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루드비 홀스테인
1. 개요
요한 루드비 홀스테인은 1694년에 태어나 1751년에 사망한 덴마크의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그는 1735년부터 1751년까지 덴마크 관방의 수석 서기(국무 장관)를 역임하며, 크리스티안 6세 치세에 덴마크의 주요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셸란의 stiftsamtmand와 코펜하겐 및 로스킬레의 amtmann, 재무부 장관을 거쳐 덴마크 총리직에 올랐다. 종교적 신념이 깊었으며, 덴마크 왕립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지냈다. 또한, 레드레보르 저택을 건설하고 2만 권의 장서를 수집하는 등 학문과 개인적인 삶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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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위 | 덴마크 추밀고문관 |
|---|---|
| 이전 | 울리크 아돌프 홀스테인 |
| 이후 | 요한 하르트비히 에른스트 폰 베른스토르프 |
| 출생일 | 1694년 9월 7일 |
| 사망일 | 1763년 1월 29일 |
| 출생지 | 뤼브츠, 메클렌부르크, 독일 |
| 사망지 | 코펜하겐, 덴마크 |
| 자녀 |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홀스테인 |
| 아버지 | 요한 게오르그 홀스테인 |
| 어머니 | 이다 폰 뷜로 |
| 배우자 | 헤데비그 빈트(1733년 결혼, 1756년 사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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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 사망 -
아우구스트 3세
아우구스트 3세는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 작센 선제후였으며,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으로 왕위에 올라 예술과 건축을 후원했지만, 폴란드 문제에는 소극적이었고 통치 기간을 하인리히 폰 브륄에게 위임했다. -
1763년 사망 -
아베 프레보
아베 프레보는 격정적인 삶을 바탕으로 인간 심리를 탐구하는 작품을 남긴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사제, 번역가이다. -
1694년 출생 -
프랑수아 케네
프랑수아 케네는 프랑스의 의사이자 경제학자로, 중농학파의 창시자이며, 농업을 부의 유일한 원천으로 보는 경제 순환 모델을 제시하고 자유방임주의 경제 정책을 주창하여 경제학과 프랑스 경제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694년 출생 -
볼테르
볼테르는 이성, 자유, 관용을 옹호하며 종교적 불관용과 전제 정치를 비판하고 프랑스 사회 개혁을 촉구한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작가, 역사가이다. -
덴마크의 정치인 -
막스 아릴스코우
막스 아릴스코우는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참전, DNSAP 활동, 신 덴마크 창당, 란스토르멘 지휘, 샬부르크 부대 공동 창설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종전 후 체포 및 사면, 그리고 1986년 사망했다. -
덴마크의 정치인 -
크리스티안 툴레센 달
크리스티안 툴레센 달은 덴마크의 정치인으로, 덴마크 인민당 대표를 역임하며 2015년 총선에서 당을 원내 제2당으로 이끌었으나 2022년 정계에서 은퇴했고, 이민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2. 초기 생애
요한 루드비 홀스테인은 훗날 덴마크 총리가 되는 요한 게오르그 홀스테인과 뷜로 가문 출신 이다 프레데리케 요아치메의 아들이었다. 1694년 9월 7일 외할머니 소유의 뤼브츠 성에서 태어났다. 성장기에 훗날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6세의 가정교사가 되는 J. W. 슈뢰더가 그의 가정교사 중 한 명이었다. 1711년 아버지는 그를 함부르크로 보내 요한 알베르트 파브리시우스에게 1년간 공부하게 했다. 1716년까지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여러 곳에서 공부하고 여행했으며, 덴마크에서 궁정 관리이자 공무원이 되었다.
3. 덴마크에서의 경력
1721년, 크리스티안 6세가 될 크리스티안 왕세자의 궁정 원수가 되었다. 1727년, 프레데리크 4세가 설립한 고아원 Waisenhuset의 원장과 선교 위원회 회원이 되었다. 1730년, 크리스티안 6세 즉위 후 셸란의 stiftsamtmand (amtmann이자 주교와 함께 교구의 공동 행정관)와 코펜하겐 및 로스킬레의 amtmann으로 임명되었다. 1734년 2월에는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3.1. 덴마크 총리 재임 (1735-1751)
1735년 5월 12일, 홀스타인은 이베르 로젠크란츠를 대신하여 덴마크 관방의 수석 서기(종종 국무 장관으로 알려진 직책)로 임명되었다. 이는 새 국왕 크리스티안 6세가 처음에 관방을 이끌 사람들에게 곧 실망하면서 이루어진 인사였다. 같은 해, 홀스타인은 국왕의 평의회(Konseillet)의 회원이 되었다. 1740년에는 코펜하겐 대학교의 후원자로서 로젠크란츠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홀스타인은 덴마크 총리로서 국왕과 일상적인 업무와 국왕이 관여하는 문제에 대해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1734년 2월에는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바 있다. 1757년에는 수년간 운영된 특별 농업 위원회의 첫 번째 회원이 되었다.
총리 임명 이전의 경력으로는, 1721년 크리스티안 왕세자(후일 크리스티안 6세)의 궁정 원수가 되었고, 1727년에는 프레데리크 4세가 설립한 고아원인 Waisenhuset의 원장과 선교 위원회의 회원이었다. 1730년 크리스티안 6세 즉위 후에는 셸란의 stiftsamtmand (amtmann이자 주교와 함께 교구의 공동 행정관)와 코펜하겐 및 로스킬레의 amtmann으로 임명되었다.
4. 종교 및 학문 활동
홀스타인은 경건주의 성향을 가진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그리스어를 공부하여 신약성경을 원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또한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가 읽은 철학자 중 한 명이었으며, 요한 로렌츠 폰 모스하임 및 요한 마티아스 게스너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덴마크에서는 역사가 한스 그람 및 안드레아스 호이에르와 교류했다.
홀스타인은 국왕의 허가를 받아 1742년 11월 13일 그람과 함께 덴마크 왕립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는 평생 동안 아카데미 회장을 역임했으며, 회의는 그의 저택에서 열렸다. 아카데미는 독일어가 홀스타인의 모국어이자 당시 덴마크의 많은 학자들의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덴마크어로 출판하는 것을 선택했다.
5. 개인 생활과 레드레보르
홀스타인은 1733년 덴마크 귀족 여성인 헤드비 빈드 (1707–1756)와 결혼했다. 그들은 크리스티안 프레데릭 홀스타인을 포함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홀스타인은 그녀의 상속 재산, 메클렌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재산을 매각하여 얻은 자본, 그리고 공무원으로서의 수입을 이용하여 레드레보르 지역의 토지를 구입하고 그곳에 레드레보르 저택을 지었다.
홀스타인은 사망할 때 20,000권의 장서와 필사본을 남겼다. 이 두 컬렉션은 모두 현재 코펜하겐 왕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