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아일랜드 조약은 1921년 영국과 아일랜드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아일랜드 대부분 지역에서 영국군이 철수하고 아일랜드는 자치령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 조약은 아일랜드 자유국의 국가 원수를 영국 군주로 하고, 북아일랜드의 탈퇴 선택권을 부여하는 등 여러 조항을 포함했다. 조약 체결에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등 영국 측과 아서 그리피스, 마이클 콜린스 등 아일랜드 측 대표가 참여했다. 조약 내용은 아일랜드 지도부를 분열시켰고, 아일랜드 내전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아일랜드에서는 이 조약이 당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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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아일랜드 - 1921년 아일랜드 총선 1921년 아일랜드 총선은 아일랜드 독립 전쟁 시기에 아일랜드 정부법 1920에 따라 남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의 자치 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실시되었으며, 남아일랜드에서는 신페인이 압승하고 북아일랜드에서는 유니오니스트가 다수를 점했다.
조약의 내용은 아일랜드 국내법보다 우선하며,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 헌법과 충돌 시 조약이 우선한다.
이 조약은 아일랜드 내에서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아일랜드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2. 1. 영국군의 철수
영국군은 아일랜드섬 대부분 지역에서 철수한다. 다만, 영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조약 항구로 알려진 제한된 수의 항구를 영국 해군 통제하에 계속 유지한다.
2. 2. 자치령 지위 부여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아일랜드는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연방과 같은 대영 제국 내 자치령 지위를 부여받았다.[3][4] 이는 아일랜드가 완전한 독립 공화국이 아닌,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하는 자치령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자치령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군주가 아일랜드 자유국(''Saorstát Éireann|사르스타트 에이렌ga'')의 국가 원수가 되었으며,[3][4] 총독이 국왕을 대표했다.[3][4] 새로운 자유국 의회의 의원들은 아일랜드 자유국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야 했다. 이 서약에는 "공동 시민권에 따라 폐하 국왕 조지 5세, 그의 상속인 및 법률에 따른 후계자에게 충실할 것"이라는 내용이 부수적으로 포함되어,[3][4] 아일랜드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조약은 아일랜드 법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졌다. 즉, 조약과 새로운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 헌법 사이에 내용상 충돌이 발생할 경우, 조약의 내용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었다.[3][4]
2. 3. 충성 서약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새롭게 수립될 아일랜드 자유국 의회의 의원들은 충성 서약을 해야 했다.[3][4] 이 서약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아일랜드 자유국 자체에 대한 충성이었고, 둘째는 대영 제국과의 '공동 시민권'에 따라 당시 영국의 국왕이었던 조지 5세와 그의 법적 후계자들에게 충실할 것을 맹세하는 것이었다.[4] 이는 아일랜드가 완전한 공화국이 아닌 대영 제국 내의 자치령 지위를 갖게 됨을 의미하는 조항 중 하나였으며, 아일랜드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2. 4. 북아일랜드의 선택권
북아일랜드는 이전에 아일랜드 정부법에 따라 설립되었으며[4], 영국-아일랜드 조약 발효 후 한 달 이내에 새로 수립될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탈퇴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졌다.[4][36] 만약 북아일랜드가 탈퇴를 선택할 경우, 아일랜드 경계 위원회가 구성되어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아일랜드 사이의 국경을 설정하기로 했다.[4][36]
2. 5. 조약 항구
영국은 자국의 안보를 명분으로, 아일랜드 내 특정 항구들을 조약 항구로 지정하여 영국 해군이 계속 통제하도록 하였다.[4]
2. 6. 기타 조항
아일랜드 자유국은 조약 서명일을 기준으로 영국 부채의 일정 부분을 인수해야 했다.[4] 또한, 조약의 내용은 아일랜드 국내법보다 우선적인 효력을 가졌다. 따라서 조약과 새로 제정될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 헌법의 내용이 충돌할 경우, 조약의 내용이 우선 적용되었다.[4]
3. 조약 협상자
영국-아일랜드 조약 협상은 영국 대표단과 아일랜드 공화국 대표단 간에 이루어졌다. 영국 측 대표단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가 이끌었으며, 아일랜드 측 대표단은 아서 그리피스 외무부 장관이 대표를 맡았다. 양측 대표단에는 주요 각료와 인물들이 참여했으며, 협상 과정을 지원하는 비서진도 있었다.
윈스턴 처칠은 아일랜드 독립 과정에서 영국 내각의 주요 인물로 참여했다. 1921년 2월까지 육군 장관으로서 아일랜드 독립 전쟁 종식을 추진했으며, 이후 식민부 장관으로서 조약 이행과 새로운 아일랜드 자유국과의 관계 설정을 담당했다.
아서 그리피스 (대표단 의장) 캐번 및 페르마나와 티론 TD (동캐번 및 노스웨스트 티론 국회의원)
아일랜드 외무부 장관
마이클 콜린스 아마 및 코크 미드, 노스, 사우스, 사우스이스트 앤드 웨스트 TD (사우스 코크 국회의원)
아일랜드 재무부 장관
로버트 바턴 킬데어-위클로 TD (웨스트 위클로 국회의원)
경제부 장관
이먼 더건 로스-미스 TD (사우스 미스 국회의원)
조지 개번 더피 더블린 카운티 TD (사우스 더블린 국회의원)
아일랜드 측 대표단의 비서는 다음과 같다.
어스킨 차일더스 (소설 ''모래의 수수께끼''의 저자이자 전 영국 하원 서기)
피넌 린치
디어뮈드 오 헤게르티
존 스미스 차트레스
아일랜드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에이먼 데 발레라는 협상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일랜드 측 협상자 중 로버트 바턴은 마지막 생존자로, 1975년 8월 10일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3. 협상 지원
협상 과정에서 양측은 다음과 같은 비서진의 지원을 받았다.
'''영국 측'''
토마스 존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의 주요 조수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저서 ''화이트홀 일기''에서 협상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다.
라이오넬 조지 커티스
'''아일랜드 측'''
어스킨 차일더스: 유명 소설 ''모래의 수수께끼''의 저자이자 전 영국 하원 서기 출신으로, 아일랜드 대표단의 비서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피난 린치
디아르무이드 오헤거티
존 스미스 차트레스
4. 조약 협상 과정
조약에 반대한 이몬 데 발레라.
영국-아일랜드 전쟁의 휴전 며칠 후, 아일랜드 공화국의 대통령 이몬 데 발레라는 1921년 7월 14일부터 시작하는 주 동안 런던에서 영국 수상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네 차례 만났다.[10] 로이드 조지는 7월 20일에 최종적으로 서명된 조약과 거의 일치하는 초기 제안을 보냈다.[11] 그러나 데 발레라는 직접 협상에 참여하는 대신, 몇 가지 비밀 지령과 조약 초안을 주어 아일랜드 사절단을 런던으로 파견했다.
10월, 아일랜드 대표단은 런던 나이츠브리지의 22 한스 플레이스에 본부를 마련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의 처음 2주는 공식적인 회의로 진행되었다. 이후 아서 그리피스와 마이클 콜린스의 요청에 따라, 양측 대표단은 각 협상팀에서 두 명씩만 참석하는 비공식 협상으로 전환했다. 아일랜드 측에서는 항상 그리피스와 콜린스가 참여했으며, 영국 측에서는 오스틴 체임벌린이 항상 참석했고 다른 한 명의 영국 측 협상가는 자주 바뀌었다.[12]
11월 말과 12월 3일, 아일랜드 대표단은 지시에 따라 더블린으로 돌아가 내각과 협상 진행 상황을 논의했다.[12] 당시 해결해야 할 주요 쟁점은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의 형식이었으나, 32개 카운티 전체를 포함하는 공화국 설립은 영국 측 제안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런던으로 돌아온 콜린스와 그리피스는 충성 서약 문구, 국방 및 통상 조항에 대한 영국의 일부 양보, 그리고 아일랜드 경계 위원회 설립 및 아일랜드 통일 가능성을 열어두는 조항 추가 등 조약의 최종 세부 사항을 조율했다.
콜린스와 그리피스는 다른 아일랜드 대표단원들을 설득하여 조약에 서명하도록 했다. 최종 서명 결정은 1921년 12월 5일 오전 11시 15분, 한스 플레이스 22번지에서 비공개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조약은 12월 6일 오전 2시 직후 10 다우닝가의 내각 회의실에서 공식 서명되었다.[13]
마이클 콜린스는 훗날 로이드 조지가 협상 마지막 순간에 조약에 즉시 서명하지 않으면 "끔찍하고 즉각적인 전쟁"을 재개하겠다고 아일랜드 대표단을 위협했다고 주장했다.[14] 아일랜드 측 협상 기록에는 이것이 명시적인 '위협'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으나,[15] 대표단원이었던 로버트 바톤은 로이드 조지가 자신에게 "어떤 대표자가 협정 조항에 서명을 거부하면 즉시 뒤따를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엄숙하게 말했다고 기록했다. 대표단원이었던 조지 가반 더피는 조약 서명을 강요받은 압박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특정 조약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인 전쟁이 벌어질 것이었다...우리는 세 시간 안에 선택을 해야 했고, 내각이나 의회, 또는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우리는 아일랜드 국민을 구하기 위해 공화국을 잃었다.[16]
영국의 윈스턴 처칠 역시 조약 서명 몇 달 후인 1922년 2월 16일 영국 의회 연설에서, 만약 아일랜드 대표단이 서명을 거부했다면 영국은 "돈과 인력 면에서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 이전에 발생했던 어떤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유혈 사태를 겪으며 아일랜드를 재정복하는 데 착수해야 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17]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몬 데 발레라는 12월 8일 내각 회의를 소집하여 조약에 대해 논의했으며, 서명된 조약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일랜드 공화국 내각은 찬성 4표, 반대 3표로 조약을 도일 에이렌(아일랜드 의회)에 권고하기로 결정했다.[18]
5. 조약의 비준과 결과
1921년 12월 아일랜드로 돌아가는 아일랜드 협상 위원회 위원들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조약 조건에 따라 영국 의회와 남아일랜드 하원의 승인이 필요했다. 남아일랜드 하원은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에 따라 1921년 아일랜드 총선에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되었으나, 선출된 신 페인 후보 대다수는 하원 출석을 거부하고 대신 아일랜드 전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제2 대일을 구성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운영된 적이 없었다.[20]
영국 의회에서는 1921년 12월 16일, 하원과 상원 모두 조약을 승인했다.[21][22]
아일랜드 측에서는 제2 대일이 1922년 1월 7일 격론 끝에 조약을 승인했지만, 이는 조약에서 명시한 공식적인 비준 절차는 아니었다. 따라서 조약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법적으로 요구된 "회의", 즉 남아일랜드 하원 의원들의 회의가 1922년 1월 14일에 형식적으로 소집되어 조약을 승인했다. 이 회의는 조약 반대파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영국 당국은 이를 통해 조약의 법적 요건이 충족되었다고 간주했다.
조약 비준을 위해 필요한 법률 제정은 영국 의회에서 이루어졌으며, 아일랜드 자유국 (협정) 법 1922가 1922년 3월 31일에 발효되었다.[23][24][25]
이 조약의 결과로 아일랜드 독립 전쟁은 종결되었고, 대영 제국 내 자치령(Dominion) 지위의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었다.[36] 한편, 1920년 아일랜드 통치법에 따라 이미 성립된 북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의회를 유지하며, 그 귀속 문제는 북아일랜드 자체의 결정에 맡겨지게 되었다.[36] 그러나 조약의 내용은 아일랜드 내부에서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야기했다.
5. 1. 아일랜드 의회의 분열
영국-아일랜드 조약의 내용은 아일랜드 공화국 지도부를 심각하게 분열시켰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이몬 데 발레라는 조약에 반대하는 소수파를 이끌었다. 가장 큰 쟁점은 아일랜드가 완전한 공화국으로서 독립하는 대신, 영국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자치령(Dominion) 지위를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아일랜드의 분할 문제 역시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당시에는 조약에 포함된 아일랜드 국경위원회가 민족주의자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을 자유국에 편입시켜 북아일랜드의 영토를 정치적으로 존립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축소할 것이라고 양측 모두 기대했기 때문에, 자치령 지위 문제만큼 첨예한 쟁점은 아니었다.[27]
1921년 12월, 아일랜드 제2대 의회(Second Dáil)는 조약 비준을 위한 격렬한 토론에 들어갔다. 토론은 12월 14일부터 이듬해 1월 7일까지 공개 및 비공개 회의를 번갈아 가며 진행되었다. 비공개 회의에서 데 발레라는 자신의 대안적인 조약 문서를 제시하기도 했으나, 영국 측이 받아들일 리 없는 내용이었다.[28] 특히 협상 대표단이었던 로버트 바튼이 협상 마지막 단계에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로부터 "끔찍하고 즉각적인 전쟁"을 재개하겠다는 위협을 받으며 강압적으로 조약에 서명했다는 주장은 조약 반대파에게 중요한 논거가 되었다.[29] 데 발레라 역시 이 문서는 강압에 의해 서명되었으므로 아일랜드 국민에게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했다.[30]
1922년 1월 7일, 제2대 의회는 64표 대 57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조약을 최종 비준했다. 데 발레라는 이 결과에 불복하며 1월 9일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조약 찬성파를 이끌었던 아서 그리피스가 투표를 통해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마이클 콜린스는 조약 규정에 따라 아일랜드 자유국 임시 정부를 구성하여 실질적인 정부 수립 작업을 이끌었다. 한편, 영국법에 따라 설립된 남아일랜드 의회 역시 1922년 1월 조약을 공식적으로 비준했다.
조약을 둘러싼 아일랜드 내부의 분열은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져 아일랜드 내전(1922-1923)이 발발했다. 이 비극적인 내전 과정에서 1922년 8월, 그리피스 대통령이 병으로 사망했고, 불과 일주일 뒤에는 마이클 콜린스가 조약 반대파 공화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두 사람의 자리는 윌리엄 토마스 코즈그레이브가 승계했다.
마이클 콜린스는 조약이 완전한 독립은 아닐지라도 "자유를 얻기 위한 자유"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훗날 이몬 데 발레라는 조약에 반대한 것이 자신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고 인정하기도 했다.[32] 오늘날 아일랜드에서는 데 발레라가 창당한 피아나 페일당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당시 상황에서 조약 체결이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조약 반대가 결과적으로 더 큰 비극을 초래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5. 2. 아일랜드 내전 발발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대한 아일랜드 내부의 찬반 분열은 결국 아일랜드 내전(1922–1923)으로 이어졌다. 조약 비준 이후 이몬 데 발레라를 중심으로 한 조약 반대 세력은 무력 행동을 개시했다.
1922년, 내전의 와중에 조약의 주요 아일랜드 서명자 두 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아일랜드 공화국의 대통령직을 승계했던 아서 그리피스는 8월 초 탈진으로 인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33] 그로부터 불과 열흘 뒤, 임시정부 수장이었던 마이클 콜린스 역시 1922년8월 Béal na Bláth에서 조약 반대파 공화주의자들의 매복 공격을 받아 암살당했다. 콜린스는 조약 서명 당시 비르켄헤드 경에게 조약 서명이 자신의 실제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33] 그리피스와 콜린스의 직위는 모두 W. T. 코즈그레이브가 승계했다.
내전은 극심한 대립을 낳았으며, 조약 협상 대표단이었으나 조약에 반대했던 어스킨 차일더스는 반조약 선전을 주도하다가 1922년 11월 권총 소지 혐의로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5. 3. 아일랜드 자유국 수립
영국 의회는 조약 비준에 필요한 법률로서 아일랜드 자유국 (협정) 법 1922를 제정하여 1922년 3월 31일 발효시켰다.[23][24][25]
도일 에런과 영국 의회가 기안한 자유국 헌법을 기초로, 조약이 서명된 지 정확히 1년 후인 1922년 12월 6일, 영국 국왕의 칙서에 의해 아일랜드 자유국이 공식적으로 건국되었다.[36] 이로써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종결되고 대영 제국 내의 자치령(도미니언)으로서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었다.[36]
1924년 7월 11일, 아일랜드 자유국은 이 조약을 국제 연맹에 등록하였다.[26]
5. 4. 조약의 수정
영국 의회가 1931년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제정한 이후, 조약의 일부 조항은 아일랜드 자유국에 의해 수정되었다. 이 헌장은 영국 의회가 도미니언의 동의 없이는 해당 도미니언을 위한 입법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함으로써, 사실상 각 도미니언에게 완전한 입법적 자율성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이전에 영국 의회가 아일랜드를 위해 제정한 법률, 즉 영국-아일랜드 조약의 내용을 자국 헌법 내에서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했다. 그 결과, 아일랜드 자유국 헌법에서 군주, 총독에 대한 조항 및 법률상 조약의 우위에 관한 조항들이 삭제되었다.
이는 약 10년 전 마이클 콜린스가 조약이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유를 쟁취할 자유"를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1930년대 에이먼 데 벌레라 정부는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통해 얻은 권한을 활용하여 조약의 제약을 제거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이는 콜린스의 예측이 실현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데 벌레라 자신도 1932년 정부를 구성하고 이전 W. T. 코스그레이브 행정부의 기록을 검토한 후, 조약 지지자들이 독립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이룬 성과를 인정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6. 조약에 대한 평가
영국-아일랜드 조약은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종식시키고 아일랜드 자유국을 탄생시킨 역사적 합의였으나, 동시에 아일랜드 사회를 극심한 분열로 몰아넣고 비극적인 아일랜드 내전을 촉발한 원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조약에 대한 평가는 체결 당시부터 현재까지 엇갈리고 있다.
조약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면에서는, 비록 완전한 독립 공화국은 아니었지만 대영 제국 내 자치령(Dominion)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이전의 자치 정부(Home Rule) 논의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획득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마이클 콜린스는 조약이 아일랜드에게 완전한 독립은 아니더라도 "freedom to achieve freedom|자유를 쟁취할 자유영어"를 줄 것이라고 주장했으며[33], 실제로 이후 웨스트민스터 헌장 등을 통해 아일랜드는 점진적으로 주권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반면, 부정적인 평가로는 조약이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지 못하고 영국 군주에 대한 충성 맹세 등 주권 제약 요소를 남겼으며, 무엇보다 북아일랜드 6개 주의 분할을 공식화하여 국토 분단을 고착시켰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러한 불만은 조약 찬성파와 반대파 간의 격렬한 대립으로 이어져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인 아일랜드 내전으로 폭발했다. 조약 체결을 주도했던 아서 그리피스와 마이클 콜린스가 내전 와중에 사망하는 등 아일랜드 민족 지도자들의 희생도 컸다.
이처럼 영국-아일랜드 조약은 아일랜드 독립 과정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깊은 상처를 남긴 양면성을 지닌 사건으로 평가된다. 조약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영향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6. 1. 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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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콜린스는 조약이 아일랜드에게 완전한 독립은 아니지만, "freedom to achieve freedom|자유를 쟁취할 자유영어"를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33] 이는 조약이 당장의 완전한 공화국 설립은 아니더라도, 아일랜드가 더 큰 자율성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조약은 폭력으로 점철되었던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종식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6]
조약을 통해 아일랜드는 대영 제국 내 자치령(Dominion) 지위를 획득했는데, 이는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와 동등한 수준의 자치권을 의미했다. 이는 1914년 자치 정부법이나 19세기에 찰스 스튜어트 파넬에게 제안되었던 자치 정부(Home Rule)보다 훨씬 진전된 것이었다. 비록 북아일랜드 6개 주의 분할이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26개 주가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확보한 것은 독립을 향한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34]
당시 영국 정부 입장에서도 조약은 현실적인 타협안이었다. 영국은 연합주의자와 민족주의자 간의 극심한 대립과 얼스터 의용군 등의 무장 저항 가능성 때문에 아일랜드 전체에 완전한 독립을 부여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연합주의자들이 통제 가능하다고 여긴 북아일랜드 6개 주를 분리하고 나머지 26개 주에 자치령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지로 여겨졌다. 로이드 조지 총리는 이미 1919년 말 팀 힐리와의 대화에서 이러한 구상을 내비친 바 있다.[35]
조약에 대한 평가는 아일랜드 내전이라는 비극을 낳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 아일랜드의 독립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조약 체결 당시 격렬히 반대했던 에이먼 데 벌레라조차 훗날 콜린스의 "자유를 쟁취할 자유"라는 주장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1932년 집권 후 그는 조약 찬성파였던 쿠만 나 게일 행정부가 남긴 기록들을 살펴본 뒤 "그들(조약 찬성파)은 훌륭했다"고 평가하며, 조약이 아일랜드의 주권 확립에 기여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헌장 통과 이후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조약의 군주 관련 조항 등 영국과의 종속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조항들을 헌법에서 삭제하며 점진적으로 완전한 독립 국가로 나아갔다.
6. 2. 부정적 평가
영국-아일랜드 조약은 아일랜드 내에서 극심한 분열을 야기했으며, 결국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이어진 아일랜드 내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조약 체결을 주도했던 아일랜드 측 주요 인물인 아서 그리피스와 마이클 콜린스는 1922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조약 서명 당시 영국 측 대표였던 버컨헤드 경은 "콜린스 씨, 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은 나의 정치적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이에 콜린스는 "버컨헤드 경, 저는 저의 실제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33] 콜린스는 실제로 1922년 8월, 반조약파 공화주의자들의 매복 공격으로 Béal na Bláth에서 사망했다. 이는 과로로 인한 심부전으로 사망한 그리피스의 죽음 불과 열흘 뒤였다. 두 사람의 자리는 W. T. 코스그레이브가 이어받았다. 아일랜드 대표단 중 로버트 바턴과 어스킨 차일더스는 조약에 반대하며 내전에 참여했다. 특히 차일더스는 반조약파의 선전을 담당하다가 1922년 11월, 권총 소지 혐의로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조약 반대파는 조약이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지 못하고, 대영 제국 내의 자치령(Dominion) 지위에 머물게 하며, 특히 북아일랜드를 분리시켜 국토 분단을 고착화시켰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1914년부터 아일랜드 전체에 대한 자치 정부(Home Rule)를 구상했지만, 1921년에는 개신교 중심의 연합주의자와 가톨릭 중심의 민족주의자 간의 극심한 종파 갈등과 폭력을 피하면서 아일랜드 전체에 완전한 독립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북동부에 집중된 연합주의자들은 이미 1921년 6월 독자적인 의회를 구성했으며, 이들의 자치 정부 반대 움직임은 아일랜드 내전으로 번질 위험이 있었다(얼스터 의용군 참조). 결국 영국 정부는 연합주의자들이 통제 가능한 북아일랜드 6개 주를 분리하고 나머지 26개 주에 대해서는 도미니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최선의 타협안이라고 여겼다.
사실, 조약을 통해 아일랜드가 얻은 도미니언 지위는 과거 1914년 자치 정부법이나 19세기 찰스 스튜어트 파넬에게 제안되었던 자치 정부 안보다 훨씬 진전된 것이었지만, 북아일랜드 분단이라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조약에 격렬히 반대했던 에이먼 데 벌레라조차 조약 논쟁 당시 비밀리에 제시했던 대안은 조약의 핵심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그가 공개적으로 주장했던 32개 주 전체의 완전한 독립 공화국과는 거리가 멀었다.[34]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이러한 분할 및 도미니언 방식의 해결책을 오랫동안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1919년 말, 전 민족주의 의원이었던 팀 힐리를 만나 아일랜드 문제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힐리는 1919년 12월 11일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이드 조지는 만약 6개 주가 현 상태로 유지되는 계획에 대한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나머지 지역에는 제국 세금 면제, 관세 및 소비세 통제권을 가진 도미니언 자치 정부를 기꺼이 부여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적었다.[35] 힐리는 이 구상이 1920년 중반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격화되기 전에 나왔지만, 드 발레라가 아일랜드 전체 공화국을 고집하면서 무산되었다고 보았다. 로이드 조지는 과거 1893년 자치 정부 법안과 1914년 자치 정부법을 지지했으며, 1917-18년 아일랜드 협약과도 접촉했다. 그러나 그의 연립 정부는 보수당 다수에 의존하고 있었고, 결국 1922년 10월 차나크 위기로 붕괴되었다.
조약에 포함된 영국 군주에 대한 충성 맹세, 총독의 존재, 조약의 법적 우위 등 아일랜드의 주권을 제약하는 조항들은 1931년 영국 의회가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제정하면서 점차 효력을 잃게 되었다. 이 헌장은 영국 의회가 자치령의 동의 없이 해당 자치령에 대한 입법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영국 의회가 과거에 제정한 법률들을 자유롭게 개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약 10년 전 마이클 콜린스가 조약이 "자유를 쟁취할 자유"를 줄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드 발레라 역시 1930년대에 집권한 후에는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32년 정부를 구성하고 코스그레이브 행정부가 남긴 문서를 검토한 직후 아들에게 "(조약 찬성파들이) 훌륭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영국-아일랜드 조약은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종결시키고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지만[36], 완전한 독립을 열망했던 민족주의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아일랜드 분단을 공식화했으며,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인 내전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조약은 아일랜드 의회(도일 에런)와 영국 정부가 설립한 남아일랜드 의회, 그리고 영국 의회의 비준을 거쳐 정식 발효되었으나, 아일랜드 내부의 찬반 논쟁은 격렬했고 의회 비준 역시 근소한 차이로 이루어졌다. 아일랜드 자유국은 도일 에런과 영국 의회에서 기안된 아일랜드 자유국 헌법을 기초로, 1922년 12월 6일 영국 국왕의 칙서에 의해 건국되었다.
6. 3. 현대적 평가
영국-아일랜드 조약 체결 이후 아일랜드 사회는 조약 찬성파와 반대파로 극심하게 분열되었고, 이는 결국 비극적인 아일랜드 내전(1922–1923)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조약 협상을 이끌었던 아일랜드 측 주요 인물인 아서 그리피스와 마이클 콜린스가 1922년 연이어 사망했다. 콜린스는 조약 서명 당시 이것이 자신의 "실제 사형 집행 영장"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고 전해지며[33], 실제로 그는 반조약파 공화주의자들의 매복 공격으로 사망했다. 대표단의 다른 구성원이었던 로버트 바턴과 어스킨 차일더스는 내전에서 조약에 반대했으며, 차일더스는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마이클 콜린스는 조약이 완전한 독립은 아니지만 아일랜드가 "자유를 쟁취할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조약을 통해 수립된 아일랜드 자유국은 이후 웨스트민스터 헌장(1931)이 영국 의회에서 제정되면서 영국 의회의 입법권으로부터 벗어날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군주, 총독 임명 등 조약에 명시된 여러 제약 조항들을 점진적으로 폐지하며 자치권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조약 체결 당시 강경하게 반대했던 에이먼 데 벌레라 역시 1932년 집권 후에는 콜린스의 주장이 옳았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그는 조약 찬성파였던 W. T. 코스그레이브 행정부가 남긴 기록들을 살펴본 후, 그들의 노력이 "훌륭했다"고 평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전체에 완전한 독립을 부여할 경우, 개신교가 다수인 북동부 얼스터 지역의 연합주의자들과 가톨릭교가 다수인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대규모 충돌을 피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특히 얼스터 의용군과 같은 연합주의자들의 무장 저항 가능성을 우려하여, 북아일랜드 6개 주를 분리하고 나머지 26개 주에 대영 제국 내 자치령(Dominion) 지위를 부여하는 방안을 현실적인 타협안으로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영국-아일랜드 조약은 북아일랜드 분단이라는 대가를 치렀지만, 19세기 찰스 스튜어트 파넬 시대부터 논의되었던 자치 정부(Home Rule)나 1914년 자치 정부법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아일랜드에 부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받는다.[34] 이는 아일랜드가 완전한 독립 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역시 이러한 형태의 해결책을 오랫동안 고려해왔던 것으로 보인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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