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뉘고르스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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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뉘고르스볼은 노르웨이의 정치인으로, 1935년부터 1945년까지 노르웨이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1902년 캐나다로 이주하여 노동 운동에 참여했으며, 1907년 노르웨이로 돌아와 노동당 교육 위원, 국회의원, 말비크 시장 등을 지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국민 연금 보험 도입 등 진보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망명 정부를 이끌었다. 1949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1952년 사망했다.

요한 뉘고르스볼 - [인물]에 관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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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쇠르트뢰넬라그주 말비크 호멜비크 출신인 뉘고르스볼은 1916년부터 1949년까지 노르웨이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1934년부터 1935년까지 노르웨이 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1935년 총리로 취임하여 1945년까지 재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망명 정부를 이끌었다.

1949년 의원직에서 물러난 후 시민 봉사 훈장(Borgerdådsmedaljen)을 받았다. 트론헤임에서 암으로 사망했으며, 호멜비크 교회에 안장되었다.

2.1. 초기 생애

쇠르트뢰넬라그주 말비크의 호멜비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노동자 연합에서 활동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12세에 제재소 노동자로 첫 직장을 얻었다. 1901년 6월 6일, 알비네 레기네 브란스레트(1878–1961)와 결혼했다.

1902년 캐나다로 이주하여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서, 그리고 미국 몬태나 주 칼리스펠과 워싱턴 주 스포캔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선동가로서의 경력을 쌓은 후, 1907년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1909년 그는 호멜비크 제재소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2.2. 정치 경력

쇠르트뢰넬라그주 말비크 홈멜비크 출신인 뉘고르스볼은 어린 시절부터 노동 운동에 참여했다. 1902년 캐나다로 이주하여 노동 운동에 참여했고, 미국에서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선전원으로 활동했다. 1907년 노르웨이로 귀국한 후 1910년 노동당 교육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16년부터 1949년까지 노르웨이 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는 고향인 말비크의 시장을 역임했다.

1934년부터 1935년까지 노르웨이 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2.2.1. 총리 재임 (1935-1945)

크리스토퍼 호른스루드 내각에서 농업부 장관을 역임한 뉘고르스볼은 1935년 노르웨이 총리로 취임하여 정부를 구성하였다. 1935년 당시 노르웨이는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뉘고르스볼 내각은 농민당과의 "위기 협약"을 통해 경제 회복에 힘썼다.

Nygaardsvold의 초상화, 노르웨이어로 캡션이 적혀 있으며, "우리의 해결책은 모든 사람에게 고용과 안전한 생활 조건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 노르웨이 노동당"을 의미한다.
뉘고르스볼 선거 포스터


뉘고르스볼 내각은 국민 연금 보험 도입, 실업 보험 의무화, 근로 시간 규제, 공휴일 부여, 출산 휴가 부여 등 여러 진보적인 개혁을 시행했다. 또한, 산업, 상업, 사무실, 육상 교통에서의 고용 연령을 14세에서 15세로 상향 조정하고, 일부 산업의 전기 장비 검사를 의무화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70세 이상 노르웨이 시민을 위한 노령 연금과 장애 연금도 도입되었다.

1940년 4월 9일,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뉘고르스볼은 내각 구성원들과 함께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여 런던 주재 노르웨이 망명 정부의 총리를 역임했다. 독일 관료들은 뉘고르스볼 정부가 항복하고 나치 동조자인 비드쿤 퀴슬링이 이끄는 정부를 임명할 것을 요구했지만, 호콘 7세 국왕은 이를 거부하고 퇴위하겠다고 밝혔다.

1945년 5월 31일, 뉘고르스볼은 내각 구성원들과 함께 노르웨이로 귀환했고, 1945년 6월 25일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임 총리로는 모든 정당으로 구성된 임시 정부를 이끌 에이나르 게르하르센이 임명되었다.

뉘고르스볼은 재임 기간 동안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1933년 노동당의 선거 결과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노르웨이 해방 후 조사 위원회는 뉘고르스볼이 독일 침공에 대한 준비 부족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지만, 망명 중의 연립 정부 운영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3. 총리 퇴임 이후

뉘고르스볼은 1945년 5월 31일 내각 구성원들과 함께 노르웨이로 귀환했고, 1945년 6월 25일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3. 평가 및 유산

뉘고르스볼은 재임 기간 동안 큰 인기를 얻었으며, 1933년 노동당의 선거 결과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농민당과 이른바 "위기 협약"을 체결하는데 기여한 후 노르웨이의 두 번째 노동당 내각에서 총리를 지냈다. 그의 정부는 국내 정책으로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에 주력했지만,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점령으로 이어지는 수년간의 외교 및 군사 정책과 1940년부터 1945년까지의 망명 정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르웨이 해방 후 보고서를 발표한 조사 위원회는 뉘고르스볼이 독일의 침공에 대한 작전 준비 부족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지만, 망명 중의 연립 정부 운영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망명 중의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보수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