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힘 푹스베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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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독일의 배우, TV 진행자, 그리고 유니세프 대사였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포로로 잡히는 등 격동적인 시기를 보냈으며, 이후 영화 《08/15》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에드거 월리스 원작 영화를 포함한 다양한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고, 1972년 뮌헨 하계 올림픽의 아나운서로도 활동했다. 그는 부동산 사업 실패, B형 간염, 아들의 사망 등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지만, 2014년 사망할 때까지 배우, 방송인, 자선 활동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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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푹스베르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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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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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요아힘 푹스베르거 |
출생일 | 1927년 3월 11일 |
출생지 | 추펜하우젠, 뷔르템베르크 자유인민주, 바이마르 공화국 |
사망일 | 2014년 9월 11일 |
사망지 | 그륀발트, 바이에른 주, 독일 |
다른 이름 | "블래키" 푹스베르거 |
직업 | 배우, 텔레비전 진행자 |
활동 기간 | 1953년–2013년 |
배우자 | 기타 린트 (1951년–1953년) (이혼) 군둘라 코르테 (1954년–사망) (아들 1명) |
2. 생애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슈투트가르트의 추펜하우젠에서 태어나 히틀러 유겐트의 멤버였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 16세의 나이에 ''강하부대'' 훈련을 받고 격투술 교관으로 동부 전선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었다.[1] 슈트랄준트의 병원에서 붉은 군대에 포로로 잡혔고, 이후 소련군, 미국과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1] 종전 후 격동적인 청소년기 때문에 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1] 1946년, 레클링하우젠에서 영국군을 위해 석탄 광부로 일했으며, "블랙키"라는 별명은 이 시기에 생겼다.
석방 후, 가족 사업에서 조판 및 인쇄 기계 엔지니어로 일했으며, 나중에는 뒤셀도르프의 출판사에서 일했다. 1949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독일 건축 전시회의 광고 관리자였으며,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뮌헨의 라디오 방송국 대변인과 뉴스릴 대변인을 맡았다. 1951년 팝 가수 기타 린트와 결혼했으나 2년 만에 이혼했다. 1954년, 라디오 기술자이자 배우인 군둘라 코르테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같은 해, 한스 헬무트 키르스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3부작 전쟁 영화 ''08/15''에서 "군너 아쉬"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다.
''08/15'' 이후 여러 전쟁 영화에 출연했다. 1959년 영화 ''마스크를 쓴 개구리''(Der Frosch mit der Maske)에서 아마추어 탐정 리처드 고든 역을 연기하여 3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성공은 에드거 월리스의 소설을 각색한 다른 많은 영화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12편의 에드거 월리스 원작 영화에서 탐정 역을 연기했다.
- 1960년 – ''끔찍한 사람들'' (롱 경감 역)
- 1961년 – ''런던의 죽은 눈'' (래리 홀트 형사 역), ''악마의 수선화'' (잭 타링 역), ''이상한 백작 부인'' (마이크 돈 형사 역)
- 1962년 – ''강가의 여관'' (웨이드 경감 역)
- 1963년 – ''노란 뱀의 저주''(Der Fluch der gelben Schlange) (클리포드 린 역), ''검은 수도원장'' (딕 알포드 역)
- 1964년 – ''13번 방'' (조사관 조니 그레이 역), ''마법사''(Der Hexer) (히긴스 경감 역)
- 1967년 – ''채찍을 든 수도사'' (히긴스 경감 역)
- 1968년 – ''사악한 분위기에 사로잡혀''(Im Banne des Unheimlichen) (히긴스 경감 역)
- 1972년 – ''당신은 솔랑주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바르트 경감 역)
1972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에서 경기장 아나운서를 맡았다. 폐막식 중 납치된 여객기가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혼란을 우려하여 대피를 결정하지 않았다. 이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960년대 후반, 부동산 회사를 공동 설립했다가 단기간에 파산했다. 42세에 모든 재산을 잃고 별장을 팔아야 했으며, 막대한 빚을 졌다. 아내 군둘라, 친구들,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978년, TV 쇼 중에 침팬지에게 물려 B형 간염에 걸렸다. 4개월간 격리 시설에서 지내며 우울증을 겪었지만 회복했다. 1970년대 후반 영화와 텔레비전 작업을 중단하고 무대 경력에 집중했다. 1990년대 후반에 일부 텔레비전 영화에 다시 출연하기 시작했고, 잠시 휴식기를 가진 후 2000년대 후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1984년 유니세프의 첫 번째 독일 대사였다. 2006년 11월 13일, 바이에른 사회 봉사 메달을 받았다.[2] 2009년부터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 이사회의 구성원이자 자원봉사 프로그램의 공동 후원자였다.[3]
그의 아들 토마스 푹스베르거/Thomas Fuchsbergerde는 작곡가였으며 2010년 10월 14일 쿨름바흐에서 익사했다.[4] 푹스베르거는 만년에 뮌헨 근처의 그륀발트와 호바트의 샌디 베이에서 살았다. 독일 시민권과 함께 호주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5] 2014년 9월 11일 그륀발트의 독일 자택에서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6]
2. 1. 초기 생애 및 제2차 세계 대전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슈투트가르트의 추펜하우젠에서 태어나 히틀러 유겐트의 멤버였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 16세의 나이에 ''강하부대'' 훈련을 받고 격투술 교관으로 동부 전선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었다.[1] 슈트랄준트의 병원에서 붉은 군대에 포로로 잡혔고, 이후 소련군, 미국과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1] 종전 후 격동적인 청소년기 때문에 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1] 1946년, 레클링하우젠에서 영국군을 위해 석탄 광부로 일했으며, "블랙키"라는 별명은 이 시기에 생겼다.2. 2. 배우 경력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슈투트가르트의 추펜하우젠에서 태어나 히틀러 유겐트의 멤버였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 16세의 나이에 강하부대 훈련을 받고 격투술 교관으로 동부 전선에 파병되어 부상을 입었다. 슈트랄준트의 병원에서 붉은 군대에 포로로 잡혔고, 이후에는 미국과 영국의 포로가 되었다.[1] 전쟁 당시의 격동적인 청소년기 때문에 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1] 1946년, 레클링하우젠에서 영국군을 위해 석탄 광부로 일했으며, "블랙키"라는 별명은 이 시기에 유래되었다.석방 후, 가족 사업에서 조판 및 인쇄 기계 엔지니어로 일했으며, 나중에는 뒤셀도르프의 출판사에서 일했다. 1949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독일 건축 전시회의 광고 관리자였으며,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뮌헨의 라디오 방송국 대변인과 뉴스릴 대변인을 맡았다. 1951년 팝 가수 기타 린트와 결혼했으나 2년 만에 이혼했다. 1954년, 라디오 기술자이자 배우인 군둘라 코르테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같은 해, 한스 헬무트 키르스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3부작 전쟁 영화 ''08/15''에서 "군너 아쉬"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다.
''08/15'' 이후 여러 전쟁 영화에 출연했다. 1959년 영화 ''마스크를 쓴 개구리''(Der Frosch mit der Maske)에서 아마추어 탐정 리처드 고든 역을 연기하여 3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성공은 에드거 월리스의 소설을 각색한 다른 많은 영화의 기반이 되었다. 이후 12편의 에드거 월리스 원작 영화에서 탐정 역을 연기했다.
- 1960년 – ''끔찍한 사람들'' (롱 경감 역)
- 1961년 – ''런던의 죽은 눈'' (래리 홀트 형사 역), ''악마의 수선화'' (잭 타링 역), ''이상한 백작 부인'' (마이크 돈 형사 역)
- 1962년 – ''강가의 여관'' (웨이드 경감 역)
- 1963년 – ''노란 뱀의 저주''(Der Fluch der gelben Schlange) (클리포드 린 역), ''검은 수도원장'' (딕 알포드 역)
- 1964년 – ''13번 방'' (조사관 조니 그레이 역), ''마법사''(Der Hexer) (히긴스 경감 역)
- 1967년 – ''채찍을 든 수도사'' (히긴스 경감 역)
- 1968년 – ''사악한 분위기에 사로잡혀''(Im Banne des Unheimlichen) (히긴스 경감 역)
- 1972년 – ''당신은 솔랑주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바르트 경감 역)
1972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에서 경기장 아나운서를 맡았다. 폐막식 중 납치된 여객기가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혼란을 우려하여 대피를 결정하지 않았다. 이 의혹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960년대 후반, 부동산 회사를 공동 설립했다가 단기간에 파산했다. 42세에 모든 재산을 잃고 별장을 팔아야 했으며, 막대한 빚을 졌다. 아내 군둘라, 친구들,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978년, TV 쇼 중에 침팬지에게 물려 B형 간염에 걸렸다. 4개월간 격리 시설에서 지내며 우울증을 겪었지만 회복했다. 1970년대 후반 영화와 텔레비전 작업을 중단하고 무대 경력에 집중했다. 1990년대 후반에 일부 텔레비전 영화에 다시 출연하기 시작했고, 잠시 휴식기를 가진 후 2000년대 후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활동했다.
1984년 유니세프의 첫 번째 독일 대사였다. 2006년 11월 13일, 바이에른 사회 봉사 메달을 받았다.[2] 2009년부터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 이사회의 구성원이자 자원봉사 프로그램의 공동 후원자였다.[3]
그의 아들 토마스 푹스베르거/Thomas Fuchsbergerde는 작곡가였으며 2010년 10월 14일 쿨름바흐에서 익사했다.[4] 푹스베르거는 만년에 뮌헨 근처의 그륀발트와 호바트의 샌디 베이에서 살았다. 독일 시민권과 함께 호주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5] 2014년 9월 11일 그륀발트의 독일 자택에서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6]
2. 3. 방송인 경력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뮌헨의 라디오 방송국 대변인과 뉴스릴 대변인을 맡았다.[1] 1951년에는 팝 가수 기타 린트와 결혼했으나 2년 만에 이혼했다.[1] 1954년, 그는 한스 헬무트 키르스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3부작 전쟁 영화 ''08/15'' 영화 시리즈에서 "군너 아쉬" 역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1]여러 편의 전쟁 영화 이후, 그는 1959년 영화 ''마스크를 쓴 개구리''(Der Frosch mit der Maske)에서 아마추어 탐정 리처드 고든 역을 연기하여 3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하였다.[1] 이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12편의 에드거 월리스 원작 영화에서 탐정 역을 계속 연기했다.[1]
푹스베르거는 뮌헨에서 열린 1972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의 경기장 아나운서였다.[1] 폐막식 중에는 납치된 여객기가 경기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푹스베르거는 혼란을 우려하여 대피를 결정하지 않았다.[1]
1978년, 그는 TV 쇼 중에 침팬지에게 물려 B형 간염에 심각하게 걸려 4개월간 격리 치료를 받고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1] 1970년대 후반 영화와 텔레비전 작업을 중단하고 무대 경력에 집중했던 그는[1] 1990년대 후반에 다시 텔레비전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후반부터 사망할 때까지 활동을 이어갔다.[1]
2. 4. 사회 참여 활동
2. 5. 개인사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슈투트가르트의 추펜하우젠에서 태어났다.[1] 의무적으로 히틀러 유겐트의 멤버였으며,[1]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16세의 나이로 강하부대 훈련을 받고 동부 전선에 격투술 교관으로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었다.[1] 슈트랄준트의 병원에서 붉은 군대에 포로로 잡혔고, 소련군, 미국, 영국의 포로 생활을 했다.[1] 종전 후 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하고,[1] 1946년 레클링하우젠에서 영국군을 위해 석탄 광부로 일하며 "블랙키"라는 별명을 얻었다.[1]석방 후 가족 사업에서 조판 및 인쇄 기계 엔지니어로 일했으며, 뒤셀도르프 출판사에서도 근무했다. 1949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독일 건축 전시회의 광고 관리자로 일했고,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뮌헨 라디오 방송국과 뉴스릴 대변인을 맡았다. 1951년 팝 가수 기타 린트와 결혼했으나 2년 만에 이혼했다. 1954년 라디오 기술자이자 배우인 군둘라 코르테와 결혼하여 아들 토마스를 낳았다.[1]
1960년대 후반, 부동산 회사 공동 설립 후 파산하여 모든 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앉았으나, 아내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978년 TV 쇼 촬영 중 침팬지에게 물려 B형 간염에 걸려 4개월간 격리 치료를 받고 우울증을 겪었으나 회복했다.[1]
1984년 유니세프의 첫 번째 독일 대사가 되었고,[2] 2006년 바이에른 사회 봉사 메달을 받았다.[2] 2009년부터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 이사회의 구성원이자 자원봉사 프로그램의 공동 후원자였다.[3]
아들 토마스/토마스 푹스베르거de는 작곡가였으나 2010년 쿨름바흐에서 익사했다.[4] 푹스베르거는 그륀발트와 샌디 베이에서 거주하며 독일과 호주 시민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5] 2014년 9월 11일 그륀발트의 자택에서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6]
3. 수상 내역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1942년 전쟁 공로 훈장 2급 검부착을 수여받았다.[7] 1961년에는 브라보 오토와 황금 스크린 상을 받았다. 1969년과 1982년에 밤비상을 수상했으며, 1970년에는 국제 영화 리본(이탈리아)을 수상했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브라보 오토를 연속 수상했다. 1979년에는 바이에른 공로 훈장을, 1982년에는 골든 카메(Golden Kamera)를 수상했다. 1983년에는 연방 공로 십자 훈장을 받았고, 1985년에는 Der liebe Augustin (오스트리아)를 수상했다. 1986년에는 골데네 오이로파(Goldene Europa)를 수상했고, 1983년 올해의 파이프 흡연자(독일)로 선정되었다. 1994년 독일 연방 공로 십자 훈장 대연방 공로 십자 훈장을 받았고, 1999년에는 태즈메이니아 관광 명예 대사로 임명되었다.[8] 2005년 바이에른 TV상, 2006년 사회 봉사를 위한 바이에른 주 메달, 2007년 브리상트 브릴란트, 2007년 비디오 챔피언 평생 공로상 부문, 2008년 플라틴 쿠리어 로미, 2009년 작센 감사 훈장, 2010년 평생 공로상 골데네 카메, 2011년 독일 텔레비전상 평생 공로상, 2011년 독일 지속 가능성 상, 2012년 밤비상 평생 업적 부문을 수상했다.
4. 출연 작품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1955년 《최후의 8월 15일》과 《마지막 웃음》에 출연하였다. 1965년에는 《라스트 모히칸》과 《나는 그녀를 잘 알았다》에 출연했다. 1972년에는 《솔란지에게 무슨 짓을 했니?》와 《광란의 질주》에 출연했다. 1982년에는 《영원한 우상》에 출연했다.
1953년 안톤 쿠터 감독의 《네 창을 열어라》에 출연했다. 1954년에는 안톤 쿠터 감독의 ''Wenn ich einmal der Herrgott wär''에서 프레드 역을 맡았고, 파울 메이 감독의 08/15에서 게프라이터 아슈 역을 맡았다. 같은 해 안톤 쿠터 감독의 《카프룬의 노래》에서 Der 'schöne Eugen' 역을 연기했다. 1955년 파울 메이 감독의 ''08/15 – Part 2/08/15 Zweiter Teilde''에서 바흐트마이스터 아슈 역, 하랄트 브라운 감독의 《마지막 인간》에서 알빈 라트슈필러 역, 파울 메이 감독의 ''08/15 at Home/08/15 in der Heimatde''에서 로이테난트 헤르베르트 아슈 역을 맡았다.
1956년 프란츠 안텔 감독의 《황금 교향곡》에서 발터 게를로스 역, ''Lumpaci the Vagabond/Lumpazivagabundus (1956)de''에서 요한 라임, 티슐러 역, 한스 퀘스트 감독의 ''Wenn Poldi ins Manöver zieht''에서 토마스 역을 연기했다. 1957년 카를 보제 감독의 ''Vater macht Karrierede''에서 저널리스트 해리 그라이프 역, 한스 그림 감독의 ''작은 남자 - 아주 훌륭해''에서 토마스 올더호프 역, 카를로 캄포갈리아니 감독의 《나폴리의 노래》에서 프랑코 페리 역, 쿠르트 빌헬름/쿠르트 빌헬름 (Regisseur)de 감독의 TV 영화 ''환상''에서 톰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질레르탈에서 온 쌍둥이》에서 프란츠 폰 아우어슈타인 역을 맡았다.
1958년 루돌프 유거트 감독의 ''에바는 단지 감독에게만 키스한다''에서 카를 뮐러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몬테 카시노의 녹색 악마》에서 Lt. 라이터 역, 베이트 하를란 감독의 ''Liebe kann wie Gift sein''에서 슈테판 브루크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U 47 - 카피탠로이테난트 프리엔》에서 오버로이테난트 토마스 비르케넥 역, 오이겐 요크 감독의 ''The Girl with the Cat Eyes/Das Mädchen mit den Katzenaugende''에서 노르베르트 빌름스 역, 한스 퀘스트 감독의 ''Mein Schatz ist aus Tirol''에서 페터 바이강 역을 맡았다. 1959년 루돌프 유거트 감독의 《붉은 남작 부인》에서 재단사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마스크를 쓴 개구리》에서 리하르트 고든 역, 루돌프 쉰들러 감독의 ''Mein Schatz komm mit ans blaue Meer''에서 디렉토어 파울 마르체즈 역을 연기했다.
1960년 루돌프 유거트 감독의 《최후의 목적지: 붉은 등불》에서 마틴 스텔링 역, 볼프 릴라 감독의 ''Die zornigen jungen Männer''에서 닥터 위르겐 파버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끔찍한 사람들》에서 셰프인스펙터 롱 역을 맡았다. 1961년 쿠르트 빌헬름 감독의 탐정 네로 울프에 관한 TV 미니시리즈 《너무 많은 요리사》에서 아치 굿윈 역,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런던의 죽은 눈》에서 인스펙터 래리 홀트 역, 아코스 라토니 감독의 《악마의 수선화》에서 잭 타링 역, 요제프 폰 바키 감독의 《이상한 백작 부인》에서 인스펙터 미하엘 '마이크' 돈 역, 하랄트 필리프 감독의 《안녕》에서 페르디난트 슈타인비힐러 역을 연기했다.
1962년 하랄트 라인 감독의 ''The Carpet of Horror/Der Teppich des Grauens (Film)de''에서 해리 라폴드 역,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강가의 여관》에서 인스펙터 웨이드 역, C. M. 페닝턴-리차즈 감독의 《미스터리 잠수함》에서 사령관 셰플러 역을 맡았다. 1963년 파울 메이 감독의 ''Barras heutede''에서 형사 역, 프란츠 요제프 고틀리프 감독의 《노란 뱀의 저주》에서 클리포드 린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하얀 거미》에서 랄프 허바드 역, 프란츠 요제프 고틀리프 감독의 《검은 수도원장》에서 딕 알포드 역을 연기했다.
1964년 하랄트 라인 감독의 《13호실》에서 조니 그레이 역,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마법사》에서 브라이언 에드거 히긴스 역을 맡았다. 1965년 에베르하르트 이첸플리츠de 감독의 《죽은 손님들의 호텔》에서 바니 블레어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마지막 토마호크》에서 빌 헤이워드 대위 역, 돈 샤프 감독의 《푸 만추의 얼굴》에서 칼 얀센 역, 안토니오 피에트란젤리 감독의 《나는 그녀를 잘 알았다》에서 작가 역을 연기했다.
1966년 호세 루이스 마드리드 감독의 ''Who Killed Johnny R.?/Wer kennt Johnny R.?de''에서 클라이드 스미스 역, 프랑코 몬테무로de 감독의 ''The Battle of the Mods/La battaglia dei Modsit''에서 로버트 B. 풀러 역,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긴 다리, 긴 손가락》에서 로버트 해먼드 역, 미하엘 플레가르 감독의 《플레이보이를 유혹하는 방법》에서 소커 역을 맡았다. 1967년 프란츠 요제프 고틀리프 감독의 ''스파이 오늘, 내일 죽는다''에서 육군 MP 해건 역(크레딧 없음),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채찍을 든 수도승》에서 인스펙터 히긴스 역, 호세 안토니오 데 라 로마es 감독의 ''Target Frankie/Feuer frei auf Frankiede''에서 프랭키 바르거 역, 볼프강 베커 감독의 TV 미니시리즈 ''Der Tod läuft hinterherde''에서 에드워드 모리슨 역을 연기했다.
1968년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초자연적인 것에 사로잡혀》에서 인스펙터 히긴스 역, 아르만도 크리스피노 감독의 《코만도》에서 오버로이테난트 하이첼 에이전 - 교수 역을 맡았다. 1969년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7일의 은총》에서 헨드릭스 역, 안토니오 마르게리티 감독의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에서 벤 테일러 역, 볼프강 베커 감독의 TV 영화 ''Hotel Royal/Hotel Royal (Film)de''에서 크리스 노먼 역을 연기했다. 1970년 볼프강 베커 감독의 TV 미니시리즈 《11시 20분》에서 토마스 바셈 역을 맡았다.
1971년 귄터 그레베르트de 감독의 TV 영화 ''뜨거운 모래''에서 제프 발로우 역, 쿠르트 빌헬름 감독의 ''올림피아-올림피아''에서 슈츠게이스트 역을 연기했다. 1972년 마시모 달라마노 감독의 《솔란지에게 무슨 짓을 했니?》에서 바르트 경감 역, 루돌프 제헤트그루버 감독의 ''Ein Käfer gibt Vollgasde''에서 플라톤 역을 맡았다. 1973년 위르겐 롤란트 감독의 《홍콩에서 온 소녀》에서 프랭크 보이드 역, 베르너 야콥스 감독의 《나는 비행 교실》에서 요하네스 뵈크 박사, 젠. 유스투스 역을 연기했다.
1977년 미하엘 베르호벤 감독의 ''Scrounged Meals/Gefundenes Fressende''에서 록 & 롤 배심원 역을 맡았다. 1982년 에크하르트 슈미트 감독의 《팬》에서 TV 속 남자 역을 연기했다. 1996년 파브리지오 코스타 감독의 TV 미니시리즈 ''Il grande fuocoit''에서 알레시오 카필루피 백작 역을 맡았다. 1998년 스테파노 레알리it 감독의 TV 영화 ''Il quarto reit''에서 발다사레 역, 파브리지오 코스타 감독의 TV 미니시리즈 ''Il cuore e la spadait''에서 마르케 역을 연기했다.
2007년 키릴 보스de 및 필리프 슈테네르트de 감독의 ''Neues vom Wixxerde''에서 딕햄 경 역을 맡았다. 2008년 크리스토프 슈레베 감독의 TV 영화 ''Bible Code/Der Bibelcodede''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역을 연기했다. 2010년 볼프강 문베르거 감독의 TV 영화 ''Live Is Life/Die Spätzünderde''에서 데겐하르트 샤고베츠 역을 맡았다. 2013년 볼프강 문베르거 감독의 TV 영화 ''Live Is Life 2/Die Spätzünder 2 – Der Himmel soll wartende''에서 데겐하르트 샤고베츠 역을 맡았으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영화 역할이었다.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1960년부터 1961년까지 ARD에서 방영된 《침착함을 유지하라》(Nur nicht nervös werden)에 출연했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는 SWF에서 방영된 《뜨거운 선》(Der heiße Draht)에 출연했으며, 1975년부터 1976년까지는 SWF의 《나와 함께 놀아요》(Spiel mit mir)에 출연했다. 1977년부터 1986년까지는 SWF의 《자, 시작하자》(Auf Los geht's los)에 출연했다. 1980년부터 1991년까지 ARD에서 《오늘 저녁》(Heut' abend)을 진행했고, 1990년부터 1994년까지 ARD의 《예 또는 아니오》(Ja oder Nein)를 진행했다.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1988년부터 2003년까지 그가 입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풍경에 관한 20편의 영화 시리즈인 ''테라 오스트랄리스''를 제작했다. 2011년에는 미하엘 벵크 감독의 TV 다큐멘터리 ''제르마인 다마 - 춤추는 별''에 출연하여 그의 전 영화 파트너 제르마인 다마를 기념하는 인터뷰를 했다.
2011년 귈터슬로어 페어라그스하우스 출판사에서 요아힘 푹스베르거가 직접 낭독한 자서전 ''노년은 겁쟁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Growing old is not for cowards)''를 출간했다.()
4. 1. 영화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다. 1955년 《최후의 8월 15일》과 《마지막 웃음》에 출연하였다. 1965년에는 《라스트 모히칸》과 《아이 뉴 허 웰》에 출연했다. 1972년에는 《왓 해브 유 돈 투 솔란지?》와 《광란의 질주》에 출연했다. 1982년에는 《영원한 우상》에 출연했다.1953년 안톤 쿠터 감독의 《네 창을 열어라》에 출연했다. 1954년에는 안톤 쿠터 감독의 ''Wenn ich einmal der Herrgott wär''에서 프레드 역을 맡았고, 파울 메이 감독의 08/15에서 게프라이터 아슈 역을 맡았다. 같은 해 안톤 쿠터 감독의 《카프룬의 노래》에서 Der 'schöne Eugen' 역을 연기했다. 1955년 파울 메이 감독의 ''''에서 바흐트마이스터 아슈 역, 하랄트 브라운 감독의 《마지막 인간》에서 알빈 라트슈필러 역, 파울 메이 감독의 ''''에서 로이테난트 헤르베르트 아슈 역을 맡았다.
1956년 프란츠 안텔 감독의 《황금 교향곡》에서 발터 게를로스 역, ''''에서 요한 라임, 티슐러 역, 한스 퀘스트 감독의 ''Wenn Poldi ins Manöver zieht''에서 토마스 역을 연기했다. 1957년 카를 보제 감독의 ''''에서 저널리스트 해리 그라이프 역, 한스 그림 감독의 ''작은 남자 - 아주 훌륭해''에서 토마스 올더호프 역, 카를로 캄포갈리아니 감독의 《나폴리의 노래》에서 프랑코 페리 역, 감독의 TV 영화 ''환상''에서 톰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질레르탈에서 온 쌍둥이》에서 프란츠 폰 아우어슈타인 역을 맡았다.
1958년 루돌프 유거트 감독의 ''에바는 단지 감독에게만 키스한다''에서 카를 뮐러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몬테 카시노의 녹색 악마》에서 Lt. 라이터 역, 베이트 하를란 감독의 ''Liebe kann wie Gift sein''에서 슈테판 브루크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U 47 - 카피탠로이테난트 프리엔》에서 오버로이테난트 토마스 비르케넥 역, 오이겐 요크 감독의 ''''에서 노르베르트 빌름스 역, 한스 퀘스트 감독의 ''Mein Schatz ist aus Tirol''에서 페터 바이강 역을 맡았다. 1959년 루돌프 유거트 감독의 《붉은 남작 부인》에서 재단사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마스크를 쓴 개구리》에서 리하르트 고든 역, 루돌프 쉰들러 감독의 ''Mein Schatz komm mit ans blaue Meer''에서 디렉토어 파울 마르체즈 역을 연기했다.
1960년 루돌프 유거트 감독의 《최후의 목적지: 붉은 등불》에서 마틴 스텔링 역, 볼프 릴라 감독의 ''Die zornigen jungen Männer''에서 닥터 위르겐 파버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끔찍한 사람들》에서 셰프인스펙터 롱 역을 맡았다. 1961년 쿠르트 빌헬름 감독의 탐정 네로 울프에 관한 TV 미니시리즈 《너무 많은 요리사》에서 아치 굿윈 역,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런던의 죽은 눈》에서 인스펙터 래리 홀트 역, 아코스 라토니 감독의 《악마의 수선화》에서 잭 타링 역, 요제프 폰 바키 감독의 《이상한 백작 부인》에서 인스펙터 미하엘 '마이크' 돈 역, 하랄트 필리프 감독의 《안녕》에서 페르디난트 슈타인비힐러 역을 연기했다.
1962년 하랄트 라인 감독의 ''''에서 해리 라폴드 역,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강가의 여관》에서 인스펙터 웨이드 역, C. M. 페닝턴-리차즈 감독의 《미스터리 잠수함》에서 사령관 셰플러 역을 맡았다. 1963년 파울 메이 감독의 ''''에서 형사 역, 프란츠 요제프 고틀리프 감독의 《노란 뱀의 저주》에서 클리포드 린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하얀 거미》에서 랄프 허바드 역, 프란츠 요제프 고틀리프 감독의 《검은 수도원장》에서 딕 알포드 역을 연기했다.
1964년 하랄트 라인 감독의 《13호실》에서 조니 그레이 역,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마법사》에서 브라이언 에드거 히긴스 역을 맡았다. 1965년 감독의 《죽은 손님들의 호텔》에서 바니 블레어 역, 하랄트 라인 감독의 《마지막 토마호크》에서 빌 헤이워드 대위 역, 돈 샤프 감독의 《푸 만추의 얼굴》에서 칼 얀센 역, 안토니오 피에트란젤리 감독의 《나는 그녀를 잘 알았다》에서 작가 역을 연기했다.
1966년 호세 루이스 마드리드 감독의 ''''에서 클라이드 스미스 역, 감독의 ''''에서 로버트 B. 풀러 역,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긴 다리, 긴 손가락》에서 로버트 해먼드 역, 미하엘 플레가르 감독의 《플레이보이를 유혹하는 방법》에서 소커 역을 맡았다. 1967년 프란츠 요제프 고틀리프 감독의 ''스파이 오늘, 내일 죽는다''에서 육군 MP 해건 역(크레딧 없음),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채찍을 든 수도승》에서 인스펙터 히긴스 역, 감독의 ''''에서 프랭키 바르거 역, 볼프강 베커 감독의 TV 미니시리즈 ''''에서 에드워드 모리슨 역을 연기했다.
1968년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초자연적인 것에 사로잡혀》에서 인스펙터 히긴스 역, 아르만도 크리스피노 감독의 《코만도》에서 오버로이테난트 하이첼 에이전 - 교수 역을 맡았다. 1969년 알프레트 포러 감독의 《7일의 은총》에서 헨드릭스 역, 안토니오 마르게리티 감독의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에서 벤 테일러 역, 볼프강 베커 감독의 TV 영화 ''''에서 크리스 노먼 역을 연기했다. 1970년 볼프강 베커 감독의 TV 미니시리즈 《11시 20분》에서 토마스 바셈 역을 맡았다.
1971년 감독의 TV 영화 ''뜨거운 모래''에서 제프 발로우 역, 쿠르트 빌헬름 감독의 ''올림피아-올림피아''에서 슈츠게이스트 역을 연기했다. 1972년 마시모 달라마노 감독의 《솔란지에게 무슨 짓을 했니?》에서 바르트 경감 역, 루돌프 제헤트그루버 감독의 ''''에서 플라톤 역을 맡았다. 1973년 위르겐 롤란트 감독의 《홍콩에서 온 소녀》에서 프랭크 보이드 역, 베르너 야콥스 감독의 《나는 비행 교실》에서 요하네스 뵈크 박사, 젠. 유스투스 역을 연기했다.
1977년 미하엘 베르호벤 감독의 ''''에서 록 & 롤 배심원 역을 맡았다. 1982년 에크하르트 슈미트 감독의 《팬》에서 TV 속 남자 역을 연기했다. 1996년 파브리지오 코스타 감독의 TV 미니시리즈 ''''에서 알레시오 카필루피 백작 역을 맡았다. 1998년 감독의 TV 영화 ''''에서 발다사레 역, 파브리지오 코스타 감독의 TV 미니시리즈 ''''에서 마르케 역을 연기했다.
2007년 및 감독의 ''''에서 딕햄 경 역을 맡았다. 2008년 크리스토프 슈레베 감독의 TV 영화 ''''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역을 연기했다. 2010년 볼프강 문베르거 감독의 TV 영화 ''''에서 데겐하르트 샤고베츠 역을 맡았다. 2013년 볼프강 문베르거 감독의 TV 영화 ''''에서 데겐하르트 샤고베츠 역을 맡았으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영화 역할이었다.
4. 2. TV 프로그램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1960년부터 1961년까지 ARD에서 방영된 《침착함을 유지하라》(Nur nicht nervös werden)에 출연했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는 SWF에서 방영된 《뜨거운 선》(Der heiße Draht)에 출연했으며, 1975년부터 1976년까지는 SWF의 《나와 함께 놀아요》(Spiel mit mir)에 출연했다. 1977년부터 1986년까지는 SWF의 《자, 시작하자》(Auf Los geht's los)에 출연했다. 1980년부터 1991년까지 ARD에서 《오늘 저녁》(Heut' abend)을 진행했고, 1990년부터 1994년까지 ARD의 《예 또는 아니오》(Ja oder Nein)를 진행했다.4. 3. 다큐멘터리
요아힘 푹스베르거는 1988년부터 2003년까지 그가 입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풍경에 관한 20편의 영화 시리즈인 ''테라 오스트랄리스''를 제작했다. 2011년에는 미하엘 벵크 감독의 TV 다큐멘터리 ''제르마인 다마 - 춤추는 별''에 출연하여 그의 전 영화 파트너 제르마인 다마를 기념하는 인터뷰를 했다.4. 4. 오디오북
2011년 귈터슬로어 페어라그스하우스 출판사에서 요아힘 푹스베르거가 직접 낭독한 자서전 ''노년은 겁쟁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Growing old is not for cowards)''를 출간했다.()참조
[1]
간행물
Setzen, Sechs! – Schulgeschichten aus Deutschland (1/3). Verlorene Kindheit
SWR
2005-12-08
[2]
웹사이트
Joachim Fuchsberger Biografie
http://www.whoswho.d[...]
[3]
웹사이트
DFB - Deutscher Fußball-Bund e.V. - Newsmeldung
https://web.archive.[...]
2017-07-17
[4]
뉴스
"'Blacky' Fuchsberger trauert um Sohn"
http://www.sueddeuts[...]
Süddeutsche Zeitung
2010-10-15
[5]
뉴스
Tassie loses a friend with star qualities
https://www.themercu[...]
2014-09-20
[6]
뉴스
TV-Legende: Joachim Fuchsberger ist tot
http://www.spiegel.d[...]
Spiegel Online
2014-09-11
[7]
웹사이트
Porträt: Joachim "Blacky" Fuchsberger
https://web.archive.[...]
2010-10-15
[8]
웹사이트
Fuchsberger Biografie bei Steffi-line.de
http://www.steffi-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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