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사다카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우에스기 사다카쓰는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요네자와번의 2대 번주이다. 1604년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623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문을 계승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알현하고 종4위하 시종에 임관되었으며, 사콘노곤쇼쇼로 전임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삼백일반제를 실시하고 공조 제도를 정비하는 등 번 통치를 강화했으며, 기독교 탄압을 시행했다. 1645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아들 우에스기 쓰나카쓰가 뒤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요네자와번주 -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우에스기 겐신의 양자가 되어 오타테의 난을 겪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귀순하여 아이즈를 다스렸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후 요네자와 번 초대 번주가 되어 에도 시대에 활약하다 사망했다. - 요네자와번주 - 우에스기 무네후사
우에스기 무네후사는 1718년에 태어나 1734년 요네자와 번의 7대 번주가 되었으며, 번 재정의 어려움을 해결하려 노력했으나 1746년에 사망했다. - 요네자와 우에스기가 -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우에스기 겐신의 양자가 되어 오타테의 난을 겪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귀순하여 아이즈를 다스렸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패배 후 요네자와 번 초대 번주가 되어 에도 시대에 활약하다 사망했다. - 요네자와 우에스기가 - 요네자와번
요네자와번은 센고쿠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다테, 가모, 우에스기 가문이 통치했으며, 우에스기 하루노리의 개혁으로 재정난을 극복하고 교육과 복지에 힘썼으나, 보신 전쟁 패배 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다. - 1645년 사망 -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는 17세기 스페인의 시인이자 소설가, 정치가로서,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작품과 궁정 생활로 유명하지만, 반유대주의적 시각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인물이다. - 1645년 사망 - 윌리엄 로드
윌리엄 로드는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찰스 1세의 종교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잉글랜드 국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종교 개혁을 추진했으나, 반대 세력의 저항을 야기하여 반역죄로 처형되고 그의 정책은 잉글랜드 내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에스기 사다카쓰 | |
---|---|
기본 정보 | |
씨명 | 우에스기 씨 |
이름 | 우에스기 사다카쓰 |
원어 이름 | 上杉定勝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게이초 9년 5월 5일 (1604년6월 2일) |
사망 | 쇼호 2년 9월 10일 (1645년10월 29일) |
어릴적 이름 | 다마마루, 지토쿠 |
다른 이름 | 통칭: 기헤이지 |
시호 | 해당 없음 |
계명 | 다이죠인덴 곤다이소즈 류신 |
묘소 | 해당 없음 |
관위 | 종사위하, 단죠다이히쓰, 시종, 좌근위권소장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히데타다 → 이에미쓰 |
번 | 데와요네자와 번주 |
씨족 | 우에스기 씨 |
부모 | 아버지: 우에스기 가게카쓰 어머니: 게이간인 (요쓰지 기미토오시 딸)요네자와의 향토사에는 가이 고젠의 자식으로 보는 설이 있지만, 가이 고젠이 사망한 것은 사다카쓰가 태어나기 전이라 시기적으로 무리가 있다. |
형제 | 양형제: 하타케야마 요시자네 후에 가게카쓰와의 양자 관계를 해소함. |
배우자 | 정실: 나베시마 가쓰시게의 딸・이치히메 측실: 사이토 모토모리의 딸・세이젠인 사이토 씨는 고노에 가쇼다이부(가지)의 가문으로, 관위만으로는 다이묘와 동격이다. |
자녀 | 도쿠마쓰, 쓰나카쓰, 구니마쓰, 도쿠히메 (조쇼인, 마에다 도시쓰구 정실), 도라히메 (류센인, 나베시마 미쓰시게 정실), 가메히메 (호센인, 마에다 도시야키 정실), 미히메 (기라 요시나카 정실) |
초상화 | |
![]() |
2. 생애
겐와 9년(1623년) 2월 13일, 에도 성에 들어가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만나 종4위하 시종에 임관되고, 탄정대필을 겸임했다. 아버지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1월 10일 사다카쓰에게 보낸 서신에서 시종 임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어, 원복 및 임관은 사전에 막부에서 가게카쓰에게 상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공가 출신에게 주어지는 시종 직을 받은 것은 중납언이었던 아버지 가게카쓰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4] 같은 해 5월 13일, 아버지 가게카쓰가 사망하여 가독을 상속했다. 급히 귀국했지만, 6월 25일 히데타다의 상경 및 참내에 맞추기 위해 곧바로 교토로 향했다.[4] 간에이 3년(1626년) 8월 9일, 사콘노곤쇼쇼로 전임되고 탄정대필은 그대로였다. 간에이 원년에 쇼군의 배려로 나베시마 가쓰시게의 딸과 혼인했으며, 간에이 11년(1634년),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상경에 따랐다.
간에이 20년(1643년), 아이즈 번주 가토 아키라나리의 제봉 처리를 했다. 린센지와 토쿠쇼지의 승록 지위를 둘러싼 다툼에서 토쿠쇼지를 파각했다. 쇼호 2년(1645년), 42세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성장
게이초 9년(1604년), 초대 번주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모이자 가게카쓰의 계실인 요츠지 씨의 친가 요츠지 가문은 사이온지 가문의 일문으로, 공가의 명문(우림가)이다. 요츠지 씨는 사다카쓰를 낳고 100일 남짓 지나 사망했기 때문에, 나오에 가네쓰구·오후네노 가타 부부가 양육을 맡았다. 게이초 15년(1610년),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알현했다. 이때, 지토쿠라는 이름을 받았다.[4]2. 2. 번주 취임과 통치
1623년, 아버지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사망하여 가독을 상속받고 요네자와번의 2대 번주가 되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종4위하 시종에 임관되었고, 이후 사콘노곤쇼쇼(左近衛権少将)로 전임되었다.[4] 나베시마 가쓰시게의 딸과 혼인하여 쇼군 가문과의 관계를 강화했다.1634년,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상경에 동행했다. 1643년에는 아이즈 번주 가토 아키라나리의 제봉 처리에 참여했다.
1638년에는 6척 5촌을 1보로 하는 삼백일반제(三百一反制|삼백일반제일본어)로써 총검지(総検地|총검지일본어)를 실시하고 공조(貢租) 제도를 정비했다. 부교(奉行), 군다이(郡代), 다이칸(代官) 등의 번 통치, 향촌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번주 직속 지배 체제를 강화했다. 도쿠가와 막부의 지령으로 크리스천 단속을 강화하여, 1628년 아마카스 노부쓰나를 처형하는 등 영지 내 번사를 포함한 다수의 크리스천들을 사형에 처했다. 1639년에는 기리시탄요코메(吉利支丹横目|기리시탄요코메일본어)를 향촌에 배치했다.
번사들에게는 '다른 가문의 풍조를 흉내내지 말고, 만사 검소하고 의례에 따르는 것을 예절의 주지로 삼고, 의복은 고소데(小袖|고소데일본어) 상하와 기리하카마(桐袴|기리하카마일본어) 등은 입어선 안되며, 오로지 문무충효에 힘써야 한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1645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적남 우에스기 쓰나카쓰가 뒤를 이었다.
3. 번정
1638년(간에이 15년) 6척 5치 1보의 301반 제도로 총 검지를 실시하여 공조 제도를 정비했다. 또한 봉행, 군대, 대관 등 번정, 향촌 지배 체제를 정비하고, 나오에 지배 체제에서 번주 직속 지배 체제로 이행을 추진했다.
에도 막부의 지령을 받아 기리시탄 단속을 강화했다. 1628년 아마카스 노부쓰나를 처형하는 등 영내 번사를 포함한 다수의 기리시탄을 체포, 사형에 처했으며, 1639년 기리시탄 요코메를 향촌에 배치하여 감시하게 했다.
사다카쓰는 요네자와 번사에게 "타가의 풍습을 흉내 내지 않고, 만사를 검소하고 율의(律儀)를 작법으로 삼으며, 의복은 고소데 상하와 기리바카마 등은 무용하며, 오로지 문무 충효에 힘쓸 것"이라는 법령을 내렸다. 이 법령은 후에 우에스기 하루노리의 첫 입부 시 "어조목"의 첨서에 사용되었다.[1]
3. 1. 번정 개혁
1638년(간에이 15년) 6척 5촌을 1보로 하는 삼백일반제(三百一反制|삼백일반제일본어)로써 총검지(総検地|총검지일본어)를 실시하여 공조(貢租)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부교(奉行), 군다이(郡代), 다이칸(代官) 등의 번 통치, 향촌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번주 직속 지배 체제를 강화하였다.[1] 도쿠가와 막부의 지령을 받아 크리스천 단속을 강화했다. 1628년(간에이 5년)에는 아마카스 노부쓰나를 처형하는 등, 영지 내에서 번사를 포함한 다수의 크리스천들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였고, 1639년(간에이 16년)에 기리시탄요코메(吉利支丹横目|기리시탄요코메일본어)를 향촌에 배치시켰다.[1] 한편 번사들에 대해서는 '다른 가문의 풍조를 흉내내지 말고, 만사 검소하고 의례에 따르는 것을 예절의 주지로 삼고, 의복은 고소데(小袖|고소데일본어) 상하와 기리하카마(桐袴|기리하카마일본어) 등은 입어선 안되며, 오로지 문무충효에 힘써야 한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이 법령은 이후 우에스기 하루노리가 처음 입부하던 때의 '어조목'에 첨부되어 있다.[1]3. 2. 기독교 탄압
도쿠가와 막부의 지령을 받아 기독교 단속을 강화했다. 1628년 아마카스 노부쓰나를 처형하는 등, 영지 내에서 번사를 포함한 다수의 기독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1] 1639년에는 기리시탄요코메(吉利支丹横目|기리시탄요코메일본어)를 향촌에 배치하여 감시를 강화했다.[1] 이러한 종교 탄압은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더라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3. 3. 번사들에 대한 법령
번사들에게 '다른 가문의 풍조를 흉내 내지 말고, 만사 검소하고 의례에 따르는 것을 예절의 주지로 삼고, 의복은 고소데(小袖) 상하와 기리바카마(桐袴) 등은 입어선 안 되며, 오로지 문무충효에 힘써야 한다'는 법령을 반포했다. 이 법령은 이후 우에스기 하루노리가 처음 입부하던 때의 '어조목'에 첨부되어 있다.4. 가계
구분 | 내용 |
---|---|
아버지 | 우에스기 가게카쓰 |
어머니 | 게이간인 (요쓰지 긴토오의 딸) |
정실 | 이치히메 (나베시마 가쓰시게의 딸) |
측실 | 세이젠인 (고노에가 가신 사이토 모토모리의 딸) |
자녀 | 내용 |
딸 | 도쿠히메 (마에다 도시하루의 정실) |
딸 | 도라히메 (나베시마 미쓰시게의 정실) |
아들 | 도쿠마쓰 |
아들 | 우에스기 쓰나카쓰 (요네자와 번 3대 번주) |
아들 | 우에스기 구니마쓰 |
딸 | 바이레이인(셋키) (기라 요시나카의 정실) |
참조
[1]
역사
米沢の郷土史には甲斐御前の子とする説があるが、甲斐御前が逝去したのは定勝が生まれる前であり、時期的に無理がある。
[2]
기타
後に景勝との養子縁組を解消。
[3]
역사
斎藤氏は近衛家諸大夫(家司)の家柄で、官位だけなら大名とも同格である。
지하가의 일람#제가지대부
[4]
논문
将軍権力と大名の元服・改名・官位叙任
吉川弘文館
201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