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네자와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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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네자와번은 센고쿠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존속했던 일본의 번으로, 다테 가문, 가모 가문, 우에스기 가문을 거치며 통치되었다. 1601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우에스기 가문이 30만 석으로 감봉되어 요네자와 번이 성립되었으며, 번의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보신 전쟁에서는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했으나 패배하여 감봉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다. 요네자와 번은 특유의 번법, 가신단, 재정 운영 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교육과 복지에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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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네자와번 - 우에스기씨
우에스기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 센고쿠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까지 번영하며 간토 간령, 슈고 다이묘, 요네자와 번주 등을 역임했고, 메이지 시대에는 화족으로 서임되었다. - 요네자와번 - 요네자와성
가마쿠라 시대에 축조되어 센고쿠 시대 다테 마사무네가 태어난 요네자와성은 무로마치 시대 다테 씨의 본거지, 에도 시대 요네자와 번 우에스기 씨의 거성이었으나, 보신 전쟁 후 철거되어 현재는 우에스기 신사가 있는 마쓰가사키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속일본100명성에 선정되었다. - 우젠국의 번 - 마쓰마에번
마쓰마에번은 홋카이도 남부를 지배하며 에조와의 교역으로 성장한 번으로, 가키자키 가문이 기반을 닦고 마쓰마에로 성씨를 바꾼 후 에조와의 무역 독점권을 인정받아 경제를 유지했으나, 러시아의 남하와 정세 변화 속에서 변동을 겪다가 폐지되었다. - 우젠국의 번 - 덴도번
덴도번은 에도 시대 후기 오다 노부카쓰의 후손인 오다 가문이 다스린 도자마 다이묘 번으로, 데와국 무라야마 군 지역을 통치하며 쇼기를 장려하여 덴도시가 쇼기의 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했으나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 후 신정부군에 항복했다.
요네자와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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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요네자와 번 (米沢藩) |
유형 | 번 |
국가 | 도쿠가와 막부 시대의 일본 |
오늘날의 위치 | 야마가타현의 일부 |
역사 | |
성립 | 1601년 |
소멸 | 1871년 |
통치 | |
정부 형태 | 다이묘 |
거점 | 요네자와성 |
지리 |
2. 역사
1548년부터 1589년까지, 그리고 1590년부터 1591년까지 다테 가문의 본거지였던 요네자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다테 마사무네가 무쓰노쿠니 이와데야마 성으로 옮겨가면서 가모 가문을 거쳐 우에스기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9]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가로 나오에 가네쓰구에게 30만 석을 주어 요네자와에 배치하여 다테 가문과 모가미 가문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았다.[9]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1601년,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120만 석에서 30만 석으로 크게 감봉당하고, 거성을 아이즈에서 요네자와로 옮기면서 요네자와 번이 성립되었다.[9] 번의 영지는 오키타마 지방 18만 석과 다테 군, 시노부 군 12만 석으로 구성되었다.[9] 나오에 가네쓰구는 요네자와 성을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양보하였다.[9]
우에스기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영지가 크게 줄었지만, 가신단을 그대로 유지하여 재정난에 시달렸다. 3대 번주 우에스기 쓰나카쓰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아이즈번주 호시나 마사유키의 노력으로 기라 요시히사의 아들 쓰나노리를 양자로 삼아 영지가 15만 석으로 삭감된 채 존속되었다. 그러나 영지 감소에도 불구하고 가신단의 규모는 줄지 않아 재정난은 더욱 심화되었다.[13]
8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는 재정난이 너무 심각하여 막부에 영지를 반납하는 것까지 고려했다.[13] 그러나 9대 번주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가 번정 개혁을 단행하여 재정 재건에 성공했다.
보신 전쟁에서 요네자와 번은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센다이번과 함께 동맹의 중핵을 담당했다. 아이즈번 토벌을 꾀하는 신정부군에 대해 호시나 마사유키에 대한 은혜를 갚고자 중개를 도맡았지만 실패했다. 요네자와 번은 옛 영지였던 에치고노쿠니 방면을 담당했으나, 신정부군에게 거듭 패배하여 결국 데와노쿠니 국경에서 항복하였다. 이후 신정부의 명에 따라 쇼나이번 정벌에 군사를 동원하고, 아이즈 번에 대해서도 항복을 권유했다.
전쟁이 끝난 뒤 요네자와 번은 14만 7천 석으로 감봉되었고, 1869년(메이지 2년)에는 요네자와 신덴 번을 병합하였다. 미야지마 세이치로의 지도 아래 판적봉환 등 신정부의 개혁을 지지하면서 '조적(朝敵)'으로서의 오명을 씻으려 했다.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으로 요네자와 번은 폐지되어 현이 되었고, 오키타마 현을 거쳐 야마가타현으로 편입되었다.
2. 1. 센고쿠 시대 이전
센고쿠 시대 이전 요네자와는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덴분 17년(1548년)부터는 다테 가문의 본거지였다.가모 우지사토가 아이즈 영주가 되면서 요네자와는 가모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가모 가문 사후,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아이즈에 입봉하여 요네자와는 다시 우에스기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가로 나오에 가네쓰구에게 30만 석을 주어 요네자와로 들어가게 하여, 다테 가문 및 모가미 가문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았다.
2. 1. 1. 다테 가문의 본거지 시대
센고쿠 시대 덴분 17년(1548년)부터 다테 가문의 본거지였다. 당시 다테 가문은 제14대 다테 도키무네와 적자인 하루무네 간의 내분(덴분의 난)이 일어났고, 그 내분에서 승리한 하루무네가 다테 가문의 제15대 당주가 되어 요네자와로 본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하루무네와 적자인 테루무네도 내분을 일으켰고, 테루무네가 승리하여 제16대 당주가 되었지만, 다테 가문은 그 때문에 세력 확장이 크게 지연되었다.덴쇼 12년(1584년) 10월, 테루무네는 은거하고 적자인 마사무네가 제17대 당주가 되었다[1]. 마사무네는 소마 가문, 니혼마쓰 하타케야마 가문, 아시나 가문 등 오슈 남부의 여러 가문을 공격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덴쇼 17년(1589년) 6월에 스리가하라 전투에서 아시나 가문에게 대승을 거두고 그 가문을 멸망시켰으며[2], 이후 마사무네는 아시나 가문의 본거지였던 구로카와성을 본거지로 삼았다. 또한 니카이도 가문[3], 이시카와 가문 및 이와키 가문[4]을 멸망시킨 마사무네는 오우 66군 중 약 절반을 지배하는[5] 오우의 패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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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 마사무네는 6월에 오다와라에 참진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신종했다. 이 때문에 다테 가문의 존속은 허용되었지만, 히데요시의 오슈 시오키에 의해 아이즈군, 아사카군, 이와세군 등 3군은 히데요시가 발령한 오우 양국 총무사령 위반이라 하여 몰수되었고[6], 마사무네는 다시 본거지를 요네자와로 옮겼다[9]. 하지만 히데요시는 오슈 시오키 때 엄격한 검지를 명했기 때문에[10], 10월 초순에 오슈 시오키에서 개역된 오사키 가문과 가사이 가문의 구령에서 잇키가 일어났다[11]. 이 잇키는 아이즈의 새로운 영주가 된 가모 우지사토와 마사무네에 의해 진정되었지만, 잇키 선동에 마사무네가 관여했고, 또한 우지사토 암살 모략이 있었다 하여 히데요시는 덴쇼 19년(1591년) 가을에 마사무네로부터 요네자와를 비롯하여 다테군과 시노부군 등을 몰수하고 오사키·가사이의 구령을 주었다[12]. 이로 인해 다테 가문의 영지는 더욱 감소했고, 연공 수입은 종전의 절반 정도가 되었다[12]. 마사무네는 이와테자와 성을 새로운 거성으로 정하고 이와데야마로 개명했다[12].
2. 1. 2. 가모 가문, 우에스기 가문의 지배
가모 우지사토가 아이즈 영주가 되면서 요네자와는 가모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가모 가문 사후,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아이즈에 입봉하여 요네자와는 우에스기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가로 나오에 가네쓰구에게 30만 석을 주어 요네자와로 들어가게 하여, 다테 가문 및 모가미 가문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았다.2. 2. 에도 시대
1548년부터 1589년까지, 그리고 1590년부터 1591년까지 다테 가문의 본거지였던 요네자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다테 마사무네가 무쓰노쿠니 이와데야마 성으로 옮겨가면서 가모 가문을 거쳐 우에스기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9]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가로 나오에 가네쓰구에게 30만 석을 주어 요네자와에 배치하여 다테 가문과 모가미 가문에 대항하는 거점으로 삼았다.[9]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1601년,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120만 석에서 30만 석으로 크게 감봉당하고, 거성을 아이즈에서 요네자와로 옮기면서 요네자와 번이 성립되었다.[9]
2. 2. 1. 우에스기 가문의 성립과 초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우에스기 가문은 120만 석에서 30만 석으로 감봉되어 요네자와 번이 성립되었다.[9] 번의 영지는 오키타마 지방 18만 석과 다테 군, 시노부 군 12만 석으로 구성되었다.[9] 나오에 가네쓰구는 요네자와 성을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양보하였다.[9]2. 2. 2. 재정난과 번정 개혁
우에스기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영지가 120만 석에서 30만 석으로 크게 줄었지만, 가신단을 그대로 유지하여 재정난에 시달렸다.[13] 3대 번주 우에스기 쓰나카쓰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아이즈번주 호시나 마사유키의 노력으로 기라 요시히사의 아들 쓰나노리를 양자로 삼아 영지가 15만 석으로 삭감된 채 존속되었다. 그러나 영지 감소에도 불구하고 가신단의 규모는 줄지 않아 재정난은 더욱 심화되었다.[13]8대 번주 우에스기 시게사다는 재정난이 너무 심각하여 막부에 영지를 반납하는 것까지 고려했다.[13] 그러나 9대 번주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가 번정 개혁을 단행하여 재정 재건에 성공했다. 요잔은 휴가 다카나베번아키즈키 가 출신의 양자로, 1767년 가독을 상속받아 번정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대절약령을 발포하고 자신의 생활비를 대폭 삭감했으며, 안방 여종을 대폭 정리해고했다.[13]
요잔은 식산흥업 정책, 적전의 례, 세습 대관 제도의 폐지, 비황 20개년 계획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13] 특히, 뽕나무와 옻나무를 심고, 비단 직물 전매제를 실시하고, 축직 기술을 도입하고, 쿠로이 타다요리에 의한 관개 사업을 추진하는 등 殖産興業 정책을 통해 번 재정을 회복시켰다.[13] 또한, 번교인 고조칸(興譲館, 현 야마가타현립 요네자와 쿄조칸 고등학교)을 부흥시켜 번사 교육에도 힘썼다.[13]
하지만 요잔의 개혁은 우에스기 겐신 이래의 원로 신하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1773년에는 가로인 스다 미쓰노리 등이 칠가 소동을 일으켜 요잔의 측근인 다케마타 도모쓰나 일파를 제거하려 했다.[13] 덴메이 대기근 등으로 개혁이 정체되기도 했지만, 요잔은 은거 후에도 번정 개혁을 지속했다.[13]
요잔은 차입금 반환 연기를 간청하고 재정 지출을 긴축하는 한편, 등급에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재정 재건 16개년 계획, 농촌 부흥 계획, 상서함 설치, 긴축 재정에서 영민 보호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13] 이러한 노력으로 요네자와번은 멸망 직전에서 벗어나 재건될 수 있었다.[13] 하루노리·하루히로 대에는 차입금을 모두 갚고 5천 량의 비축금을 갖게 되었으며, 나리노리 대에는 쇼나이번의 "전봉 저지" 비용 7만 3천 량을 제공할 정도로 재정적 여유가 생겨났다.[13]
2. 2. 3.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
보신 전쟁에서 요네자와번은 아이즈번 토벌을 꾀하는 신정부군에 대해, 호시나 마사유키에 대한 은혜를 갚고자 중개를 도맡았지만 실패했다. 이후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센다이번과 함께 동맹의 중핵을 담당했다. 요네자와 번은 옛 영지였던 에치고노쿠니 방면을 담당했으나, 신정부군에게 거듭 패배하여 결국 데와노쿠니 국경에서 항복하였다. 이후 신정부의 명에 따라 쇼나이번 정벌에 군사를 동원하고, 아이즈 번에 대해서도 항복을 권유했다. 전쟁이 끝난 뒤 요네자와 번은 14만 7천 석으로 감봉되었고, 1869년(메이지 2년)에는 요네자와 신덴 번을 병합하였다. 미야지마 세이치로의 지도 아래 판적봉환 등 신정부의 개혁을 지지하면서 '조적(朝敵)'으로서의 오명을 씻으려 했다.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으로 요네자와 번은 폐지되어 현이 되었고, 오키타마 현을 거쳐 야마가타현으로 편입되었다.2. 3. 메이지 시대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센다이번과 함께 중심 역할을 했던 요네자와 번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여러 변화를 겪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14만 7천 석으로 감봉되었고, 1869년에는 요네자와 신덴 번을 병합하였다. 미야지마 세이치로의 지도 아래 판적봉환 등 신정부의 개혁을 지지하면서 '조적'(朝敵)의 오명을 씻으려 했다.2. 3. 1. 폐번치현과 그 이후
보신 전쟁에서 요네자와 번은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가담하여 센다이번과 함께 중심 역할을 했다. 요네자와 번은 옛 영지였던 에치고노쿠니 방면을 담당했지만, 신정부군에게 계속 패배하여 결국 데와노쿠니 국경에서 항복했다. 이후 신정부의 명령에 따라 쇼나이번 정벌에 군사를 동원하고, 아이즈번에 대해서도 항복을 권유했다. 전쟁이 끝난 후 요네자와 번은 14만 7천 석으로 감봉되었다.메이지 2년(1869년)에는 요네자와 신덴 번을 병합하였다. 요네자와 번은 미야지마 세이치로의 지도 아래 판적봉환 등 신정부의 개혁을 지지하면서 '조적'(朝敵)의 오명을 씻으려 노력했다.
메이지 4년(1871년), 폐번치현으로 요네자와 번은 폐지되어 요네자와 현이 되었고, 오키타마 현을 거쳐 야마가타현에 편입되었다.
요네자와의 마지막 번주였던 우에스기 모치노리는 훗날 새로운 화족 작위인 백작이 되었다.[1]
3. 번의 통치 구조
요네자와 번은 에도 시대 초기부터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우에스기 가문이 120만 석에서 30만 석으로 감봉되면서 수입이 크게 줄었지만, 에치고 시대부터 따르던 가신들을 대부분 유지했기 때문이다. 가신 1인당 토지에서 얻는 수입은 낮게 억제되었고, 이는 가신 개개인의 극심한 경제적 곤궁으로 이어졌다.[9]
2대 번주 우에스기 사다카쓰는 신전 개발을 추진했지만, 1664년 3대 번주 우에스기 쓰나카쓰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영지가 15만 석으로 반감되어 재정난이 더욱 심화되었다. 8대 번주 우에스기 시게타다는 쇼군 정권에 영지를 반납하려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9]
1767년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가 번주가 되면서 대대적인 번정 개혁이 시작되었다. 요잔은 검약령을 발포하고, 농촌 통제를 강화했으며, 비단 직물의 전매제를 실시하는 등 재정 재건에 힘썼다. 또한 뽕나무와 옻나무를 심고, 축직 기술을 도입하고, 관개 사업을 추진하는 등 식산흥업 정책을 통해 번 재정을 회복시켰다.[9] 호소이 헤이슈를 초빙하여 번교인 고조칸(현 야마가타현립 요네자와 쿄조칸 고등학교)을 설립하여 번사 교육에도 힘썼다.
요잔의 개혁으로 요네자와 번은 다시 번영하게 되었고, 덴메이 대기근(1781–89)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1830년에는 쇼군 정권으로부터 잘 다스려지는 영지의 대표적인 예로 공식 선언되기도 했다.[9] 그러나 막말 시기 외국 선박의 접근에 따른 군역 등으로 인해 재정은 다시 악화되었다. 보신 전쟁에서 오에쓰 열반 동맹에 가담했다가 패배한 후, 메이지 원년(1868년)에는 4만 석을 감봉당해 14만 7천 석이 되었다.[9] 미야지마 세이이치로의 지도하에 판적봉환 등 메이지 정부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재정 안정을 도모했다.
요네자와 번에서는 독자적인 번찰도 사용했다. 호레키 13년(1763년)에는 우에스기 가문이 교토 저택을 되사면서 은찰도 발행되었다. 메이지 7년(1874년) 신정부에 의한 신통화 발족에 따라 번찰이 회수될 때, 금찰 1냥은 1엔, 은찰 50몬메는 1엔의 파격적인 환율로 교환되었다.[15]
요네자와 번의 재정 상황은 다음과 같다.
요네자와 번의 PL 또는 SI (플로우/세입 부문) =미납고+금납액/년 | 요네자와 번의 BS (스톡/자본 부문) =자산-부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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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 석 시대…5만 석+1만 냥 (쓰나카쓰 상속 시) | 쓰나카쓰 상속 시…13만 냥 |
3. 1. 종교
가모 우지사토가 기리시탄 다이묘였던 영향으로[19], 구 가모 영지는 도호쿠 지방의 기독교 신앙 근거지와 같은 지역이 되었다. 요네자와에도 우지사토의 가신이자 기독교 신자였던 가모 사토야스가 성주였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다. 우에스기 가문이 요네자와에 들어온 후, 1611년에는 프란치스코회 신부 루이스 소테로에 의해 아마카스 가게쓰구의 아들 노부쓰나가 기독교에 입교했고[20], 이후 노부쓰나에 의해 요네자와의 기독교 신앙이 확대되었다.[21]에도 막부가 1613년 전국에 금교령을 내리면서 가혹한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었다.[19][21] 이 탄압으로 교토, 오사카 지역의 기독교 신앙은 쇠퇴했지만, 박해받은 신자들은 주로 도호쿠 지방으로 피신했기 때문에 도호쿠 지역의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번성하게 되었다. 요네자와에서는 노부쓰나의 포교 활동으로 신도가 1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21] 막부는 요네자와에 기독교 탄압을 명령했지만,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형식적으로는 따르면서도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상당히 관대했다.[21] 이는 우에스기 가문 내에 많은 기독교 신자 무사들이 있었고, 유능한 인재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22]
그러나 가게카쓰 사후, 뒤를 이은 사다카쓰는 막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1628년 아마카스 노부쓰나와 그 가족, 가신 등 14명을 처형한 것을 시작으로[22], 기독교 탄압을 계속하여 요네자와 간에이 5년의 기독교 탄압으로 불리는 이 해에만 70명 이상이 순교했다.[22]
시마바라의 난 이후에는 기독교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고[22], 사다카쓰의 사촌인 야마우라 겐바도 1653년에 막부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23]
3. 2. 가신단
요네자와 번은 다른 번에 비해 하급 무사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9]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하여 영지가 4분의 1로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신들을 해고하지 않고 그대로 요네자와로 데려왔기 때문이다.[9] 이로 인해 가신 1인당 지행고(知行高, 토지에서 얻는 수입)는 낮게 억제되었고, 이는 가신 개개인의 극심한 경제적 곤궁으로 이어졌다.[9]오사카 전투에서 우에스기 군은 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진했지만,[9] 원래 30만 석의 영지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은 최대 7,500명에서 9,000명 정도였다. 이는 우에스기 가문이 동원 가능한 병력의 두 배 이상을 동원한 것이다. 야마가타현 내에 있던 쇼나이번 사카이 가문의 가신은 약 1,900명인데 비해, 요네자와 번은 약 5,000명으로, 가신의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이 재정난의 한 원인이었다.[9]
요네자와 번의 가신 구성은 상급 가신(고케슈, 봉행, 가로, 분령가)이 약 2%인 95명, 중급 가신(우에스기 겐신의 기하타였던 우마마와리구미,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기하타였던 고시키구미, 나오에 가네쓰구의 요이타슈)이 약 19%인 930명, 나머지 약 3,900명이 하급 가신이었다.[9]
일반적으로 최하위 계급인 족경은 기술직으로 취급되어 세습이 아닌 1대 고용이 원칙이었다.[9] 그러나 요네자와 번에서는 족경(특히 조총 족경)은 세습되었고, 봉급도 도사(徒士) 계급 등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경우도 있었다.[9] 이는 요네자와 번이 조총의 기능을 중요하게 여겨 수련을 장려했고, 매년 정월에는 번주가 참관하는 조총 공개 행사에서 가신들이 기량을 겨루는 무대가 있었기 때문이다.[9] 중급 무사도 조총을 다룰 수 있었지만, 10몬메(匁, 무게 단위)까지만 허용되었고, 20몬메 이상의 대통(大筒) 사격은 족경에게만 허용된 특수 기능이었다. 대통을 다룰 수 있는 자에게는 추가 급여가 주어졌다.[9]
세키가하라 전투 후 영지가 줄어 하급 무사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요네자와 번은 번 경계 경비와 황무지 개간을 위해 하급 무사들을 변경 지역에 배치하여 반농반사(半農半士)의 생활을 하게 했다. 이들을 하라가타슈(原方衆)라고 불렀으며, 약 1,900명으로 하급 무사의 반수를 차지했다.[9] 이들은 농민과 비슷한 생활을 했지만, 무사로서의 긍지를 잊지 않고 학문과 무예에 힘쓰는 자도 많았다. 이들은 개척한 토지를 그대로 소유했고, 세금도 경감되어 성 아래 사는 무사보다 생활이 안정되었다.[9]
반면 성 아래에 모여 사는 하급 무사들은 생활이 어려워 부업을 하거나, 장인이나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 수입을 얻어야 했다.[9] 요네자와 사람들은 이들에게 "인부님", "대목님"과 같이 경칭을 붙여 불렀고, 이러한 풍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9]
3. 3. 재정
요네자와 번은 에도 시대 초기부터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우에스기 가문이 120만 석에서 30만 석으로 감봉되면서 수입이 크게 줄었지만, 에치고 시대부터 따르던 가신들을 대부분 유지했기 때문이다.2대 번주 우에스기 사다카쓰는 신전 개발을 추진했지만, 1664년 3대 번주 우에스기 쓰나카쓰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영지가 15만 석으로 반감되어 재정난이 더욱 심화되었다. 8대 번주 우에스기 시게타다는 쇼군 정권에 영지를 반납하려 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9]
1767년 우에스기 하루노리(요잔)가 번주가 되면서 대대적인 번정 개혁이 시작되었다. 요잔은 검약령을 발포하고, 농촌 통제를 강화했으며, 비단 직물의 전매제를 실시하는 등 재정 재건에 힘썼다. 또한 뽕나무와 옻나무를 심고, 축직 기술을 도입하고, 관개 사업을 추진하는 등 식산흥업 정책을 통해 번 재정을 회복시켰다.[9] 호소이 헤이슈를 초빙하여 번교인 쿄조칸(현 야마가타현립 요네자와 쿄조칸 고등학교)을 설립하여 번사 교육에도 힘썼다.
요잔의 개혁으로 요네자와 번은 다시 번영하게 되었고, 덴메이 대기근(1781–89)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1830년에는 쇼군 정권으로부터 잘 다스려지는 영지의 대표적인 예로 공식 선언되기도 했다.[9]
그러나 막말 시기 외국 선박의 접근에 따른 군역 등으로 인해 재정은 다시 악화되었다. 보신 전쟁에서 오에쓰 열반 동맹에 가담했다가 패배한 후, 메이지 원년(1868년)에는 4만 석을 감봉당해 14만 7천 석이 되었다.[9]
요네자와 번은 미야지마 세이이치로의 지도하에 판적봉환 등 메이지 정부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재정 안정을 도모했다.
요네자와 번에서는 독자적인 번찰도 사용했다. 호레키 13년(1763년)에는 우에스기 가문이 교토 저택을 되사면서 은찰도 발행되었다. 메이지 7년(1874년) 신정부에 의한 신통화 발족에 따라 번찰이 회수될 때, 금찰 1냥은 1엔, 은찰 50몬메는 1엔의 파격적인 환율로 교환되었다.[15]
3. 4. 교육
나오에 가네쓰구는 겐와 4년(1618년)에 젠린 문고를 창설하여 아시카가 학교나 가나자와 문고에 필적하는 학문 수행의 도장으로 삼아 가신의 교육을 도모하려 했지만, 나오에가 이듬해에 병사했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13] 4대 우에스기 쓰나노리는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장학으로 학문소를 창설했지만, 이후 요네자와번의 번 재정 악화로 인해 학문소 자체가 쇠퇴했다.[13]이 때문에 요네자와번에서 실질적으로 번교가 창설된 것은 우에스기 요잔의 개혁기이다.[13] 요잔은 자신의 스승 호소이 헤이슈를 요네자와에 초빙하여,[13] 스승의 명명으로 번교는 고조칸으로 명명되었다.[13] 규모와 내용은 겐와나 겐로쿠 시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으며,[13] 요잔과 호소이는 번교에 우수한 지도자가 될 만한 인재 육성의 역할을 요구했다.[13] 번교의 서열은 신분이 아닌 연장자 순서로 정해졌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에게 연 1냥의 수당을 지급하고 기숙사비를 무료로 하는 등의 특전도 있었다. 이 번교 출신 자제들이 번의 중추에서 활약하게 된다.[13]
유익한 여러 설을 흡수하고 실천을 중시한 기토쿠민의 절충학을 비롯하여, 다른 번에서 배척되었던 야마가류 고학(성학)도 배우게 되었으며, 분세이 시대에는 라이 산슈, 가에이 시대에는 요시다 쇼인도 교류를 위해 요네자와를 방문했다.[23][24]
란가쿠도 장려하여 이토 쇼테키 등이 나가사키에 유학했다.
한편, 요네자와번에서는 메이지 4년(1871년) 1월에 양학사를 설립, 게이오기주쿠에서 3명의 교사를 초빙하여 수업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영국인 찰스 헨리 댈러스를 어학 교사로 초빙했다. 요네자와번 지사 명의의 서장 안에는 "인민 평균의 이치", "자주 자유의 권"이라는 구미의 정치 용어가 사용되었다.
3. 5. 복지
上杉治憲|우에스기 하루노리일본어(요잔)는 가신과 영민을 불문하고 노인과 아동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복지 정책을 실시했다. 간세이 4년(1792년)에는 90세 이상의 노인에게 평생 1인분의 녹미를 지급하는 노령 연금 제도를 실시했다.[4] 또한 15세 이하의 자녀가 5명 이상인 가정에는 막내가 5세가 될 때까지 1인분의 녹미를 지급하는 아동 수당을 실시했다.[4] 효행과 정절 등으로 뛰어난 "선행자"를 표창하는 제도를 권장하여 복지를 정했고, 특히 모범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평생 집의 문기둥에 이름을 새겨 현창했다.[4]3. 6. 번법
요네자와 번은 형법전을 제정하지 않고 판례에 준거하여 처벌을 행했다. 주요 판례집에는 『어하부인합』, 『중전류취』, 『어재허초』 등이 있으며, 그것들을 연결하면 에도 시대 전기의 형사 판결이 명확해진다.[1] 거기에 기록된 형벌의 종류는 약 60종 정도이며, 그중에는 암살, 향체, 출봉공, 정가옥도 등 다른 번에서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1]4. 역대 번주
대수 | 번주 | 초상화 | 재임 기간 | 비고 |
---|---|---|---|---|
1 | 우에스기 가게카쓰 上杉景勝일본어 | ![]() | 1601년 ~ 1623년 | |
2 | 우에스기 사다카쓰 上杉定勝일본어 | ![]() | 1623년 ~ 1645년 | |
3 | 우에스기 쓰나카쓰 上杉綱勝일본어 | ![]() | 1645년 ~ 1664년 | |
4 | 우에스기 쓰나노리 上杉綱憲일본어 | 1664년 ~ 1703년 | 고가 기라 요시히사의 장남 | |
5 | 우에스기 요시노리 上杉吉憲일본어 | ![]() | 1703년 ~ 1722년 | |
6 | 우에스기 무네노리 上杉宗憲일본어 | ![]() | 1722년 ~ 1734년 | |
7 | 우에스기 무네후사 上杉宗房일본어 | ![]() | 1734년 ~ 1746년 | |
8 | 우에스기 시게사다 上杉重定일본어 | ![]() | 1746년 ~ 1767년 | |
9 | 우에스기 하루노리 上杉治憲일본어 | ![]() | 1767년 ~ 1785년 | 다카나베번주 아키즈키 다네미쓰의 차남 |
10 | 우에스기 하루히로 上杉治広일본어 | ![]() | 1785년 ~ 1812년 | |
11 | 우에스기 나리사다 上杉斉定일본어 | ![]() | 1812년 ~ 1839년 | |
12 | 우에스기 나리노리 上杉斉憲일본어 | ![]() | 1839년 ~ 1869년 | |
13 | 우에스기 모치노리 上杉茂憲일본어 | ![]() | 1869년 ~ 1871년 |
4. 1. 요네자와 번
대수 | 번주 | 초상화 | 재임 기간 | 비고 |
---|---|---|---|---|
1 | 우에스기 가게카쓰 上杉景勝일본어 | 1601년 ~ 1623년 | ||
2 | 우에스기 사다카쓰 上杉定勝일본어 | 1623년 ~ 1645년 | ||
3 | 우에스기 쓰나카쓰 上杉綱勝일본어 | 1645년 ~ 1664년 | ||
4 | 우에스기 쓰나노리 上杉綱憲일본어 | 1664년 ~ 1703년 | 고가 기라 요시히사의 장남 | |
5 | 우에스기 요시노리 上杉吉憲일본어 | 1703년 ~ 1722년 | ||
6 | 우에스기 무네노리 上杉宗憲일본어 | 1722년 ~ 1734년 | ||
7 | 우에스기 무네후사 上杉宗房일본어 | 1734년 ~ 1746년 | ||
8 | 우에스기 시게사다 上杉重定일본어 | 1746년 ~ 1767년 | ||
9 | 우에스기 하루노리 上杉治憲일본어 | 1767년 ~ 1785년 | 다카나베번주 아키즈키 다네미쓰의 차남 | |
10 | 우에스기 하루히로 上杉治広일본어 | 1785년 ~ 1812년 | ||
11 | 우에스기 나리사다 上杉斉定일본어 | 1812년 ~ 1839년 | ||
12 | 우에스기 나리노리 上杉斉憲일본어 | 1839년 ~ 1869년 | ||
13 | 우에스기 모치노리 上杉茂憲일본어 | 1869년 ~ 187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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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요네자와 신덴 번
요네자와 신덴 번은 1719년, 요네자와 번의 4대 다이묘인 우에스기 쓰나노리의 넷째 아들 우에스기 가쓰치카를 위해 설립되었으며, 10,000 곡의 새로운 쌀 수입을 할당받았다.[29] 이 번은 요네자와 번의 부속 영지로 유지되었으며, 본가의 아들들이 번주를 역임했다. 보신 전쟁에서 요네자와 번이 패배한 후, 요네자와 신덴 번은 본가에 흡수되었고, 마지막 다이묘인 우에스기 가쓰미치는 후에 화족의 작위인 자작을 받았다.- - '''우에스기 씨''' 1719–1869 (도자마)
이름 | 재임 기간 | 예칭 | 조정 관위 | 고쿠다카 | |
---|---|---|---|---|---|
1 | 우에스기 가쓰치카 | 1719년 ~ 1749년 | 스루가노카미(駿河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10,000 곡 |
2 | 우에스기 가쓰요시 | 1749년 ~ 1785년 | 스루가노카미(駿河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10,000 곡 |
3 | 우에스기 가쓰사다 | 1785년 ~ 1815년 | 스루가노카미(駿河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10,000 곡 |
4 | 우에스기 가쓰요시 | 1815년 ~ 1842년 | 스루가노카미(駿河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10,000 곡 |
5 | 우에스기 가쓰미치 | 1842년 ~ 1869년 | 사도노카미(佐渡守) | 종5위하 (従五位下) | 10,000 곡 |
'''요네자와 신덴 번'''(米沢新田藩)은 요네자와 번의 지번(支藩)이다. 외부 다이묘 가문(外様)으로, 야나기마 간(柳間詰)에 위치했다. 대대로 슨가노카미(駿河守)를 칭하며, 슨푸 성가반(加番) 역할을 맡았다. 교호 4년(1719년)에 5대 번주 요시노리가 동생인 가쓰치카에게 영내의 신덴 분 1만 석을 분여하여 성립되었다. 2대 번주 가쓰쓰구 이후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이후 3대는 종가의 역대 번주의 동생을 양자로 맞이했다. 신덴 번주는 요네자와 번 내에서는 "시코(支侯)"라고 불렸다.
요네자와 성 내 니노마루(二の丸)에 번청을 두고 거처로 삼았다. 부칸(武鑑)에서는 에도 번저는 아자부에 상옥(上屋敷)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종가의 중옥(中屋敷)의 일부를 받은 것이다. 후에 상옥의 소재 표기는 이이쿠라카타마치(飯倉片町)가 된다.
분세이 연간의 부칸(武鑑)에서 신덴 번의 가로인 다카나시 사콘이 종가의 용인을 겸임하고 있는 것으로 표기되었고, 우에스기 번의 사료 "쇼슈로쿠(紹襲録)"에서도 분세이 원년(1818년)에 종가의 측역이었던 루스 젠지로가 신덴 번주 가쓰요시의 용인이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네자와 성 내에는 신덴 번의 관청과 번주 어전이 있었으며, 우에스기 요잔의 은거소인 산카칸(餐霞館)은 원래 신덴 번주의 어전이었던 것을 유용한 것으로, 요잔 사망 이후 시코 어전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요네자와 신덴 번은 특정 영지나 성지를 가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배 기구, 재정, 가신단, 거주지, 나아가 후계자까지 모두 종가의 요네자와 번에 의존하고 있어, 에도 막부의 고산케와 상당히 유사한 번내 분가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잠시 '''요네자와 신덴 번'''이 메이지 정부에 의해 잠정적인 번명으로 인지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요네자와 번 내부에서는 메이지 2년 중에 요네자와 신덴 번을 '''야치 번''' (谷地藩)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29]。하지만 동시기의 메이지 정부의 사료에는 "야치 번"은 등장하지 않는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 수사국에 의해 편찬된 "번제 일람표"에 처음으로 "야치 번"의 이름이 등장하고, 후에 다이쇼 시대에 편찬된 화족 명감 등에서는 요네자와 신덴 번을 야치 번의 구칭으로 하고, 야치 번을 정식 번명으로 채용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종가의 소령 삭감도 있어 존속이 어려워졌고, 요네자와 번의 판적봉환이 실시된 메이지 2년 음력 6월 18일 (1869년 7월 26일) 또는 메이지 3년 음력 8월 19일 (1870년 9월 14일)에 요네자와 번으로 병합되었다. 폐번 후에도 자작 가문으로 존속했지만, 종가의 당주 동생을 양자로 하는 것이 지번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메이지 3년(1870년)에 태정관에 의해 요네자와 신덴 번은 현미 2926석, 표고 1만 석으로 자작 가문에 포함되었으며, "삼공칠민(三公七民)"이었다.
5. 번저
분세이 연간 당시, 에도 번저는 외사쿠라다 어해자 거리(현재의 도쿄도 지요다구 가스미가세키 1초메 법무성 부지 내)에 상저택, 아자부 (현재의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32] 1초메 및 아자부다이 1초메)에 중저택, 시바시로카네 (현재의 도쿄도 미나토구 시바시로카네 2초메 메구로 거리)에 하저택이 있었다. 교토 번저는 야나기바바 거리 산조 내려가는 서쪽에 위치했다. 그 외에 미타 (현재의 도쿄도 미나토구 미타 2초메, 게이오기주쿠 대학교 운동장 부근)와 시바 (현재의 도쿄도 미나토구 시바 1초메)에 안고저택[33]과 창고저택이 있었다. 아자부 번저는 우에스기 쓰라노리에 의해 신축되었다.
요네자와 신덴 번의 에도 번저는 아자부(미나토구 아자부다이 1초메 외무성 이이쿠라 공관 외원 동쪽 거리)에 있었으며, 아자부 우에스기가라는 호칭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인근의 아자부 마미아나초에는 오야노 신유의 저택이 있어 도장으로 사용되었다[34].
교토 번저는 일시적으로 모리 도시자네(헤이에몬)가 매각했지만, 다케마타 마사쓰나(미사카)가 다시 사들였다. 또한, 1788년(덴메이 8년)의 교토 화재로 일시적으로 소실되었다.
6. 보리사
에도 시대의 보리사는 아사쿠사 신토리고에(현재는 기요카와에 위치)에 있던 신기진언종 사찰인 긴치산 호조인이며, 요네자와 신덴 번도 마찬가지였다.
번주 우에스기 가는 진언종을 가문의 종파로 삼는 몇 안 되는 다이묘 가문이었다. 이는 가문의 시조로 여겨지는 우에스기 겐신(카게카츠의 양아버지)이 만년에 진언종 승려로서 득도하여, 그의 유언에 따라 구카이의 선례를 따라 갑옷을 착용한 채 살아있는 모습으로 항아리에 밀봉되어 가스가야마성에 세워진 어당에 안장된 것에 기인한다. 그 후, 우에스기 가문의 전봉에 따라 겐신의 유해를 담은 항아리도 이전되었고, 요네자와번이 성립된 후에는 혼마루 동남쪽에 어당이 세워졌으며, 더 나아가 니노마루에는 어당을 둘러싸듯이 이를 수호하는 진언종 사찰군이 건립되었다. 4대 번주 츠나노리 이후의 역대 번주(보신 전쟁 후에 계승한 시게노리를 제외)는 가독을 계승한 후, 처음 부임하여 요네자와 성에 들어가면 즉시 어당에 참배하고, 그 후 처음 맞는 정월 13일 (그 해 첫 겐신의 월명일)에 어당에 안치되어 있던 겐신의 유물인 갑옷을 착용한 채 참배하는 「어무구 소하지메」가 행해지게 되었다. 폐번치현 후에는 성 밖의 우에스기 가문 묘소에 새로운 어당이 건립되었고, 유해를 담은 항아리도 그곳으로 옮겨졌다[35]。
7. 번직
요네자와번의 번직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봉행(奉行, 다른 번의 국가로에 해당): 3명[36]
- 에도 가로(江戸家老): 2명
- 시토(使途): 5명
- 성대(城代)[36] 또는 역옥장(役屋将): 5명
- 유자(柚子)
- 고쇼가시라(小姓頭): 2명
- 오메츠케(御目付)
- 나카마 노도시(中間年寄): 3명 (로쿠로(六老) 또는 로쿠닌 노도시(六人年寄)라고도 함)
- 간조가시라(勘定頭)
- 야쿠쇼야쿠(役所役)
- 마치부교(町奉行): 2명
- 군부교(郡奉行): 2명 (\[\[간세이]] 3년(\[\[1791년]]) 개혁으로 로쿠닌 노도시 겸무)
- 다이칸(代官): 5명 (\[\[안에이]] 원년(\[\[1772년]])에 세습제 폐지)
요네자와번의 수뇌부는 봉행(3명), 에도 가로(2명), 시토(5명)의 총 10명으로 구성되었다. 봉행직은 우에스기 사다카츠 대에 신설되었으며, 다른 번의 국가로에 해당했다. 시토는 5조 편성으로 되어 있는 사무라이조의 각 조의 반토였다. 이러한 중직에는 번내의 상사 계급인 사무라이조 중에서도 특히 가문이 높은 집안인 분령가만이 취임할 수 있었다.
간세이 10년(1798년)에는 말회조 출신의 코토 요시마사가 봉행으로 등용되면서 분령가만이 봉행직에 취임할 수 있다는 관행이 깨지게 된다.
8. 가신단
요네자와번의 가신단은 크게 상사(上士), 하사(下士), 졸(卒)로 구분되며, 각 신분에 따라 다양한 가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은 15만 석 시대의 녹고(祿高)를 기준으로, 사무라이조(侍組)의 서열에 따라 주요 가문들을 정리한 것이다.
'''상사(上士)'''
석차 | 가문 | 녹고 (석) | 주요 지행지 | 가계 | 비고 |
---|---|---|---|---|---|
1 | 요네자와 다케다 씨 | 500 | 다케다 노부키요(다케다 신겐의 여섯째 아들) - 가쓰노부 = 노부히데(혼조 시게나가의 차남) - 노부야스(노부히데의 차남) - 노부마사 - 노부히사 - 노부토미 - 노부미 - 노부아키 - 노부아쓰 - 노부이치 | ||
2 | 노토 하타케야마 씨 | 250 | 하타케야마 가게히로(하타케야마 요시하루의 장남) - 마사토시 - 마사쓰카 = 마사나가(니혼마쓰 구니타카의 장남) - 시게토모 - 시게히로 = 시게스케(이로베 마사나가의 차남) - 다다시게 - 시게아키 - 요시미치 | ||
3 | 야마모데라 씨 | 250 | 야마모데라 가쓰나가(야마모데라 가게나가의 아들, 야마모데라 사다나가의 손자) = 가쓰마사(나가오 가게미쓰의 셋째 아들) - 가쓰오키 - 가쓰야스 - 가쓰키 - 가쓰요시 - 가쓰히사 - 가쓰시게 - 가쓰요시 | ||
4 | 니혼마쓰 씨 | 200 | 하타케야마 씨 분가, 처음에는 토네가와 씨를 칭함. 니혼마쓰 구니타카(하타케야마 마사토시의 차남) = 구니마사(토네가와 마사타카의 차남) - 구니시게 - 구니오 - 구니마사 - 구니신 - 구니사다 = 구니준(구니사의 동생) | ||
5 | 혼조 씨 | 1,666 | 아유카와 | 혼조 시게나가-미츠나가(시게나가의 차남)=시게나가(시게나가의 여섯째 아들)-마사나가-히데나가-요시나가=쇼쿠나가(히라바야시 츠네히로의 차남)-기초=세이나가(쇼쿠나가의 셋째 아들)-타메나가-칸나가-마사나가-카츠나가=타카나가(마사나가의 셋째 아들) | 지토와 후쿠시마성대(나중에 아유카이 역할)를 겸임. |
6 | 시라이 나가오 씨 | 1,000 | 이케구로 | 나가오 카게히로=카게야스(나카조 미츠모리의 차남)-카게미츠-카게사다-카게마사=카게카제(이와이 조직의 차남)-카게요시=카게아키(카게요시의 동생)=카게야스(이모카와 마사노리의 넷째 아들)-카게토시-카게나오-카게타카-쿠니마루 | |
7 | 나카조 씨 | 900 | 야마구치 신치 | 나카조 미츠모리(나카조 카게야스의 장남, 나카조 후지스케의 외증손)-미츠나오-치카-키요스케(시마즈 미치타다의 차남)-친스케-비스케-후사스=시게스케(타케마타 히데치카의 셋째 아들)=타츠스케(시키베 노리나가의 차남)-아키스케(타츠스케의 손자)-키요스케 - 아츠시 | |
8 | 센자카 씨 | 1,565 | 야나기사와, 박택 | 센자카 카게치카=타카노부(만간지 센에몬)-타카하루(타카노부의 차남)-타카후사-나오치카-야스치카-오키치카=타카아츠(히로이 키요오의 장남, 야스치카의 외손자)-키요타카-타카오=오키타카(타카오의 동생)-타카아키(오키타카의 차남)-타카마사-치지로(타카마사의 차남) | |
9 | 스다 씨 | 1,000 → 200 | 타카나시 | 스다 나가요시(스다 미츠치카의 차남)-히데미츠-요시아테-요시노부-요시나리=토모요시-미츠모치-미츠키요-미츠테루=미츠치카(케이미 덴에몬의 차남)-요시히-요시하루=요시미치(혼마 타카스미의 차남) | 7가 소동에서 사무라이조 평시로 강등. |
10 | 카미마츠 씨 | 250 | 카미마츠 요시츠구(키소 요시마사의 외손,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정실・키쿠히메의 조카) - 요시나가 = 요시타다(사이조 히데아키의 삼남) - 요시큐 = 요시반(시마즈 토모타다의 동생) = 요시토요(토모타다의 삼남) - 요시카타 - 요시미치 - 요시타다 - 요시치카 | 처음 소사 나가오 씨의 명맥을 잇고 나가오 씨를 칭함. | |
11 | 타카나시 씨 | 250 | 타카나시 요리치카 - 요리키요 - 토요야스 - 요리아키 = 요리나가(요리아키의 동생) - 요리히로 - 요리토 - 요리자네 - 요리이 - 요리타츠 = 요리마사(이로베 히사나가의 차남) | ||
12 | 시키베 씨 | 1,666 | 쿠보다 | 시키베 미츠나가(시키베 노리나가의 장남, 시키베 카츠나가의 손자)=토시나가(야스다 토시히로의 차남)=키요나가(타케다 카츠노부의 차남)=야스나가(나가오 카게미츠의 차남)-타카나가-마사나가-테루나가(마사나가의 다섯째 아들)-치카나가=아츠나가(카사카 요시마사의 차남)-히사나가-야스나가 | 저택터는 현재 요네자와 간이 재판소. 보신 전쟁의 종전 처리에 의해 일단 단절되지만, 메이지 16년(1883년)에 사면. |
13 | 모리 야스다 씨 | 2,166 | 카와이 | 야스다 요시모토(야스다 아키모토의 동생)=토시히로(나미 아키무네의 차남)-키요모토-미치히로-칸겐-사다히로-모리 마사모토(사다히로의 넷째 아들)=타카모토(이모카와 마사노리의 동생)-카타모토-오키모토-나리히로 | 나중에 모리로 복성. |
14 | 오오미 야스다 씨 | 416 | 와카사 | 야스다 카타치카(카와타 모토치카의 삼남, 야스다 나가히데의 양자) = 이에치카(후쿠시마 히데시게의 삼남) - 노부치카 - 히데츠미 - 히데세이 - 히데무라 = 에이히데(이와이 야스치카의 사남) - 히데토시 - 히데마사 - 히데우타가이 | |
15 | 쿠로카와 씨 | 500 | 쿠로카와 타메자네(쿠로카와 키요자네의 손자) - 요시치카 = 요시자네(타메자네의 차남) = 요시타다(카스가 모토타다의 삼남) = 요시모토(모토무라 토시모리의 차남) - 요시하루 - 요시나오 - 요시치 - 요시히 - 요시치 - 요시마 - 요시스미 = 요시츠라(키요노 히데사다의 동생) - 요시후 = 요시타카(요시후의 동생) - 요시미치 | ||
16 | 카키자키 씨 | 250 | 카키자키 노리에(카키자키 카게이에의 아들) - 마사이에 - 이에나가 = 이에시게(이에나가의 동생) - 이에치카(불가독) - 이에토요 - 이에타카 - 이에사이 - 이에사다 - 이에노리 - 이에나리 - 이에테루 | ||
17 | 타케마타 씨 | 1,000 | 타케마타 토시츠나(타케마타 요시츠나의 양자)=후사츠나(이치카와 후사츠나의 차남)-요시타다=요시즈미(타케마타 요시히데의 장남)-미츠츠나-모토츠나(불가독)-토모츠나-아츠츠나=요시츠나(타케마타 히데카타의 차남)-노리츠나-히사츠나 | 저택터는 현재 구리 학원 고등학교. 저택 문이 린센지의 산문으로 현존. | |
18 | 이치카와 씨 | 1,066 | 이치카와 후사츠나-후사타다(후사츠나의 셋째 아들)-후사노리-후사유키-히데후사-카네오-모리후사-에이후사-후사고-후사타카-후사히로-신이치로 | ||
19 | 키요노 씨 | 1,416 | 키요노 나가노리(히라타 츠네노리의 아이)-히데노리-시게노리=노리스케(나가오 카게사다의 차남)-히데스케-유스케(불가독)-쿠니히데-히데마사-히데사다-히데마사-히데아키-히데슈(히데아키의 차남)=히데효(히데슈의 동생) | ||
20 | 이모카와 씨 | 985 → 200 | 이모카와 마사치카=모토치카(이모카와 모리치카의 장남)-츠나치카(마사치카의 장남)-타카치카-마사치카-마사토코-에이치카-마사레이-노부치카-친쇼-친와=손친(타케마타 히데오키의 동생)-아이친=츠쿠친(시모조 치카요시의 셋째 아들)-무네치카 | 7가 소동에서 사무라이조 평시로 강등. | |
21 | 시나노 나가누마 시마즈 씨 | 1,116 → 500 → 800 | 잇폰야나기 | 시마즈 타다나오-요시타다=토시타다(이와이 노부요시의 아이)=미치타다(나카조 미츠나오의 차남)-토모타다-후사타다=유키타다(후사타다의 동생)-마사타다-치카타다-친타다-큐타다-노리타다-요조 | |
22 | 에치고 사이토 씨 | 200 | 나가테 | 사이토 카게노부(사이토 아사노부의 장남) - 노부나리 - 야스노부 - 마사노부 = 키요노부(혼조 마사나가의 차남) - 시게노부 - 타카노부 - 아사야스 = 히데노부(스다 토모요시의 차남) - 토시노부 - 요시노부 - 아츠노부 | |
23 | 아야카와 씨 | 250 | 아야카와 히데사다(아야카와 모리나가의 양자) = 노부시게(혼조 나가후사의 장남) = 타카나가(센바 타카하루의 차남) - 후사나가 - 치카나가 - 나오나가 - 료나가 - 로나가 = 미츠나가(나카죠 시시의 차남) - 스케나가 = 쥬초(스케나가의 동생) | ||
24 | 쿠로가네 씨 | 500 | 쿠로가네 야스타다(시마쿠라 야스아키의 장남, 쿠로가네 카게노부의 양자) = 테츠 야스토시 - 야스후사(야스토시의 차남) - 카게야스 - 카게오 - 카게타츠 - 카게에이 - 카게아리 - 카게후쿠 - 카게이 - 카게야스 | 후에 철(鉄)로 개성. | |
25 | 오오쿠니 씨 | 250 | 오오쿠니 사네요리(나오에 카네츠구의 동생) = 미츠요리(히구치 히데카네의 장남) = 요리타카(타데누마 츠네타카의 장남) - 요리야 - 요리츠구 = 요리바타(타케마타 미츠츠나의 삼남) - 요리야스 - 요리코 - 요리오 - 요리린 - 요리시게 | 직계 자손에 오오쿠니 마사히코(오지제지 전 회장). | |
26 | 닛츠 씨 | 508 | 닛츠 히데스케(아카츠 탄죠의 아들, 닛츠 카츠스케의 양자) = 츠즈히사(야마기시 나오이에의 아들) - 츠즈히데 - 츠즈오키 = 츠즈츠라(미야지마 가의 장남) - 츠즈노부 - 츠즈스케 - 츠즈타카 - 츠즈무네 | ||
27 | 타케마타 니시 씨 | 600 | 타케마타 요시히데(타케마타 후사츠나의 차남)-사이히데(타케마타 요시즈미의 동생)-모리히데=에이히데(아유카와 치카나가의 장남)-토시히데-슈히데-타다히데=야스히데(슈히데의 동생)=진히데(혼마 히데토요의 차남)-아리히데=쥰스케(사이토 아츠노부의 차남) | 타케마타 씨 분가, 처음 호시나 씨를 칭함. | |
28 | 시모조 씨 | 250 | 간신다이 신치 | 시모조 타다치카(카와타 모토치카의 차남) - 마사치카 - 모리치카 = 시게치카(우루가 타다에몬의 장남) - 토요치카 - 히데치카 - 토미치카 - 치카사다 = 치카젠(치카사다의 동생) - 치카아키 = 치카요시(시마즈 토모타다의 차남) - 치카요시 - 치카에이 | |
29 | 카사카 씨 | 350 | 타자와 | 카사카 마사요시 = 타다마사(이노우에 타츠미츠의 사남) - 타카마사 - 나가마사 - 토요마사 - 나가오키(토요마사의 손자) - 나오마사 - 마사아키 - 카츠마사 = 마사조(카츠마사의 동생) - 마사쿠니 | |
30 | 히라바야시 씨 | 850 → 1,000 | 사사고다이라, 야키다이라 | 히라바야시 마사츠네-마사오키(마사츠네의 차남)-마사노부-마사츠미-츠네히로-마사아키-마사무라-마사나리-마사카-마사아키-마사나-마사쿠니 | |
32 | 미즈하라 씨 | 200 | 미즈하라 치카노리(오오세키 모리노리의 아들) = 노리츠구(시모조 마사치카의 차남) = 스기하라 타다치카(마사치카의 삼남) = 츠구치카(히라바야시 마사오키의 차남) = 카타치카(시모조 시게치카의 차남) = 젠치카(히라바야시 마사토모의 차남) - 치카노부 = 요시치카(니시나 모리히사의 삼남) = 카이치카(코리도 마사이의 차남) - 치카켄 - 치카토쿠 | 후에 스기하라로 개성. | |
34 | 신보 씨 | 200 | 신보 모리요시(신바타 시게이에의 동생) - 나가유키(모리요시의 차남) - 시게유키 - 사다유키 - 마사유키 - 무라츠나 - 토시츠나 - 카즈츠나 = 미츠츠나(마츠키 히데히로의 차남) = 츠나요시(이로베 아츠나가의 숙부) = 아사츠나(아츠나가의 삼남) | 후에 방계 자손이 신바타로 복성. | |
35 | 오오이시 씨 | 200 | 오오이시 츠나모토 - 카네후사 - 카네토쿠 - 카네타카 - 카네반 = 카네토요(나가오 카게사다의 삼남) - 나오츠나 - 츠나요시 = 토쿠츠나(모리 나가노부의 차남) = 코츠나(키요노 히데사다의 차남) - 키츠나 | ||
36 | 요시에 씨 | 200 | 요시에 나가타다(요시에 카게스케의 삼남, 요시에 무네노부의 손자) - 나가츠구 = 나가노부(야스다 키요모토의 사남) - 나가이츠 - 나가키 - 스케나가 = 나가나오(쿠리바야시 마사스미의 동생) - 나가시게 - 나가타미 - 나가하츠 | ||
37 | 히로이 씨 | 500 → 850 | 히로이 타다이에 - 타다요시 = 타다키요(히로이 타다후사의 장남) - 타다요시 - 요시야스 - 키요오 - 타다키 - 타다미치 = 타다요시(모리 가의 전 차남) = 타다마스(마츠키 히데자네의 차남) - 타다요시 = 토쿠마루(혼조 마사나가의 차남) | 후에 사무라이 조(組) 분령가로 승격. | |
41 | 아마카스 씨 | 250 | 야치 | 아마카스 카게모치 - 시게마사 - 시노부시게 - 시게치카 - 에이시게 - 카게토요 - 카게모토(카게토요의 차남) - 카게타케 - 카게미치 - 카게히로 - 카게토 - 카게니 | 직계 자손에 아마카스 마사히코 육군 대위. |
42 | 히구치 씨 | 250 | 히구치 카네토요(나오에 카네츠구의 아버지) - 히데카네(카네토요의 삼남) - 나가카네(히데카네의 차남) - 카네히사 - 카네오키 - 카네노부 - 카네키 - 카네아타 - 카네토 - 카네타카 = 카네토시(히라바야시 마사카의 삼남) - 카네하루 | ||
65 | 카스가 씨 | 500 | 카스가 모토타다 - 츠즈모토 - 모토시게 - 호모토 - 모토나오 - 모토테루(모토나오의 차남) - 코모토 - 모토쵸 - 모토나가 - 모토류 - 모토사다 | ||
73 | 카노 씨 | 200 | 카노 히데토시(카노 히데하루의 장남) = 마사토모(요시에 카게토시의 차남) = 토모키요(요시에 카게아츠의 사남) - 히데아츠 - 히데노부 - 히데나오 = 히데노리(야스다 사다히로의 사남) = 히데요(사다히로의 오남) = 히데오키(센바 타카토요의 차남) = 히데아키(요시에 스케나가의 차남) - 히데루이 - 지츠히데 = 히데로(키요노 히데사다의 동생) - 히데켄 | ||
80 | 시다 씨 | 250 | 카미코스게 | 시다 요시히데 - 요시시게(요시히데의 차남) - 요시치카 - 요시아키 - 요시이에 - 요시타카 = 요시카즈(이와이 오사치카의 삼남) - 카즈요시 = 요시카츠(사이토 요시노부의 동생) = 요시타츠(이로베 아츠나가의 차남) - 타츠오 | |
81 | 아마카스 씨 | 200 | 아마카스 카게츠구(토사카 키요타카의 장남) - 요시츠구 = 야스츠구(아마카스 나가츠구의 차남) = 마사츠구(나가츠구의 삼남) - 츠구노부 = 타다키미(쿠리바야시 마사모리의 삼남) - 츠구요시 = 츠구타케(이모카와 마사히로의 동생) = 츠구미츠(니시나 모리히로의 차남) - 츠구칸 - 츠구젠 - 츠구나리 | ||
90 | 카미이즈미 씨 | 250 | 카미이즈미 야스츠나(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손자) - 히데츠나 = 히데토미(시다 요시히데의 삼남) - 히데후 - 히데나리 - 히데켄(히데나리의 차남) - 히데카즈 = 히데에이(키요노 히데아키의 차남) = 히데아츠(오오쿠니 요리바타의 차남) = 히데토키(모리 타카모토의 차남) = 히데쥬(모리 가의 동생) = 히데마사(이치카와 후사고의 차남) - 히데토시 | 방계 자손에 카미이즈미 토쿠야 해군 중장. |
'''하사(下士)'''
하사(下士)에 대한 기록은 상사(上士)에 비해 자세하게 나와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가문들이 있었다.
- 아이우라씨 (번 내 25석): 원래는 조조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 방계 자손으로는 개그맨 나달이 있다.
- 카와타씨 (번 내 25석)
- 다카하시씨 (번 내 12석 5되 → 25석)
- 토미나가씨 (번 내 25석)
- 코노토씨 (석차 38위, 번 내 150석 → 550석): 후에 사무라이조 분령가로 승격.
- 모모이씨 (번 내 50석)
- 사쿠라이씨(桜井氏)(번 내 50석)
- 후쿠오지씨(福王寺氏)(번 내 50석)
- 야마기시씨(山岸氏)(번 내 50석)
- 아베씨(安部氏)(번 내 25석)
- 이즈미자와씨(泉沢氏)(번 내 25석)
- 쿠로이씨(黒井氏)(번 내 25석)
- 야마요시씨(山吉氏)
- 진보씨(神保氏)(원래 오젠부조)
- 모리 씨(森氏) (후에 사시(侍) 조 평시(平侍)로 승격, 개역)
- 오쿠야마 씨(奥山氏) (영내 25석)
- 오미 씨(小見氏) (영내 25석)
- 오노사토 씨(小野里氏) (영내 25석)
- 아오키 씨(청목씨)(번내 35석)
- 야마시타 씨(山下氏) (번 내 50석, 이후 분가하여 25석)
'''졸(卒)'''
졸(卒)에 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역할들이 있었다.
- 외양 법체: 상투를 틀지 않고 총발의 형태를 하여 법체로 보인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 외과: 외양 법체의 차석이라는 의미이며, 외과의사의 외과와는 다르다.
- 오마모리조: 겐신이 가스가야마 참배 시 신전 수비를 명받은 데서 유래.
- 테아키슈: 참근교대 시에는, 오사키다치(御先立), 나카오시(中押), 아토오시(後押)의 선도 역할.
- 어당번: 우에스기 겐신의 유해를 아이즈, 그 후 요네자와로 옮겼을 때 유해를 안치하는 어당의 번을 맡는 역할.
- 동심: 봉행의 부하인 사분.
- 에도가로: 에도가로(江戸家老) 직속의 사(士)분.
- 어선 헌립 작성 담당
- 식재료 및 일용품 구매 담당
- 금고 관리
- 금산, 광산 업무 담당
- 어마구간: 평시에는 이노마루 북쪽에 위치한 어마구간에서 말 사육이나 말 고로쿠구치정에서 열리는 말 시장의 경비.
- 용도품 제작 담당
- 매사냥 지도 담당
- 이마무라 씨(번 내 25석)
- 혼테아케: 참근교대 때 오사키다치(御先立), 나카오시(中押), 아토오시(後押)의 선도 역할.
- 법체: 성내 대광간이나 식대 등의 청소를 담당. 참근교대 시에는 오차도 역할도 수행.
- 조총대
- 30인조
- 번소 근무자
- 본환 근무자
- 창고 관리
- 활 솜씨가 뛰어난 자
- 창술에 능숙한 자
- 첩보 활동 및 범죄자 체포 담당
- 보물 창고 관리
- 남정 번소 근무자
- 사쿠라다 가미야시키의 쓰지반 담당자
- 십팔조 아시가루 또는 십팔조
- 병기창 근무 아시가루
- 본환 어문 번 담당 [아시가루/족경](足軽).
- 요네자와 성 二ノ丸御門 번 담당 아시가루.
- 대관소 근무 [아시가루/족경].
- 낟알 창고 번 담당 족경.
- 묘소 경비 족경(足軽)
- 금산役人(킨잔 야쿠닌)의 하급 관리
이 외에도 번사(藩사)와 막신(바쿠신), 고케(高家) 등 다양한 신분과 가문들이 요네자와번에 소속되어 있었다.
9. 막말의 영지
메이지 유신 이후 요네자와 번은 데와국 (우젠국) 오키타마군의 294개 촌을 포함했다.[1] 시리베시국 이소야군의 일부도 영지에 추가되었다.[1] 또한 에치고국 이와후네군 91개 촌의 막부령을 맡았지만, 이 지역은 모두 무라카미번에 편입되었다.[1]
10. 지성
- 후쿠시마성(무쓰국 시노부군) - 1664년(간분 4년)까지 혼조 씨가 성주로 있었다. 신다쓰 통치의 중심 거점이었으며, 간분의 반치 이후에도 천령(20만 석 여)과 후쿠시마번(이타쿠라 씨)이 거성으로 사용했다.[38]
- 오모리성 (무쓰국 시노부군) - 이모카와 씨가 들어갔다. 북쪽 높은 곳이 성주의 관저로 추정되며, 주곽 남쪽에는 해자와 토루가 남아 있다.
- 야나가와성(무쓰국 다테군) - 성주인 스다 씨에 의한, 혼마루의 망루 터의 석축이나 북 삼의 마루의 높은 토루 등, 우에스기 통치 시대의 유구가 남아 있다.
- 호바라성 (무쓰국 다테군) - 오이시 씨와 군대인 히라바야시 마사쓰네는 개전·용수 언을 적극적으로 개착하여, 호바라 지방의 비옥한 논밭의 기초를 만들었다.[38] 천령이 된 후 폐성되었지만 혼마루 터가 현존한다. 시라카와번이 망루와 관저 터에 저택을 짓고 '호바라 진야'가 되었다.
- 아유카이성, 아라토성, 오구니성, 나카야마성 (데와국 오키타마군) - 간분의 반치 이후에도 존속한 오키타마군 내의 지성. 이후에는, 일국일성령에 의해 성을 '야쿠야', 성주·성대를 '야쿠야 쇼'로 개칭했다.[39] 아유카이성터의 아유카이 하치만구 '수장고 鞘殿' 안에는, 혼마루와 이의 마루의 미니어처 복원 모형이 있다.
- 다카하타성 (데와국 오키타마군) - 1664년(간분 4년)까지. 다만, 오다 씨의 다카하타 이봉 후에도 우에스기 가문이 관리했다. 오다 씨는 다카하타 진야 (처음에는 성내, 나중에는 누카노메로 이동)를 쌓아 입부했다.[40] 1810년(문화 7년)의 가증으로, 다시 우에스기 가문이 정식으로 소유했다.
- 다테야마성 (데와국 오키타마군) - 요네자와성의 서쪽에 있는 평산성. 성터는 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41] 최근의 발굴 조사에 의해, 전국 시대의 다테 씨의 본거지라는 설이 나와 주목받고 있다. 다만, 석축에 관해서는, 쌓는 방식에서 우에스기 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42] 「고성」「성산」이라고도 칭해지는 성터 입구에, 현재는 우에스기 가문의 '사유지이므로 출입 대환영'의 표기가 있으며, 유지에 의한 안내소가 있다.
- 가미세키진야 (에치고국 이와후네군) - 에치고국의 예탁지 1만 석을 관리하는 진야.
- 우루시야마진야 (데와국 무라야마군) - 데와국 야마가타번 내의 예탁지 4만 석을 관리하는 진야. 1770년에 우루시야마 마을 이하 9개 마을이 예탁지가 되어, 요네자와번은 우루시야마에 진야를 설치했다.
- 고베쓰에소야진야 (니시에조치 시리베시국 이소야군) - 요네자와번이 관리하는 에조치의 시리베시국 1만 석격 (실제의 쌀 생산은 무고)에 놓인 진야. 번사가 기록한 '에조 에소야 일지'가 남아 있다.[43]
참조
[1]
웹사이트
Yonezawa-han
http://www.asahi-net[...]
[2]
서적
Land and Lordship in Early Modern Japan
Stanford University Press
[3]
논문
Rescuing the Nation from History: The State of the State in Early Modern Japan
[4]
웹사이트
江戸大名公卿net
https://web.archive.[...]
2015-02-28
[5]
서적
Young Japan: Yokohama and Yedo
Trubner & Co.
[6]
웹사이트
Genealogy (jp)
http://reichsarchiv.[...]
[7]
문서
文禄4年(1595年)の蒲生騒動により、上杉家は新川と東蒲原を交換し越後・佐渡を完全領有した(前田は越中を完全領有。能登・加賀には他領あり)。朱印状では「越後、佐渡二国に信濃川中島四郡、出羽庄内三郡、他に上方に台所入(軍役外)の在京領」
[8]
문서
天正19年に豊臣秀吉から発給された領知朱印状・領知目録 「安芸 周防 長門 石見 出雲 備後 隠岐 伯耆三郡 備中国之内、右国々検地、任帳面、百拾二万石之事」『毛利家文書』天正19年(1591年)旧暦3月13日付(『大日本古文書 家わけ文書第8 毛利家文書之三』所収)。
[9]
서적
Unbeaten Tracks in Japan 第二巻「北日本旅行記」
[10]
서적
明治維新人名辞典
日本歴史学会
[11]
웹사이트
名誉市民
https://www.city.yon[...]
2023-08-17
[12]
문서
明治12年(1879年)6月24日合祀(第11回合祀祭)
[13]
서적
酒田市史 改訂版
[14]
서적
維新政権
吉川弘文館
[15]
문서
金1両=銀60匁のため(市場相場はさらに上がる)兌換率は額面の十割二分を超す
[16]
웹사이트
日本銀行貨幣博物館展示および公式web
[17]
문서
1869年(明治2年)2月15日の「現米申告」。米成が「現米五万石以上」により伯爵に相当。
[18]
서적
日本永代蔵
[19]
논문
米沢藩の実高推移と財政規模
[20]
서적
米沢藩の借金・再生史
[21]
데이터베이스
旧高旧領取調帳
[22]
서적
農林水産統計
農林水産省
[23]
서적
頼三樹傳
[24]
서적
東北遊日記
[25]
문서
享保8年(1723年)、「憲英(世子・家督時は弾正少弼)」から将軍綱吉の偏諱を受けて「宗憲」に改名の際に叙任。
[26]
문서
上杉氏・大岡氏は越前家の「越前守」独占の例外。
[27]
문서
将軍家茂の京都上洛に御供および二条城警護就任による
[28]
문서
貴族院議員での功績による
[29]
문서
例えば米沢市史 資料篇 4 (近現代史料 1)収録の明治2年11月付の御日帳に、「末家谷地藩」への言及がある。
[30]
서적
藩制一覧
日本史籍協会
[31]
서적
府藩県制史
https://dl.ndl.go.jp[...]
名取書店
[32]
문서
六本木は上杉氏はじめ青木氏、一柳氏、片桐氏、朽木氏、高木氏の六大名の屋敷が存在したことに由来する説あり。
[33]
문서
幕府から拝領した屋敷ではなく、自費で調達した屋敷
[34]
문서
偶然だが、男谷信友および勝海舟の生家は本所にあり旧吉良邸に近い。
[35]
논문
不識院御堂と謙信の神格化
高志書院
[36]
문서
고하타케 성
[37]
문서
후쿠시마 성
[38]
간행물
후쿠시마현 역사자료관 수장자료 목록
[39]
문서
나카야마 성
[40]
문서
오다씨
[41]
법령
平成28年3月1日文部科学省告示第26号
2016-03-01
[42]
문서
쌓는 방법
[43]
문서
에조 에소야 일지
요네자와 시립 도서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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