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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주 와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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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주 와일란은 명나라 탑산좌위도독 커시너의 차남으로, 16세기 명나라 시대에 활약한 여진족 추장이다. 그는 아버지와 형제들이 살해된 후 세력을 이끌고 남하하여 하다 부락을 건설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명나라 조정과의 외교를 통해 세력을 키웠으며, 주변 여진족과 몽골 부족들을 복속시키며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부하의 반란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조카 왕타이가 하다국을 건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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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주 와일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왕주 와일란
만몽 유니코드ᠸᠠᠩᠵᡠ
ᠸᠠᡳ᠌ᠯᠠᠨ (Wangju Wailan)
한자이름왕주 외랑(旺住外郞), 왕제 외란(旺濟外蘭)
별명왕충(王忠)
관직
관직하다 수장, 명 탑산좌위도독(塔山左衛都督)
전임커시너(Kesine, 克什納)
후임왕타이(Wangtai, 王台)
사망
사망일1552년
사망지하다성(哈達城)
가족 관계
부친커시너

2. 생애

왕주 와일란은 명나라 탑산좌위(塔山左衛) 도독 커시너의 차남이다. 가정(嘉靖) 연간 초, 탑산좌위 내란으로 부친과 형제, 아들들을 잃었으나[4][5], 자신은 화를 피해 남은 부족민을 이끌고 송화강 유역을 떠나 하다하(哈達河) 부근에 정착하여 하다부(哈達部)의 기초를 다졌다.[6]

이후 명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고[3][7] 경쟁 세력이었던 추쿵거(Cukungge, 褚孔格)를 제거하며[8][9][10]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명나라로부터 도독(都督) 직위를 받는 등[11] 그 영향력을 인정받아, 해서여진과 건주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제하는 여진 사회의 실력자로 부상했다.[12][13] 그의 통치 아래 하다부는 주변 몽골 및 동해여진 부족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전성기를 맞았다.[14]

그러나 가정 31년(1552년), 부하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15] 그의 사후, 어린 아들 볼콘(博爾坤) 대신 조카 왕타이(王台)가 추대되어 반란을 수습하고 하다국(哈達國)을 건국하며 완한(Wan han, 萬汗)을 칭했다.[1]

2. 1. 초기 생애와 하다부의 기원

왕주 와일란은 명나라 탑산좌위(塔山左衛) 도독(都督) 커시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가정제 시기 초기에 탑산좌위에서 연이어 내란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커시너, 큰형 徹徹木|처처무중국어, 아들 汪古羅|왕구로중국어와 汪古六|왕구루중국어 등이 종숙조(從叔祖)인 巴岱|바다이중국어(일명 巴代達爾漢|바다이다르한중국어)에게 살해당했다.[4][5] 당시 왕주 와일란은 다른 곳에 있어 목숨을 건졌다. 그는 남은 부족 사람들을 이끌고 송화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개원의 정안보(靖安堡) 광순관(廣順關, 일명 남관南關) 바깥 하다하(哈達河)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강 북쪽에 하다성(哈達城)을 쌓았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하다구성(哈達舊城)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훗날 하다부의 기반이 되었다.[6]

이후 왕주 와일란은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가정 19년(1540년), 그는 우윤주(兀允住)와 손잡고 첩렬산위(帖列山衛)의 바투랑중(把禿郎中)을 습격해 살해하고, 명나라와의 교역(입공)에 필요한 칙서(敕書) 35개를 빼앗았다. 그러나 얼마 뒤 우윤주가 바타이(把太)에게 살해당하면서 칙서는 모두 왕주 와일란의 차지가 되었다. 그는 이 칙서를 이용해 자격 없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교역을 시도했으나, 명 조정에 발각되어 공시(貢市, 조공 무역) 참여가 금지되었다.[3] 가정 22년(1543년), 왕주 와일란은 명나라에 여진 내부 정보와 타안위가 차하르 몽골과 연합하여 명나라 북쪽 국경을 침략하려 한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명 조정은 이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도독첨사(都督僉事)에 임명하고, 금지되었던 입공 자격도 회복시켜 주었다.[7]

당시 여허 지역의 전신 격인 명나라 소속 탑로목위도독첨사(塔魯木衛都督僉事) 褚孔格|추쿵거중국어(추쿵거)는 북관(北關) 지역에서 패자를 자처하며, 하다부와 매년 '칙서가 불공평하여 다툼'(敕書不平爲爭)을 벌였다.[8] 또한 여러 차례 가하(加哈) 등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공격하고 다른 위소(衛所)들의 조공을 방해하기도 했다.[9] 이에 명 조정은 왕주 와일란에게 추쿵거를 토벌하도록 부추겼고, 왕주 와일란은 추쿵거를 공격하여 죽이고 그의 칙서를 빼앗았다.[10] 명 조정은 왕주 와일란에게 관직을 내리고 포상했으며, 가정 30년(1551년)에는 그를 도독(都督)으로 승진시켰다.[11]

이로써 해서위(海西衛) 등이 가지고 있던 칙서 999개와 건주(建州)의 칙서 500개도 왕주 와일란의 통제 아래 들어갔다. 이를 바탕으로 하다부는 여진 부족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12] 기록에 따르면, 하다부의 전성기에는 '동이(東夷)인 해서와 건주 182위(衛) 20소(所) 56참(站) 모두가 그의 통제를 받았다 ... 일시에 요동 변방을 열어도 명의 주민을 범하는 동이 한 명 없었으니, 모두 왕충(왕주 와일란)의 힘 덕분이다'라고 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3] 주변의 몽골 부족들이나 멀리 떨어진 동해여진 부족들까지도 왕주 와일란을 지도자로 인정하고 매년 공물을 바쳤다.[14]

하지만 가정 31년(1552년), 전성기를 누리던 왕주 와일란은 부하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 博爾坤|볼콘중국어은 나이가 어려 부족을 다스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과거 탑산 내란 때 시버(ᠰᡳᠪᡝ|Sibemnc, 錫伯) 부족의 수이하성(ᠰᡠᡳᡥᠠ ᡥᠣᡨᠣᠨ|Suiha hotonmnc, 綏哈城)으로 피신했던 왕주 와일란의 조카 왕타이를 불러 지도자 자리를 잇게 했다.[15] 왕타이는 반란을 진압하고 왕주 와일란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하다국(哈達國)을 세우고 스스로 완한(ᠸᠠᠨ ᡥᠠᠨ|Wan hanmnc, 萬汗)이라 칭했다.[1]

2. 2. 세력 확장과 명과의 관계

왕주 와일란은 명나라 탑산좌위(塔山左衛) 도독 커시너(Kesire)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嘉靖) 연간 초기에 탑산좌위에서 연이어 내란이 발생했는데, 두 번째 내란 때 아버지 커시너와 큰형 처처무(徹徹木), 아들 왕구로(汪古羅)와 왕구루(汪古六) 등이 종숙조(從叔祖)인 바다이(巴岱, 바다이다르한 巴代達爾漢)에게 살해당했다.[4][5] 당시 왕주 와일란은 다른 곳에 있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남은 부족민을 이끌고 송화강(松花江)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개원(開原)의 정안보(靖安堡) 광순관(廣順關, 남관南關) 바깥 하다하(哈達河) 유역에 정착했다. 강 북쪽에 하다성(哈達城)을 쌓았는데, 훗날 이는 하다구성(哈達舊城)이라 불리게 된다.[6]

이후 왕주 와일란은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가정 19년(1540년), 그는 우윤주(兀允住)와 손잡고 첩렬산위(帖列山衛)의 바투랑중(把禿郎中)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명나라에 조공할 때 필요한 칙서(敕書) 35장을 빼앗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윤주가 바타이(把太)에게 살해되면서 왕주 와일란이 칙서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이 칙서를 이용해 자격 없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려 했으나, 명나라 조정에 발각되어 공시(贡市, 조공 무역) 참여가 금지되었다.[3] 가정 22년(1543년), 왕주 와일란은 명나라의 정탐 활동을 돕기 위해 여진 내부 정보와 타안위(朵顏衛)가 차하르(察哈爾) 몽골과 연합하여 명나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려 한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그 대가로 도독첨사(都督佥事) 벼슬을 받고 다시 조공할 자격을 얻었다.[7]

당시 여허(Yehe, 葉赫)의 전신인 명나라 소속 탑로목위(塔魯木衛)의 도독첨사 추쿵거(Cukungge, 褚孔格)는 북관(北關) 지역의 강자로 행세하며 하다와 해마다 칙서 배분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8] 또한 여러 차례 가하(加哈) 등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침략하고 다른 위소(衛所)의 조공을 방해하기도 했다.[9] 이에 명나라 조정은 왕주 와일란에게 추쿵거를 토벌하도록 부추겼고, 왕주 와일란은 추쿵거를 사로잡아 죽이고 그의 칙서를 빼앗았다.[10] 명나라 조정은 왕주 와일란에게 관직을 내리고 포상했으며, 가정 30년(1551년)에는 도독(都督)으로 승진시켰다.[11]

이로써 해서위(海西衛) 등의 칙서 999도와 건주(建州)의 칙서 500도가 왕주 와일란의 통제 아래 들어갔고, 하다는 여진 부족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12] 문헌 기록에 따르면, 그의 전성기에는 '동쪽 오랑캐인 해서와 건주의 182개 위(衛), 20개 소(所), 56개 참(站)이 모두 그의 통제를 따랐으며... 한동안 요동 변경을 열어도 명나라 주민을 감히 침범하는 오랑캐가 한 명도 없었으니, 이는 모두 왕충(왕주 와일란)의 힘 덕분이었다'고 한다.[13] 심지어 주변의 몽골 부족이나 멀리 떨어진 동해여진(東海女眞) 부족들까지 왕주 와일란을 지도자로 받들고 매년 공물을 바쳤다.[14]

그러나 가정 31년(1552년), 전성기를 누리던 왕주 와일란은 부하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 볼콘(博爾坤)은 나이가 어려 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탑산 내란 당시 시버(Sibe, 錫伯) 부락의 수이하성(Suiha hoton, 綏哈城)으로 피신했던 왕주 와일란의 조카 왕타이(王台)를 불러들여 왕위를 잇게 했다.[15] 왕타이는 반란을 진압하고 왕주 와일란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 하다국(哈達國)을 세우고 완한(Wan han, 萬汗)이라 칭했다.[1]

2. 3. 최전성기와 몰락

가정 19년(1540), 왕주 와일란은 우윤주와 협력하여 첩렬산위의 바투랑중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명나라에 입공(入貢)하는 데 필요한 칙서 35도를 훔쳐 달아났다. 그러나 얼마 후 우윤주가 바타이에게 살해당하면서 남겨진 칙서는 모두 왕주 와일란의 차지가 되었다. 이를 이용해 왕주 와일란은 자격 없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입공하려 했으나, 명 조정에 발각되어 공시 참여가 금지되었다.[3]

가정 22년(1543), 왕주 와일란은 명나라의 정보 수집을 돕기 위해 여진 내부 정보와 타안위가 차하르 몽골과 연합하여 명나라 북쪽 변경을 침범하려 한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그 대가로 도독첨사 벼슬을 받고 입공 자격도 회복하였다.[7]

당시 여허(Yehe)의 전신인 명나라 소속 탑로목위도독첨사 추쿵거(Cukungge)는 북관에서 패자를 자처하며 하다(Hada)와 해마다 칙서 분배 문제로 다툼을 벌였다.[8] 또한 여러 차례 가하 등과 연합하여 명나라를 침공하고 다른 위소의 조공을 방해하기도 했다.[9] 이에 명 조정은 왕주 와일란에게 추쿵거 토벌을 종용했고, 왕주 와일란은 추쿵거를 사로잡아 살해하고 그의 칙서를 빼앗았다.[10] 명 조정은 왕주 와일란에게 책봉과 포상을 내렸으며, 가정 30년(1551)에는 도독으로 승진시켰다.[11]

이로써 해서위 등의 칙서 999도는 모두 왕주 와일란의 소유가 되었고, 건주의 칙서 500도 역시 그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하다는 여진 부락들 가운데 최강자로 부상했다.[12] 문헌 기록에 따르면, 최전성기에는 '동쪽 오랑캐인 해서와 건주의 182위, 20소, 56참 모두가 그의 통제를 따랐다 ... 한동안 요동 변경을 열어도 명나라 주민을 감히 침범하는 오랑캐가 한 명도 없었으니, 이는 모두 왕충(왕주 와일란)의 힘 덕분이었다'라고 칭송될 정도였다.[13] 심지어 주변의 몽골 부족이나 멀리 떨어진 동해여진 부락들까지 왕주 와일란을 수령으로 받들고 매년 공물을 바쳤다.[14]

그러나 가정 31년(1552), 최전성기를 누리던 왕주 와일란은 부하의 반란으로 살해당하며 몰락했다. 그의 아들 볼콘은 나이가 어려 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과거 탑산 내란 당시 시버(Sibe) 부락의 수이하성(Suiha hoton)으로 피신했던 왕주 와일란의 조카 왕타이를 불러 즉위시켰다.[15] 왕타이는 반란을 평정한 후 왕주 와일란이 남긴 기반 위에 하다국을 세우고 완한(Wan han)이라 칭했다.[1]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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