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기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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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웅기 상륙 작전은 1945년 8월,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 해안 지역 점령을 위해 수행한 군사 작전이다. 소련군은 일본군의 저항을 억제하고 웅기, 나진, 청진 등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상륙 작전을 계획했으며, 이반 스테파노비치 유마셰프 제독이 지휘했다. 8월 11일부터 13일까지 진행된 웅기 상륙 작전에서 소련군은 웅기 항구를 점령하고, 이후 웅기항을 소련 태평양 함대의 전진 기지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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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기 상륙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웅기 상륙 작전 정보 | |
분쟁 | 웅기 상륙 작전 |
전체 | 만주 전략공세작전 |
날짜 | 1945년 8월 11일 |
장소 | 일제 강점기 조선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
결과 | 소련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소련군 지휘관 |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이바놉스키 이반 유마셰프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레메시코 |
일본군 지휘관 | 불명 |
병력 규모 | |
소련군 병력 | 783명 선박 4척 보트 8척 |
일본군 병력 | 불명 |
사상자 규모 | |
소련군 사상자 | 불명 |
일본군 사상자 | 불명 |
러시아어 명칭 | |
러시아어 명칭 | Десант в порт Юки |
2. 작전 계획
1945년 8월 초, 소련군 제1극동전선군 예하 제25군은 일본군 점령 하의 한반도 해안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소련군 극동전선군은 초기 국경 공세가 성공적으로 이뤄진 후, 일본군의 반격을 막기 위해 한반도 북부 항구들에 대한 상륙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이 작전은 이반 스테파노비치 유마셰프 제독이 지휘했다. 첫 상륙 지점은 소련 국경과 가장 가까운 항구인 경흥군 웅기읍이었고, 이후 나진과 청진이 목표 지점이 되었다.
2. 1. 작전 준비
8월 9일부터 10일 사이에 소련 항공군과 어뢰정이 웅기 항구를 폭격하여 일본군의 방공 및 항만 시설을 무력화했다. 이 과정에서 최대 12척의 일본 선박이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1] 작전 수행을 위해 제140 태평양 함대본부 정보부대, 제13해병여단(소령 I.P.마킨대대) 제75대대, 제390소대(783명)가 배속되었다.[1] 이들은 어뢰정 8척, 랜드리스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받은 EK-7과 EK-9[2] 호위함 2척, 기뢰정 2척, 경비정 2척으로 구성된 함대의 지원을 받았다.[2]3. 전투 경과
8월 11일 오후 3시, 전방분견대가 노빅만을 출발하여 상륙 지점으로 향했다.[4] 당시 안개와 바람 덕분에 일본 항공기나 함대와 충돌할 가능성은 없었다. 오후 5시경, 제2분견대(어뢰정 2척, 정찰대 70명)가 출발했다. 오후 7시 10분경, 제1분견대가 웅기 항구에 입항하여 일본군이 항구를 버리고 떠난 것을 확인했다. 정찰대는 항구를 점령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으나, 일본군의 저항은 없었다.[5][6]
3. 1. 상륙 및 점령
8월 11일 오후 3시, 전방분견대가 노빅만을 출발하여 상륙 지점으로 향했다.[4] 당시 안개와 바람 덕분에 병력이 통과하기로 한 5개 지점에서 일본 항공기나 함대와 마주칠 가능성은 없었다. 오후 5시경에는 제2분견대(어뢰정 2척, 3계급 함장 G.P. 콜류바킨 지휘 하의 정찰대 70명 탑승)가 출발했다. 오후 7시 10분경, 제1분견대가 항구에 도착하여 적이 항구를 버리고 떠난 것을 확인했다. 정찰대는 항구를 점령하고 방어 준비를 했지만,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5][6]웅기 상륙은 8월 12일 밤부터 시작되어 8월 13일 밤 8시에 완료되었다. 8월 12일 아침, 치스티야코프 대령이 사령관으로 있던 제25군은 남쪽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이후 웅기항은 소련 태평양 함대의 전진 기지로 사용되었고, 13척의 어뢰정이 이곳으로 신속하게 이동하여 이후 전투 작전의 출발점으로 활용되었다.
참조
[1]
문서
В советской литературе часто именовались сторожевыми кораблями.
[2]
간행물
Разведка в действиях флотов империй России и СССР.
2007
[3]
간행물
Охрана границ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и участие морских пограничников в войне с Японией.
2015
[4]
문서
Протяженность перехода — 90 морских миль.
[5]
문서
По другим источникам, численность двух передовых групп разведчиков составляла 139 человек.
[6]
간행물
Из опыта боевого применения надводных кораблей Тихоокеанского флота в войне с милитаристской Японией.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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