로 옮겨졌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 석재로는 조각이 어려워 송나라에서 석재를 구입했다. 원래 채색이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도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좌의 모란문, 연화문, 사자 등의 부조에는 주겐의 이가(伊賀) 별소(신대불사(新大仏寺)) 석조 대좌와 공통되는 요소가 확인된다.[75]

3. 3. 이월당
국보. 음력 2월에 '''오미토리'''(슈니에)가 행해지는 것에서 이 이름이 유래하였다. 이월당은 지쇼 4년(1181년), 에이로쿠 10년(1567년) 두 차례의 큰 화재에도 불타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간분 7년(1667년) 오미토리 도중 실화로 소실되어 2년 후 재건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24] 본존은 대관음(大観音), 소관음(小観音)이라 불리는 두 체의 십일면관음상으로, 모두 여러 사람이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절대 비불이다. 건물은 2005년(헤이세이 17년) 12월 국보로 지정되었다.건물 서쪽은 급경사면으로 되어 있어 현애조로 세워져 있다. 동쪽 산 쪽에는 오뉴진자(遠敷神社)와 이이미치진자(飯道神社)가 있으며, 서쪽 절벽 아래에는 참롱소(参籠所), 불상야(仏餉屋)(모두 중요문화재), 고조사(興成社)가 세워져 있다. 또한, 오미토리에 사용하는 우물(와카사이(若狭井))을 위한 아가이야(閼伽井屋)(중요문화재)가 있다. 이월당 주변은 조인(上院)이라고도 불린다.

3. 4. 법화당 (삼월당)


법화당은 국보로, 경내 동쪽 와카쿠사야마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동대사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시대 건축물 중 하나이며, 덴표 불상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 창건 당시에는 권삭당(羂索堂)이라고 불렸으며, 동대사의 전신 사찰인 금종사(金鐘寺)의 당으로 지어졌다. 창건 시기는 덴표 12년(740년)부터 덴표 20년(748년)경으로 추정된다.
건물 북측(참배길에서 보아 왼쪽)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팔작지붕 부분을 정당(正堂), 남측의 맞배지붕 부분을 예당(禮堂)이라고 부른다. 정당은 나라 시대 건축이며, 예당 또한 나라 시대에 존재했지만, 현재 있는 것은 가마쿠라 시대인 1199년경(다른 설도 있음)에 추가된 것이다.
당내에는 본존인 불공권삭관음(不空羂索觀音) 입상, 범천·제석천 입상, 금강역사·밀적역사(密迹力士) 입상, 사천왕 입상 등 총 9체의 건칠상(삼베 천에 옻칠을 여러 겹 발라 만든 인형과 같은 형태의 불상)과, 조소의 집금강신(執金剛神) 입상을 안치한다(모두 나라 시대). 그 외 조소의 일광보살·월광보살(月光) 보살 입상, 길상천·변재천 입상 등 여러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으나, 이들은 2011년부터 동대사 뮤지엄으로 이동했다. 여러 불상의 정확한 제작 연대와 당초의 안치 상황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건칠불공권삭관음입상(국보): 나라 시대. 높이 3.62미터. 세 눈과 여덟 팔(이마에 세 번째 눈이 있고, 여덟 개의 팔을 가진) 관음상으로, 법화당의 본존으로 내진 중앙의 소미단 위에 안치되어 있다. 머리 위의 보관은 정면에 은으로 만든 아미타여래상을 장식하고, 많은 보석과 투각으로 장식한 화려한 것으로, 평소에는 가까이서 볼 수 없지만, 나라 시대 공예의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 조소집금강신입상(국보): 높이 1.704미터. 본존 불공권삭관음의 뒤편 궤 속에 북쪽을 향해 안치된다. 오른손에 금강저(금강저, 불적을 물리치는 무기)를 들고, 눈을 부릅뜨고 위협하는 무신상이다. 오랫동안 비불이었기 때문에, 당초의 채색이 잘 남아 있다. 집금강신이란, 인왕상을 한 체로 표현한 것이다. 본상은 동대사의 개산(초대 주지) 량변의 염불이라고 전해지며, 평장문 전설로도 알려진 옛날부터 유명한 불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평장문이 동국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이 불상의 계(もとどり, 머리를 묶은 머리)를 묶고 있는 원결뉴(もとゆいひも)의 끝이 벌이 되어 날아가, 장문을 쏘아 고통스럽게 했다고 한다(『일본영이기』).[51] 확실히, 본상의 원결뉴는 지금도 한쪽이 결손되어 있다. 비불이며, 량변의 제사인 12월 16일만 공개된다.
다음과 같은 다른 8구의 여러 불상을 안치한다.
- 건칠범천·제석천입상(국보)
- 건칠금강력사입상 2구(국보)
- 건칠사천왕입상(국보)
3. 5. 기타 건축물
도다이지 초기 모습을 그린 기록은 매우 적지만, 몇몇 기록을 통해 원래는 2개의 불탑, 도서관, 강의실, 승려 거주 건물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다이지는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고등 교육 기관의 역할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현재 도다이지의 원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곳에 살았던 승려들이 남긴 자료와 편지, 기록 덕분이다.[13]
원래 사원에는 100m가 넘는 두 개의 불탑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이 두 탑은 각각 대불전 동쪽과 서쪽에 하나씩 있었으며, 4개의 문이 있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탑들은 지진으로 파괴되었다.[22][23] 1970년 오사카 엑스포를 위해 하나의 ''소린''(sōrin) 상륜부가 복제되어 탑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쇼소인(Shōsōin)은 도다이지의 창고였으며, 현재 일본 역사의 텐표 시대의 많은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나라 시대 도다이지의 가람은 남대문, 중문, 금당(대불전), 강당이 남북 방향으로 일직선으로 나란히 서 있었고, 강당 북쪽에는 동·북·서쪽으로 「コ」자 모양으로 승방(승려들의 거처)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승방 동쪽에는 식당(직당)이 있었다. 남대문과 중문 사이 좌우에는 동서 2기의 칠중탑(높이 약 70미터 이상으로 추정됨)이 회랑에 둘러싸여 세워져 있었다. 745년 착공하여 가람이 대략 완성될 때까지는 4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나라 시대 이른바 남도육종(화엄종, 법상종, 율종, 삼론종, 성실종, 구사종)은 '종파'라기보다는 '학파'에 가까운 것이었고, 일본 불교에서 '종파'라는 개념이 확립된 것은 중세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사찰에서는 여러 종파를 겸학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도다이지의 경우, 근대 이후로는 소속 종파를 명시할 필요가 생겨 화엄종을 표방했지만[52], 나라 시대에는 '육종 겸학의 사찰'로 여겨졌고, 대불전 안에는 각 종파의 경론을 봉안한 「육종 厨子」가 있었다.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면서 간무 천황의 남도 불교 억압책으로 “조동대사소”(造東大寺所)가 폐지되는 등 압박을 받았으나, 당나라에서 귀국한 쿠카이가 별당이 되어 절 안에 진언원(真言院)이 열리고, 쿠카이가 전한 진언종, 사이초가 전한 천태종을 더하여 “팔종겸학의 절”이 되었다. 아침저녁 독경에는 리슈경이 지금도 읽히고 있다. 화엄경 세계의 상징인 비루사나불(대불) 앞에서 리슈경이 읽히는 것은 쿠카이가 남긴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강당과 삼면 승방이 화재로, 서탑이 낙뢰로 소실되거나, 폭풍우로 남대문, 종루가 붕괴되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지만, 후에 황족·귀족의 존경을 받아 쿠로다 쇼엔을 대표로 하는 많은 쇼엔(장원)을 기증받거나, 스스로 개발하여 가람의 복흥에 힘썼다. 이윽고 나라 (남도)의 유력 곤몬(권문)으로 안팎에 알려지게 되면서, 많은 승병을 거느리고, 코후쿠지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조정에 쿄우소(강소)를 행하였다.
동대사의 경내는 평성경 외경의 동쪽 끝을 구획하는 동칠방대로(현 국도 169호선)를 서쪽 끝으로 하고, 서남쪽은 흥복사 경내와 접해 있었다. 남대문을 들어 참도를 따라가면 정면에 중문(남중문), 그 앞에 대불전(정식 명칭은 "금당")이 있다. 대불전 앞에는 동대사 창건 당시에 조립된 팔각등롱이 있다. 중문에서는 동서로 회랑이 뻗어 대불전 좌우에 이른다. 회랑은 현재는 대불전 남쪽에만 있지만, 당초에는 북쪽에도 회랑이 있었고, 회랑 북면 중앙에는 "북중문"이 있었다.
남대문에서 중문으로 이어지는 참도 동쪽에는 동대사의 본방이 있고, 반대편 서쪽에는 동대사 복지료육병원 등이 있다. 대불전 동쪽에는 준승당, 행기당, 염불당, 종루 등이 있으며, 그 동쪽 산록은 "상원(じょういん)"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개산당, 삼매당(사월당), 2월당, 법화당(3월당) 등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鎮守의 손향산하치만궁(동대사와는 별개 법인)이 있다.
대불전 서쪽에는 지도당(さしずどう), 권진소, 계단원 등이 있다. 대불전 북쪽, 약간 서쪽에는 정창원의 고창조 보고와 철근콘크리트조 동보고·서보고가 있다. 정창원의 건물과 보물은 국유재산으로 궁내청 정창원사무소가 관리하고 있다. 경내 북서쪽 끝에는 나라 시대 유구인 전해문(てがいもん)이 있다.
과거에는 이들 외에도 많은 당탑이 존재했다. 대불전 북쪽에는 강당과 승방이 있었고, 이들의 동쪽에는 식당(じきどう)이 있었다. 승방은 강당의 북쪽·동쪽·서쪽 3면에 코자형으로 설치되었기 때문에 "삼면승방"이라고 불렀다.
2024년 9월 19일, 나라 동대사의 "삼면승방 터"에서, 절과 나라문화재연구소, 가시하라고고학연구소가 합동으로, 개울을 약 90미터 조사했다. 승방 동동의 위치의 강바닥에서, 그림의 기둥 위치와 거의 같은 배치로 지름 약 1미터의 12기의 초석과, 3회에 걸친 화재의 흔적이 발견된 것을 조사단이 발표했다. 정창원 보존의 창건 당시 "전당평면도"에서는 승방은 동서 221미터, 남북 126미터라는 대규모 건물로, 회랑으로 연결되는 강당은 폭 54미터, 깊이 약 28.5미터였다. 절의 기록에 따르면, 강당과 삼면승방은 헤이안 시대 전기의 917년, 1180년 평중행 남도소각, 전국 시대의 1508년의 3회 소실되어, 그 후는 재건되지 않았다.[76]
서쪽 동칠방대로에 면해서는 3개의 문이 열려 있었지만, 이 중 북쪽 문만이 현존한다(전술한 전해문). 매년 1월 1일 0시부터 8시까지, 중문(중요문화재)이 열려 금당(대불전·국보) 내부에 무료로 입당할 수 있다(통상 입당료: 어른 500JPY·어린이 300JPY). 참배는 오전 7시 30분부터 받고 있다.
- 대불전(금당, 국보): 1709년 재건.
- 동락문(중요문화재): 1722년 재건.
- 동회랑(중요문화재): 1716년부터 1737년에 재건.
- 서락문(중요문화재): 1719년 재건.
- 서회랑(중요문화재): 1716년부터 1737년에 재건.
- 중문(중요문화재): 1716년 9월 재건. 대불전 앞에 있는 이리모야조의 누문(2층 건물의 문). 지국천과 다문천이 봉안되어 있지만, 다문천이 두발비사문천이 되어 매우 드문 형식이다. 중문의 양옆에서 "코"자형으로 회랑이 뻗어 금당의 좌우에 이른다.
- 상륜: 1970년에 개최된 일본 만국 박람회에서 고가 파빌리온에 세워진 동대사 칠중탑의 상륜 부분. 박람회 종료 후 상륜은 동대사에 기증되어 현재 위치로 이설되었다.
대불전 앞 동서에는 동탑·서탑(모두 칠중탑)이 있었다. 이들 탑은 주위를 회랑으로 둘러싸고, 회랑의 동서남북 4곳에 문을 설치한 "동탑원", "서탑원"이라 불리는 대규모 시설이었다.[77]
- 동탑지(跡): 칠중탑 터. 동탑지·서탑지 모두 토단(土壇)만 남아 있고, 초석은 가져가 버려 남아 있지 않다. 『東大寺要録』에는 753년 완공이라고 되어 있지만, 764년에 탑의 노반(露盤)을 높였다는 기록도 있어, 이 무렵의 완공으로 보인다.
- 서탑지(跡): 칠중탑 터. 『東大寺要録』에는 753년 윤3월 완공이라고 되어 있지만, 윤3월이 있었던 것은 전년인 752년이며, 실제로는 동탑과 비슷한 시기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서탑은 934년에 소실되었다. 그 후 복흥이 계획되지만, 공사 도중 1000년에 다시 소실된다. 이후로는 재건되지 않았다.
동탑은 1181년의 남도소토(南都焼討)로 소실되었다. 그 후 복흥되어, 1227년에 완공되지만, 1362년에 낙뢰로 다시 타 버려, 이후로는 재건되지 않았다. 동대사는 2010년 4월, 동탑 재건을 위해 수년 이내에 탑 터의 발굴 조사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78] 2015년 7월, 동탑의 기단(基壇) 터 발굴 조사가 시작되어, 11월에 중간 발표가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의 기단은 한 변이 27미터 사방, 건물 부분은 17미터 사방으로 당시 국내 최대급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당시의 유구도 발견되어, 이 기단은 한 변이 24미터 사방이었다.[79][80][81] 시기는 미정이지만, 재건된다면 약 650년 만에 동탑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 동탑·서탑 높이 논쟁
동탑·서탑 모두 칠중탑으로, 높이는 『東大寺要録』,『南都七大寺巡礼記』에는 23장(丈) 정도, 『조야군재(朝野群載)』,『부소략기(扶桑略記)』에는 33장 정도라고 되어 있다. 이 높이에 대해, 1909년에 일영박람회(日英博覽會)에 출품된 창건 당시의 복원 모형(현재는 대불전 안에 전시)을 설계한 아마누마 슌이치(天沼俊一)는, 『東大寺要録』등의 "동탑이 23장 8척, 서탑이 23장 6척 7촌"에 노반(相輪) 높이 약 8장(문헌에 따라 세세한 수치는 다름)을 더하여 31장 정도(약 94미터)로 했다.[82]
한편, 건축사가 아다치 야스시는, 처음 기재하는 높이는 상륜을 포함하는 것이 당시 문헌의 일반적인 관례라고 하는 한편, 23장 정도의 전체 높이 중 8장을 상륜이 차지한다면 균형이 부족하다는 견해에서, 일부 문헌에 보이는 "33장"(약 100미터)이 정확하다고 했다.[82] 이들에 의해, 90~100미터로 하는 것이 통설이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나라문화재연구소의 하코자키 카즈히사(箱崎和久)는 2003년의 논문에서, 현존하는 동시대의 불탑이나,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발굴 조사된 대형 불탑(다이칸다이지(大官大寺)나 기비이케하이지아토(吉備池廃寺跡) 등)과의 비교에서, 아마누마의 복원도대로의 탑을 나라 시대 당시에 건축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고, 시대가 가까운 겐코지(元興寺) 소탑을 모델로 하여, 총높이 23장 7척(약 70미터), 그중 상륜부 8장 6척(약 26미터)이라는 복원을 추정하고 있다.[82][83] 나라문화재연구소는, 하코자키의 발표로부터 약 20년이 경과한 2024년 4월 25일에, 창건 당시의 동탑의 높이에 대해 원자료로 보이는 「대불전비문(大仏殿碑文)」의 기재를 「23장」으로 판단하고, 이에 따라 약 70미터로 결론지었다.[82][84] 종래의 100미터설의 근거가 되고 있던 「33장」이라는 견해는, 문헌의 사본 중에서 에도 시대에 발생한 오기가 그대로 계승된 것이라고 했다.[82][85] 또 「23장」에서는 상륜의 균형이 부족하다는 설에 대해서는, 다른 탑과의 비교에 의해 창건 당시에는 부자연스럽지 않다고 했다.[82][85] 동대사 측은 「지금까지의 동탑의 복원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천평의 동탑의 모습을 알고 싶다는 생각에 하나의 답을 얻었다」는 받아들이는 방식을 보이고, 「복흥을 진행하는 데 있어, 고려해야 할 중요한 연구 성과다」라고 했다.[86][87]
동시에 나라문화재연구소는, 가마쿠라 시대에 재건된 동탑은, 당시 문헌에 있는 높이 32장(96미터)으로 하고 있다.[82] 일본만국박람회(日本万国博覧会) (1970년)의 후루카와 파빌리온(古河パビリオン)에서 높이 86미터의 동대사 칠중탑의 외관이 재현되었다. 파빌리온은 박람회 종료 후 철거되었지만, 상륜만이 보존되어, 대불전 회랑의 동쪽에 세워져 있다. 오사카시(大阪市)의 후지타 미술관(藤田美術館)의 정원에 동대사 동탑의 심초(心礎)라고 전해지는 초석이 있지만, 동탑의 것이라는 확증은 없다.
- 열취신사(鑰取神社): 테무케야마 하치만구(手向山八幡宮)의 말사(末社).
- 하쿠산신사(白山神社): 테무케야마 하치만구의 말사.
- 관음원(観音院): 탑두(塔頭).
- 테무케야마 하치만구(手向山八幡宮): 옛 동대사의 鎮守社. 1871년의 신불분리(神仏分離) 시에 동대사로부터 독립했다.
- 고발탑(御髪塔): 십이중석탑.
- 법화당경고(法華堂経庫)(중요문화재): 헤이안 시대의 건립.
- 법화당(삼월당(三月堂), 국보): 740년부터 748년에 건립.
- 법화당수수야(法華堂手水屋)(중요문화재): 1335년 건립.
- 법화당북문(法華堂北門)(중요문화재): 1240년 건립.
- 부동당(不動堂)
- 사월당(四月堂)(삼매당(三昧堂), 중요문화재): 1681년 건립. 기와지붕(寄棟造) 이중, 본기와(瓦)葺き. 부현당(普賢堂)이라고도 불리며, 삼월당 서쪽에 있다. 원래는 보형조(宝形造)였지만, 에도 시대의 개수로 현재의 이중 기와지붕이 되었다. 본존 십일면관음입상(중요문화재), 아미타여래좌상(중요문화재), 보현보살기상상(騎象像) 등을 안치한다. 구 본존의 천수관음입상(중요문화재)는 동대사 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 2월당(국보): 1669년 재건.
- 식도신사(飯道神社)
- 서국삼십삼소석불군
- 온후쿠신사(遠敷神社)
- 야마테관음당(山手観音堂)
- 북참롱소(北参籠所)
- 료벤스기(良弁杉): 료벤이 아기였을 때 솔개에게 납치당해, 이 삼나무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 고세이신사(興成神社)
- 아카이이야(閼伽井屋)(중요문화재): 가마쿠라 시대의 건립. 와카사이야(若狭井屋)라고도 불린다. 오미즈토리를 할 때 사용된다.
- 등랑(登廊)
- 2월당참롱소(二月堂参籠所)(중요문화재): 1277년부터 1282년에 건립.
- 귀자모신당
- 2월당유야(二月堂湯屋)(나라현 지정 유형문화재): 에도 시대 중기의 건립. 탑두의 킨주인(金珠院)이기도 하다.
- 2월당붓쇼노야(二月堂仏餉屋)(부쇼노야(仏餉の屋), 공구소(供御所), 중요문화재): 가마쿠라 시대의 건립.
- 조가미보(上之坊): 탑두.
- 개산당(開山堂)(국보): 개산(初代住職) 료벤의 초상을 안치하기 위한 당. 내진(内陣)은 1200년, 외진은 1250년의 건축으로, 남대문과 함께, 대불양(大仏様) 건축의 몇 안 되는 유작이다. 본존 목조료벤승정좌상(木造良弁僧正坐像)(국보)은 1018년의 료벤기(良弁忌)에 제작된 작품으로, 오랫동안 비불(秘仏)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채색이 잘 남아 있다. 상이 손에 드는 여의(如意)는 료벤 유애의 물건이라고 전해진다. 료벤상의 배후에는 료벤의 고제인 짓추상이 안치되어 있다. 개산당은 료벤의 명일인 12월 16일만 공개된다.
- 염불당(念仏堂)(중요문화재): 1237년 건립. 마찬가지로 가마쿠라 시대, 1237년에 불사인 코세이가 만든 지장보살좌상(중요문화재)을 안치한다. 원래는 지장당(地蔵堂)이라고 불렸다. 지붕은 1688년-1704년에 시코로야네(錣葺)로 개수되고 있다.
- 영령전(英霊殿): 염불당의 배후에 있는 납골당. 제2차 세계 대전에 의한 나라현의 전몰자의 유골 약 3만 주를 안치하고, 매달 5일의 법요와 8월 11일의 영령우란분회법요에 위령이 행해지고 있다.[89]
- 깅키당(行基堂): 나라 시대의 저명한 승려로, 동대사의 창건에도 공헌한 행기의 상을 안치한다. 원래는 슌죠당(俊乗堂)이었지만, 현재의 슌죠당이 건립되었기 때문에, 깅키좌상을 안치하고 깅키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상은, 깅키의 묘가 있는 치쿠린지에 있던 상을 본떠 교호(享保) 연간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 종루(鐘楼)(국보): 1207년-1211년 재건. 현재의 종루는, 주겐 상인에 이어 대권진직(大勧進職)에 취임한 에이사이 선사가 재건한 것이다. 매달려 있는 범종(국보)는 대불개안(大仏開眼)과 같은 해인 752년의 제작으로, 중세 이전의 범종으로서는 최대의 것(높이 385센티미터, 구경 271센티미터). 속칭 이 범종은 의인화하여 「나라지로(奈良次郎)」라고 불린다.[88] 매일 오후 8시에 종이 울린다.[89] 2002년 12월, NHK의 하청업자에게 못이 박히는 사건을 당했다. 「동대사 종(東大寺鐘)」은 난토팔경 중 하나이다. 종루의 주변은 「종루가오카(鐘楼ヶ丘)」「종루노오카(鐘楼の丘)」라고 불린다.
- 슌죠당(俊乗堂): 1704년 건립. 가마쿠라 시대에 대불과 대불전을 재흥한 중흥의 조(祖)·슌죠보쵸겐(俊乗房重源)을 섬긴다. 대불전보다 동쪽으로 한 단 높아진 「종루가오카」라고 불리는 장소에 있으며, 옛날 이 장소에는, 주겐이 복흥의 거점으로 한 동대사 별소(別所)와 그 중심 당우의 정토당(浄土堂)이 있었지만, 1567년에 병화로 타 버려, 그 후, 코케이(公慶)가 1704년에 주겐 500년 원기(遠忌)에 정토당 터에 새롭게 슌죠당을 건립하고, 원래의 슌죠당(현·깅키당)으로부터 슌죠상인좌상(俊乗上人坐像)(국보)을 옮겨 안치했다.[89] 이 좌상은 상인이 86세에 죽은 직후의 제작으로 생각되며, 가마쿠라 시대 초상 조각의 걸작이다. 이 외에, 당내에는 카이케이 작의 아미타여래상과 헤이안 시대의 아이젠묘오좌상(모두 중요문화재)이 안치되어 있다. 걸려 있는 편액 「슌죠당」은 주겐의 필적으로, 주겐의 800년 원기에 해당하는 2006년(헤이세이 18년)에 설치되었다. 매년 7월 5일(주겐의 기일)과 12월 16일에는 당내가 특별 공개된다.[89]
- 대유야(大湯屋)(중요문화재): 12세기 말에 주겐에 의해 재건. 1239년에 개수되어, 1408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대개수가 행해지고 있다.[89] 2월당 뒤 참도에 있다. 정면은 이리모야조, 배면은 기리즈마조이며, 동서로 긴 건물의 내부는, 전면이 욕실의 전실, 중앙이 욕실, 배면이 가마장이 되고 있다. 욕실에는 당파풍(唐破風) 붙이의 목욕탕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주겐의 명으로 1197년에 만들어진 철제의 욕조(중요문화재)가 놓여져 있다. 가마장의 옥상에는 연출구(煙抜き)의 누각이 있어, 중세의 욕실의 모습을 전하는 귀중한 역사적 유구이다. 비공개.
- 신국사(辛国社)
- 강당지(講堂跡): 초석이 남아 있다. 옛날, 대불전의 북쪽에는 폭 54미터, 깊이 약 28.5미터의 강당과, 그 동서북의 3면의 외회랑에 따라 승방이 서 있었다.[76] 강당은 756년 무렵에 완공되어, 천수관음을 본존으로 했지만, 917년에 소실된다. 재건된 당도 1181년의 병화로 소실. 그 후 복흥되었지만, 1508년의 소실 후에는 재건되지 않았다.
- 시안신사(子安神社)
- 시즈도(指図堂): 에도 시대 후기의 재건. 대불전 서쪽에 있다. 호넨의 화상을 섬기는 당. 가마쿠라 시대, 대불의 복흥에 종사한 주겐은, 호넨의 추거로 대불 복흥의 대권진직이 되었다. 이 당에 복흥 대불전의 지도(設計図)를 납입한 것으로부터 시즈도의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토교에도 관심이 강했던 주겐의 초대로 호넨이 이곳에서 정토삼부경을 강했다고 한다. 원래 이 당에 있던 목조석가여래좌상(가마쿠라 시대, 중요문화재)은 동대사 박물관으로 이동하고 있다. 건물은 에도 시대 후기의 1852년 무렵의 것이지만, 법연상인이십오영장 제11번 찰소이기 때문에, 정토종측이 기사 등으로 재건에 협력하고 있다. 노후화에 의해 2022년부터 2023년에 걸쳐 수리가 행해졌다. 이에 앞서 2020년부터 동쪽에 인접하는 구리(庫裏)가 개축되어, 사경도장(写経道場)이 되었다.
- 권진소(勧進所): 원래는 동대사 중흥의 조인 주겐이 권진(소실한 동대사 재흥을 위한 기증금 모금)의 본거지로 한 곡옥(穀屋)이다. 대불전 서쪽의 담으로 둘러싸인 일획으로, 표문을 들어가면 왼쪽에 코케이당(公慶堂), 그 앞의 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에 아미타당(阿弥陀堂), 정면 깊숙이에 하치만덴(八幡殿), 하치만덴의 왼쪽에 경고(経庫)(중요문화재)가 있다.
- * 구리
- * 코케이당(公慶堂): 에도 시대의 대불전 재흥에 공헌한 코케이상인의 상(중요문화재)을 안치한다. 상은 상인의 사망 다음 해인 1706년의 작품. 매년 4월 12일과 10월 5일에 공개된다.
- * 아미타당(阿弥陀堂): 주겐이 송(宋)으로부터 장래했다는 전승이 있는 고교사유아미다(五劫思惟阿弥陀)상(중요문화재)을 안치한다. 매년 10월 5일만 공개된다.
- * 하치만덴(八幡殿): 1201년에 카이케이에 의해 만들어진 승형하치만신(승형(僧形)하치만신)좌상(국보)을 안치한다. 이 상은 동대사의 진수인 테무케야마 하치만구의 신체였던 것으로, 메이지의 신불분리에 따라 동대사로 옮겨졌다. 제작 당시의 채색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카이케이의 대표작이다. 매년 10월 5일만 공개된다.
- * 권진소경고(勧進所経庫)(중요문화재): 헤이안 시대의 건립.
- * 종루
- * 표문(적문(赤門))
- 동대사학원유치원
- 계단원(戒壇院): 출가자가 수계(正規의 승려가 되기 위한 계율을 받는)하기 위한 시설로서, 755년에 간진화상을 초청하여 창건되었다.
- * 계단당(戒壇堂)(나라현 지정 유형문화재): 1733년 재건. 내부에는 중앙에 법화경견보탑품(見宝塔品) 제11의 소설에 기초한 다보탑이 있으며, 내부에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섬겨진다. 그 주위를 국보의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다.
- ** 조상사천왕입상(塑造四天王立像)(국보): 법화당의 일광보살상·월광보살상 및 집금강신상과 함께, 나라 시대의 조상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이다. 분노의 표정을 드러낸 지국천(持国天), 증장천상과, 미간을 찌푸리고
4. 대불 (비로자나불)
도다이지에서 제시한 대불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
항목 | 크기 |
---|---|
키 | 14.98m |
얼굴 | 5.33m |
눈 | 1.02m |
코 | 0.5m |
귀 | 2.54m |
대불의 어깨 길이는 약 28m이고, 머리에는 총 960개에 달하는 꼬인 모양의 머리카락 돌기들이 있다. 뒤에 있는 광배의 지름은 27m이고, 그 옆에 위치한 16개의 각기 다른 광배는 각각 2.4m이다.
최근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대불상의 무릎 부분에서 사람 이빨, 진주, 거울, 칼, 보석들이 감지되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이를 쇼무 천황의 유물로 추정하고 있다.[30]
대불의 무게는 약 500ton이다.
743년, 쇼무 천황은 일본 전역에 새로운 불교 사찰을 건립하는 데 백성들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행기는 제자들과 함께 지방을 돌아다니며 기부를 요청했다. 도다이지가 보관한 기록에 따르면, 총 26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불과 그 전당 건립에 참여하여 쌀, 목재, 금속, 천 또는 노동력을 제공했으며, 35만 명은 불상 건립에 직접 참여했다.[13] 높이 16m의 불상은 3년에 걸쳐 여덟 번의 주조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으며, 머리와 목은 별도의 요소로 주조되었다.[18] 불상 제작은 먼저 시가현 시가라키에서 시작되었으나, 여러 차례의 화재와 지진을 겪은 후, 745년 나라에서 건축이 재개되었고,[14] 751년에 마침내 불상이 완성되었다. 1년 후인 752년에는 1만 명의 승려와 4천 명의 무용수가 참석한 가운데 불입식이 거행되어 불상 완성을 축하했다.[19] 인도 승려 보리선이 쇼무 천황을 위해 개안식을 거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일본에 큰 비용을 들였는데, 불상 제작에 일본의 청동이 많이 사용되었고 금은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이다.[20]
대불상은 지진 피해 등 여러 이유로 여러 차례 주조되었다. 현재 불상의 손은 모모야마 시대(1568~1615)에, 머리는 에도 시대(1615~1867)에 만들어졌다.
국보이다. 처음 건립된 대불(루사나불)과 대불전은 쇼무 천황의 발원으로 8세기에 건립되었으나, 이후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대불전은 에도 시대에 재건된 것이다. 대불은 대좌와 소매, 다리 등 일부에 초기 부분만 남아있고, 몸체의 대부분은 중세 시대 작품이며, 머리는 에도 시대 작품이다.
덴표 15년(743년)에 쇼무 천황이 대불 조성의 조서를 발표하였다. 처음에는 자고락궁 근처의 고가사에서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이후 현재지인 나라에서 다시 조성을 시작하여 덴표쇼호 4년(752년)에 개안공양이 거행되었다. 지쇼 4년(1181년)의 난토소토 화재로 대불전이 소실되고, 대불도 대좌와 하반신 일부만 남고 불타 없어졌다. 이후, 대불과 대불전은 중원의 노력으로 재건되어 분지 원년(1185년)에 대불의 개안공양, 겐큐 원년(1190년)에는 대불전 상량식, 겐큐 6년(1195년)에는 대불전 낙성공양이 거행되었다. 이 가마쿠라 시대에 재건된 대불도 에이로쿠 10년(1567년)의 도다이지 대불전 전투로 다시 불탔다. 대불전의 재건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불은 임시 수리 상태로 노천에 방치된 채 수십 년이 흘렀으나, 에도 시대에 공경 상인의 노력으로 대불과 대불전 모두 복원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대불의 머리는 겐로쿠 3년(1690년)에 주조된 것이며, 겐로쿠 5년(1692년)에 개안공양이 거행되었다. 대불전은 보에이 6년(1709년)에 낙성하였다.
;대불(루사나불상)
국보. 지정 명칭은 “동조 루사나불좌상(금당 안치) 1구”이다. 상의 높이는 14.7미터이다. 대불은 『화엄경』에 설하는 루사나불이라는 이름의 부처이다. 루사나불은 “연화장 세계” (『화엄경』의 세계관)의 중심에 위치하며, 대우주의 존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이다.
5. 정원
도다이지의 다양한 건물들은 정원 설계의 전체적인 미적인 의도에 따라 배치되었다. 인접한 정원은 오늘날 도다이지의 일부로 여겨진다. 이들 구조물의 일부는 현재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과 정원은 독특하고 유기적인 사원 단지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발전하였다.
6. 문화재
도다이지에는 수많은 국보와 중요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종류 | 이름 | 한자 |
---|---|---|
건축물 | 금당 (대불전) | 金堂 (大仏殿) |
남대문 | 南大門 | |
개산당 | 開山堂 | |
종루 | 鐘楼 | |
법화당 (삼월당) | 法華堂 (三月堂) | |
2월당 | 二月堂 | |
전해문 | 転害門 |
- '''대불전'''(大仏殿, 금당): 국보이다. 성무 천황의 발원으로 8세기에 건립되었으나,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에도 시대에 재건된 것이다. 대불은 대좌와 소매, 다리 등 일부에 초기 부분만 남아있고, 몸체의 대부분은 중세 시대 작품이며, 머리는 에도 시대 작품이다.[69]
- '''목조 금강역사입상'''(木造 金剛力士立像, 남대문 안치): 국보이다. 높이 8.4미터의 거대한 목상으로, 겐닌 3년(1203년)에 불과 69일 만에 만들어졌다. 문을 향해 오른쪽에 웅형(吽形, 입을 다문 모습), 왼쪽에 아형(阿形, 입을 벌린 모습)을 안치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인왕상의 안치 방법과는 좌우가 반대이다.[72]
- '''법화당'''(法華堂, 삼월당): 국보이다. 경내 동쪽 와카쿠사야마 기슭에 있으며, 도다이지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시대 건축물 중 하나로, 천평불의 보고로 알려져 있다.[75]
- '''건칠불공권삭관음입상'''(乾漆不空羂索觀音立像, 법화당 안치): 국보이다. 나라 시대 작품으로, 높이 3.62미터이다. 세 눈과 여덟 팔을 가진 관음상으로, 법화당의 본존이다. 머리 위의 보관은 정면에 은으로 만든 아미타여래상을 장식하고, 많은 보석과 투각으로 장식되어 있어, 나라 시대 공예의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75]
- '''조소집금강신입상'''(塑造執金剛神立像, 법화당 안치): 국보이다. 높이 1.704미터로, 본존 불공권삭관음의 뒤편 궤 속에 북쪽을 향해 안치된다. 오른손에 금강저를 들고 눈을 부릅뜨고 위협하는 무신상이다. 오랫동안 비불이었기 때문에, 당초의 채색이 잘 남아 있다.[89]
- '''2월당'''(二月堂): 국보이다. 음력 2월에 "오미즈토리"(修二会)가 행해지는 곳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간분 7년(1667년) 오미토리 도중 실화로 소실되어 2년 후 재건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본존은 대관음, 소관음이라 불리는 두 체의 십일면관음상으로, 모두 비불이다.[91]
- '''남대문'''(南大門): 국보이다. 헤이안 시대에 태풍으로 무너진 후, 가마쿠라 시대인 1199년에 재건되었다. 슌죠보 주겐이 송나라에서 전래한 건축 양식인 대불양(大仏様)을 채용한 건축으로 유명하다.[75]
이 외에도 도다이지에는 수많은 중요문화재가 있다.
7. 주요 행사
- 1월 1일 '''제야의 종'''(종루)
- 1월 1일-3일 '''정월 삼가일'''(대불전·2월당)
- 1월 7일 '''수정회'''(대불전) 후회법요가 행해진다.
- 2월 3일 '''세츠분·호시마츠리'''(2월당) 낮에는 「환궁」과 「세츠분마메마키」가 행해진다. 환궁이란 낡은 신사나 부적 등을 불에 태우는 의식이다. 세츠분 마메마키는 오후 2시경, 2월당 무대 위에서 행해진다. 「호시마츠리」는 별에게 재난 제거와 즐거움을 기원하는 법회이다. 저녁때, 2월당 본당에 만등명을 밝히고 「별만다라」를 내걸고 이 법회를 행한다.
- 3월 1일-14일 '''수이회(오미토리)'''(2월당) 자세한 내용은 「수이회」 항목 참조. 나라 시대, 실충 화상에 의해 시작된 도다이지의 대표적인 행사. 11명의 연행중이라고 불리는 승려들이 정진결제하여 합숙 생활을 보내고, 2월당의 본존 십일면관음에게 죄를 참회하고, 국가 안태, 만민 풍락 등을 기원한다. 내진에서는 과거장 독송, 달리기 행법, 타타르의 행법 등의 행사가 행해진다. 2월당 위에서 송명을 휘두르는 「오마츠리」는 3월 1일 이후 매일 행해진다. 와카사이에서 물을 길어 본존에 바치는 「오미토리」는 3월 12일 심야(13일 새벽)에 행해진다.
- 3월 15일 '''열반강''' 석가의 입열반을 기념하는 법요.
- 4월 8일 '''불생회'''(대불전) 석가의 탄생을 축하한다.
- 4월 24일 '''화엄지식공'''(개산당) 일산의 승려들이 개산당에 집합하여, 량변승정의 꾸밈상자 앞에 화엄 오십오성선지식만다라를 걸고, 화엄경을 강의하고, 법회를 행한다.
- 5월 2일-3일 '''성무천황제''' 성무천황의 기제법요.
- * 5월 2일 천황전에서 논의법요. 식중·치고의 행렬이 시내에서 대불전으로 향한다. 도착 후, 대불전에서 성무천황 경찬법요. 무악도 봉납된다.
- * 5월 3일 '''산릉제'''(대불전·사보고릉) 대불전을 출발하여, 도다이지 일산의 승려들이 성무천황을 모시는 사보고릉에 참배한다. 귀착 후, 대불전에서 헌차식.
- 7월 5일 '''준조기'''(준조당) 가마쿠라 시대에 대불을 복원한 중원의 법요. 법요 종료 후(11시경)부터 오후 4시경까지 평소 비공개인 비불 중원상인좌상(국보)이 일반 공개된다.
- 7월 28일 '''해제회'''(대불전) 901년(연희 원년)에 시작된, 하츠고에노하라이와 깊은 관계가 있는 법회. 법요와 갈대고리 통과가 행해진다.[102][103]
- 8월 7일 '''대불오미즈키'''(대불전) 200명 정도의 승려와 관계자들이 새벽부터 2월당의 목욕탕에서 몸을 깨끗이 하고, 흰옷에 짚신 차림으로 대불전에 모여, 오전 7시부터 발견작법이 행해진 후, 모두가 경을 외우고, 1년에 한 번 대불의 「오미즈키」를 행한다.
- 8월 9일 '''오요쿠'''(2월당) 이 날 참배하면 46,000번 참배한 것과 같은 공덕을 얻는다고 전해진다.
- 8월 15일 '''만등공양회'''(대불전) 우란분절의 마지막 날, 8월 15일 밤, 대불에 많은 등롱을 공양한다. 귀성하지 못하는 분들도 선조의 공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취지로 1985년에 시작되었다.
- 9월 17일 '''십칠야'''(2월당) 관세음보살의 인연일로, 법요 외에 2월당 앞 광장에서 본오도리가 행해진다.
- 10월 5일 '''전해회''' 동대사의 진수인 데무카야마 하치만궁의 제례.
- 10월 15일 '''대불 가을 축제'''(대불전)
- 12월 14일 '''불명회'''(2월당) 3천 불의 그림을 걸고 불명을 외우며 예배하고, 연내의 죄장 소멸을 기원한다.
- 12월 16일 '''량변기'''(개산당) 동대사 개산 량변승정의 법요. 비불·량변승정좌상, 집금강신입상이 공개된다.
- 12월 16일 '''방광회'''(법화당) 연학수의라고 불리는 구두 시험이 행해진다. 사찰 내의 화엄과 삼론을 배우는 자가 학승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것에 합격해야 한다. 현재는 형식화되어 있다.
- 12월 18일 '''향수 내려주기''' 오미토리에서 길어온 와카사이의 물이 신자들에게 나누어진다.
그 외, 2002년 이래, 매년 12월에 '''더 그레이트 부다 심포지엄'''이 개최되고 있다. 불교에 관한 여러 문제를 넓은 시야에 서서 엄밀한 학문적 방법으로 분석·검토하고, 그 의의를 명확히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8. 기타
- 1933년 쇼소인에서 신라장적이 발견되었다.
- 속장경의 일부인 《화엄경수소연의초》 40권이 소장되어 있다.
- 마쓰오 바쇼는 하이쿠(1689~1670)에서 대불상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39][40]
::"첫눈이네!/ 언제 대불/ 기둥처럼 서 있네"
::"첫눈 내리고 / 거기에 서 있는 큰 부처 / 힘의 기둥"
- 여러 일본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사용되었으며, 1950년대 존 웨인 주연의 영화 《바바리안과 게이샤》에서는 남대문이 도시 성문으로 등장했다.
- 1994년 5월 20일, 유네스코 후원으로 국제 음악 축제인 《위대한 음악 체험(The Great Music Experience)》이 도다이지에서 열렸다. 도쿄 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엑스 재팬, INXS, 존 본 조비, 조니 미첼, 밥 딜런 등이 참여했으며, 1994년 5월 22일과 23일에 55개국에서 동시 방송되었다.
- 2007년 애니메이션 시리즈 《모노노케》 8화와 9화에서 도다이지와 정토원이 언급된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포가튼》에서 일본의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 2003년 라슬로 크라스나호르카이의 소설 "북쪽으로 산, 남쪽으로 호수, 서쪽으로 길, 동쪽으로 강"의 주제이다.
8. 1. 사회 공헌 활동
도다이지는 고묘 황후가 비다원과 시약원을 설립하여 일본 사회사업의 선구가 된 사찰이기 때문에, 현대에도 다양한 사회사업을 실시하고 있다.2019년 4월 발생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이후, 일본 당국은 도다이지를 포함한 여러 역사적 장소의 화재 예방 조치를 확대할 계획을 발표했다. 사찰과 신사 직원들의 고령화에 따라 젊은 직원을 새로 채용하는 방안도 포함되었다.[41] 도다이지 사찰 관리들은 대불상 뒤 복도에 "노트르담 대성당을 재건합시다"라는 기부함을 설치했다. 2019년 6월, 이 기부함 옆에는 일본어와 영어로 도다이지가 불교 계곤종(華嚴宗)의 본산으로서 이러한 방식으로 기금을 모금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설치되었다. 영어 안내판에는 "도다이지 사찰은 대규모 화재로 인해 여러 차례 재건되었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입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비극에 진심으로 애도를 표합니다. 종교를 넘어, 대성당 재건을 위해 여러분의 지원을 부탁드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 동대사 복지료육병원
: 신체장애아 시설 「동대사 정지원」, 중증심신장애아 시설 「동대사 광명원」, 그리고 중증심신장애아(자) 통소시설 「화의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료육(療育)을 실시하고 있다. 일반적인 정형외과 등의 외래 및 입원 수술, 재활 치료도 실시하고 있다. 동대사 종합문화센터 서쪽에 위치해 있다.
; 학교법인 동대사학원
시설 | 내용 |
---|---|
동대사학원 중학교·고등학교 | 중고 일관 남학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초대 교장은 별당도 역임한 시미즈 고쇼(清水公照)이다. 남대문 서쪽에 있었으나, 현재는 산령정(山陵町)으로 이전하였다. |
동대사학원 유치원 | 2세부터 보육을 실시한다. 계단당 북쪽에 위치해 있다. |
; 동대사 도서관
: 주로 불교 관련 서적, 불교 미술, 고서, 고문서, 고고학 자료 등을 수집 보존하고 일반인의 열람에 제공하고 있다. 남도 여러 사찰에 전해지는 문화재가 메이지 시대의 폐불훼석 운동으로 유실·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현재는 동대사 종합문화센터 내에 위치해 있다.
:* 동대사사를 중심으로 한 「더 그레이트 부다 심포지엄」(The Great Buddha Symposium)을 2003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다(논집은 2019년 현재 17호 발행, 법장관(法蔵館)).
8. 2. 대불로 인한 수은 공해설 (논란)
도다이지 대불 건립 당시 시행된 금도금 과정에서 발생한 수은 증기가 헤이조쿄를 뒤덮어 수은 중독을 일으켰고, 이것이 징벌로 여겨져 헤이조쿄가 74년 만에 버려지고 나가오카쿄로 천도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107]白須賀公平|시라스가 고헤이일본어가 『대학 등 환경 안전 협의회 회보』에 기고한 논문 「수은 증기로 20만(추정) 도시가 멸망」에서 이 가설을 주장했다. 『도다이지 요록(東大寺要録)』에 따르면, 금도금에는 금 375kg과 수은 2110kg이 사용되었으며, 금과 수은의 합금인 아말감을 도금 대상에 바른 후 불로 수은을 기화시켜 금만 남기는 방식이었다.[107]
2006년 2월 26일, TV아사히 『멋진 우주선 지구호』 제418회 「수은의 신비」는 이 가설을 바탕으로 방송되었다.[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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