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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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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7세기 후반에 태어나 8세기에 활동한 일본의 여성으로, 유력 가문인 오토모 씨 출신이다. 호즈미 친왕, 후지와라노 마로, 이복 오빠 오토모노 스쿠나마로 등과 결혼 또는 연인 관계를 맺었으며, 오토모노 타비토의 가문에서 다자이후 시절을 보냈다. 만년에 오토모 씨 가문의 수장 역할을 하며, 조카 오토모노 야카모치가 성년이 될 때까지 가문을 관리했다. 그녀는 만엽집에 84편의 작품이 수록된 뛰어난 여성 시인으로, 조카 야카모치에게 문학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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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
기본 정보
본명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 (大伴坂上郎女)
출생c. 695년
사망750년
인물 정보
성씨오토모 (大伴)
직업시인

2. 생애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695년경 유력한 오토모 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오토모노 야스마로와 이시카와 부인의 딸로, 오토모노 다비토, 오토모노 다누시, 오토모노 스쿠나마로의 이복 여동생이었다.[1] 당시 관례에 따라 그녀의 개인적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라쓰메'는 '어린 숙녀', '처녀', '딸'을 의미하는 고어이다.[2]

십 대 초반에 호즈미 친왕과 결혼했으나, 715년에 그가 사망한 후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마로와 결혼했다.[3] 두 번째 남편이 사망하자, 이복 오빠인 오토모노 스쿠나마로와 결혼하여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오이라쓰메와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오토이라쓰메 두 딸을 낳았다.[4]

728년, 맏오빠인 오토모노 타비토가 규슈 지방 정부인 다자이후의 장관이자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과부가 된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타비토의 가문에 합류하였다.[4] 731년 오빠 타비토가 사망한 후[5], 사카노우에는 오토모 가문의 사실상 수장이 되었고 조카 오토모노 야카모치가 성년이 될 때까지 가문의 일을 관리했다.

덴표 쇼보 2년(750년), 사위가 된 야카모치가 고쿠시(국수)로서 엣추국에 부임할 때, 아내로서 동행했던 딸 오이라쓰메에게 보낸 노래 "오이라쓰메에게 주는 노래"(만요슈 19권-4220・4221)가 낭녀의 마지막 노래이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오토모노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695년경 유력한 가문인 오토모 씨에서 태어났다. 오토모노 야스마로와 이시카와 부인의 딸로, 오토모노 다비토, 오토모노 다누시, 오토모노 스쿠나마로의 이복 여동생이었다.[1] 당시 관례에 따라 그녀의 개인적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라쓰메'는 '어린 숙녀', '처녀', '딸'을 의미하는 고어이다.[2]

십 대 초반에 호즈미 친왕과 결혼했으나, 715년에 그가 일찍 사망한 후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마로와 결혼했다.[3] 두 번째 남편이 사망한 후, 이복 오빠인 오토모노 스쿠나마로와 결혼하여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오이라쓰메와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오토이라쓰메 두 딸을 낳았다.[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오토모노 야스마로
어머니이시카와노 이라쓰메
배우자자녀
호즈미 친왕(첫 번째 남편)
후지와라노 마로(두 번째 남편)
오토모노 스쿠나마로(세 번째 남편, 이복 오빠)


2. 2. 결혼과 사별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십 대 초반에 호즈미 친왕과 결혼했다.[2] 715년 호즈미 친왕이 사망한 후,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마로와 결혼했다.[2] 737년 천연두로 마로가 사망한 뒤, 이복 오빠인 오토모노 스쿠나마로와 결혼하여[2]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오이라쓰메와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오토이라쓰메 두 딸을 낳았으나[3], 얼마 지나지 않아 사별한 것으로 보인다.

2. 3. 다자이후 시절

728년(진키 5년), 맏오빠인 오토모노 타비토가 규슈 지방 정부인 다자이후의 장관이자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과부가 된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타비토의 가문에 합류하였다.[4] 도널드 킨과 쓰치하시 유타카는 타비토가 오토모노 야카모치의 교육을 위해 불렀다고 추측한다.[5] 그녀를 부른 다른 이유로는 타비토의 첩 또는 배우자가 되기 위해서,[6] 또는 오토모 씨를 위한 종교 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최근 사망한 타비토의 아내를 대신하기 위해서 등이 제시되었다.[7]

730년 다자이후에 머물던 시기에 지은 노래는 상문가 2수(만요슈 권4-563・564)밖에 남아있지 않다. 같은 해 11월,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먼저 야마토로 떠났고,[8] 12월에는 타비토도 귀경하였으나, 7개월 후인 731년 7월 25일 사망하였다.(『속일본기』).

2. 4. 오토모 가문의 수장

731년 오빠 오토모노 타비토가 사망한 후[5], 사카노우에는 오토모 가문의 사실상 수장이 되었고 조카 오토모노 야카모치가 성년이 될 때까지 가문의 일을 관리했다. 야카모치는 나중에 사카노우에의 맏딸 오이라쓰메와 결혼했다.

타비토가 죽은 후에는 오토모 씨의 본가인 사호 저택에서 오토모 씨의 웃어른으로서[6] 오토모 씨 일족을 지원하고, 가정을 돌보며, 종묘 제사와 친척 연회를 주최했다. 황족이 아닌데도 이례적으로 사호 저택(만요슈 권4-721)이나 카스가 마을(만요슈 권4-725, 726)의 개인 땅에서 읊은 헌상가를 성무 천황에게 바쳤는데, 이는 세력이 커지고 있던 신흥 귀족 후지와라 씨에 대항하여 씨족의 장자인 가모치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기존 귀족인 오토모 일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평가받는다.[6]

2. 5. 만년

레이키(영귀) 원년(715년)에 18, 9세에 호즈미 황자와 사별하였다.[2] 그 후, 후지와라노 마로의 연인이 되었으나[2], 덴표 9년(737년) 7월 13일에 마로가 당시 유행하던 천연두로 사망한다. 요로(양로) 8년(724년)경, 이복 오빠인 오토모노 스쿠나마로의 아내가 되어, 사카노우에노 오이메와 사카노우에노 니이메를 낳았으나[3], 이후 일찍 사별한 것으로 보인다.

오토모노 타비토가 다자이후에 소치로 부임하였으나, 진키(신구) 5년경 아내를 잃자, 낭녀는 다자이노 소치의 집에서 동거하며 오토모노 야카모치, 오토모노 후미모치를 양육하였다. 덴표 2년(730년) 6월에 타비토가 다리의 종창으로 위중해져 증인을 불러 유언을 하지만, 회복한다.[4] 같은 해 11월 낭녀는 먼저 야마토로 떠난다. 같은 해 12월에 타비토가 귀경하지만,[5] 7개월 후인 덴표 3년 7월 25일 타비토가 사망한다(『속일본기』).

타비토 사후, 오토모 씨의 본가인 사호 저택에서 오토모 씨의 토지(부인의 장로)로서 일족을 지원하고, 가정을 돌보며, 종묘의 제사, 친척의 연회를 주최했다. 황족이 아닌데도 사호 저택(만요슈 권4-721)이나 카스가의 마을(동 725・726)의 개인 땅에서 읊은 헌상가를 성무 천황에게 바친 것은, 세력이 커지는 신흥 귀족 후지와라 씨에 대항하여, 씨장자인 가모치가 아직 어렸기에 기존 귀족인 오토모 일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6]

덴표 쇼보 2년(750년), 사위가 된 가모치가 고쿠시(국수)로서 엣추국에 부임할 때, 아내로서 동행했던 딸 오이메에게 보낸 노래 "오이메에게 주는 노래"(만요슈 19권-4220・4221)가 낭녀의 마지막 노래이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오토모노 야스마로(大伴安麻呂)714년 6월 21일 사망
어머니이시카와노 이라쓰메(石川 内命婦)
첫 번째 남편호즈미 친왕(穂積親王)덴무 천황(天武天皇)의 아들, 715년 8월 30일 사망
첫째 아들가미도 친왕(上道王)727년 4월 28일 사망
둘째 아들사카이베 친왕(境部王)
두 번째 남편후지와라노 마로(藤原 麻呂)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의 아들, 695년 – 737년 8월 17일
세 번째 남편오토모노 스쿠나마로(大伴宿奈麻呂)이라쓰메의 이복형제
첫째 딸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오이라쓰메(大伴坂上大嬢)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 家持)의 아내
둘째 딸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오토이라쓰메(大伴坂上二嬢)오토모노 스루가마로(大伴駿河麻呂)의 아내


4. 문학적 업적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만엽집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어머니 이시카와노 이라쓰메의 궁정 노래에서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시켰다.[13]

쇼무 천황에게 바친 노래는 당시 부인(夫人)의 신분으로는 매우 드문 일이었는데, 나카니시 스스무는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가 이전부터 궁정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덴표 11년(739년) 전후,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궁정에서 묘부로서 쇼무 천황을 섬겼을 것으로 추정된다.[10]

와타세 마사타다는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가 진구 황후오진 천황 등의 황실 조상을 모시는 무녀인 이즈히메(嚴媛)로서 조정의 공직으로 파견되었다고 주장한다.[9]

4. 1. 만엽집의 주요 시인

만엽집의 가장 뛰어난 여성 시인으로, 성별을 불문하고 전체에서 세 번째로 많은 작품(총 84편)이 수록되어 있다.[1] 그녀의 조카인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만엽집''의 주요 편집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2] 폴라 도는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가 야카모치의 멘토로서 그의 초기 시와 문학적 감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야카모치가 그녀의 작품을 많이 포함한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고 시사한다.[3]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의 현존하는 시 84편은 단가 77편, 장가 6편, седака 1편이다.[4] 그녀의 시 중 몇몇은 그녀의 집을 위해 종교 의식을 수행하는 동안 쓰여진 것으로 명문에 언급된다.[5] 가장 긴 시는 ''반카''(장가 형식의 비가)이며,[6][7] 사카노우에가 젊었을 때부터 오토모 가문의 손님이었던 한국인 여승 리간의 죽음을 애도하며 쓰여졌다.[8]

주목할 만한 다른 시로는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단가''인 ''송문'' 모음이 있는데,[9] 이 시들은 그녀가 남편, 연인, 친구들과 교류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10] 그녀의 시 중 몇 편은 딸들에게 보내거나 딸들에 대해 쓴 것으로,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감정을 담고 있다. 더 긴 작품 중 하나는 오이라쓰메에게 보내는 것으로, 딸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표현하고 있다.[11]

4. 2. 작품의 특징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만엽집에서 가장 뛰어난 여성 시인 중 한 명으로, 성별에 관계없이 전체 시인 중 세 번째로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총 8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1] 단가 77편, 장가 6편, 세다카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4] 그녀의 조카인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만엽집''의 주요 편집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2] 폴라 도는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가 야카모치의 멘토로서 그의 초기 시와 문학적 감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야카모치가 그녀의 작품을 많이 포함한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3]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의 시 중 몇몇은 그녀의 집에서 종교 의식을 행하는 동안 쓰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5] 그녀의 가장 긴 시는 ''반카''(장가 형식의 비가)로,[6][7] 사카노우에가 젊었을 때부터 오토모 가문의 손님이었던 한국인 여승 리간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것이다.[8]

주목할 만한 다른 시로는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단가''인 ''송문'' 모음이 있는데,[9] 이 시들은 그녀가 남편, 연인, 친구들과 교류한 내용을 담고 있다.[10] 또한, 그녀의 시 중 몇 편은 딸들에게 보내거나 딸들에 대해 쓴 것으로,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오이라쓰메에게 보낸 긴 시는 딸을 향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11]

4. 3. 작품 목록 (일부)

만엽집에는 총 84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77편의 단가, 6편의 장가, 1편의 세다카이다.[3] 이 중 몇몇은 종교 의식을 수행하는 동안 쓰여졌다.[6] 가장 긴 시는 반카(장가 형식의 비가)이며, 한국인 여승 리간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것이다.[7][8]

주목할 만한 다른 시로는 "다른 사람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단가인 ''송문'' 모음이 있는데,[9] 남편, 연인, 친구들과 교류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10] 딸들에게 보내거나 딸들에 대해 쓴 시도 몇 편 있는데,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감정을 담고 있다. 그중 하나는 딸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표현하고 있다.[11]

  • 지금도 혹시 큰 성의 산에 뻐꾸기가 울려 퍼지겠지. 나는 없지만 - 도읍으로 돌아간 후 다자이후를 그리워하며 읊은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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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연구 및 평가


  •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가 친족 파견지에 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에 대해 와타세 마사타다는 사망한 오토모노 이라쓰메가 중앙 관료인 교칸(京官) 3위의 사망에 준하여 여행자에 의해 조정에 사망 보고되었고, 회신으로 기사(忌使)가 파견되었다고 보았다. 게다가 현직 관료의 사망에 준하는 취급으로 야마토에서 하사품이 역사를 통해 운반되어 헌상되었다. 와타세 마사타다는 이것이 통상의 관부(官婦) 사망의 취급이 아니라, 오토모노 이라쓰메는 여행자가 다자이소(大宰帥)로서 진구 황후오진 천황 등의 황조령을 제사할 때, 그것을 돕는 이즈히메(嚴媛)(오토모 씨의 상급 여성이 계승하는 무녀)로서 조정의 공직으로 파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그 후임으로서 이즈히메로 선임되어 내려왔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9]
  • 나카니시 스스무는 쇼무 천황에게 바친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의 헌가는, 재래의 부인(夫人)으로부터의 헌가이며, 천황에 대해, 이것은 좀처럼 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구체적인 옛 공직 관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카니시 스스무는 덴표 11년 전후에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궁정에 출사하여, 나라 시대에는 궁인(宮人)의 범위인 묘부로서 쇼무 천황을 섬겼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10]。 이에 대해, 묘부라면 봉가(奉歌)・진가(秦歌)이며,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3수 모두 헌가이며, 그래서 답가가 없다는 점, 그리고 공직이었다면 묘부 등을 만요슈에 기록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11]。 카스가노사토(春日の里) 헌가는, 어머니・이시카와노 묘부(石川命婦)가 사망하여, 그 중매 역할을 하던 궁정과의 연결이 끊어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궁중과 오토모 일족을 잇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다시 천황에게 헌가했다고 추정된다[12]
  •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의 문학적 재능은 어머니・이시카와노 이라쓰메(石川郎女)의 궁정 노래로부터 이어받아 확대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일족에서 수행했던 역할도 생활 환경도,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가 이시카와노 이라쓰메로부터 이어받은 것은 크다[13]

참조

[1] 서적 『万葉集』巻4、667左注、母名記載
[2] 서적 『万葉集』巻4、525から528歌左注「保大納言大伴安麻呂の娘であり、初めに穂積皇子に嫁し、たぐうことなき寵愛を受けた。そして皇子の薨(こう)ぜられた後、藤原麻呂、郎女を娉(つまどう)(妻にした)。坂上(さかのうへ)の里に家居(いへい)す。よりて族氏号(なづ)けて坂上郎女といふ。」
[3] 서적 『万葉集』巻4、759左注「右は、田村大嬢(おほをとめ)と坂上大嬢と、並びにこれ右大弁宿奈麿卿の娘なり。卿は田村の里に居(す)み、号(な)を田村大嬢といへり。ただ、妹の坂上大嬢は、母、坂上の里に居む。よりて坂上大嬢といへり。時に姉妹諮問(とぶら)ふに、歌を以ちて贈答せり。」
[4] 서적 万葉集4巻566・567左注
[5] 서적 『万葉集』巻3、446-450題詞「天平二年庚午冬十二月大宰帥大伴卿向京上道之時作歌五首」
[6] 서적 萬葉集の文学論的研究 桜楓社
[7] 간행물 万葉集の相聞歌と声の歌 https://doi.org/10.1[...] 京田辺 2007-06
[8] 서적 大伴坂上郎女 - 天平の女歌 おうふう
[9] 서적 大伴阪上郎女(序説)大宰帥の家へ 笠間書院
[10] 서적 天平の女たち 講談社
[11] 서적 坂上郎女と家持:大伴家の人々 翰林書房
[12] 서적 坂上郎女と家持:大伴家の人々 翰林書房
[13] 서적 坂上郎女と家持:大伴家の人々 翰林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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