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고케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케닌은 일본 중세 시대의 무사 신분으로, 시대에 따라 그 의미와 역할이 달랐다. 헤이안 시대에는 귀족을 섬기는 가신을 지칭했으며,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는 쇼군과 주종 관계를 맺고 군역과 공사를 수행하는 무사를 의미했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 이후에는 겐무 신정에서 폐지되었으나, 무로마치 막부와 센고쿠 시대에는 다이묘의 가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막부에 직접 예속된 하급 봉신으로, 하타모토와 달리 쇼군을 알현할 권한은 없었으며, 봉록을 받고 막부의 공무에 종사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막부 - 장군선하
    장군 선하는 무가 정권 수장이 천황으로부터 장군으로 임명받아 권력과 정통성을 인정받는 의식이다.
  • 가마쿠라 막부 고케닌 - 미우라 요시무라
    미우라 요시무라는 가마쿠라 막부 초기의 무장으로, 주요 권력 투쟁에서 막부 측에 서서 활약하며 막부 안정에 기여했으나, 와다 요시모리의 난에서 배신,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암살 연루설, 쇼큐의 난 진압, 숙로 임명 등 정치적 수완과 교활한 면모를 동시에 보인 인물이다.
  • 가마쿠라 막부 고케닌 - 쇼니 요리히사
    쇼니 요리히사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규슈를 관할한 쇼니 씨의 5대 당주 쇼니 사다쓰네의 아들로, 겐코의 난과 겐무 신정에서 활약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지지했으나, 세력 다툼과 패배로 은거하여 사망했다.
  • 무사 - 사무라이
    사무라이는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의 무사 계급을 일컫는 말로, 본래 귀족을 섬기는 사람을 뜻하는 '사부라이'에서 유래하여 쇼군을 섬기는 무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변화했으며, 무사도를 따르며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무사 - 무사도
    무사도는 중세 일본에서 시작하여 에도 시대에 발전한 사무라이의 윤리 및 생활 방식으로, 진실성, 충성, 명예 등을 중시하며 선종, 유교 등의 영향을 받아 체계화되었고 현대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케닌
고케닌
정의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에서 쇼군에게 봉공한 무사 계급
봉사 의무군사적 봉사 및 막부 관련 임무 수행
특권영지 소유 및 막부의 보호
역사적 배경
가마쿠라 막부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막부를 세우면서 고케닌 제도 시작
고케닌들은 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군사적 필요에 따라 동원됨
쇼군은 고케닌에게 봉사의 대가로 영지를 지급하고 지배를 인정
호조 씨 집권 이후 쇼군이 아닌 막부에 봉사하는 형태로 변화
고케닌은 쇼군의 권력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
무로마치 막부고케닌은 여전히 존재했으나 가마쿠라 막부와는 다른 성격
막부의 세력이 약해짐에 따라 고케닌의 영향력도 감소
슈고 다이묘의 등장으로 고케닌의 역할 축소
의무와 특권
오미에미 (御目見)쇼군을 직접 알현할 수 있는 특권
겐잔 (見參)쇼군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는 의식에 참여하는 의무
묘부호테이 (名簿奉呈)자신의 가문을 쇼군에게 보고하는 의무
호코슈 (奉公衆)막부의 직접적인 봉사자로서, 필요에 따라 군사적 의무를 수행
군사적 봉사막부의 전쟁에 참여하고, 필요에 따라 군사력을 제공
영지 소유막부로부터 영지를 하사받아 소유하고 관리
사회적 의미
무사 계급의 핵심고케닌은 일본 봉건 사회의 중심축을 담당하는 무사 계급
봉건적 관계고케닌 제도 속에서 쇼군과 고케닌은 봉건적 주종 관계를 형성
지배 체제의 기반막부는 고케닌을 통해 지방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통치
사회적 영향고케닌은 무사 사회의 규범과 가치를 형성하고 전파
기타
영향고케닌 제도는 일본의 봉건 사회와 무사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

2. 중세의 고케닌

헤이안 시대에는 귀족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을 섬기는 가신을 「고케닌」이라고 불렀다. 중세 시대에는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면서 가마쿠라도노와 주종 관계를 맺은 무사들을 가리켜 고케닌이라 불렀는데, 이는 가마쿠라도노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御(미)” 자를 붙인 것이다. 이들은 '''고케닌(鎌倉殿御家人)''', '''관동 고케닌(関東御家人)''', '''진제이 고케닌(鎮西御家人)'''이라고도 불렸다.

고케닌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타이라 씨(平氏)를 정벌할 때 공을 세운 무사들과 그 후손들로, 쇼엔(荘園) 소유주, 농민, 사무라이(侍) 출신이었다.[5] 이들은 쇼군에게 군사력을 제공하고 지방세를 징수하며 맡겨진 영토를 다스렸다.[5] 쇼군은 천황의 임명권을 빼앗아 고케닌을 임명했기 때문에, 이들은 쇼군에게만 충성했다.[5] 고케닌 칭호는 입문식에서 명부에 이름을 적고 충성 서약을 하면 주어졌다.[8]

고케닌은 가마쿠라도노에게 직접 소령(所領) 안도를 받은 경우와 본택 안도를 받은 경우로 나뉜다. 전자는 동국에 살면서 초창기부터 요리토모를 따른 이들이 많았고, 지토(地頭)직에 임명되는 등 요리토모의 보호를 받는 대신 유사시 가마쿠라로 달려갈 의무가 있었다. 후자는 국 단위로 편성된 “국 고케닌(国御家人)”으로, 지쇼·주에이 내란 이후 대번역(大番役) 독촉을 통해 각지 무사들이 국 고케닌화되었고, 서국 무사 대부분이 이에 해당되었다. 국 고케닌은 수호(守護)가 통솔하며, 대번역을 독촉하고 대번역 근무 고케닌 명부를 막부에 제출했다.

고케닌은 소령 규모와 상관없이 가마쿠라도노에게 동등하게 종속된 가신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주종 관계는 자유로워 이익에 따라 주인을 선택하거나 여러 주인을 섬길 수 있었고, 고케닌 중에는 교토 공가를 주군으로 섬기는 자도 있었다. 유력 고케닌은 세력을 넓히며 소고케닌을 가신으로 만들기도 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고케닌 임명 및 해임 권한을 가졌지만, 그 외에는 슈고, 지토와 함께 세수입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했다.[5] 고케닌은 충성을 다하면 중앙 정부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얻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권력과 토지는 세습되었다.[5] 막부 말기에는 정부가 여러 반자치적 국가의 연합체처럼 되었다.[5]

2. 1. 어원

「고케닌(御家人)」과 「케닌(家人)」이라는 용어는 어원적으로 관련이 있지만, 의미는 매우 다르다.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일본에서 사용된 율령(律令) 제도 하에서 「케닌(家人)」("가신")은 법적으로는 가족의 재산이었지만, 매매할 수 없고 노예와 달리 어느 정도의 권리를 가진 인간이었다.[1] 예를 들어, 사찰 재산 목록에는 13명의 케닌(그중 4명은 여성)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들은 사실상 종이었다.[3]

일본 중세 초기부터는, 실제 혈연 관계가 없더라도 영주와 봉신 간의 관계는 각 세대가 전 세대의 권리와 의무를 상속하는 선조적 유대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었다.[4] 양측 모두 친족 관계를 암시하는 용어로 그들의 관계를 생각하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고케닌(御家人)」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고-" 접두사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후에 권위를 나타내는 의미로 추가되었다.[4] 鎌倉幕府가 성립되면서 鎌倉殿과 주종 관계를 맺고 그 종자가 된 자들을, 鎌倉殿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御(미)” 자를 붙여 고케닌(御家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2. 2. 성립

고케닌(御家人)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타이라 씨(平氏)를 정벌할 때 공을 세운 무사들과 그 후손들로, 전직 쇼엔(荘園) 소유주, 농민, 사무라이(侍) 출신이었다.[5] 이들은 쇼군에게 군사력을 제공하고 지방세를 징수하며 맡겨진 영토를 다스렸다.[5] 쇼군이 천황의 임명권을 빼앗아 고케닌을 임명했기 때문에, 이들은 쇼군에게만 충성했다.[5] 고케닌 칭호는 입문식에서 명부에 이름을 적고 충성 서약을 하면 주어졌다.[8] 가마쿠라 막부는 고케닌 임명 및 해임 권한을 가졌지만, 그 외에는 슈고(守護), 지토(地頭)와 함께 세수입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했다.[5] 고케닌은 충성을 다하면 중앙 정부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얻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권력과 토지는 세습되었다.[5] 막부 말기에는 정부가 여러 반자치적 국가의 연합체처럼 되었다.[5]

가마쿠라 막부 성립 후, 가마쿠라도노와 주종 관계를 맺은 이들을 가마쿠라도노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御"자를 붙여 고케닌이라 불렀다. '''고케닌(鎌倉殿御家人)''', '''관동 고케닌(関東御家人)''', '''진제이 고케닌(鎮西御家人)'''이라고도 한다.

고케닌의 성립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막부 수립과 관련이 깊다. 요리토모는 유배자여서 가신이 적었고, 1180년(지승 4년) 거병 당시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의 가신이었던 남관토 무사들을 “대대로 이어온 고케닌(累代の御家人)”으로 포섭했지만, 당시 주종 관계는 개별 계약이었기에 요리토모에게 종속되지 않은 무사도 많았다.

이후 가마쿠라에 동국 정권을 세우자 각지 무사들이 요리토모 휘하로 들어왔다. 급증한 무사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모치히토 왕의 령서가 이용되었다. 령서에 따라 요리토모에게 귀의한 무사들은 모두 “고케닌”으로 편성되었다. 고케닌에는 무사 출신 '''무사 고케닌(武士御家人)'''과 문관 출신 '''문사 고케닌(文士御家人)'''이 있었다. 지바 씨(千葉氏), 미우라 씨(三浦氏), 오야마 씨(小山氏) 등이 유력한 무사 고케닌이었고,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 미요시 야스노부(三善康信), 니카이도 유키마사(二階堂行政) 등이 대표적인 문사 고케닌이었다.

지쇼·주에이의 난 때는 관동 외 지역의 많은 무사들을 고케닌으로 만들어야 했고, 평씨 토벌에 공을 세운 무사들에게 본래 영지를 안도(安堵)하는 “본택 안도”가 많이 이루어졌다. 관동 고케닌은 대부분 요리토모의 소령(所領) 안도를 통해 고케닌이 되었지만, 본택 안도 고케닌의 소령 안도 권한은 장원(荘園) 영주인 본소(本所)나 국사(国司)에게 있었기에, 요리토모는 이들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고 지위를 안도해주는 방식으로 고케닌을 조직했다.

고케닌은 가마쿠라도노에게 직접 소령 안도를 받은 고케닌과 본택 안도를 받은 고케닌으로 나뉜다. 전자는 동국에 살면서 초창기부터 요리토모를 따른 이들이 많았다. 지두(地頭)직에 임명되는 등 요리토모의 보호를 받는 대신, 유사시 가마쿠라로 달려갈 의무가 있었다. 후자는 국 단위로 편성된 “국 고케닌(国御家人)”이었다. 지쇼·주에이 내란 이후 대번역(大番役) 독촉을 통해 각지 무사들이 국 고케닌화되었고, 서국 무사 대부분이 국 고케닌이 되었다. 국 고케닌은 수호(守護)가 통솔하며, 대번역을 독촉하고 대번역 근무 고케닌 명부를 막부에 제출했다.

고케닌은 소령 규모와 상관없이 가마쿠라도노에게 동등하게 종속된 가신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주종 관계는 자유로워 종자는 이익에 따라 주인을 선택하거나 여러 주인을 섬길 수 있었고, 고케닌 중에는 교토 공가를 주군으로 섬기는 자도 있었다. 유력 고케닌은 세력을 넓히며 소고케닌을 가신으로 만들기도 했다.

2. 3. 고온(御恩)과 봉공(奉公)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면서 가마쿠라도노와 주종 관계를 맺은 이들을 고케닌(御家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가마쿠라도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御”자를 붙여 존경을 나타냈다.[8]

고케닌의 성립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요리토모는 유배자였기에 가신이 매우 적었지만, 1180년 거병 당시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의 가신이었던 남관동 무사들을 “대대로 이어온 고케닌”으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주종 관계가 개인적인 계약이었기에, 요리토모에게 종속하지 않는 무사들도 많았다.

이후 가마쿠라에 동국 정권을 수립하면서 각지의 무사들이 요리토모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급증하는 무사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이인왕의 령서가 이용되었고, 령서에 따라 요리토모에게 복속된 무사들은 모두 “고케닌”으로 조직되었다. 고케닌에는 무사 출신의 '''무사 고케닌'''과 문관 출신의 '''문사 고케닌'''이 있었다. 대표적인 무사 고케닌으로는 지바 씨(千葉氏), 미우라 씨(三浦氏), 오야마 씨(小山氏) 등이 있었고, 문사 고케닌으로는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 미요시 야스노부(三善康信), 니카이도 유키마사(二階堂行政) 등이 있었다.

지쇼·주에이의 난 시기에는 관동 이외 지역의 무사들을 복속시킬 필요가 있었고, 타이라 씨(平氏) 토벌에 공을 세운 무사들을 고케닌으로 인정하고 본택을 안도(安堵)하는 “본택 안도”가 많이 행해졌다. 관동 고케닌 대부분이 요리토모의 소령(所領) 안도를 통해 고케닌이 된 것과는 달리, 본택 안도 고케닌의 소령 안도 권한은 장원 영주인 본소(本所)나 국사(国司)에게 있었다. 따라서 요리토모는 본소·국사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지위를 안도함으로써 고케닌을 조직했다.

고케닌은 가마쿠라도노로부터 직접 소령 안도를 받는 고케닌과 본택 안도를 받는 고케닌으로 나뉜다. 전자는 동국에 거주하며 초창기부터 요리토모를 섬겼던 이들이 많았고, 지토(地頭)직에 임명되는 등 두터운 보호를 받는 대신 유사시 가마쿠라에 긴급히 참집할 의무가 있었다. 후자는 국 단위로 편성되어 “국 고케닌”이라 불렸으며, 지쇼·주에이 내란 종결 후에는 대번역(大番役) 독촉을 통해 각지 무사들의 국 고케닌화가 진행되어 서국 무사 대부분이 국 고케닌으로 편성되었다. 국 고케닌은 수호(守護)가 통괄했으며, 대번역을 독촉하고 대번역 근무 고케닌 명부를 막부에 제출했다.

고케닌은 소령 규모에 따라 유력 고케닌부터 영세 고케닌까지 다양했지만, 가마쿠라도노에게 동등하게 종속하는 가신으로서 신분상 동등하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주종 관계에서는 종자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자유롭게 주인을 선택하거나 여러 주인을 섬길 수 있었기에, 고케닌 중에는 교토의 공가를 주인으로 섬기는 자도 있었다. 또한 유력 고케닌은 세력을 확장하면서 소고케닌을 가신으로 삼기도 했다.

고케닌이 가마쿠라도노로부터 받는 은혜, 즉 '''고온(御恩)'''은 안도와 신은급여(新恩給与)였다. 안도에는 소령 안도와 본택 안도가 있었고, 신은급여는 모반 진압 등에 공을 세운 고케닌에게 모반인의 소령 등을 새로운 영지로 하사하는 것이었다. 소령 안도와 신은급여는 지토(地頭)직에 임명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큐의 난 이후에는 고토바 상황으로부터 몰수한 대량의 소령이 공을 세운 고케닌에게 신령급여되었는데, 이때 임명된 지토를 특히 신보지두(新補地頭)라고 한다.

고케닌은 고온을 받는 대가로 '''봉공(奉公)''', 즉 가마쿠라도노에게 군역(軍役)과 공사(公事)를 바칠 의무를 졌다. 이러한 의무를 고케닌야쿠(御家人役)라고 한다. 군역은 전시 종군뿐 아니라 평시 교토, 가마쿠라의 대번역(大番役)이나 이국 경호역 등을, 공사는 간토고쿠지(関東御公事)라고도 하며 막부가 고케닌에게 부과한 쌀과 돈의 납입 의무를 말한다.

이러한 가마쿠라도노와 고케닌 사이의 상호 호혜 관계를 고온과 봉공(御恩と奉公)이라고 한다.

2. 4. 가마쿠라 중기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타이라 씨를 정벌할 때 공을 세운 이들의 후손들이 고케닌(御家人)이었다.[5] 이들은 쇼군에게 필요한 군사력을 제공하고, 지방세를 징수하며, 맡겨진 영토를 다스렸다.[5] 쇼군이 임명했기에, 고케닌은 쇼군에게만 충성을 바쳤다.[5] 고케닌 칭호는 입문식, 명부(名簿)에 이름 기재, 충성 서약을 통해 얻었다.[8] 가마쿠라 막부는 임명과 해임 권한을 가졌지만, 그 외에는 고케닌, 슈고(守護), 지토(地頭)에게 자치권을 주고 세수입을 자유롭게 쓰도록 했다.[5] 충성하면 중앙 정부로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5] 시간이 지나면서 고케닌 관리는 거의 해임되지 않아 권력과 토지 소유는 사실상 세습되었다.[5] 막부 말기에는 정부가 여러 반자치 국가의 연합체와 같았다.[5]

1333년 가마쿠라 함락 이후, 아시카가 막부는 국가 경제와 구조 개혁을 시도했다.[7] 토지 분할을 되돌리는 과정은 수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막부는 지방 군벌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지만, 오히려 적대감만 커졌다.[7] 아시카가 막부는 호조 씨와 패배한 고케닌들의 토지를 몰수했지만, 이를 독점하여 전국 25%를 직접 통치하자 동맹 세력들조차 불안해했다.[7] 이 혼란은 봉건 영주인 다이묘의 등장을 불렀지만, 이 용어는 50년 동안 널리 쓰이지 않았다.[7] 많은 다이묘는 고케닌 출신 슈고, 지토, 귀족이었지만, 대부분 상관을 대체한 새로운 인물이었다.[7] 아시카가 막부에 저항하려면 강력한 중앙 권력과 원활한 계승이 필요했기에, 다이묘들은 상속을 분할하지 않고 단일 상속인에게 이전했으며, 상속인은 혈족이 아닌 입적된 유망주인 경우가 많았다.[7]

사료에 나타난 고케닌 수는 적었으며, 간토를 제외하면 한 나라당 수 명 정도였다. 1275년 「로쿠죠 와카미야 조영 주문」에 기록된 전국 고케닌 총수는 469명인데, 가마쿠라 123명, 무사시국 84명, 사가미국 33명, 교토 28명 등 간토에 고케닌이 많았다. 이는 모든 고케닌을 포함한 것은 아니지만, 고케닌이 무사 중에서도 제한된 계층이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가마쿠라 막부와 고온(御恩)·봉공(奉公) 계약 관계가 없는 '''비고케닌'''도 많았다. 문영의 역이라는 대외 위기 때 막부는 비고케닌 지휘권도 얻었지만, 막부에 따르지 않는 무사도 많았다. 영인의 덕정령 이후 비고케닌에 대한 고케닌 우대책이 두드러졌고, 비고케닌 중에는 악당이 되어 막부, 공가(公家), 사찰에 저항하는 자도 있었다. 동시에 덕정령 발표 이면에는 소령을 잃은 "무족의 고케닌(無足の御家人)"도 있었다.

2. 5. 겐무신정(建武新政)

1333년 가마쿠라 막부 멸망 이후 권력 구도가 재편되면서, 아시카가 막부는 국가 경제와 구조 개혁을 시도했다.[7] 토지 분할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이후 수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막부는 지방 군벌 세력을 억누르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반발만 불러일으켰다.[7] 아시카가 막부는 가마쿠라의 실질적 지배 세력이었던 호조 씨와 몰락한 고케닌(御家人)들의 토지를 몰수했으나, 이로 인해 전국 영토의 약 25%를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동맹 세력들마저 자신과 후계자들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었다.[7] 이러한 혼란 속에서 봉건 영주인 ''다이묘''가 등장했지만, 이 용어는 50년 동안 널리 쓰이지 않았다.[7] 많은 다이묘는 고케닌 출신의 슈고(守護)나 지토(地頭), 혹은 귀족이었으나, 대부분은 상관을 대체한 새로운 인물들이었다.[7] 아시카가 막부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 권력과 원활한 승계가 필요했기에, 다이묘들은 상속 재산을 분할하지 않고 단일 상속인에게 온전히 물려주었으며, 혈연 관계가 아닌 능력 있는 인물을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7]

가마쿠라 막부의 세력이 강성했을 때는 고케닌(御家人)이 무사의 신분을 의미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겐무신정(建武新政)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1333년 가을 이후, 늦어도 1334년까지는 "고케닌(御家人)"이라는 칭호가 폐지되었다.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은 결성 종광(結城宗広)에게 보낸 서신에서 고케닌(御家人)을 측근 신하로 격하된 이들로 간주하고, 고케닌(御家人)을 폐지하여 천황의 직신(直臣)으로 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인식했다.

또한, 현실적으로 지토(地頭) 직책에 비고케닌(非御家人)이 진출하고 "무족의 고케닌(無足の御家人)"이 늘어나는 등, 고케닌(御家人)의 기능이 약화되어 새로운 군역(軍役)·공사 부과 체계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무사 계급은 이를 고케닌(御家人)의 명예와 특권을 빼앗는 것으로 받아들여 반발했다. 『태평기(太平記)』 권13 「용마 진소사(龍馬進奏事)」에는 "고케닌(御家人)" 칭호 폐지로 다이묘(大名)·고케(高家)가 평민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에 분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무사들의 반발은 곧 엔겐의 난(延元の乱)으로 이어져 겐무신정(建武新政)이 붕괴되는 원인이 되지만, "지토(地頭)=고케닌(御家人)"을 전제로 했던 가마쿠라 막부와 같은 고케닌(御家人) 제도를 부활시키는 것은 이미 어려운 상황이었다.[12][13]

3. 무로마치 막부·센고쿠 다이묘의 고케닌

무로마치 막부는 고케닌 제도를 채택하지 않았지만, 봉공중을 가리켜 고문서학적으로는 고케닌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가와 주종 관계에 있는 자를 가리켜 고케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고케닌은 쇼군 직참의 무사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센고쿠 시대에는 전이되어 센고쿠 다이묘의 가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특히 유명한 예로는 다케다 씨, 모리 씨 등이 있다.

近年役御家人 井関七百文 萩原弥兵衛尉|근년역고케닌 이관칠백문 하기하라 야헤이몬조일본어 永禄六年甲戌検地|에이로쿠 6년(1513년)일본어 카이 국 케이린지 검지장에 나오는 "고케닌"에 대해 중세사학자 야타 토시후미는 지사화된 쇼백성과 다케다 씨의 원래 가신이었던 것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7]

4. 근세의 고케닌

에도 시대에 고케닌은 하타모토 다음으로 도쿠가와 막부에 직접 예속된 가장 하급 봉신이었다.[9] 하타모토와 달리 고케닌은 오메미에이조(御目見以上) 신분이 아니었으며, 쇼군을 알현할 권리가 없었다.[9]

에도 시대 중반부터 부유한 조닌이나 농민이 빈곤한 고케닌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양자로 들어가 사무라이 가문의 지위와 봉록을 상속함으로써 사무라이 계급에 편입될 수 있었다. 고케닌에게 지불되는 금액은 지위에 따라 달랐는데, 요리키는 1000JPY, 카치는 500JPY이었다.[10] 이들 중 일부는 하타모토로 승진하여 막부 내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기도 했다.[11]

4. 1. 개요

고케닌(御家人)은 에도 시대하타모토(旗本) 다음으로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에 직접적으로 예속된 가장 하급의 봉신이었다.[9] 하타모토와 달리 고케닌은 오메미에이조(御目見以上)의 신분이 아니었으며, 즉 쇼군(将軍)을 알현할 권리가 없었다.[9]

에도 시대 중반부터는 부유한 조닌(町人)이나 농민이 빈곤한 고케닌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양자로 들어가 사무라이 가문의 지위와 봉록을 상속함으로써 사무라이 계급에 편입될 수 있었다. 고케닌에게 지불되는 금액은 그의 지위에 따라 달랐는데, 요리키(寄騎)의 경우 1000JPY, 카치(徒士)의 경우 500JPY이었다.[10] 그들의 자손 중 일부는 하타모토로 승진하여 막부 내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기도 했다.[11]

에도 시대에, 고케닌은 지행(知行)이 1만 석 미만인 도쿠가와 쇼군가(德川将軍家)의 직참 가신단(직신) 중에서, 특히 고메켄(御目見) 미만(쇼군이 직접 만나지 않는)의 가각(家格)에 위치 지워진 자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고케닌에 대해, 고메켄 이상의 가각의 직참을 하타모토(旗本)이라고 한다.

근세의 고케닌의 대부분은, 전장에서는 토시(徒士)의 무사, 평시에는 칸죠쇼(勘定所) 근무・푸세(普請) 방 근무・번사 혹은 마치부교쇼(町奉行所)의 요리키(与力)・도신(同心)으로서 하급 관리로서의 직무나 경비를 맡은 사람들이다.

고케닌은 원칙적으로, 탈것이나 말을 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집에 현관을 설치할 수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탈것에는, 문이 없는 가마는 포함되지 않는다. 예외로, 부교쇼의 요리키가 되면 말을 탈 수 있는 경우가 있었다. 유능한 고케닌은 하타모토가 맡는 상위의 직책에 등용되는 경우도 있었고, 원칙적으로 후이(布衣) 이상의 직책에 취임하거나, 3대에 걸쳐 하타모토의 직책에 취임하면 하타모토의 가각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4. 2. 가문(家格)

고케닌의 가문 등급(家格)은 보대(譜代), 이반바( இடை番), 포석(抱席)의 세 가지로 나뉜다. 보대는 이에야스부터 4대 이에쓰나 시대까지 쇼군 가문에 여력(与力)·동심(同心)으로 섬긴 경험이 있는 자의 자손을 말한다. 포석(포입(かかえいれ)이라고도 함)은 그 이후에 새롭게 고케닌 신분으로 등용된 자를 가리키며, 이반바는 그 중간 등급이다.[9] 이중 보대에서 특히 유서 깊은 가문은 보대석(譜代席)이라 불리며, 에도 성 안에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보대와 이반바는 무역(無役, 막부의 공직에 임명되지 않은 상태)이어도 봉록을 지급받았고, 소령(所領)에게 가독(家督)을 상속시켜 신분과 봉록을 전할 수 있었다. 가독 상속이나 서임(敍任)에 있어서 고케닌은 원칙적으로 쇼군을 알현할 수 없었지만, 보대석만은 성 안에서 젊은이(若年寄) 또는 두목(頭) 등의 상사에게 알현하여 전달받았다. 보대석 미만의 고케닌은 성 안이 아닌 자신의 소속 기관에서 전달받았다.

포석은 일대(一代) 한정 봉공(奉公)으로, 은거나 사망으로 고케닌 신분을 잃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점차 무너져, 마치부교쇼(町奉行所)의 여력조두(與力組頭, 필두 여력)처럼 일대 포석이면서도 기승(騎乘)이 허용되고 230석 이상의 봉록을 받으며 소령에게 가독을 상속시켜 신분과 봉록을 전하는 것이 일상화된 직책도 있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는 부유한 상인(町人)이나 농민이 곤궁한 고케닌의 명목상 양자 신분을 금전으로 사들여 고케닌 신분을 획득하는 것이 널리 행해졌다. 매매되는 고케닌 신분은 고케닌주(御家人株)라고 불렸으며, 가격에 따라 정해진 계승할 수 있는 역할마다 시세가 생길 정도였다.[15] 보대의 고케닌주도 실제로 팔리고 있었다.[16]

고케닌주를 구입한 자나 그 자손이라도 영달하여 막부의 원국봉행(遠国奉行)이나 감정음미역(勘定吟味役)과 같은 중직에 오른 자도 있다.[14]

4. 3. 지교(知行)

에도 시대에, 고케닌(御家人)은 지행(知行)이 1만 석 미만인 도쿠가와 쇼군가(德川将軍家)의 직참 가신단(직신) 중에서, 특히 고메켄(御目見) 미만(쇼군이 직접 만나지 않는)의 가각(家格)에 위치 지워진 자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고케닌에 대해, 고메켄 이상의 가각의 직참을 하타모토(旗本)이라고 한다.

고케닌은 원칙적으로 토지는 주어지지 않고, 끊어진 쌀(切米), 부지쌀(扶持米) 등의 봉록을 받았다. 고케닌의 봉록은 최고 260석, 최저 4냥이었다.[9] 하타모토는 100석에서 1만 석 미만의 지행소를 받았지만, 고케닌은 원칙적으로 토지는 주어지지 않고, 끊어진 쌀(切米), 부지쌀(扶持米) 등의 봉록을 받았다.

하지만, 하타모토와 고케닌의 정의는 직참(直参) 중 알현(謁見)이 가능한지 여부였으므로, 가록(家禄)(봉록)의 고저는 가격(家格) 결정과 관계가 없었고, 하타모토 중 가장 소록(小禄)이었던 자는 50석 정도로 고케닌의 대부분보다 적었다. 200석(俵) 이상을 받는 고케닌도 있었지만, 400석을 넘는 고케닌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에는 지방 지행제가 무너지고 창미취로 이행하거나, 고케닌에서 하타모토로 승진한 경우가 생겨 지행지를 가진 고케닌은 거의 사라졌다.

고케닌의 대부분은 지행지를 갖지 않은 30석 이상, 80석 미만의 창미취로 구성되었으며, 지행지를 가진 자도 200석 정도의 소신(小身)이었다.

5. 참고 사항

참조

[1] 서적 Gokenin Iwanami Kōjien
[2] 서적 Mass Mass 1996
[3] 서적 Mass Mass 1996
[4] 서적 Deal Deal 2005
[5] 서적 Perez Perez 1998
[6] 서적 Hall Hall 1985
[7] 서적 Perez Perez 1998
[8] 서적 Shirai Shirai 1976
[9] 서적 Hatamoto Iwanami Kōjien
[10] 웹사이트 ja:御家人株 https://kotobank.jp/[...] Kotobank 2024-07-16
[11] 웹사이트 ja:武士(ぶし)/侍(さむらい) https://imidas.jp/ji[...] Shūeisha 2024-07-19
[12] 논문 건무정권의 고가인제 ‘폐지’ 思文閣出版 2008
[13] 서적 남조연구의 최전선 朝日文庫 2020
[14] 서적 Ogawa Ogawa 2003
[15] 논문 연구노트: 근세 중후기에 있어서의 무사 신분의 매매에 관하여: ‘후지오카야 일기’를 소재로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2008-03
[16] 서적 姜 姜 2008
[17] 간행물 완전보존판 에도의 생활과 직업 대도감 朝日新聞社 2019
[18] 서적 중세재고 講談社学術文庫 2000
[19] 서적 일본의 중세 財団法人放送大学教員振興会 1999
[20] 서적 일본인의 급여명세서 角川ソフィア文庫 2015
[21] 서적 음모의 일본 중세사 角川新書 2018
[22] 서적 일본인의 급여명세서
[23] 논문 가마쿠라 막부의 측근정치에 관한 고찰 2002
[24] 논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