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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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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타이는 16세기 후반 여진족 하다 부족의 군주로, 하다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말년의 방탕한 생활로 쇠퇴를 초래했다. 그는 원교근공 정책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명나라로부터 도독에 봉해졌으며, 몽골과의 연합을 막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말년에 사치와 향락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이는 하다의 쇠퇴와 후금 건국의 배경이 되었다. 왕타이 사후 내분으로 하다는 더욱 약화되었고, 결국 누르하치에게 복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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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타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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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름}}
작위훌룬 구룬 만한
재위?-1582년
전임자(신설)
후임자후르간
작위2해서여진 하타 아이만 버일러
재위21552년-1582년
전임자2왕주 와일란
후임자2후르간
왕타이(}}, )
왕조해서여진
가문나라 할라
자녀후르간, 캉구루(Kanggūru, 康古魯)
친인척사위 누르하치

2. 역사

가정 31년(1552년), 숙부 왕주가 부락 내부의 반란으로 사망한 후[18] 몇 년 안에 왕타이가 하다부의 부주(部主) 자리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가정 37년(1558년), 명나라 변경을 침범한 자하보(紫河堡)의 추장 타이추(台出) 등을[19] 사로잡아 명나라에 넘겼다.[20][21] 이 무렵 왕타이는 스스로 한(汗)을 칭하고 하다 구룬(Hada gurun, 하다 국)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22]

가정 41년(1562년), 개원(開原) 변경을 침입한 홀실탑(忽失塔) 등을 부하 하걸납(哈乞納)이 생포하여 명나라의 명령에 따라 처형했다.[23]

융경 6년(1572년), 반란을 일으킨 건주 여진의 추장 왕고를 설득하여 명나라와 무순관(撫順關)에서 맹약을 맺게 하고, 그가 납치했던 군인과 백성을 돌려보내도록 중재했다.[14]

만력 원년(1573년),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몽골 투메드부에게 많은 말을 약탈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몽골 동부의 알탄 칸의 동생 위징(하이쓰하르 훈두렌 칸?) 및 그의 아들 두렌 센게 홍타이지와 연이어 혼인 관계를 맺었다.[4]

만력 2년(1574년), 왕고가 다시 명나라 변경을 공격하자 왕타이는 명나라를 도와 왕고에게 납치되었던 명나라 군인을 구출했다.[14] 이듬해인 만력 3년(1575년)에는 왕고를 직접 사로잡아 명나라 수도 북경으로 압송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우주국(右柱國)과 용호장군(龍虎將軍)의 직위를 받았다.[14]

만력 10년(1582년), 왕타이는 사망했다.

2. 1. 건국 이전

하다나라 씨의 시조는 왕주이다. 왕주의 아버지 케시네는 조정에 봉사하여 가정 초기에 좌도독(左都督)에 임명되었으나, 탑산전위(塔山前衛)의 내란으로 사망했다.[4] 왕주는 아버지 사후 하다 지방으로 피신하여 부주(部主)가 되었고, 명나라에 협력하며 세력을 키웠다. 그는 여허부의 추장 추쿵게를 잡아 처형한 공으로 명나라로부터 도독에 임명되었고, 여허의 공험(貢驗, 입공 자격) 700개를 빼앗고 13개 부락을 점령하며 세력을 떨쳤으나, 그 역시 부락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4]

왕타이는 초기에 시버부[5][6]의 수이하성(綏哈城, 현재 길림성 길림시 서쪽[7])에 거주했다. 왕타이의 숙부[8] 왕주 와일란(王住外蘭)은 개원(開原) 정안보(靖安堡) 바깥에 살다가 부락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 왕주 와일란의 아들 볼콘(博爾坤)은 복수를 위해 버일러(貝勒, 부족장) 계승권을 사촌형인 왕타이에게 양보하고 그를 하다로 맞이했다.[4] 하다부의 버일러가 된 왕타이는 즉시 13개 부락을 통합하여 이끌고 작은아버지 왕주 와일란의 복수를 실행했다.

이후 왕타이는 원교근공(遠交近攻) 외교 정책을 펼치며 세력을 확장했고, 하다는 점차 강성해져 여러 여진 부족들 사이에서 패자(覇者)로 부상했다.[4] 당시 여허, 울라, 호이파 및 건주여진의 후너허(渾河) 부락까지 모두 하다에 복속했으며, 관할 영토는 천여 리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왕타이는 가정 37년(1558년) 경 한(汗)을 칭하고 하다 국(Hada gurun)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22]

건주여진의 추장 왕고가 몽골의 투먼 칸과 연합하려 하자, 왕타이는 이들의 중간에 위치하여 연합을 저지했다. 이에 은 왕타이를 도독으로 삼아 그의 영향력을 인정했다.[4] 융경 6년(1572년), 왕고가 명나라 변경을 침범하자 왕타이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왕고를 설득하여 무순관(撫順關)에서 맹약을 맺게 하고 납치된 군민을 돌려보내도록 했다.[14] 그러나 만력 2년(1574년), 왕고가 다시 명나라 변경을 공격하자[14] 왕타이는 명나라를 도와 왕고를 생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했다.[14] 이 공으로 명 조정은 왕타이를 우주국(右柱國) 및 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봉하고, 그의 아들 두 명에게도 도독첨사(都督僉事) 벼슬을 내렸으며, 황금과 의복 등을 하사했다.[4] 이때 하다의 세력은 동쪽의 울라와 후이파, 남쪽의 건주부, 북쪽의 여허까지 미치며 천여 리에 달하는 광대한 영역을 자랑했다.[4]

왕타이는 여허의 수장인 칭기야누양기누 형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자신의 딸을 양기누에게 시집보내고 양기누의 여동생 온저(溫姐)를 아내로 맞이했다. 또한 건주여진의 소창가(푸만의 셋째 아들)는 자신의 아들 우타이(吳泰)를 왕타이의 딸과 혼인시켜 인척 관계를 맺었다.[10]

그러나 말년에 왕타이의 생활은 방탕해졌고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여 여허로 투항하는 이들이 빈번해지면서 하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양기누울라와 왕타이의 장남 후르간(Hūrgan, 扈爾干)을 끌어들여 지러(季勒) 등 8개 부락을 탈취하기도 했다. 만력 10년(1582년) 7월, 왕타이는 병으로 사망했다. 명나라는 왕타이에게 제사를 지내주고 채폐(采幣)와 4표리(表裏)를 하사했다.

2. 2. 왕타이의 통치와 하다의 성장

왕타이는 본래 수이하성에 거주했다. 그의 숙부인 왕주 와일란이 개원 정안보 바깥에서 살해되자, 왕주의 아들 볼콘은 복수를 위해 버일러 계승권을 사촌형인 왕타이에게 양보했다. 왕타이는 즉시 부락 13채를 이끌고 버일러 지위를 계승하고 숙부의 복수를 하였다.[4]

이후 왕타이는 원교근공 정책을 채택하여 세력을 키웠다. 하다는 점차 강성해져 여진 여러 부족 가운데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당시 여허, 울라, 호이파 및 건주여진의 후너허 부족 등이 모두 하다에 복속했으며, 관할 영토는 천여 리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왕타이는 하다를 나라로 선포하고 스스로 한을 칭하였다.[4]
와의 관계왕타이는 건주여진왕고와 몽골의 투먼 칸이 연합하려는 움직임을 중간에서 차단하여 와의 관계를 다졌다. 이에 명은 왕타이를 도독으로 임명했다.[4] 융경 6년(1572년), 반란을 일으킨 왕고를 설득하여 무순관에서 맹약을 맺고 납치된 군민을 돌려보내도록 했다.[14] 만력 2년(1574년)에는 왕고를 생포하여 명의 수도인 북경으로 보냈고[4][14], 이 공으로 명 조정은 왕타이를 우주국 및 용호장군으로 승진시키고, 그의 아들 두 명에게 도독첨사 벼슬을 주었으며, 황금 20량과 대홍사자저의 1벌을 하사하는 등[4][14]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주변 부족과의 관계왕타이는 청흥조 푸만의 셋째 아들 소창가와 인척 관계를 맺어, 소창가의 아들 우타이를 자신의 사위로 삼았다.[10] 또한 소창가가 동고부와 분쟁을 겪자 그의 요청으로 군사를 지원하기도 했다.[10]

초기에는 여허의 수장인 칭기야누양기누 형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왕타이는 자신의 딸을 양기누에게 시집보냈고, 자신은 양기누의 여동생 온저와 혼인했다.[4] 그러나 말년에는 관계가 악화되었다. 양기누는 울라 및 왕타이의 장남 후르간과 손잡고 하다의 지러 등 8개 부락을 빼앗았다.[4][17] 이는 여허 형제가 할아버지 추쿵게가 왕타이의 숙부 왕주에게 살해당한 것에 대한[15] 앙금을 품고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4]
몽골과의 관계만력 1년(1573년), 동쪽으로 이동해 온 몽골 투메트부에게 많은 말을 약탈당하기도 했다.[4] 이후 알탄 칸의 동생 웨이정(하이스하르 훈두렌 칸) 및 알탄 칸의 아들 두렌 센게 홍타이지와 연이어 혼인 관계를 맺었다. 특히 홍타이지는 5만 기병[11]을 동원하여 압력을 가했으나, 혼인 후에는 백마를 잡아 맹세하며 약탈 금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후 홍타이지가 명나라 변경 약탈을 제안했을 때 왕타이는 이를 거절했다.[4]
말년과 사망말년에 왕타이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졌고[4], 탐욕스러운 성격으로 민심을 잃었다는 평가도 있다.[4] 이로 인해 하다를 떠나 여허로 투항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하다는 점차 쇠퇴하였다.[4] 만력 10년(1582년) 7월, 왕타이는 병으로 사망했다.[4] 명나라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사를 지내주고 채폐와 4표리를 보냈다.[4]

왕타이 사후 장남 후르간이 뒤를 이었으나, 다른 아들 캉구루가 이에 불복하여 내분이 발생했고, 캉구루는 여허로 도주하였다.[4] 이는 하다의 세력 약화를 더욱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2. 3. 왕타이의 실정과 하다의 쇠퇴

왕타이는 말년에 이르러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으며, 이는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4] 그는 탐욕스러운 성격으로 백성들의 호소에도 뇌물의 유무에 따라 판결을 뒤집기 일쑤였고, 그의 부하들 역시 파견지에서 오만하게 행동하며 백성들에게 과도한 헌상을 요구했다.[4] 이러한 실정(失政)과 폭정으로 인해 민심은 점차 하다를 떠나기 시작했고, 특히 여허로 투항하는 백성들이 늘어나면서 하다의 국력은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4]

한때 왕타이는 여허의 수장인 칭기야누양기누 형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딸을 양기누에게 시집보내고 양기누의 여동생 온저(溫姐)를 아내로 맞이하는 등 혼인 관계를 통해 동맹을 굳건히 하려 했다. 그러나 여허 형제는 할아버지[15] 추쿵게가 왕타이의 아버지인 왕주에게 살해당한 원한을 은밀히 품고 있었고,[15] 왕타이가 노쇠하자 점차 세력을 키우며 하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양기누는 몽골 호르친부와 혼인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했다.[16]

결국 양기누는 울라 및 왕타이의 장남 후르간을 끌어들여[16] 하다의 영토인 지러(季勒) 등 8개 부락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이는 과거 하다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으려는 여허의 의도와 맞물린 것이었다.[17] 하다의 세력이 약해지자 호이파나 울라 등 과거 하다의 영향력 아래 있던 부족들도 점차 하다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만력 10년(1582년) 7월, 왕타이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4] 조정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사를 지내주었으나,[4] 하다의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왕타이 사후 장남 후르간이 뒤를 이었지만, 다른 아들 캉구루 등이 이에 불복하면서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내부 다툼이 벌어졌다.[4] 이러한 내분은 하다의 쇠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4]

2. 4. 왕타이 사후의 내분과 멸망

만력 10년 (1582년), 하다의 국주였던 왕타이가 사망하였다.[14] 왕타이 사후 하다 국주의 자리는 다음과 같이 계승되었다.

역대 하다 국주 (왕타이 사후)
대수이름즉위퇴위/사망
2대후르간만력 10년 (1582년)만력 11년 (1583년)
3대다이샨만력 16년 (1588년)만력 19년 (1591년)
4대멩게부루만력 19년 (1591년)만력 28년 (1600년)
마지막울구다이만력 29년 (1601년)만력 30년 (1602년)



왕타이의 뒤를 이어 후르간, 다이샨, 멩게부루, 울구다이가 차례로 국주 자리에 올랐다.

3. 주요 인물

ᠸᠠᠨ|완mnc(Wan)은 하다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이다.[4] 그는 초기 수이하성(만주어: ᠰᡠᡳᡥᠠ ᡥᠣᡨᠣᠨ|수이하 호톤mnc, Suiha hoton)에 거주했으며, 사촌인 왕주 와일란이 살해된 후 그의 아들 ᠪᠣᠯᡴᠣᠨ|볼콘mnc(Bolkon)의 추대로 버일러(만주어: ᠪᡝᡳ᠌ᠯᡝ|버일러mnc, Beile) 직위를 계승했다. 완은 즉위 후 작은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원교근공 정책을 통해 하다의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여진 여러 부락의 패자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여허, 울라, 호이파 및 건주여진의 후너허 부락까지 하다에 복속했으며, 관할 영지가 천여 리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완은 하다를 나라로 선포하고 한(만주어: ᠬᠠᠨ|한mnc, han)을 칭했다. 그는 명나라와의 관계에도 힘써, 왕고와 몽골 투먼한의 연합을 막아 명으로부터 도독(都督) 벼슬을 받았다.[4] 만력 2년(1574)에는 왕고를 생포하여 명나라 수도 북경으로 보냈고, 그 공으로 우주국(右柱國)·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승진했으며, 그의 아들 두 명도 도독첨사(都督僉事)에 임명되었다. 또한 여허의 수장인 칭기야누·양기누 형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혼인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민심을 잃어 하다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만력 10년(1582) 7월에 병사했다.[4]

후르간(만주어: ᡥᡡᡵᡤᠠᠨ|후르간mnc, Hūrgan)은 완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다의 2대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즉위 과정에서 동생 캉구루(만주어: ᡴᠠᠩᡤᡡᡵᡠ|캉구루mnc, Kanggūru)의 반발에 부딪혔고, 캉구루는 결국 여허로 도주했다. 후르간 역시 성격이 포악하여[4] 민심을 얻지 못했으며, 그의 치세 동안 하다는 더욱 쇠퇴했다.

다이샨(만주어: ᡩᠠᡳᡧᠠᠨ|다이샨mnc, Daišan)은 후르간의 아들로, 하다의 3대 군주이다. 그의 치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족하나, 선대의 혼란 속에서 하다의 국력은 회복되지 못했다.

멩게부루(만주어: ᠮᡝᠩᡤᡝᠪᡠᠯᡠ|멩게부루mnc, Menggebulu)는 완의 아들이자 다이샨의 뒤를 이은 하다의 4대 군주이다. 그 역시 약화된 하다를 이끌었으며, 결국 누르하치에게 복속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울구다이(만주어: ᡠᡵᡤᡠᡩᠠᡳ|울구다이mnc, Urgudai)는 멩게부루의 아들로, 하다의 마지막 군주이다. 그의 대에 하다는 완전히 후금에 병합되었다.

아민 제제(만주어: ᠠᠮᡳᠨ ᠵᡝᠵᡝ|아민 제제mnc, Amin Jėje)[26]는 후르간의 딸이자 다이샨의 여동생이다. 그녀는 훗날 청나라를 건국하는 누르하치의 부인이 되었다. 이는 당시 여진족 부족 간의 복잡한 혼인 관계와 정치적 역학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외에도 완의 가계에는 여러 인물들이 있으며, 그들의 활동은 하다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예를 들어, 완의 손자 중 한 명인 조노이(만주어: ᠵᠣᠨᠣᡳ|조노이mnc, Jonoi)는 후금에 귀순하여 니루이 에젠(만주어: ᠨᡳᡵᡠ ‍ᡳ ᡝᠵᡝᠨ|니루이 에젠mnc, niru i ejen)의 직책과 교로씨(만주어: ᡤᡳᠣᡵᠣ|교로mnc, Gioro) 성을 하사받았으나, 명나라와의 전투 중 전사하기도 했다.[38] 그의 후손들은 청나라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가문을 이어갔다. 또한 완의 딸들은 여허의 양기누, 청흥조 푸만의 손자 우타이, 몽골 알탄 칸의 동생이나 아들, 알탄 칸의 장남 등 여러 세력과 혼인 관계를 맺어 당시 하다의 외교적 위상을 보여준다.

4. 후금(後金)과의 관계

하다의 왕타이는 초기 건주여진의 일부인 후너허(Hunehe, 渾河) 부락 등을 복속시키는 등 건주여진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기오창가의 형제이자 누르하치의 당숙할아버지인 소창가(索長阿)는 자신의 아들 우타이(吳泰)를 왕타이의 딸과 혼인시켜 인척 관계를 맺었다.[10]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소창가는 동고부와의 분쟁에서 왕타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왕타이는 군사를 보내 동고 병력을 격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0] 이는 하다와 건주여진 일부 세력 간의 초기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하다와 건주여진의 관계가 항상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건주여진의 추장 왕고(王杲)는 명나라와 지속적으로 충돌하였는데, 왕타이는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왕고를 생포하고 북경으로 압송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4][14] 일설에 따르면 왕고는 누르하치의 외조부 혹은 외증조부로 알려져 있다.[4] 이 사건은 당시 하다, 건주여진, 명나라 사이의 복잡한 역학 관계를 보여준다.

왕타이 사후 하다는 내분으로 인해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고, 이는 이후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이 부상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주어진 자료만으로는 왕타이 사후 하다와 후금의 구체적인 관계 변화, 특히 복속 과정에 대해서는 상세히 파악하기 어렵다.

5. 평가

왕타이의 통치 초기는 하다의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그는 작은아버지 왕주 와일란의 복수를 하고 버일러 자리를 이어받은 뒤, 원교근공 정책을 통해 세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그의 치세 동안 하다는 여허, 울라, 호이파 및 건주여진의 일부 부락까지 복속시키며 천 리에 달하는 영토를 다스리는 여진족의 패자로 군림했으며, 스스로 한(汗)을 칭하며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왕타이는 과의 관계에도 능숙하여, 왕고와 몽골 투먼 한의 연합을 저지하여 명으로부터 도독(都督) 벼슬을 받았다. 1574년에는 왕고를 생포하여 명나라 수도 북경으로 보내면서 우주국(右柱國)·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승진하고 큰 상을 받기도 했다. 또한 여허의 수장 칭기야누양기누 형제와는 관계가 좋아, 딸을 양기누에게 시집보내고 자신은 양기누의 여동생 온저(溫姐)와 결혼하여 인척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말년에 왕타이는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는 백성들의 호소에도 뇌물 유무에 따라 주장을 바꾸는 등 부패한 정치를 행했으며, 그의 부하들 역시 사자로 파견되어 매, 개, 닭, 돼지 등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바치게 하며 오만하게 굴었다. 이러한 폭정과 부패는 백성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민심 이반을 초래했다.[4] 이로 인해 여허로 투항하는 이들이 빈번해지면서 하다의 국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왕타이가 늙자 여허양기누는 몽골 논 호르친부 수장 웅가다이의 딸과 혼인하며 세력을 키웠고,[16] 왕타이의 장남 후르간 역시 포악한 성격 탓에 그의 부하들 중 여허로 귀순하는 자들이 생겨났다.[17] 결국 양기누는 울라 및 후르간과 연합하여 하다의 영토 일부(지러 등 8채)를 빼앗아갔으며, 호이파와 울라 등 다른 부족들도 하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582년 7월 왕타이가 병으로 사망하자, 명나라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사를 지내주었으나,[4] 하다 내부는 장남 후르간과 다른 아들 캉구루 사이의 후계자 다툼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지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의 치세는 하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지만, 동시에 말년의 실정은 국가 쇠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柳邊紀略
[2] 서적 東夷考略
[3] 서적 滿洲實錄
[4] 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清史館
[5] 문서 シベ部
[6] 서적 满汉大辞典 遼寧民族出版社
[7] 서적 新满汉大词典 新疆人民出版社
[8] 문서 ボルコン・シェジン
[9] 서적 满汉大辞典 http://hkuri.cneas.t[...] 遼寧民族出版社
[10] 서적 滿洲實錄 https://hanchi.ihp.s[...] 四庫全書
[11] 서적 明神宗實錄
[12] 서적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https://kotobank.jp/[...] ブリタニカ・ジャパン
[13] 서적 普及版字通 https://kotobank.jp/[...] 平凡社
[14] 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清史館
[15] 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16] 서적 明神宗實錄
[17] 서적 清史稿
[18] 위키백과 维基百科
[19] 문서 타이チュ (イェヘナラ氏)
[20] 서적 明世宗実録
[21] 서적 明世宗實錄 不詳
[22] 서적 明實錄
[23] 서적 明世宗實錄 不詳
[24] 문서 糲
[25] 서적 普及版 字通 https://kotobank.jp/[...] 平凡社
[26] 문서 アミン・ジェジェ
[27] 위키백과 王台
[28] 서적 東夷考略 https://zh.wikisourc[...] 不詳
[29] 위키백과 王台
[30] 문서 로로
[31] 문서 ハイタ
[32] 서적 滿洲實錄 https://hanchi.ihp.s[...] 四庫全書
[33] 서적 manju i yargiyan kooli (滿洲實錄) 四庫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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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서적 滿洲實錄 https://hanchi.ihp.s[...] 四庫全書
[36] 문서 原文「䨇井舗」
[37] 문서 「遣員」「廃員」「戍員」「革員」「流人」など様々な呼称があるが、つまるところは断罪されて辺境地(多くは新疆地区)に飛ばされ、苦役を課せられた者のこと。辺境地での苦役を以て「罪を贖わ」せた。「遣」はツカワス意、「廃」はスタル・ヤメル意、「戍」はマモル意、「革」はアラタメル意。
[38] 서적 清史稿 https://zh.wikisourc[...] 清史館
[39] 서적 《满洲实录·卷1》 中华书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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