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립 아일랜드 경찰대 보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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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 보조사단(ADRIC)은 아일랜드 독립 전쟁 중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RIC)를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이다. 1920년 7월에 모집이 시작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전직 장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약 1,900명 규모로 성장했다. 이들은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활동이 활발한 지역에서 활동하며, 기동 타격 및 습격 작전을 수행했다. 보조사단은 정보 수집에서 효과를 보았지만, 규율 문제와 잔학 행위로 인해 논란이 되었고, 1922년 RIC와 함께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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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경찰순경은 징병제로 충원된 준군사 부대로, 대간첩 작전 수행을 위해 창설되어 치안 보조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나, 민주화 운동 탄압 논란을 겪으며 병역 의무자 감소와 정책에 따라 해체되었고, 의무경찰과 경찰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 보조경찰부대 -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 특수예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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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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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간 | 1920년 7월 – 1922년 4월 |
| 소속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
| 유형 | 준군사 조직 |
| 역할 | 반(反)폭동 |
| 규모 | 2,264명 |
| 지휘 체계 |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 |
| 참전 | 아일랜드 독립 전쟁 킬마이클 매복 드럼콘드라 매복 클론핀 매복 쿨라보키그 매복 크로스배리 매복 세관 화재 사건 라스쿨 매복 |
| 주요 지휘관 | 프랭크 퍼시 크로지어 |
2. 창설 배경 및 목적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격화되면서 기존의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RIC)만으로는 치안 유지 및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활동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내 경찰력을 신속하게 보강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19년 9월, 아일랜드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프레더릭 쇼 경은 특별 지원병 부대를 모집하여 경찰력을 강화할 것을 처음 제안했다. 이듬해인 1920년 5월 11일 내각 회의에서는 당시 육군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RIC의 산하 조직으로 "특별 응급 헌병대" 창설을 공식 제안했다. 이 제안은 아일랜드 주둔 영국군 사령관 네빌 매크레디 장군이 위원장을 맡은 위원회로 넘겨졌으나, 초기에는 채택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달 뒤인 1920년 7월, 더블린 성 행정부의 경찰 고문이었던 H. H. 튜더 소장이 처칠의 계획을 되살려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보조사단(Auxiliary Division, 약칭 ADRIC) 창설이 본격화되었다. 튜더는 7월 6일자 메모를 통해, 정규 RIC 신병을 모집하고 훈련하는 방식으로는 당면한 위기 상황에 신속히 대처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며 임시 부대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구상에 따라 창설된 보조사단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전직 장교들을 중심으로 모집하여 IRA에 대한 공세적인 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았다.
보조사단 대원들은 '임시 사관 후보생'이라는 직함으로 1년간 임시 고용되었으며, 당시 경찰관 급여의 두 배에 달하는 주급 7GBP과 하사관 수당을 지급받았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던 전직 장교들에게 상당한 유인책이 되었다. (실제로 당시 런던에서는 주급 2.5GBP를 받는 커피 가판대 관리직 모집에 5천 명의 전직 장교가 지원할 정도였다.)
이처럼 보조사단은 아일랜드 내 영국 통치를 유지하고 IRA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한 목적으로, 전직 군인들을 활용하여 단기간에 전투력을 확보하려는 의도 하에 창설되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보조사단 대원들의 용맹함을 인정하면서도, 이들 중 일부가 범죄 행위에 연루되거나 민간인을 상대로 강압적인 행동을 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앵글로-아일랜드 조약을 지지했던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전 고위 간부 피아라스 비슬레이는 보조 부대에 전직 장교뿐 아니라 "범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가 더블린에서 강탈 행위를 저질렀다고 지적하기도 했다.[2] 보조사단의 구체적인 모집 과정, 조직 구성, 활동 및 평가는 이어지는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2. 1. 모집 및 구성
1919년 9월, 아일랜드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프레더릭 쇼 경은 아일랜드 경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특별 지원병 부대를 모집할 것을 제안했다. 1920년 5월 11일 내각 회의에서는 육군 장관 윈스턴 처칠이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RIC)의 지부가 될 특별 응급 헌병대" 창설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아일랜드 주둔 영국군 사령관 네빌 매크레디 장군이 위원장을 맡은 위원회에 회부되었으나 거부되었다. 그러나 두 달 뒤인 7월, 더블린 성 행정부의 경찰 고문인 H. H. 튜더 소장이 이 계획을 다시 추진했다. 튜더는 1920년 7월 6일 메모에서 일반 신병으로 RIC를 보강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을 들어 새로운 "보조 부대" 창설을 정당화했다. 이 부대는 엄격히 임시 조직으로 계획되었으며, 구성원은 1년 동안 복무하고 주급 7GBP(당시 경찰관 급여의 두 배)와 하사관 수당을 받으며 "임시 사관 후보생"으로 불릴 예정이었다. 당시 높은 실업률 속에서, 런던에서는 주당 2.5GBP를 받고 커피 가판대를 관리할 전직 장교 모집 광고에 5천 명이 지원할 정도였다.
보조사단(ADRIC)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전직 장교들을 중심으로 대영 제국 전역에서 모집되었다. 특히 영국 육군(왕립 비행 군단 포함) 출신이 많았다. 대부분 영국 출신이었지만, 아일랜드 출신과 대영 제국의 다른 지역 출신도 일부 포함되었다. 많은 대원들이 전쟁 중 훈장을 받았으며, 제임스 리치, 제임스 존슨, 조지 오니언스는 최고 무공 훈장인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다. 일부 대원들은 장교에게 수여되는 무공 십자 훈장 외에(또는 대신) 일반 병사에게 수여되는 무공 훈장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이들 중 상당수가 전쟁 중 사병에서 장교로 임관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민간 생활에서 이전의 지위와 급여를 잃는 것에 적응하기 어려워했으며, 일부 역사가들은 보조 부대가 이러한 "임시 신사(temporary gentlemen)"들을 대거 받아들였다고 분석한다.
앵글로-아일랜드 조약을 지지했던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전 고위 간부 피아라스 비슬레이는 보조 부대의 용맹함을 인정하면서도, 이 부대가 전직 장교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범죄자"들도 포함하고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더블린 거리와 집에서 사람들을 강탈했다고 지적했다(피해자 중에는 다수의 유니오니스트도 포함됨).[2]
모집은 1920년 7월에 시작되어 1921년 11월에는 부대 규모가 1,900명에 달했다. 보조 부대는 명목상 RIC 소속이었지만, 실제로는 시골 지역에서 거의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약 100명 규모의 중대(총 15개 중대)로 나뉘어 중무장하고 기동성을 갖추었으며, IRA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아일랜드 남부 및 서부의 10개 카운티에서 주로 활동했다. 이들은 RIC 제복이나 구 영국 육군 제복에 경찰 배지를 부착하고, 독특한 탬 오 섀터 모자를 착용했다. 부대는 프랭크 퍼시 크로지어 준장이 지휘했다.
3. 조직 및 활동
정예 전직 장교들로 구성된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 보조사단은 특히 정보 수집이라는 핵심 분야에서 블랙 앤 탄스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부대로 평가받았다. 이들은 기동 타격 및 습격 부대로 운용되었으며, 아일랜드 공화군(IRA)에 대항하여 여러 작전을 수행했다.
보조사단의 활동은 IRA에게 상당한 위협으로 작용하여, 일부 IRA 대원들은 이들을 '초인적인 전사이며 거의 무적'처럼 여기기도 했다. 이는 IRA 지휘부가 부대 사기를 우려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보조사단 역시 아일랜드 독립 전쟁 중 IRA의 매복 공격 등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대표적인 사례로 킬마이클 매복과 클론핀 매복 등이 있다.
성공적인 작전을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필수적이었으나, 때때로 정보 부족이나 오류로 인해 작전이 실패하거나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일례로 더블린 성의 관리인을 실수로 체포하거나, 리머릭 주 캐슬코넬의 섀넌 호텔 습격 시 휴무 중이던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RIC) 소속 경찰관들과 서로를 적으로 오인하여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RIC 경찰관, 보조사단 생도, 민간인이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4] 또한 보조사단 지휘관이 IRA에 의해 암살되는 일도 있었다.[3]
3. 1. 주요 작전
정예 전직 장교들로 구성된 보조사단은 특히 정보 수집이라는 핵심 분야에서 블랙 앤 탄스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부대임이 입증되었다. 이들은 기동 타격 및 습격 부대로 활동하면서 아일랜드 공화군(IRA)에 대항하여 몇몇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1920년 11월 20일, 피의 일요일 전날 밤, 보조사단은 IRA 더블린 여단의 사령관 딕 맥키와 부사령관 피더 클랜시를 체포하여 더블린 성에서 살해했다. 같은 날 밤, 또 다른 습격에서는 슬리고 IRA 사령관인 윌리엄 필킹턴을 체포했다. 한 달 후인 12월에는 킬케니 주에서 얼니 오말리를 기습적으로 체포했다. 당시 오말리는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보조사단 생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고 회고하며 "죽음만큼이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클레어 IRA 사령관 마이클 브레넌 역시 그의 회고록에서 보조사단이 3일 밤 연속으로 자신을 거의 체포할 뻔했던 경험을 묘사했다.IRA 지휘관들은 많은 의용군 대원들이 보조사단을 '초인적인 전사이며 거의 무적'처럼 여기게 되면서 부대 사기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IRA 역시 보조사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는 아일랜드 독립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들 중 일부가 되었다. 예를 들어, 1920년 11월 28일 킬마이클 매복에서는 보조사단 소대 하나가 톰 배리가 이끄는 제3 코크 여단의 매복 공격을 받아 전멸했다. 약 두 달 후인 1921년 2월 2일에는 클론핀 매복에서 또 다른 보조사단 소대가 숀 맥케인과 롱포드 IRA에게 매복 공격을 당했다. 1921년 3월 19일, 크로스배리 매복에서는 IRA 제3 코크 여단이 영국군과 보조사단의 대규모 포위 및 함정 시도를 격퇴했다. 1921년 4월 15일에는 보조사단 H중대 지휘관 로이 매키논 대위가 케리 주에서 IRA에 의해 암살되었다.[3]
보조사단의 작전 성공은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에 의존했지만, 습격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거나 때로는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한 사례로, 보조사단은 실수로 더블린 성의 관리인이자 법률 고문인 W. E. 와일리를 체포했다. 또 다른 악명 높은 사건은 1921년 4월 19일 리머릭 주 캐슬코넬의 섀넌 호텔 습격이다. 수상한 인물들이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출동했으나, 그 "수상한 인물"들은 휴무 중이던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RIC) 소속 경찰관 3명이었다. 양측은 서로를 반란군으로 오인하고 총격을 가했고, 이 총격전으로 RIC 경찰관 1명, 보조사단 생도 1명[4], 그리고 민간인 1명이 사망했다.
4. 논란 및 만행
보조사단은 급하게 모집되고 훈련이 부족하여 규율 문제가 심각했으며, 잦은 음주와 폭력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이는 블랙 앤 탠스(Black and Tans)보다 심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왕립 아일랜드 경찰(RIC) 정규 대원들이나 영국 육군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맥레디 장군 역시 일부 부대의 규율 부족이 전체 사단의 신뢰를 떨어뜨렸다고 지적했다.
4. 1. 더블린 유혈 사태 (1920년)
1920년 피의 일요일 저녁,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고위 간부인 딕 맥키와 피더 클랜시가 더블린 성에서 보조 부대원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들은 체포된 상태였으며, 탈출을 시도하다 사살되었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으나 이는 널리 의심받고 있다. 이는 IRA가 당일 오전에 영국 정보 요원들을 암살한 것에 대한 보복 성격으로 여겨진다.보조 부대의 폭력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1921년 2월 9일, 제임스 머피와 패트릭 케네디는 더블린에서 보조 부대원들에게 체포되었다. 두 시간 후, 더블린 수도 경찰 소속 경찰관들은 두 사람이 드럼콘드라 길가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케네디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머피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2월 11일 사망했다.[6] 머피는 죽기 직전 자신과 케네디를 쏜 것이 보조 부대원들이라고 증언했다.
이 사건으로 군사 조사 위원회가 열렸고, 보조사단 F 중대 지휘관인 W. L. 킹 대위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킹 대위는 192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열린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머피의 임종 진술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으며, F 중대 소속 다른 장교 두 명이 킹 대위의 알리바이를 위증했기 때문이었다.
4. 2. 규율 문제와 내부 갈등

사단 소속 임시 사관생도 중 다수는 반란 진압 과정에서의 좌절감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급하게 모집되고 훈련이 부족했으며 역할이 불분명했던 이들은 곧 음주, 규율 위반, 폭력 행위로 악명을 얻었고, 이러한 행위는 블랙 앤 탠스(Black and Tans)보다 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은 왕립 아일랜드 경찰(Royal Irish Constabulary, RIC) 정규 대원들에게 "거친 사람들"로 여겨지며 미움을 받았다. 또한 영국 육군에게도 인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2대대 캐머런 하이랜더스 부관으로 복무했던 한 영국 장교는 회고록에서 보조 부대원들이 "우리 연대 기준으로는 완전히 규율이 잡혀 있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맥레디 장군은 회고록에서 "지휘관이 유능하고 부하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전직 정규 장교가 있는 부대는 유용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약하거나 무능한 지휘관 아래 있던 다른 특정 부대의 행위는 전체 부대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렸다"고 평가했다.
정규 경찰과 마찬가지로 보조 부대원들은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공격 이후 보복 행위를 자행했다. 예를 들어, 1920년 피의 일요일 저녁, IRA 간부인 딕 맥키와 피더 클랜시는 매우 의심스러운 상황 속에서 보조 부대원들에게 살해되었다. 두 사람이 탈출을 시도했다는 공식 발표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조 사단과 관련된 가장 악명 높은 보복 사건은 1920년 12월 11일에 발생한 코크 소각이다. 그날 저녁 7시 30분경, 새로 창설된 K 중대 소속 보조 부대원들이 딜런스 크로스에서 매복 공격을 받았다. 트럭에 수류탄이 투척되어 10명의 보조 부대원이 부상을 입고 임시 사관생도 스펜서 채프먼이 사망했다.[5] 그날 밤, 경찰과 보조 부대원들은 코크 시의 상업 중심지에 불을 지르고 소방대의 진입을 막으며 7명을 사살하는 방식으로 보복했다(코크 소각 참조).
IRA 대원 코르넬리우스 델라니와 제레미아 델라니는 더블린 힐 자택에서 잠자던 중 살해당했다(코르넬리우스는 12월 18일까지 생존했다). 다섯 명의 민간인이 거리에서 사살되었으며, 피해액은 2000만달러에 달했다. 코크 소방대는 화재 진압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했다. 법과 질서는 완전히 붕괴된 것처럼 보였다. 영국 정부는 처음에 방화의 책임이 시민들에게 있다고 주장했으나, 스트릭랜드 보고서로 알려진 군사 조사 위원회는 나중에 화재가 보조 부대원들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밝혀냈다. 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정부에 의해 은폐되었고, K 중대는 해산되었다. 일부 보조 부대원들은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탄 코르크 조각을 모자에 달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며칠 후, 던먼웨이 근처에서 보조 부대원 버논 하트가 길에서 만난 젊은 남성과 70세 사제를 살해했다. 세 번째 민간인인 지역 치안 판사는 다른 보조 부대원들에게 붙잡히기 직전 들판을 가로질러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하트는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그가 사망한 채프먼의 "특별한 친구"였으며, 12월 11일 이후 과음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국 내각은 이 사건과 프랜시스 시히-스케핑턴 살해 사건의 유사성을 우려하여 하트가 최소 두 명의 의료 전문가에게 검사를 받도록 지시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의료 증인들은 하트가 살인 당시 정신 이상 상태였다고 증언했고, 군사 재판소는 그가 "기소된 범죄에 대해 유죄이지만, 범행 당시 정신 이상 상태였다"고 판결했다. 해머 그린우드는 하원에서 하트가 국왕 폐하의 뜻에 따라 구금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그는 브로드무어 형사 정신병원에 잠시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하트가 정신 병원에서 복역하는 동안 다른 보조 부대원들은 살인 혐의를 피했다. 1921년 2월 9일, 제임스 머피와 패트릭 케네디는 더블린에서 보조 부대원들에게 체포되었다. 두 시간 후, 더블린 수도 경찰 소속 순경들은 두 사람이 드럼콘드라에서 총에 맞은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케네디는 현장에서 사망했고, 머피는 중태였다.[6] 머피는 2월 11일 더블린의 마터 병원에서 사망했지만, 죽기 전에 자신과 케네디가 보조 부대원들에게 총격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군사 조사 위원회가 열렸고, ADRIC F 중대 지휘관 W. L. 킹 대위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킹은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군사 재판을 받았으나, 머피의 임종 진술이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고 F 중대 소속 장교 두 명이 킹 대위의 알리바이를 위증하면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불과 2주 후 클론멀 매복 사건에서는 코크 카운티의 한 보조 부대 분대가 항복한 IRA 대원 7명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당국은 종종 보복 행위를 묵인했지만, "민간인", 특히 충성파이거나 정치적으로 관련 없는 사람들에 대한 범죄에는 덜 관대했다. 여러 보조 부대원들이 절도 혐의로 해고되거나 기소되었다. 한 예로, 민간인을 이유 없이 폭행하여 사단에서 해고된 후 크리머리(유제품 공장)를 강탈하여 투옥된 외팔의 전직 임시 사관생도 이원 캐머런 브루스 소령이 있다. 1921년 2월 19일, 사령관 크로지어는 경찰 자문관과의 규율 문제에 대한 논쟁 끝에 사임했다. 크로지어는 미스 카운티에 있는 개신교도 소유의 허가받은 식료품점을 약탈한 혐의로 21명의 임시 사관생도를 해고했다. 튜더 장군이 공식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을 복직시키자 크로지어는 사령관직을 떠났다. 그의 후임으로는 부사령관이었던 에드워드 앨런 우드 준장이 임명되었으며, 우드는 부대가 해체될 때까지 사단을 지휘했다.
5. 해체 및 역사적 유산
보조사단은 1922년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와 함께 해산되었다. 1921년 체결된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아일랜드 자유국이 왕립 아일랜드 경찰대 구성원의 연금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으나, 보조사단은 이 조항에서 명시적으로 제외되었다.[7] 해산 이후, 많은 전직 보조사단 인력은 위임통치 팔레스타인의 팔레스타인 경찰(Palestine Police Force)에 합류했다.
5. 1. 관련 매체
보조사단의 대반란 활동은 블랙 앤 탄이 수행한 활동과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아, 보조사단이 저지른 많은 잔학 행위가 블랙 앤 탄의 소행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영국군은 아일랜드에서 똑같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보조사단은 다음과 같은 역사 드라마 영화에 등장했다.
- ''마이클 콜린스''
- ''라스트 셉템버''
-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6. 부대 목록
케이번주
더블린
로스커먼주 (1921년 6월까지)
메이요주
리트림주 (1921년 6월까지)
모나한주
코크주
군사 통신에서 근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