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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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룡묘는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으로, 조선 선조 38년(1605) 평안도 영유현에 건립 기록이 있으며, 현재 서울에 있는 와룡묘는 고종의 후궁 엄상궁이 세웠다는 설과 1862년 제갈공명을 추모하는 인사들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192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34년에 재건되었으며, 제갈량상과 관우상, 단군상, 산신, 칠성, 독성을 모시고, 음력 6월 24일에 제사를 지내는 등 한국 토속 신앙과 결합된 무속 신앙의 형태를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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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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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와룡묘 |
한자 표기 | 臥龍廟 |
유형 | 민속문화재 |
지정 번호 | 5 |
지정일 | 1974년 1월 15일 |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산5-6번지 |
시대 | 조선시대 |
참고 | 무후사 |
수량 | 1동 |
문화재청 | 24,00050000,11 |
2. 역사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선조 38년(1605) 평안도 영유현에 공식으로 와룡묘를 짓게 하였고, 그 후부터 왕들이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거나 제문(祭文)을 지어 보낸 예도 있으며, 사액(賜額)을 내린 예도 전해지지만, 이 와룡묘와의 연관성은 확실치 않다.
이후 와룡묘는 기와지붕을 얹은 건물로, 1924년 화재로 훼손되었다가 1934년 재건되었다.
2. 1. 서울 와룡묘의 건립과 변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선조 38년(1605) 평안도 영유현에 공식으로 와룡묘를 짓게 하였다. 그 후 왕들이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거나 제문을 지어 보냈고, 사액(賜額)을 내린 기록도 있지만, 이 와룡묘와의 연관성은 확실하지 않다.고종의 후궁이었던 엄상궁이 처음 세웠다고 전해지지만, 1862년에 제갈공명을 추모하는 인사들이 묘사 뒷면 암벽에 조각된 제갈공명의 영정을 받들어오다가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다. 192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34년에 중건되었고, 1976년에 보수되었다.
3. 구조 및 특징
와룡묘는 조선시대 후기 엄귀비가 처음 세웠다고 전해지나 확실치 않다. 1924년 화재로 소실된 뒤 1934년에 중건되었으며, 1976년에 보수되었다.
경내에는 와룡묘 외에도 단군성전, 제석전, 약사전, 삼성각, 문신각, 요사 등 다양한 건물들이 함께 있어, 와룡묘가 단순한 중국 도교 사당이 아니라, 한국의 토속신앙과 결합된 무속신앙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3. 1. 건물 배치
와룡묘는 기와지붕을 얹은 건물로, 내부에는 2m 크기의 제갈공명 석고상과 2.5m 높이의 관우 석고상이 있으며, 대북, 소북, 종 등 의식용 악기들도 갖추고 있다. 1924년 화재로 훼손되었다가 1934년 재건되었다. 경내에는 단군묘, 제석전(帝釋殿), 약사전(藥師殿), 삼성각(三星閣), 요사(寮舍), 문신각(文臣閣) 등이 있다.묘사는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건물로, 왼쪽 처마에 정4각형 지붕의 종각이 이어져 있다. 묘사 중앙에는 석고로 된 와룡선생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머리에 와룡관을 쓰고 녹색 도포를 입었으며, 오른손은 우선을 들고 가슴 쪽에 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놓은 좌상이다. 오른쪽의 관성제군상 역시 석고로 되어 있으며, 황색 도포를 입고 긴 수염을 달았으며, 오른손은 책을 펼치고 왼손은 책 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다리 사이에는 긴 칼을 세워 왼쪽 무릎에 기대어 놓았다.
단군성전의 단군상은 석고상이며 복식은 상 위에 물감으로 칠해져 있고, 양손은 소매 안에 넣고 앉아 있으며, 도포를 입고 긴 수염을 달았다. 삼성각에는 산신이 중앙에, 오른쪽에는 칠성, 왼쪽에는 독성이 각각 모셔져 있다. 산신은 석고를 벽면에 붙여 양각 형식으로 만들었으며, 머리에는 복건 같은 것을 쓰고 수염을 길게 늘였으며, 겉에는 붉은 도포를 입고 아래에는 녹색 옷을 입고 왼쪽 무릎을 세웠으며, 오른손에는 우선을 들고 있다. 좌정한 산신 뒤에는 호랑이가 있다. 칠성은 부처 형상이고, 독성은 민머리에 붉은 도포를 입고 오른손에 단장을 잡고 있으며 왼손에는 염주를 쥐고 있다.
와룡묘에는 일산, 청룡도 2자루, 삼지창 한 자루와 향로, 촛대, 제기 등의 도구가 갖추어져 있다.
3. 2. 제갈량 상과 기타 신상
건물 내부에는 2m 크기의 제갈공명 석고상과 2.5m 높이의 관우 석고상이 있다. 그 밖에 대북·소북·종 등 의식용 악기들도 갖추고 있다. 묘사 중앙에는 석고로 된 와룡선생상(제갈공명)이 있는데, 머리에는 와룡관을 쓰고 녹색 도포를 입었으며, 오른손은 우선(羽扇)을 들고 가슴 쪽에 대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앉은 자세이다. 오른쪽 관성제군상(관우)도 석고로 되어 있는데, 황색 도포를 입고 긴 수염을 달았으며, 오른손은 책을 펼치고 왼손은 책 쪽으로 향해 있으며, 다리 사이에는 긴 칼을 세워 왼쪽 무릎에 기대어 놓고 있다.3. 3. 제례 의식
음력 6월 24일에 와룡선생과 관성제군 두 분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평상시에도 신도들이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옛날에는 와룡선생 탄신일과 기일, 그리고 명절에 제사를 지냈으나 근래에 간소화된 것으로 보인다. 제의(祭儀)는 시봉인이 독축(讀祝)과 배례(拜禮) 순으로 진행한다.제비(祭費)는 시봉인인 관리자가 준비하며 제물로는 떡, 제육(祭肉), 채소, 과실 등이 있다. 제주(祭酒)로는 소주를 사용하며, 현재 민간신앙화되어 유지해 오고 있다.
4. 한국 민간 신앙과의 결합
경내에는 단군묘, 제석전, 약사전, 삼성각, 요사, 문신각 등이 함께 있어, 와룡묘가 중국 도교계 신령을 모신 단순한 사당이 아니라, 한국의 토속신앙과 결합된 무속신앙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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