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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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영 제국은 15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존재했던 잉글랜드 왕국,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 그리고 영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으로, 전 세계에 걸쳐 식민지를 건설하고 지배했다. 1490년대 존 캐벗의 탐험을 시작으로, 16세기에는 종교 개혁과 스페인과의 경쟁 속에서 해상 활동을 강화하며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 17세기에는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과 아시아 무역 진출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으며, 특히 카리브해 지역에서 노예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다. 18세기에는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북아메리카와 인도를 장악했지만, 미국 독립 전쟁으로 북미 식민지를 잃었다. 19세기에는 산업 혁명을 바탕으로 세계 무역을 주도하며 "팍스 브리타니카" 시대를 열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으로 식민지를 확장했다. 20세기 들어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으며 국력이 쇠퇴했고, 식민지들의 독립 운동이 거세지면서 제국은 해체되었다. 1997년 홍콩 반환을 끝으로 대부분의 식민지가 독립했으며, 현재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영연방이 그 유산을 잇고 있다. 대영 제국은 영어, 스포츠, 법률 등 다양한 유산을 남겼지만, 식민 지배 과정에서 폭력, 착취, 기근 등 부정적인 영향도 함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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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 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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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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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British Empi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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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하느님, 국왕(여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 |
건국 시기 | 1609년 |
멸망 시기 | 1997년 |
선대 국가 |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아일랜드 왕국 |
후대 국가 | 영국 아일랜드 공화국 홍콩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뉴펀들랜드 (자치령) 남아프리카 연방 |
공용어 | 영어 |
수도 | 런던 |
정치 | |
국가원수 | 국왕 |
국가원수 시작 년도 | 1607년 1952년 |
국가원수 종료 년도 | 1625년 1997년 |
국가원수 이름 | 제임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
총리 | 총리 |
총리 시작 년도 | 1721년 1997년 |
총리 종료 년도 | 1742년 1997년 |
총리 이름 | 로버트 월폴 토니 블레어 |
역사 | |
변천 | 제임스타운 식민지 설립 (1607년) 미국 독립 승인 (1781년) 인도 제국 성립 (1857년) 웨스트민스터 헌장 (1931년) 인도 독립 (1947년) 홍콩 반환 (1997년) |
인구 | |
최대 인구 | 4억 1,200만 명 (1913년) |
세계 인구 비율 | 23% (1913년) |
면적 | |
최대 면적 | 3,550만 제곱킬로미터 |
세계 면적 비율 | 24% |
경제 | |
통화 | 영국 파운드 |
기타 | |
현재 국가 | 영국 아일랜드 예멘 이스라엘 이라크 인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미얀마 오만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우간다 이집트 에스와티니 가나 감비아 케냐 잠비아 시에라리온 지부티 짐바브웨 수단 탄자니아 나이지리아 나미비아 부룬디 말라위 르완다 레소토 미국 캐나다 앤티가 바부다 그레나다 자메이카 세인트키츠 네비스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세인트루시아 도미니카 연방 트리니다드 토바고 바베이도스 바하마 가이아나 벨리즈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파푸아뉴기니 |
2. 배경 (1493년~1583년)
대영 제국의 기틀은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별개의 왕국이었던 시절에 마련되었다. 1496년, 잉글랜드의 헨리 7세는 해외 탐험에서 스페인 제국과 포르투갈 제국의 성공에 자극받아 존 캐벗에게 북대서양을 통해 아시아로 가는 북서 항로를 찾도록 지시했다. 캐벗은 1497년에 뉴펀들랜드섬 해안에 상륙했으나, 자신이 아시아에 도착했다고 믿었고 식민지 건설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캐벗은 이듬해 다시 아메리카로 항해를 떠났지만, 그와 그의 배는 돌아오지 못했다.[119]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시기까지 아메리카에 영국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추가적인 시도는 없었다. 헨리 8세의 1533년 상소 제한 법령은 "잉글랜드 왕국이 제국임을" 선포했다.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와 가톨릭 스페인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1562년, 엘리자베스 1세는 사략선 존 호킨스와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을 공격하여 대서양 노예 무역에 참여하도록 장려했다.
영국-스페인 전쟁이 격화되면서 엘리자베스 1세는 사략선들이 아메리카의 스페인 항구와 보물선을 공격하는 것을 허가했다. 동시에 리처드 해클루트와 존 디 같은 영향력 있는 저술가들은 잉글랜드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대항하여 자체적인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대영 제국(British Empire)"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 당시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브라질에서 중국까지, 프랑스는 뉴프랑스 지역에 정착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해외 식민지 건설에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뒤처졌지만, 16세기에 아일랜드에서 문스터 식민을 통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개신교 정착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는 잉글랜드의 첫 근대 식민지로, 아일랜드의 노르만 정복 이후 지속된 식민지화의 연장선이었다.[5]
2. 1. 초기 탐험과 신대륙 발견
대영 제국의 역사는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으로 합쳐지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96년 잉글랜드의 헨리 7세는 포르투갈 제국과 스페인 제국이 신대륙 탐험에 성공한 것을 보고 존 캐벗에게 북대서양을 거쳐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찾도록 지시했다.
캐벗은 1497년에 캐나다 연안에서 육지를 발견하고 상륙했지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처럼 그 역시 아시아에 도착했다고 착각했으며, 콜럼버스보다 5년 늦게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캐벗은 다음 해에 다시 아메리카 탐험에 나섰지만, 그 이후 그의 원정대에 대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다.
2. 2. 엘리자베스 1세 시대와 해상 활동 강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에 잉글랜드는 해상 활동을 강화하며 대영 제국의 기반을 다졌다. 1496년 헨리 7세는 존 캐벗에게 북대서양을 통한 아시아 항로 개척을 명했으나, 캐벗은 1497년 뉴펀들랜드섬에 상륙하는 데 그쳤고, 이후 실종되었다.[119]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잉글랜드는 종교개혁의 여파로 스페인과 경쟁 관계에 돌입했다. 존 호킨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사략선들은 스페인 선박과 항구를 공격하며 부를 축적했고, 리처드 해클루트, 존 디 등은 잉글랜드의 제국 건설을 촉구했다. 이때 "대영 제국(British Empire)"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119]
엘리자베스 시대의 해적선 선장들은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영국의 적을 공격할 권한을 받은 사략선 선장 및 탐험가 집단이었다. 1560년부터 활동한 이들은 영국-스페인 전쟁 (1585–1604) 기간 동안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목표물을 공격했다. 존 호킨스와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대서양 노예 무역에도 관여했다.[6][7]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1577년부터 1581년까지 세계 일주에 성공하여 영국 최초이자 역사상 세 번째 세계 일주를 달성했다. 마틴 프로비셔는 북극을 탐험했다. 1578년, 엘리자베스 1세는 험프리 길버트에게 해외 탐험 특허를 부여했고, 1583년 길버트는 세인트존스 항구를 점령했다. 1584년, 월터 롤리는 버지니아 식민지 건설 헌장을 받았다.[12]
1600년,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극동 무역 독점에 도전했다.[13][14]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와 방글라데시 해안에 무역 기지를 설립하여 영국령 인도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2. 3. 종교 개혁과 경쟁 심화
종교개혁의 여파로 영국 성공회를 신봉하는 잉글랜드와 로마 가톨릭교회를 신봉하는 스페인은 경쟁 관계가 되었다.[119]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통치 기간까지 아메리카에 영국의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추가적인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헨리 8세의 1533년 상소 제한 법령은 "잉글랜드 왕국이 제국임을" 선포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잉글랜드와 가톨릭 스페인을 불가침의 적으로 만들었다. 1562년, 엘리자베스 1세는 사략선 존 호킨스와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선박에 대한 노예 습격에 참여하도록 장려했으며, 대서양 노예 무역을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영서전쟁에서 존 호킨스,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같이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재가받은 사략선들은 아메리카에 주둔한 스페인 항구들을 약탈하면서 챙긴 보물들을 싣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본국으로 돌아오는 일에 종사하였다. 이 노력은 좌절되었고, 나중에 영국-스페인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엘리자베스 1세는 아메리카의 스페인 항구와 대서양을 건너 돌아오는 선박, 신대륙에서 보물을 싣고 온 선박에 대한 사략선 습격을 더욱 허가했다. 동시에 리처드 해클루트, 존 디와 같은 영향력 있는 저술가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조국 잉글랜드 역시 제국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대영 제국(British Empire)”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였다. 이때까지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연안과 브라질에서 중국까지 일련의 교역소들을 정착시켰고, 프랑스는 나중에 뉴프랑스가 되는 지역에 있는 세인트로렌스강으로 이주민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시대 동안, 엘리자베스 시대의 해적선 선장들(Sea Dogs)은 공식적으로 전쟁 중이든 아니든 영국의 적을 공격할 권한을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받은 영국의 사략선 선장들과 탐험가들의 집단이었다. 1560년부터 활동한 이들은 주로 육지와 바다에서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목표물을 공격했는데, 특히 영국-스페인 전쟁(1585–1604) 기간 동안 그랬다. 존 호킨스 경과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을 포함한 해적선 선장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와 불법적인 대서양 노예 무역에도 관여했다.[6][7]
2. 4. 아일랜드 식민화
16세기 잉글랜드 왕국은 아일랜드에서 문스터 식민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근대 식민지를 수행하여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프로테스탄트 정착민들로 정착시켰다. 잉글랜드는 1169년 아일랜드의 노르만 정복 이후 아일랜드의 일부를 식민지화했다.[5] 문스터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준 여러 사람들은 나중에 북미의 초기 식민지 건설에도 참여했는데, 특히 웨스트 컨트리 맨으로 알려진 그룹이었다.3. 제1제국 (1583년 ~ 1783년)
1578년 엘리자베스 1세는 험프리 길버트에게 해외 탐험 및 발견 권한을 부여했다. 길버트는 서인도 제도로 항해했으나 악천후로 실패했다. 1583년, 길버트는 뉴펀들랜드섬을 잉글랜드 영토로 선언했지만, 귀환 중 사망했다. 그의 이복형제 월터 롤리가 특허를 이어받아 1584년 로어노크 식민지를 건설했다.
1603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 제임스 1세로 즉위했다. 1604년 런던 조약으로 스페인과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잉글랜드는 해외 식민지 건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초,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섬들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영국 동인도 회사를 통해 아시아와 교역했다.
1670년, 찰스 2세는 허드슨 베이 회사에 루퍼트 랜드의 모피 무역 독점권을 부여했다. 허드슨 베이 회사의 요새와 무역 거점은 뉴 프랑스를 건설한 프랑스인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130]
2년 뒤, 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찰스 2세에게 노예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았다.[131] 노예제는 서인도제도 영국 식민지의 기반이었다. 1807년 노예 무역 금지까지 영국은 350만 명의 노예를 아메리카로 강제 이주시켰다.[132]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아프리카계 인구 비율은 1650년 25%에서 1780년 80%로 증가했다.[133]
18세기, 대영 제국은 프랑스와 식민지 경쟁을 벌였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후 우트레히트 조약으로 영국은 뉴펀들랜드, 아카디아, 지브롤터, 메노르카를 획득했다. 7년 전쟁과 1763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은 루퍼트 랜드, 신 프랑스(프랑스계 캐나다인이 거주), 플로리다를 얻어 해양 강국이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은 프랑스에 승리하고 이오니아 제도, 몰타, 모리셔스, 세인트루시아, 세이셸, 토바고, 트리니다드, 기아나, 실론, 케이프 식민지, 헬골란트를 획득했다.
3. 1.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

1578년 엘리자베스 1세는 험프리 길버트에게 바다 건너 새로운 땅을 발견하고 답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그해, 길버트는 해적질에 종사하며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수립할 목적으로 서인도 제도를 향해 떠났으나, 악천후로 인해 원정이 초반부터 실패했다. 1583년에 그는 뉴펀들랜드섬을 언급하면서 아직 아무 이민자들이 없는 이때에 잉글랜드가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시 한번 항해 도전에 착수하였다. 길버트는 잉글랜드로 귀국하던 도중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의붓형제 월터 롤리가 1584년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특권을 받았으며, 같은 해 오늘날 노스캐롤라이나 연안에 로어노크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1603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권을 물려받았다. 1604년에 런던 조약을 맺으면서 스페인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였다. 주된 적대국과 평화관계를 맺은 이때, 잉글랜드는 다른 나라들의 식민지를 공격해 약탈하는 행동에서 스스로 국외에 식민지들을 건설하는 일에 나서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7세기 초, 대영 제국은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의 작은 섬들에 자국민들을 이주시키는 사업과 더불어 개인 회사인 영국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와의 교역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카리브 제도는 최초 몇 번의 식민지화 실패 이후 성공한 잉글랜드의 가장 중요하고 풍부한 곳 중 하나였다.[120] 1604년에 기아나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금을 채취하지 못하여 2년 만에 실패하였다.[121] 세인트루시아(1605)와 그레나다(1609)의 식민지들은 급격히 실패하였으나, 세인트키츠섬(1624), 바베이도스(1627) 그리고 네비스섬(1628)으로의 정착은 성공하였다.[122] 이들 식민지들은 곧 포르투갈령 브라질이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실행했던 설탕 플랜테이션을 성공적으로 실행하였다.[123] 점차적으로 증가하는 이러한 무역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하여 잉글랜드 의회는 1651년에 잉글랜드의 배만 잉글랜드의 식민지를 독점할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의회의 결정은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적대적 관계를 초래하였고 몇 차례에 걸친 영국-네덜란드 전쟁 끝에 결국 잉글랜드의 아메리카 식민지 독점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124] 1655년에 잉글랜드는 스페인에게서 자메이카를 합병하게 되며, 이후 1666년에는 바하마 제도를 성공적으로 식민지화한다.[125]

잉글랜드가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영구 정착한 곳은 존 스미스 선장이 이끌고 버지니아 회사가 지원하여 1607년에 건설한 제임스타운이다. 버뮤다는 1609년에 버지니아 회사 난파선의 깃발로 인해 영유권이 주장되었고 정착민들이 이주하였다. 이후 식민지들에 대한 버지니아 회사의 특권은 1624년에 폐지되었고 버지니아 식민지의 이름으로 잉글랜드 군주의 직접 통제를 받게 되었다. 1610년, 런던 앤 브리스톨 회사가 뉴펀들랜드를 식민지화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126] 1620년에는 플리머스 식민지가 청교도들을 위한 정착지로 건설되었다.[127] 종교재판은 많은 영국인들이 위험한 아메리카로의 항해를 결정하는 중요한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 1634년에 건설된 메릴랜드 식민지는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건설되었으며, 로드아일랜드 식민지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건설되었다. 캐롤라이나 식민지는 1663년에 건설되었다. 1664년에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뉴암스테르담이 잉글랜드에 합병되었으며, 이후 뉴욕으로 도시 이름이 변경되었다. 뉴욕의 합병은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끝맺는 협상 중 수리남과의 교환으로 이루어졌다.[128] 1681년에는 펜실베이니아 식민지가 윌리엄 펜에 의해 건설되었다. 비록 미주 식민지들은 카리브해의 식민지보다 재정적으로 적은 이익을 제공하였으나 좋은 질의 농작지와 적정한 기후 덕분에 많은 영국 이민자들이 선호하였다.[129]

3. 2. 카리브해 진출과 노예 무역
카리브 제도는 초기 몇 번의 식민지화 실패 후, 잉글랜드가 성공을 거둔 중요하고 풍요로운 지역 중 하나였다.[120] 1604년 기니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금 채취 실패로 2년 만에 좌절되었다.[121] 세인트루시아(1605)와 그레나다(1609) 식민지도 실패했지만, 세인트키츠섬(1624), 바베이도스(1627), 네비스섬(1628) 정착은 성공했다.[122]이들 식민지는 포르투갈령 브라질이 노예 노동력을 이용해 성공시킨 설탕 플랜테이션을 도입했다.[123] 이 무역의 이익을 위해 잉글랜드 의회는 1651년 잉글랜드 배만 잉글랜드 식민지를 독점할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는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갈등을 초래,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이어졌으나, 결국 잉글랜드의 아메리카 식민지 독점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124] 1655년 잉글랜드는 스페인으로부터 자메이카를 합병했고, 1666년에는 바하마 제도를 식민지화했다.[125]
2년 후, 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카리브해 영국령 식민지에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찰스 2세에게 노예 무역 독점권을 받았다.[131] 노예제는 서인도제도의 대영 제국 식민지 유지에 중요했다. 1807년 노예 무역 금지 전까지 영국은 350만 명의 노예를 대서양에서 아메리카로 강제 이주시켰다.[132] 이를 위해 대영 제국은 서아프리카에 요새를 건설했다. 영국령 서인도제도에서 아프리카 흑인 비율은 1650년 25%에서 1780년 약 80%까지 증가했다.[133]
3. 3. 네덜란드와의 경쟁과 아시아 진출
16세기 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아시아 무역을 독점하던 포르투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영국 동인도 회사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각각 1600년과 1602년에 설립되었다. 이들은 향신료 무역을 장악하고, 주요 무역 거점인 인도와 인도네시아 군도에 주목했다. 특히 네덜란드가 몰루카 제도를 장악하고, 잉글랜드가 1613년 인도의 수라트에 공장을 설립하면서 양국 회사 간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17세기의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아시아에서 네덜란드의 지위를 흔들었다. 잉글랜드는 네덜란드를 제치고, 명예 혁명 이후 오렌지가의 윌리엄이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면서 적대 관계가 종식되었다. 이후 인도네시아 군도의 향신료 무역은 네덜란드가, 인도의 직물 산업은 잉글랜드가 차지했다. 직물 산업은 곧 수익성에서 향신료 무역을 추월했고, 1720년 잉글랜드 회사는 시장 점유율에서 네덜란드를 압도했다.[134]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무역 중심지를 수라트에서 마드라스, 봄베이, 캘커타로 옮겼다.
영국은 1600년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에 진출, 향신료 무역에 개입을 시도했다. 말레이 반도의 파타니 왕국과 태국의 아유타야, 일본의 히라도에도 상관을 설치하여 무역을 했지만, 모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물러났다.
이 때문에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 주력하여 1612년에 수라트에 상관을 설치하고, 1639년 첸나이(마드라스), 1668년 뭄바이(봄베이), 콜카타(캘커타)에도 상관을 설치했다. 인도 무역은 성공을 거두었고, 이들 상관은 점차 요새화되어 주변 인도 제후들을 영향하에 두게 되었다.
3. 4. 프랑스와의 충돌
제2차 백년전쟁18세기에는 새롭게 통합된 대영제국이 세계적인 식민 제국으로 부상했고, 프랑스는 제국 무대에서 주요 경쟁국이 되었다.[20]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1714년 우트레히트 조약으로 종결되었는데, 필립 5세는 자신과 후손들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고, 스페인은 유럽에서의 제국을 잃었다.[11]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와 아카디아를, 스페인으로부터 지브롤터와 메노르카를 얻었다. 지브롤터는 중요한 해군 기지가 되었고, 영국이 대서양의 지중해 출입구를 통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스페인은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 노예를 판매할 수 있는 권리인 ''아시엔토''를 영국에 양도했다.[21]
18세기 중반, 인도 아대륙에서는 카르나틱 전쟁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무굴 제국의 쇠퇴로 인한 공백을 메우려 했다.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은 벵골 나와브와 프랑스 동맹군을 물리쳐 벵골을 장악하고 인도에서 주요 군사 및 정치 세력이 되었다.[17] 프랑스는 영토를 유지했지만, 군사적 제약과 영국 종속국 지원 의무로 인해 인도를 장악하려는 희망은 사라졌다.[37] 이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총독부 군대의 무력 위협 아래 직접 통치하거나 지역 통치자를 통해 통제하는 영토를 점차 확대했는데, 이 군대의 대다수는 영국 장교가 지휘하는 인도 시파이로 구성되었다.[38] 인도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투쟁은 7년 전쟁 (1756-1763)의 한 전장이 되었다.[25]
1763년 파리 조약으로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는 식민 강국으로서의 미래가 사실상 끝났는데, 루퍼트 랜드에 대한 영국의 주장이 인정되었고,[25] 신 프랑스(New France)가 영국에 양도(영국 통제하에 상당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남게 됨)과 루이지애나가 스페인에 양도되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영국에 양도했다. 인도에서 프랑스를 물리친 승리와 함께 7년 전쟁은 영국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양 강국으로 만들었다.[39]
나폴레옹 치하 프랑스는 영국에 다시 도전했는데, 이는 이전 전쟁들과 달리 두 국가 간의 이념 대결을 의미했다.[40]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의 많은 국가들을 압도했던 것처럼 영국 자체를 침공할 위협을 가했다.[41]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은 승리하기 위해 많은 자본과 자원을 투입했다. 프랑스 항구들은 영국 해군에 의해 봉쇄되었고, 영국 해군은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 제국 해군-스페인 해군 함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네덜란드(1810년 나폴레옹에 의해 합병됨)의 식민지들을 포함한 해외 식민지들이 공격받고 점령되었다. 프랑스는 1815년 유럽 연합군에 의해 최종적으로 패배했다.[42] 영국은 다시 평화 조약의 수혜자였다. 프랑스는 이오니아 제도, 몰타(1798년 점령), 모리셔스, 세인트루시아, 세이셸, 토바고를 할양했고, 스페인은 트리니다드를, 네덜란드는 기아나, 실론, 케이프 식민지를, 덴마크는 헬골란트를 할양했다. 영국은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프랑스령 기아나, 레위니옹을 프랑스에; 미노르카를 스페인에;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덴마크에; 자바와 수리남을 네덜란드에 반환했다.[43]
4. 제2제국(1783년 ~ 1815년)
플라시 전투에서 로버트 클라이브가 승리함으로써 영국 동인도 회사는 통상력뿐만 아니라 군사력까지 확립되었다.[41] 1815년부터 1914년까지를 영국의 "제국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41] 이 시기 영국 제국은 약 10e6sqmi의 영토와 약 4억 명의 인구를 추가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중앙아시아의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었다.[42] 해상에서의 독보적인 지위를 바탕으로 영국은 ''팍스 브리타니카''[42]로 알려진 세계 경찰 역할을 맡았고, "고귀한 고립" 외교 정책을 채택했다.
영국은 식민지에 대한 통제와 더불어 세계 무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통해 중국, 아르헨티나, 샴 등 여러 국가의 경제를 효과적으로 통제했는데, 이를 "비공식 제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 19세기 후반에 발명된 증기선과 전신은 제국을 통제하고 방어하는 데 큰 힘이 되었으며, 1902년에는 올 레드 라인이라는 전신망으로 제국 전체가 연결되었다.
19세기 동안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청나라 등이 약화되면서 생긴 권력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 중앙아시아에서의 이러한 경쟁은 "대게임"으로 불리게 되었다.[43]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183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지만,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재앙으로 끝났다.[44]
1853년 러시아가 오스만의 발칸 지역을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여 크림 전쟁(1854-1856)에 참전했다. 이 전쟁은 ''팍스 브리타니카'' 기간 동안 영국과 다른 제국 세력 간에 벌어진 유일한 세계 대전이었으며,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다.[44] 중앙아시아에서의 갈등은 20년 넘게 이어졌지만, 1878년 세력권 합의와 1907년 영러 협약 체결로 해결되었다. 1904-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 제국 해군이 발트 함대를 쓰시마 해전에서 격파하면서 러시아의 위협은 더욱 줄어들었다.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희망봉에 네덜란드 케이프 식민지를 설립했다. 영국은 1795년 이 지역을 점령했고, 1806년에 식민지와 아프리카너(보어인) 주민들을 공식적으로 인수했다.[45] 영국 이민이 증가하면서 보어인들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대이동을 통해 독립적인 보어 공화국들을 세웠다.[46] 이 과정에서 보어 트레커들은 영국과 충돌했고, 결국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1852–1877; 1881–1902)과 오렌지 자유국(1854–1902)을 세웠다.[47] 1902년 영국은 제2차 보어 전쟁 이후 두 공화국을 점령했다.[48]
1869년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어 지중해와 인도양이 연결되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운하에 반대했지만,[49] 개통 후 그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고 "제국의 경동맥"으로 삼았다.[50] 1875년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는 이집트 통치자 이스마일 파샤의 수에즈 운하 지분 44%를 400만파운드에 매입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재정 통제는 1882년 영국의 완전한 점령으로 이어졌다. 영국은 20세기까지 이집트를 통제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다. 1888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으로 운하는 중립 지역이 되었다.[51]
콩고 강 하류 지역에서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의 경쟁이 심화되자, 1884~1885년 베를린 회의가 개최되어 아프리카 분할을 규제하고 "실효 지배"를 영토 인정 기준으로 정의했다.[52] 아프리카 분할은 189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영국은 1896년 마흐디 전쟁에서 승리하고 1898년 파쇼다 사건에서 프랑스를 저지했다. 수단은 명목상 영국-이집트 공동 통치였지만 실제로는 영국 식민지였다.
남부 및 동부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성과는 세실 로즈가 케이프타운-카이로 철도 건설을 촉구하게 만들었다.[53]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로즈는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를 통해 로디지아를 점령하고 합병했다.[54]
4. 1. 미국 독립과 영향
1760년대에서 1770년대에 걸쳐 13개 식민지와 영국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대표 없는 과세는 없다."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영국 의회가 자신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려는 것에 반발했다.[23] 미국 독립 전쟁은 의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치를 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영국은 직접 통치를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1775년 전쟁이 발발했다.[23] 1776년, 제2차 대륙 회의는 미국 독립 선언을 통해 영국 제국으로부터 식민지의 주권을 선포하고 미국을 건국했다.[23] 프랑스와 스페인 군대의 참전으로 미국의 승리가 유리해졌고, 1781년 요크타운 포위전에서 영국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한 후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1783년 파리 조약에서 미국의 독립이 인정되었다.[23]미국 독립은 캐나다에 대한 영국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독립 전쟁 이후 4만 명에서 10만 명 사이의[23] 왕당파가 미국에서 캐나다로 이주했다.[23] 세인트 존과 세인트 크로이 강 유역으로 간 1만 4천 명의 왕당파는 핼리팩스의 지방 정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런던은 1784년 뉴브런즈윅을 별도의 식민지로 분리했다.[23] 1791년 헌법 조례는 상부 캐나다(주로 영어 사용)와 하부 캐나다(주로 프랑스어 사용) 주를 만들어 프랑스와 영국 공동체 간의 긴장을 완화하려 했다. 또한, 미국 혁명과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영국과 유사한 정부 시스템을 구현하여 제국 권력을 주장하고, 정부에 대한 대중의 통제를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23]
영국과 미국 간의 긴장은 나폴레옹 전쟁 중 영국이 프랑스와의 미국 무역을 차단하고 미국 선박에 승선하여 징병을 통해 영국 해군에 인력을 충원하려고 했기 때문에 다시 고조되었다. 미국 의회는 1812년 전쟁을 선포하고 캐나다 영토를 침략했다. 이에 영국은 미국을 침략했지만, 1814년 겐트 조약에 의해 전쟁 전 경계가 재확인되어 캐나다의 미래가 미국과 분리될 것임을 보장했다.[23]
4. 2. 태평양 탐험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식민화

제임스 쿡은 1769년 10월 뉴질랜드에 도착하여 뉴질랜드를 일주하고 지도를 작성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27] 18세기 후반부터 뉴질랜드는 탐험가, 선원, 선교사, 상인, 모험가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했지만, 정착이나 영유권 확립 시도는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은 1606년 네덜란드인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식민지화 시도는 없었다. 1770년, 뉴질랜드를 떠난 후 제임스 쿡은 동부 해안을 측량하고, 영국을 위해 대륙을 주장하고, 뉴사우스웨일스라고 명명했다.
1718년부터 미국 식민지로의 유형은 영국에서 다양한 범죄에 대한 처벌이었으며, 매년 약 1,000명의 유죄 판결자들이 유형되었다. 1783년 13개 식민지 상실 이후 대체 장소를 찾아야 했던 영국 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눈을 돌렸다. 1778년, 조지프 뱅크스는 보타니 베이가 유형 정착지를 설립하기에 적합하다는 증거를 제시했고, 1787년 첫 번째 유형수 수송선이 출항하여 1788년에 도착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선포를 통해 주장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조약을 체결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으며,[28] 식민화는 질병과 폭력을 가져왔고, 토지와 문화 박탈은 이들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29] 영국은 1840년까지 뉴사우스웨일스로, 1853년까지 타즈매니아로, 1868년까지 서호주로 유형수를 계속 수송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는 빅토리아 골드 러시 때문에 양모와 금의 수익성 있는 수출국이 되었고, 수도인 멜버른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다.
4. 3. 나폴레옹 전쟁과 제국의 확장

영국은 나폴레옹 치하의 프랑스로부터 도전을 받아 전력을 다해 싸웠다. 이 대결은 이전의 전쟁들과는 달리 두 나라 간 이데올로기의 경쟁을 의미했다. 단순히 영국이 세계무대에서 사라질 위기에 직면한 것만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유럽 대륙의 수많은 나라를 침략했으며, 이내 영국에도 위협이 임박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은 영국이 승리를 위해 엄청난 양의 자금과 물자를 쏟아부은 전쟁 가운데 하나였다. 프랑스 항구들은 영국 해군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이는 1805년 트라팔가르에서 프랑스 함대를 상대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정복 식민지들은 차례대로 공격을 받아 점령되었으며, 1810년 나폴레옹에 의해 합병되었다. 프랑스는 1815년 유럽군들의 연합 공격을 받고 마침내 패배하였다. 대영 제국은 또다시 평화 조약의 수혜자가 되었다. 프랑스로부터는 이오니아 제도와 몰타(이 둘은 1797년과 1798년에 각각 점유하였음), 세인트루시아, 모리셔스를 넘겨받았으며, 스페인으로부터는 트리니다드섬과 토바고섬을 넘겨받았다. 네덜란드로부터는 가이아나와 케이프 식민지를 넘겨받았다. 영국은 프랑스에 과들루프와 레위니옹을, 네덜란드에는 자바와 수리남을 돌려주었다.[26]
나폴레옹 치하 프랑스는 영국에 다시 도전했는데, 이는 이전 전쟁들과 달리 두 국가 간의 이념 대결을 의미했다.[36] 위험에 처한 것은 영국의 세계 무대에서의 위치만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그의 군대가 유럽 대륙의 많은 국가들을 압도했던 것처럼 영국 자체를 침공할 위협을 가했다.[36]
나폴레옹 전쟁은 영국이 승리하기 위해 많은 자본과 자원을 투입한 전쟁이었다. 프랑스 항구들은 영국 해군에 의해 봉쇄되었고, 영국 해군은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 제국 해군-스페인 해군 함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네덜란드(1810년 나폴레옹에 의해 합병됨)의 식민지들을 포함한 해외 식민지들이 공격받고 점령되었다. 프랑스는 1815년 유럽 연합군에 의해 최종적으로 패배했다.[36] 영국은 다시 평화 조약의 수혜자였다. 프랑스는 이오니아 제도, 몰타(1798년 점령), 모리셔스, 세인트루시아, 세이셸, 토바고를 할양했고, 스페인은 트리니다드를, 네덜란드는 기아나, 실론, 케이프 식민지를, 덴마크는 헬골란트를 할양했다. 영국은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프랑스령 기아나, 레위니옹을 프랑스에, 미노르카를 스페인에,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덴마크에, 자바와 수리남을 네덜란드에 반환했다.[36]
4. 4. 노예 제도 폐지
영국은 노예 매매(1807)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노예 폐지론자들의 압력으로 다른 나라에도 이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1833년 노예 제도 자체를 불법화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1834년 8월 1일에 발효되었다.[37] 산업혁명으로 노예를 통해 생산된 상품의 경제적 중요성이 낮아지고,[37] 노예 반란 진압 비용이 증가하면서, 영국 의회는 1807년 노예 무역을 금지했다. 1808년 시에라리온 식민지는 해방 노예를 위한 공식 영국 식민지로 지정되었다.[38] 1834년 8월 1일, 노예 폐지법으로 영국 제국 내 노예제가 폐지되었다(동인도회사와 실론은 1844년에 폐지). 노예들은 4~6년의 "견습 기간" 후 완전 해방되었으나,[38] 반대로 인해 1838년에 견습 제도가 폐지되었다. 영국 정부는 노예 소유주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39][40]5. 제국주의 시기 또는 대영 제국의 전성기(1815-1914)
1815년부터 1914년까지는 영국 역사에서 "제국의 세기"라고 불리는 기간으로,[136][137] 약 2천6백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와 당시 세계 인구의 약 1/4에 해당되는 약 4억 명의 인구가 대영 제국의 이름 아래 하나가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경쟁국이 없었으며,[138] 특히 바다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영국은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처하였는데, 훗날 이때를 가리켜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라고 불렀다.[139] 영국은 식민지 곳곳에 지배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세계 무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점유하여 남아메리카, 중국, 시암과 같이 일부 역사학자들이 “비공식 제국령”으로 묘사한 많은 명의상 독립국의 경제를 사실상 통제했다.[140]
5. 1. 산업 혁명과 경제 성장
일부 역사학자들은 1815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을 영국의 "제국 시대"라고 부른다.[41] 이 기간 동안 영국 제국에는 약 10e6sqmi의 영토와 약 4억 명의 인구가 추가되었다. 나폴레옹에 대한 승리는 중앙아시아의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영국에 심각한 국제적 경쟁자를 남기지 않았다.[42] 바다에서의 영국의 독보적인 지위는 영국이 세계 경찰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팍스 브리타니카''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고귀한 고립"의 외교 정책을 채택하게 되었다.영국은 자체 식민지에 대한 공식적인 통제와 함께 세계 무역에서의 지배적인 위치를 통해 중국, 아르헨티나, 샴과 같은 많은 국가의 경제를 효과적으로 통제했는데, 이는 일부 역사학자들에 의해 "비공식 제국"으로 묘사되었다.[2] 영국 제국의 힘은 19세기 후반에 발명된 증기선과 전신이라는 새로운 기술에 의해 뒷받침되었으며, 이를 통해 제국을 통제하고 방어할 수 있었다. 1902년까지 영국 제국은 올 레드 라인이라고 불리는 전신 케이블 네트워크로 연결되었다.
5. 2. 인도의 완전 식민지화
영국 동인도 회사는 18세기 중반 카르나틱 전쟁에서 프랑스 동인도 회사와 경쟁하며 인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로버트 클라이브가 이끈 플라시 전투 승리로 벵골 지역을 장악하고, 이후 인도에서 주요 군사 및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135]19세기 초, 영국 왕실은 동인도 회사의 업무에 더 큰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 의회법을 통해 회사를 규제하고 획득한 영토에 대한 왕실 주권을 확립했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은 양측에 큰 인명 피해를 낳으며 진압되었고, 이듬해 영국 정부는 동인도 회사를 해산하고 1858년 인도 통치법을 통해 인도를 직접 통치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 여황제로 즉위하고, 총독이 임명되어 영국령 인도 시대가 시작되었다. 인도는 "왕관의 보석"이라 불리며 제국에서 가장 귀중한 소유물이자 영국의 힘의 원천이 되었다.[135]
동인도 회사는 마이소르 왕국과 앙글로-마이소르 전쟁을 치렀다. 제1차와 제2차 전쟁 이후, 제3차와 제4차 전쟁에서 승리하여 마이소르 왕국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33] 또한 마라타 제국과의 세 차례 앙글로-마라타 전쟁에서 승리하여 1818년 바지라오 2세 항복 후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장악했다.[36]

5. 3. 아편 전쟁과 중국 진출
19세기 영국의 대아시아 정책은 인도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넓히고 지키는 것이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7년 전쟁 동안 영국 해군과 협력했으며, 이집트에서 나폴레옹 축출(1799), 자바 탈취(1811), 싱가포르(1819)와 말라카(1824) 획득, 버마 격퇴(1826) 등 인도 밖에서도 협력을 이어갔다.[23]동인도 회사는 1730년대부터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이 무역은 1729년 청이 아편 금지령을 내린 후 불법이었지만, 영국은 중국에 대량의 은을 지불하며 홍차를 수입해 손해를 보았다. 1839년, 중국 당국이 광저우에서 영국 상인들의 아편 상자 20,000개를 압수하자, 영국은 중국을 공격해 승리했다(제1차 아편 전쟁). 난징조약을 통해 홍콩섬을 할양받았다.[23]
5. 4. 러시아와의 경쟁 (그레이트 게임)
19세기 동안 영국과 러시아 제국은 쇠퇴하는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제국, 청나라가 남긴 권력 공백을 채우기 위해 경쟁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의 이러한 경쟁은 "그레이트 게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2] 영국의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가 페르시아와 튀르키예에 가한 패배는 그들의 제국적 야망과 능력을 보여주었고, 영국에서는 육로를 통한 인도 침공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시켰다.[2] 1839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이를 선제적으로 차단하려 했지만,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영국에게 재앙이었다.[2]1853년 러시아가 오스만 발칸 반도를 침공하자, 지중해와 중동에서의 러시아 지배에 대한 우려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하고 러시아 해군의 능력을 파괴하기 위해 크림 반도를 침공했다.[2] 새로운 현대전 기술이 사용된 크림 전쟁(1854-1856)은 ''팍스 브리타니카'' 기간 동안 영국과 다른 제국 세력 사이에서 벌어진 유일한 세계 대전이었으며, 러시아에게는 압도적인 패배였다.[2][42] 중앙아시아의 상황은 20년 이상 해결되지 않은 채, 영국은 1876년에 발루치스탄을,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및 투르크메니스탄을 합병했다. 한때 또 다른 전쟁이 불가피해 보였지만, 두 나라는 1878년에 해당 지역의 세력권과 1907년 영러 협약 체결과 함께 모든 미해결 문제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42] 1904-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 제국 해군이 발트 함대를 쓰시마 해전에서 격파함으로써 영국에 대한 위협이 줄어들었다.[42]
5. 5. 아프리카 분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52년 동인도 식민지와의 항해를 위한 중간 기착지로 아프리카 남단에 케이프 식민지를 설립했다. 영국은 1795년 플랑드르 전역 중 프랑스에 점령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지역을 점령했고, 1806년에 식민지와 그곳의 많은 아프리카너(보어인) 주민들을 공식적으로 인수했다.[44] 1820년 이후 영국 이민이 케이프 식민지로 증가하면서, 영국 통치에 분개한 수천 명의 보어인들은 1830년대 후반과 1840년대 초 대이동 기간 동안 북쪽으로 이동해 독립적인 보어 공화국을 세웠다.[44] 이 과정에서 보어 트렉커들은 남아프리카 식민지 확장과 소토족, 줄루 왕국 등 원주민 아프리카 정치 세력에 대한 자체 계획을 가진 영국과 반복적으로 충돌했다. 결국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트란스발 공화국, 1852–1877; 1881–1902)과 오렌지 자유국(1854–1902) 등 두 개의 공화국을 세웠다.[44] 1902년 영국은 제2차 보어 전쟁(1899–1902) 이후 두 보어 공화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두 공화국을 모두 점령했다.[45]
1869년 나폴레옹 3세 치하에서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어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했다. 영국은 처음에 운하에 반대했지만,[45] 개통 후 전략적 가치를 빠르게 인식하여 "제국의 경동맥"이 되었다.[45] 1875년 보수당 정부의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부채에 시달리는 이집트 통치자 이스마일 파샤의 수에즈 운하 지분 44%를 400만파운드에 매입했다.[45] 이는 전략적 수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영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재정 통제는 1882년 영국의 완전한 점령으로 끝났다.[45] 영국은 20세기까지 이집트 제후국을 통제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영국 제국의 일부는 아니었다. 프랑스는 여전히 최대 주주였으며 영국의 입지를 약화시키려 시도했지만,[45] 1888년 콘스탄티노플 조약으로 타협하여 운하가 공식적으로 중립 지역이 되었다.[46]
하부 콩고 강 지역에서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의 경쟁적인 활동이 열대 아프리카의 질서 있는 식민화를 저해함에 따라, 1884~1885년 베를린 회의가 "아프리카 분할"에서 유럽 열강 간의 경쟁을 조절하고 "실효 지배"를 영토 청구에 대한 국제적 인정 기준으로 정의하기 위해 개최되었다.[47] 아프리카 분할은 189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영국이 1885년 수단에서 철수하기로 한 결정을 재고하게 만들었다. 1896년 영국과 이집트군 합동 부대는 마흐디 군대를 물리치고 1898년 프랑스의 침략 시도(파쇼다 사건)를 격퇴했다. 수단은 명목상 영국-이집트 공동 통치가 되었지만 실제로는 영국 식민지였다.[47]
남부 및 동부 아프리카에서 영국의 성과는 남아프리카에서 영국의 확장을 개척한 세실 로즈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수에즈 운하를 대륙의 광물이 풍부한 남부 지역과 연결하는 "케이프타운-카이로 철도" 건설을 촉구하게 만들었다.[48]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로즈는 자신의 사유 회사인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를 통해 점령하고 합병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영토인 로디지아를 세웠다.[49]
6. 세계 대전 (1914년 ~ 1945년)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의 기간(전간기)에는 영국의 역할에 큰 변화가 있었다.
1919년 인도 정부법이 인도 독립 운동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인도에서의 독립 투쟁이 시작되었다.[49] 암리차르 학살 등으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었고, 간디가 이끄는 비협조 운동은 차우리 차우라 사건 이후 1922년 중단되었지만, 불만은 계속되었다.[49]
아일랜드에서는 신 페인이 1919년 더블린에 독립 의회를 설립하고 독립을 선포하면서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종결되었고, 아일랜드 자유국이 탄생했다. 아일랜드 정부법에 따라 북아일랜드는 영국 내에 남았다.[49]
1922년, 이집트는 공식적으로 독립했지만, 1936년 조약 체결 전까지 영국군이 주둔하는 등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49] 이라크는 1932년 독립하여 국제 연맹에 가입했다.[49] 팔레스타인에서는 발푸어 선언으로 인해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49]
1923년 제국 회의에서 캐나다 등 자치령의 독자적 외교 정책 수립권이 인정되었고,[49] 1926년 제국 회의에서는 1926년 발푸어 선언을 통해 영국과 자치령이 동등한 지위를 가진 영국 연방으로 정의되었다.[49] 이는 1931년 웨스트민스터 법령으로 법제화되었다.[49] 뉴펀들랜드는 1933년 재정난으로 식민지 지위로 복귀했고,[49] 아일랜드 자유국은 1937년 새 헌법을 도입하여 국명을 ''아일랜드''로 변경했다.[49]
경제 대공황과 독일, 일본의 군국주의 강화는 영국의 제국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49] 영국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통해 미국과 협력 관계를 맺었지만, 영일 동맹은 유지하지 않았다.[4]
6. 1.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당하면서 시작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민족주의, 제국주의와 같은 정치 경제적 갈등이 원인이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벨기에의 중립국 지위 보장에 대한 독일 제국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참호전, 기관총, 화학무기, 야간 폭격, 탱크 등 이전 전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참혹한 전쟁이었으며,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1917년 동맹국이 차례로 항복하기 시작했고, 1918년 독일 제국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끝났다.전쟁 이후 영국은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요르단과 잔지바르를 자국 식민지로 편입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라크를 식민지로 편입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를 오스만 제국에서 분리시켜 보호국으로 삼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27년, 이라크는 1932년에 독립했다.[23]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은 독일에 대한 우려를 현실로 마주하게 되었다. 영국은 신속하게 독일의 아프리카 해외 식민지 대부분을 침략하여 점령했다. 태평양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각각 독일령 뉴기니와 독일령 사모아를 점령했다. 독일 편에 가담한 오스만 제국의 전후 분할 계획은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약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수립했는데, 이 협약은 영국이 아랍 반란을 촉구했던 메카의 셰리프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독립적인 아랍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43]
영국의 독일과 동맹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식민지와 자치령을 전쟁에 참여하게 했으며, 이들은 귀중한 군사적, 재정적, 물질적 지원을 제공했다. 250만 명이 넘는 남성이 자치령 군대에서 복무했으며, 왕관 식민지에서도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했다.[44] 1915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군대의 공헌은 국내의 국가 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가 식민지에서 독립 국가로 이행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들 국가는 안작데이에 이를 계속 기념하고 있다. 캐나다인들은 비미 능선 전투를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보았다.[45] 자치령의 중요한 전쟁 노력 기여는 1917년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각 자치령 총리를 초청하여 제국 정책을 조율하기 위한 제국 전시 내각에 참여하도록 했을 때 인정받았다.[46]
1919년에 체결된 최종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제국은 1300만 명의 새로운 백성을 추가하여 최대 규모에 도달했다.[47]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는 연합국에 국제 연맹 위임 통치령으로 분배되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 이라크, 카메룬과 토골랜드의 일부, 그리고 탕가니카를 통치하게 되었다. 자치령들도 자신들의 위임 통치령을 얻었다. 남아프리카 연방은 남서아프리카(현재 나미비아), 오스트레일리아는 뉴기니, 뉴질랜드는 서사모아를 얻었다. 나우루는 영국과 두 개의 태평양 자치령의 합동 위임 통치령이 되었다.[48]
6. 2. 전간기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영국은 미국과 일본 중 한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어야 했다. 이에 워싱턴 해군 조약을 통해 미국과 협력하고 일본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경제 대공황으로 미국, 영국, 유럽 경제는 악화되었고, 이는 독일에서 나치즘 확산과 대영 제국 식민지들이 영국 연방으로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다.[49]
한편 영국은 신 페인과 정치적 충돌을 겪으며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간 대립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독립국으로 인정하되, 북아일랜드를 영국령으로 통치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후 대영 제국은 아일랜드 공화국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통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질서 변화, 특히 미국과 일본의 해군 강국 부상, 인도와 아일랜드 독립 운동은 영국 제국 정책 재평가를 야기했다.[4] 영국은 영일 동맹 대신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통해 미국과 해군력 균형을 유지했다.[49] 이는 1930년대 영국 내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49] 대공황 속 독일과 일본의 군국주의 정부 장악으로 영국은 양국 동시 공격을 우려했고,[49] 제국 안보는 영국 경제에 중요했기에 심각한 문제였다.[49]
1919년 아일랜드 자치 운동 지연에 대한 불만으로 신 페인 의원들은 더블린에 독립 의회를 설립, 아일랜드 독립을 선포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영국에 게릴라전을 시작했다.[49] 아일랜드 독립 전쟁은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 체결로 종결, 아일랜드 자유국이 탄생했다. 자유국은 실질적 내부 독립을 얻었지만 영국 왕실과 헌법적 연결은 유지했다.[49]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에 따라 북아일랜드는 영국 내 기존 지위를 유지했다.[49]
인도에서도 1919년 인도 정부법이 독립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투쟁이 시작되었다.[49] 가다르 음모 이후 롤랫 법에 따른 전시 규제 갱신은 긴장을 높였고,[49] 암리차르 학살로 절정에 달했다. 영국 내 여론은 학살의 도덕성을 두고 분열되었다.[49] 비협조 운동은 차우리 차우라 사건 이후 1922년 3월 중단되었지만, 불만은 25년간 지속되었다.[49]
1922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이집트는 공식 독립했지만, 1954년까지 영국의 종속국이었다. 영국군은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 체결 전까지 이집트에 주둔했다.[49] 조약에 따라 영국군은 철수하되 수에즈 운하 지역 점령과 방어는 유지했다. 이집트는 국제 연맹 가입 지원을 받았다.[49] 1920년부터 영국 위임통치령이었던 이라크는 1932년 독립 후 국제 연맹 회원국이 되었다.[49]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은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 중재 문제에 직면했다. 발푸어 선언은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국토 설립과 유대인 이민 허용을 명시했다.[49] 이는 아랍인과의 갈등을 야기, 1936년 봉기로 이어졌다. 1930년대 독일과의 전쟁 위협 속에서 영국은 아랍 지지를 우선시하여 유대인 이민을 제한, 유대인 반란을 초래했다.[49]
1923년 제국 회의에서 도미니언의 독자적 외교 정책 수립권이 인정되었다.[49] 차낙 위기 당시 캐나다와 남아프리카는 군사 지원을 거부했고, 캐나다는 1923년 로잔 조약 구속을 거부했다.[49] 1926년 제국 회의에서 1926년 발푸어 선언이 발표, 영국과 도미니언은 "영국 제국 내 동등 지위, 자치 공동체"인 "영국 연방"으로 선언되었다.[49] 이 선언은 1931년 웨스트민스터 법령으로 법적 실체를 얻었다.[49]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 아일랜드 자유국, 뉴펀들랜드 의회는 영국 입법 통제에서 독립, 영국 법 무효화 권한을 얻었고, 영국은 동의 없이 법 제정이 불가능했다.[49] 뉴펀들랜드는 대공황 속 재정난으로 1933년 식민지 지위로 복귀했다.[49] 1937년 아일랜드 자유국은 공화국 헌법을 도입, ''아일랜드''로 개명했다.[49]
6.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영국은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영국령 인도 제국을 포함한 직할 식민지들과 아일랜드를 제외한 모든 자치령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아일랜드 자유국은 영국 해군 철수 조약항에 따라 중립을 유지하기로 하였다.[141]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의 동맹으로서 전쟁에 참가하였는데,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 로버트 멘지스는 영국의 선전포고에 오스트레일리아도 자동 참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멘지스는 윈스턴 처칠이 오스트레일리아군을 중동에서 혹사하는 것에 대해 염려하였다.[141] 멘지스의 후임자 존 커틴은 영국에 대해 뿌리 깊은 환멸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그는 독자적으로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보몽이 지적한 것처럼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사이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1941년 12월 7일 커틴은 미국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더는 자국의 이익을 영국의 이익보다 아래에 두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하였다.[142]제국 전체가 전쟁에 동원되었다. 세계 각지로부터 군수품과 인적 자원이 동원되었다. 자치령들은 유럽에서의 공중전을 위해 많은 항공기 승무원들을 파병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캐나다에서 훈련을 받았다. 다국적으로 이루어진 영국 제8 육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군과 싸웠다. 1941년 진주만공습으로 미국에 참전하여 일본과 싸워서 미국의 승리를 도왔다.

1940년 6월 프랑스 함락 이후, 영국과 제국은 1941년 4월 7일 그리스 침공이 있을 때까지 독일과 단독으로 맞섰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지만, 루즈벨트는 아직 미국 의회에 전쟁 참여를 요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50] 1941년 8월, 처칠과 루즈벨트는 만나 대서양 헌장에 서명하였는데, 여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표현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침략한 유럽 국가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유럽 국가들에 의해 식민지화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지 모호했으며, 나중에 영국, 미국, 그리고 민족주의 운동에 의해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50]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영국 인도 제국을 포함한 속국들의 자결에 관해서는 이것의 보편적 적용 가능성을 거부했다. 처칠은 또한 자신이 제국의 청산을 감독하기 위해 총리가 된 것이 아니라고 덧붙였다.[51]
처칠에게 있어 미국의 전쟁 참여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52] 그는 이제 영국의 승리가 확보되었다고 생각했지만,[52] 1941년 12월에 "앞으로 닥칠 많은 재난, 헤아릴 수 없는 비용과 시련"이 제국의 미래에 영구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극동에서 영국군이 급속히 패배한 방식은 영국의 제국 권력으로서의 위상과 명성을 돌이킬 수 없게 손상시켰다.[52] 특히, 이전에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지브롤터의 동쪽에 해당하는 것으로 칭송받았던 싱가포르 함락을 포함한다.[52] 영국이 제국 전체를 방어할 수 없다는 깨달음은 이제 일본군의 위협을 받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미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1951년 ANZUS 조약으로 이끌었다.[52] 전쟁은 다른 방식으로 제국을 약화시켰다. 인도에서 영국의 정치적 지배를 약화시키고, 장기적인 경제적 피해를 입히고, 소련과 미국을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지정학을 돌이킬 수 없게 변화시켰다.[52]
7. 식민지의 독립과 붕괴 (1945년 ~ 1997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대영 제국은 승리했지만, 전쟁의 영향은 국내외 모두에 엄청났다. 수 세기 동안 세계를 지배해 온 유럽 대륙의 상당 부분이 폐허가 되었고,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세계 질서의 균형을 쥐게 되었다.[50] 영국은 사실상 파산 상태에 놓였고, 1946년 미국으로부터 37억 5천만 달러 차관을 협상한 후에야 파산을 면했다.[53][54]
이와 동시에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에서 반식민주의 운동이 급증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경쟁이 심화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원칙적으로 두 국가 모두 유럽 식민주의에 반대했지만,[55] 실제로는 미국의 반공주의가 반제국주의보다 우선했기 때문에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대영 제국의 존속을 지지했다.[55]
처음에 영국 정치인들은 재구상된 연방을 중심으로 세계 강국으로서 영국의 역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51] 1960년까지는 저항할 수 없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50] 그들의 우선순위는 광범위한 영국 영향권 유지[66] 및 전 식민지에 안정적인 비공산주의 정부 수립으로 바뀌었다.[62] 이러한 맥락에서 프랑스와 포르투갈과 같은 다른 유럽 강국들이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값비싼 전쟁을 벌이고 실패한 반면, 영국은 일반적으로 식민지로부터 평화적인 분리를 채택했지만, 말레이아, 케냐, 팔레스타인에서는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55] 1945년부터 1965년 사이에 영국 통치 하에 있던 영국 자체를 제외한 인구는 7억 명에서 500만 명으로 감소했고, 그중 300만 명은 홍콩에 있었다.[53]
1951년 총선에서 윈스턴 처칠의 지도 아래 보수당이 영국에서 다시 집권했다. 처칠과 보수당은 영국의 세계 강국으로서의 지위는 제국의 지속적인 존재에 달려 있으며, 수에즈 운하 기지가 인도 상실에도 불구하고 중동에서 영국의 최고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1952년 권력을 장악한 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집트 정부를 무시할 수 없었고, 이듬해 영국군이 수에즈 운하 지역에서 철수하고 수단이 1955년까지 자결권을 부여받아 1956년 1월 1일에 독립하기로 합의했다.[53]
1956년 7월, 나세르는 일방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다. 처칠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앤서니 이든은 프랑스와 공모하여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을 유도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운하를 탈환할 구실을 만들었다.[59] 이든은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게 사전 협의 없이 행동하여 그의 분노를 샀고, 아이젠하워는 침공을 지지하지 않았다.[59] 아이젠하워는 영국 파운드화의 미국 매장량을 매각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금융 레버리지를 활용하여 영국 통화의 붕괴를 초래하려 했다.[59] 침공군이 군사적으로 목표를 달성했지만,[59] UN의 개입과 미국의 압력으로 영국은 군대를 굴욕적으로 철수해야 했고, 이든은 사임했다.[59] 수에즈 위기는 영국의 한계를 세계에 공개적으로 드러냈고, 세계 무대에서 영국의 쇠퇴와 일류 강국으로서의 종말을 확인시켜 주었다.[60][61]
해럴드 맥밀런은 1960년 2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이 대륙을 가로지르는 변화의 바람"에 대해 연설하며,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벌이고 있던 것과 같은 유형의 식민지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탈식민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46] 1950년대에 독립을 얻은 수단, 골드코스트, 말레이아 세 식민지에 1960년대에는 그 10배에 가까운 수의 식민지가 추가되었다.
자치령인 남부 로디지아를 제외하고 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영국의 식민지는 모두 1968년까지 독립했다. 1952년부터 케냐 식민지에서는 8년 동안 마우마우 반란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수만 명의 반란 용의자들이 식민 정부에 의해 구금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1000명 이상의 유죄 판결자들이 처형되었고 기록은 체계적으로 파기되었다.[65] 1960년대 내내 영국 정부는 제국 탈식민화에 대해 "다수 통치 이전에는 독립 없다" 정책을 택하여 남부 로디지아의 백인 소수 정부가 1965년 영국으로부터 일방적 독립 선언을 하도록 이끌었고, 이는 1979년 영국이 중재한 란카스터 하우스 협정까지 지속된 내전을 초래했다.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은 스페인 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영유권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영국은 이어진 포클랜드 전쟁에서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하기 위한 군사 작전에 성공하면서, 세계 강국으로서의 영국의 하락세를 반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1984년 중영 공동 선언에 따라 홍콩은 1997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1982년 9월, 마거릿 대처 수상은 영국의 마지막이자 가장 인구가 많은 해외 영토인 홍콩의 미래에 대해 중국 공산당 정부와 협상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다.[67] 1842년 난징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에 따라 홍콩 섬과 구룡반도는 영구히 영국에 할양되었지만, 식민지의 대부분은 1898년 99년 임대 계약에 따라 획득한 신계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 계약은 1997년에 만료될 예정이었다.[67] 포클랜드 제도와 유사점을 발견한 대처 수상은 처음에 홍콩을 유지하고 중국 주권 하에 영국 행정을 제안했지만,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67] 중영 공동 선언을 통해 홍콩 반환 합의에 도달했다. 1997년 홍콩 반환식은 당시 참석했던 찰스 3세(당시 웨일스 공)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지만,[67] 제국의 잔재인 많은 영국령이 여전히 남아 있다.
7. 1. 인도의 독립
마하트마 간디와 수바스 찬드라 보스가 이끄는 인도 국민 회의파가 40년에 걸쳐 인도 사람들의 자치와 주권을 얻기 위한 독립 운동을 지휘한 끝에, 1947년 8월 마침내 영국령 인도 제국이 종식되면서 대영 제국은 가장 크고 값진 식민지인 인도 제국을 상실했다.[55]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이끄는 이슬람교도 연맹은 무슬림 지역을 인도에서 분리하여 파키스탄을 건국하는 데 성공했다. 인도의 분할은 대규모 인구 교환과 광범위한 폭력 사태를 야기하여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55]
7. 2. 수에즈 사태
1952년 7월, 이집트에서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은 나세르는 혁명 4주년을 맞아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가 사라졌다. 분노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비밀 협정을 맺고 수에즈 운하를 되찾으려 했다.[143]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은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수에즈 운하로 진격했다. 다음 날,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이집트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운하 입구의 도시 포트사이드를 공격했다. 일주일 간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했고 이집트는 영토 일부를 잃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시대착오적인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그해 12월 22일, 두 나라 군대는 모두 이집트에서 철수했다. 이스라엘군도 1957년 3월에 철수했으며, 미국이 중동에 막대한 경제 원조를 제공하며 그 공백을 메웠다.[143]
이 사건으로 나세르는 전쟁에서 지고도 아랍의 영웅이 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 지역에서 행사하던 영향력을 거의 잃어버렸다.[143]
7. 3.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독립
마틴 맥밀런은 1960년 2월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이 대륙을 가로지르는 변화의 바람"에 대해 연설했다. 맥밀런은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벌이고 있던 것과 같은 유형의 식민지 전쟁을 피하고자 했으며,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탈식민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46] 1950년대에 독립을 얻은 수단, 골드코스트, 말레이아 세 식민지에 1960년대에는 그 10배에 가까운 수의 식민지가 추가되었다. 이 기간 동안 탈식민화의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1966년에 식민지 장관 직책과 식민청이 폐지되었고, 1968년 10월에는 영연방 관계청과 합쳐져 외교 및 영연방청(현재 외교, 영연방 및 개발청)이 되었다.[64]자치령인 남부 로디지아를 제외하고 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영국의 식민지는 모두 1968년까지 독립을 얻었다. 아프리카 남부와 동부 지역에서 영국의 철수는 평화로운 과정이 아니었다. 1952년부터 케냐 식민지에서는 8년 동안 마우마우 반란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수만 명의 반란 용의자들이 식민 정부에 의해 구금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1000명 이상의 유죄 판결자들이 처형되었고 기록은 체계적으로 파기되었다.[65] 1960년대 내내 영국 정부는 제국 탈식민화에 대해 "다수 통치 이전에는 독립 없다" 정책을 택하여 남부 로디지아의 백인 소수 정부가 1965년 영국으로부터 일방적 독립 선언을 하도록 이끌었고, 이는 1979년 영국이 중재한 란카스터 하우스 협정까지 지속된 내전을 초래했다. 이 협정은 영국 제국이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일시적으로 남부 로디지아 식민지를 재건하여 다수 통치 짐바브웨 공화국으로의 과도 정부로 만들었다. 이것이 아프리카에서 마지막 영국령이었다.

7. 4. 포클랜드 전쟁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는 자국 영토임을 주장하며 아르헨티나 부근의 영국령 포클랜드섬을 무력으로 점령했고, 이로 인해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군은 기동부대를 파견했고, 유엔 사무총장의 조정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포클랜드섬에 상륙하여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을 받아냈다.[144] 영국은 이 분쟁에서 포클랜드섬을 계속 보유하게 되었으나, 두 달에 걸친 격렬한 전투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전쟁으로 천 명 이상이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포클랜드 제도를 방위하기 위해 주민의 두 배가 넘는 약 4천 명의 영국군을 주둔시켜야 했다.[144]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제도 침공으로 인해 영국의 남은 해외 영토 방위에 대한 결의가 시험대에 올랐다. 아르헨티나의 침공은 스페인 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영유권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영국은 이어진 포클랜드 전쟁에서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하기 위한 군사 작전에 성공하면서, 세계 강국으로서의 영국의 하락세를 반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7. 5. 홍콩 반환
1984년 중영 공동 선언에 따라 홍콩은 1997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1982년 9월, 마거릿 대처 수상은 영국의 마지막이자 가장 인구가 많은 해외 영토인 홍콩의 미래에 대해 중국 공산당 정부와 협상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다.[67] 1842년 난징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에 따라 홍콩 섬과 구룡반도는 영구히 영국에 할양되었지만, 식민지의 대부분은 1898년 99년 임대 계약에 따라 획득한 신계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 계약은 1997년에 만료될 예정이었다.[67] 포클랜드 제도와 유사점을 발견한 대처 수상은 처음에 홍콩을 유지하고 중국 주권 하에 영국 행정을 제안했지만,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67] 중영 공동 선언을 통해 홍콩 반환 합의에 도달했다. 1997년 홍콩 반환식은 당시 참석했던 찰스 3세(당시 웨일스 공)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지만,[67] 제국의 잔재인 많은 영국령이 여전히 남아 있다.8. 영연방
대영 제국은 수백 년에 걸쳐 전 세계로 확장되었으며, 그 유산은 오늘날 영연방이라는 형태로 남아있다. 영연방은 과거 대영 제국의 일원이었던 독립 국가들의 자발적인 연합체이다.
1981년 영국 국적법에 따라 이전의 왕관 식민지는 "영국 속령"으로 개명되었고, 2002년에는 영국 해외 영토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68][69] 옛 영국 식민지와 보호령 대부분은 약 22억 명의 인구를 가진 동등한 회원들의 자발적 연합체인 영연방에 속해 있다.[70]
8. 1. 영연방의 기원
1981년 영국 국적법에 따라 이전의 왕관 식민지는 "영국 속령"(British Dependent Territories)으로 개명되었고,[68] 2002년에는 영국 해외 영토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69] 옛 영국 식민지와 보호령 대부분은 약 22억 명의 인구를 가진 동등한 회원들의 자발적 연합체인 영연방에 속해 있다.[70] 영국과 14개 다른 나라들은 영연방 왕국으로 알려져 있으며, 찰스 3세를 국가 원수로 자발적으로 공유한다. 이 15개국은 영국 군주국, 오스트레일리아 군주국, 캐나다 군주국, 뉴질랜드 군주국, 앤티가 바부다 군주국, 바하마 군주국, 벨리즈 군주국, 그레나다 군주국, 자메이카 군주국, 파푸아뉴기니 군주국, 세인트 키츠 네비스 군주국, 세인트루시아 군주국,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군주국, 솔로몬 군도 군주국, 투발루 군주국으로 구별되는 동등한 법적 실체이다.[71]8. 2. 영연방의 구성과 역할
영국은 영국령 제도를 제외한 14개의 영토에 대한 주권을 유지하고 있다. 1983년 1981년 영국 국적법(British Nationality Act 1981)은 기존의 왕관 식민지(Crown Colonies)를 "영국 속령"(British Dependent Territories)으로 개명했고,[68] 2002년에는 영국 해외 영토(British Overseas Territories)로 이름이 바뀌었다.[69] 대부분의 옛 영국 식민지와 보호령은 약 22억 명의 인구로 구성된 동등한 회원들의 자발적 협회인 영연방의 회원이다.[70] 영국과 다른 14개국은 모두 영연방 왕국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발적으로 찰스 3세(Charles III) 국왕을 국가원수로 공유하고 있다. 이 15개국은 영국 군주국(Monarchy of the United Kingdom), 오스트레일리아 군주국(Monarchy of Australia), 캐나다 군주국(Monarchy of Canada), 뉴질랜드 군주국(Monarchy of New Zealand), 앤티가 바부다 군주국(Monarchy of Antigua and Barbuda), 바하마 군주국(Monarchy of the Bahamas), 벨리즈 군주국(Monarchy of Belize), 그레나다 군주국(Monarchy of Grenada), 자메이카 군주국(Monarchy of Jamaica), 파푸아뉴기니 군주국(Monarchy of Papua New Guinea), 세인트 키츠 네비스 군주국(Monarchy of Saint Kitts and Nevis), 세인트루시아 군주국(Monarchy of Saint Lucia),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군주국(Monarchy of Saint Vincent and the Grenadines), 솔로몬 군도 군주국(Monarchy of the Solomon Islands), 투발루 군주국(Monarchy of Tuvalu)으로 구별되고 동등한 법적 실체이다.[71]

수십 년, 어떤 경우에는 수세기 동안의 영국 통치와 영국 이민(British diaspora)은 대영 제국에서 독립한 국가들에 흔적을 남겼다. 제국은 전 세계 지역에서 영어 사용을 확립했다. 오늘날 영어는 최대 4억 6천만 명의 사람들의 주요 언어이며, 15억 명이 제1, 제2 또는 외국어로 사용한다.[72] 특히 축구, 크리켓, 정구, 골프와 같이 영국에서 발전한 개인 및 단체 스포츠는 수출되었다.[73]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의 의원내각제는 많은 옛 식민지 정부의 모범이 되었고,[74] 영국법인 영미법은 법 체계의 모범이 되었다.[75]
9. 대영 제국의 유산과 영향
대영 제국은 14개의 영국 해외 영토에 대한 주권을 유지하고 있다. 1983년 1981년 영국 국적법에 따라 기존의 왕관 식민지들은 "영국 속령"으로 개명되었고, 2002년에는 다시 영국 해외 영토로 이름이 바뀌었다. 옛 식민지와 보호령 대부분은 영연방 회원국으로, 약 22억 명의 인구를 가진 동등한 회원들의 자발적 연합체이다. 영국을 포함한 15개 국가는 영연방 왕국으로, 찰스 3세를 국가 원수로 공유한다.[71]
수 세기 동안 지속된 영국의 통치와 영국 이민은 독립한 국가들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제국은 영어를 전 세계로 확산시켰고, 현재 영어는 4억 6천만 명의 주요 언어이며, 15억 명이 제1, 제2 또는 외국어로 사용한다.[72] 축구, 크리켓 등 영국에서 발전한 스포츠들도 널리 퍼졌다.[72] 영국의 선교사들은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앵글리칸교 포함), 의학, 교육, 법률을 전파했고,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72]
대영 제국은 대규모 인구 이동을 초래했다. 수백만 명이 영국 제도를 떠나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지에 정착했고, 남아시아 디아스포라는 말레이시아, 피지 등으로, 화교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카리브해 등으로 이주했다.[7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옛 식민지에서 영국으로의 이민이 증가했다.[72]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에 기반한 의원내각제는 많은 옛 식민지 정부의 모델이 되었고,[73] 영미법은 법 체계의 기반이 되었다.[73] 국제 상업 계약은 종종 영미법에 기초하며,[73] 영국의 추밀원 사법위원회는 여전히 일부 옛 식민지의 최고 항소 법원 역할을 한다.[73]
18세기와 19세기 영국의 혁신과 발견은 제조업, 교통 등의 발전을 이끌었다.[72] 영국 식민지 건축 양식은 여러 도시에서 볼 수 있으며,[72] 야드 파운드 법과 좌우측 통행 관습도 일부 지역에 남아 있다.[72]
대영 제국은 시대별 특징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아일랜드와 북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하여 13개 식민지(북미 식민지) 및 카리브해 식민지와의 무역을 중심으로 한 시대.
- 미국(미국 연합국) 독립 이후 아시아·아프리카로 무역 대상을 전환하여 19세기 중반까지 최전성기를 구축한 자유무역 시대.
- 자유무역을 유지하면서도 프로이센 왕국(후의 독일 제국) 등 후발 공업국의 추격을 받아 식민지 확장을 진행한 제국주의 시대.
- 20세기에 들어 각 식민지가 독자적인 외교 권한을 얻게 된 웨스트민스터 헌장 이후의 시대.
일반적으로 대영 제국이라고 불리는 것은 특히 3과 4의 시대를 가리킨다. 1과 2를 "제1제국", 3과 4를 "제2제국"이라고 부른다. 영국 제2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케이블 앤드 와이어리스(Eastern Telegraph Company, 후의 C&W)의 "해저 케이블"을 들 수 있다.
구 제국과 신 제국 체제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구 제국 | 신 제국 | |
---|---|---|
무역 중심지 |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의 식민지>각 식민지 상호 간의 무역 | |
무역 정책 | 자유무역과 중상주의>식민지 내에서는 자유무역, 식민지 밖에서는 보호무역 | |
종교 | 프로테스탄트 계열인 영국 성공회를 유일하게 정확한 신앙으로 여김>종교의 자유 원칙을 채택 |
9. 1. 부정적인 유산
역사가들은 대영제국을 주로 자유화하고 근대화하는 기업으로 보는 인식에 반대하며, 권력 유지를 위해 폭력과 계엄령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것을 비판했다.[76][77] 제국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에는 식민지의 수용소 사용, 원주민 학살,[78] 그리고 기근 대응 정책 등이 포함된다.[79][80] 아마르티야 센을 포함한 일부 학자들은 영국 정책이 영국 통치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낸 인도의 기근을 악화시켰다고 주장한다.[81]9. 2. 긍정적인 유산(논란의 여지가 있음)
수십 년, 어떤 경우에는 수세기 동안의 영국 통치와 영국 이민(British diaspora)은 대영 제국에서 독립한 국가들에 흔적을 남겼다. 제국은 전 세계 지역에서 영어 사용을 확립했다. 오늘날 영어는 최대 4억 6천만 명의 사람들의 주요 언어이며, 15억 명이 제1, 제2 또는 외국어로 사용한다.[72] 또한 다른 언어에 영어화(Englishisation) 영향을 미쳤다. 특히 축구, 크리켓, 정구, 골프와 같이 영국에서 발전한 개인 및 단체 스포츠는 수출되었다.[72] 전 세계를 여행했던 영국의 선교사들은 종종 군인과 공무원보다 앞서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앵글리칸교 포함), 의학 발전, 교육, 법률을 모든 대륙에 전파했다. 대영 제국은 수백 년 동안 종교적 박해를 받는 유럽 대륙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72]대영 제국은 대규모 인구 이동을 초래했다(참조: 영연방 디아스포라). 수백만 명이 영국 제도를 떠났고,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건국 정착민 식민지주의(Settler colonialism) 인구는 주로 영국과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영국 식민지 사이를 이동했고, 많은 수의 남아시아 디아스포라가 말레이시아와 피지와 같은 제국의 다른 지역으로, 화교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카리브해로 이주했다.[72] 영국의 인구 통계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옛 식민지에서의 1922년 이후 영국 이민#전후 이민 (1945–1983)로 인해 변화했다.[72]

18세기와 19세기에 영국의 혁신과 발견 목록은 제조업의 혁신적인 변화, 공장 시스템의 발전, 철도와 증기선에 의한 교통의 발전으로 이어졌다.[72] 대학교, 교회, 기차역, 정부 건물과 같은 영국 식민지 건축 양식은 한때 대영 제국의 일부였던 많은 도시에서 볼 수 있다.[72] 영국의 측정 시스템인 야드 파운드 법은 일부 국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좌우측 통행의 관습은 옛 제국의 많은 지역에서 유지되고 있다.[72]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의 의원내각제는 많은 옛 식민지 정부의 모범이 되었고,[73] 영국법인 영미법은 법 체계의 모범이 되었다.[73] 국제 상업 계약은 종종 영미법에 기초한다.[73] 영국의 추밀원 사법위원회는 여전히 12개의 옛 식민지의 최고 항소 법원 역할을 하고 있다.[73]
10. 한국과의 관계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수립 이후 "대영제국"이라는 명칭은 한국, 중국,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북한, 베트남, 몽골 등 한자 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93] 이 용어는 일본에서 명치유신기부터 일영동맹 체결기까지 "Great Britain"과 "British Empire" 두 영어 단어가 점차 연결되면서 정착되었는데, 당시 일본인이 영국을 세계 최첨단 문명으로 여기는 경향과 대일본제국과의 대칭성을 고려한 결과였다.[91]
영어권에서는 "British Empire"가 "United Kingdom"뿐만 아니라 영국의 모든 식민지를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19~20세기 영국 정부도 공식적으로 "대영제국"이라고 자칭했다. 1707년 연합 조약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평등한 입장에서 하나의 왕가 지배하에 들어갔기 때문에 "대영제국"이라는 명칭이 더 중립적이라고 여겨졌다.
현대 역사학 및 학술 연구에서는 "영국 제국"이라는 번역이 주로 사용되지만, 학문 이외의 영역에서는 "대영제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10. 1. 조선과 영국의 관계
(원문 소스에 조선과 영국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이 섹션은 작성할 수 없습니다.)10. 2. 일제강점기와 영국
일제강점기(1910년 ~ 1945년)는 한반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지만, 주어진 자료에는 이 시기 영국과 한국(또는 조선) 간의 직접적인 관계에 대한 내용은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자료에서 언급된 "대영제국"이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사용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맥락이 존재한다.- "대영제국" 용어의 일본 내 정착:
- "British Empire"의 일본어 번역으로 "대영제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 명치유신기부터 일영동맹 체결기까지 "Great Britain"과 "British Empire" 두 영어 단어가 점차 연결되었다.
- 당시 일본인이 서양, 특히 영국을 세계 최첨단 문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 "대영제국"과 "대일본제국"을 의도적으로 대칭적으로 사용하여, "대영제국" 번역은 일영동맹 성립 이후 일본어 문맥에서 정착되었다고 여겨진다.[91]
- "Great Britain"은 원래 그레이트브리튼섬을 가리키는 말이며, "Great"는 브르타뉴(프랑스)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에서 "대영제국"으로 불리게 된 것은 역사 의식이 배경에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 "대영제국"이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이는 일제강점기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10. 3. 대한민국 수립 이후
"대영제국"이라는 명칭은 "소영"(Little Britain)과의 구별에서 유래한다. 영어권에서는 "British Empire"가 "United Kingdom"뿐만 아니라 영국의 모든 식민지를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19~20세기 영국 정부도 공식적으로 "대영제국"이라고 자칭했다."Empire"나 "Imperial"이라는 영어 단어는 훨씬 이전부터 사용되었지만, 영국이 진정으로 제국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 북미와 카리브해의 식민지가 정비된 무렵이었다. 당시 영국이 "잉글랜드 제국"이라고 자칭하지 않은 이유는 1707년 연합 조약에 따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나라가 평등한 입장에서 하나의 왕가 지배하에 들어갔기 때문에 "대영제국"이라는 명칭이 더 중립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일본어에서는 "대영제국"이라는 번역이 종종 사용되지만, 현대 역사학 및 학술 연구에서는 "영국 제국"이라는 번역이 주로 사용된다. "British Empire"의 일본어 번역으로 "대영제국"이 사용되기 시작한 자세한 경위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Great Britain"과 "British Empire" 두 영어 단어는 명치유신기부터 일영동맹 체결기까지 점차 연결되었으며, 당시 일본인이 서양, 특히 "영국을 세계 최첨단 문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대영제국"과 "대일본제국"을 일부러 대칭적인 의미로 사용하여 "대영제국"이라는 번역은 일영동맹 성립 후 일본어 문맥에서 정착되었다.[91]
Great Britain(그레이트브리튼)을 "대영"으로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Great Britain"은 원래 섬(그레이트브리튼섬)의 이름이며, 이 Great는 소브리튼의 브르타뉴(프랑스)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어에서 "대영제국"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역사 의식이 배경에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 밖에도, 원래 잉글랜드의 포르투갈어 형태에서 유래하는 "영국"이라는 표현은 애매하고 "잘못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웨일스·스코틀랜드·아일랜드도 포함한 연합 왕국(및 식민지)을 "영국"으로 칭하는 것을 피하고, 원어에 더 충실한 "브리튼 제국"도 사용되기 시작하고 있다. 또 단순히 "제국"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대영제국"이라는 말도 서적의 제목 등에서는 종래와 같이 사용되지만, 본문에서는 기본적으로 항상 괄호를 붙여 "대영제국"으로 표기된다.
학문 이외의 영역에서는 제목에 한정되지 않고, 특히 영국 제국 전성기 이후를 가리켜 "대영제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대영제국"에서 파생되어 "British"의 번역으로 "대영"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가장 유명한 예로는 "the British Museum"이 "대영박물관"으로 번역되고, "the British Library"가 "대영도서관"으로 번역되는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the British Council"은 일본어로 그대로 "브리티시 카운슬"이라고 불리고, "British Commonwealth"는 학문·비학문 영역을 불문하고 "영국 연방""영연방"이라고 불리고 있어 "British"에 대응하는 번역어는 반드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중국,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의 중화권과 한국, 북한, 베트남, 몽골 등의 한자 문화권에서는 오랫동안 "'''대영제국'''"으로 불려 왔다.[93]
11. 결론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식민지가 불필요하며, 자유무역이 보호무역주의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4] 1783년 이후 새롭게 독립한 미국과 영국 사이의 무역 증가는 경제적 성공을 위해 정치적 통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스미스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였다.[25]
대영 제국은 시대별 특징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아일랜드와 북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하여 13개 식민지(북미 식민지) 및 카리브해 식민지와의 무역을 중심으로 한 시대.
- 미국(미국 연합국) 독립 이후 아시아·아프리카로 무역 대상을 전환하여 19세기 중반까지 최전성기를 구축한 자유무역 시대.
- 자유무역을 유지하면서도 프로이센 왕국(후의 독일 제국) 등 후발 공업국의 추격을 받아 식민지 확장을 진행한 제국주의 시대.
- 20세기에 들어 각 식민지가 독자적인 외교 권한을 얻게 된 웨스트민스터 헌장 이후의 시대.
일반적으로 대영 제국이라고 불리는 것은 특히 3과 4의 시대를 가리킨다. 1과 2를 "제1제국", 3과 4를 "제2제국"이라고 부른다. 영국 제2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케이블 앤드 와이어리스(Eastern Telegraph Company)의 "해저 케이블"을 들 수 있다.
구 제국과 신 제국 체제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구 제국은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의 식민지"를 중심으로 무역을 전개했지만, 신 제국은 "각 식민지 상호 간의 무역"을 중심으로 전개했다.
- 구 제국은 "자유무역과 중상주의"를 철저히 실행했지만, 신 제국은 "식민지 내에서는 자유무역, 식민지 밖에서는 보호무역" 정책을 실행했다.
- 구 제국은 "프로테스탄트 계열인 영국 성공회"를 유일하게 정확한 신앙으로 여겼지만, 신 제국은 종교의 자유 원칙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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