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할린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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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사할린 침공은 1945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소련군이 일본 영토였던 남사할린 섬을 점령한 군사 작전이다. 1905년 러일 전쟁 이후 남사할린은 북위 50도선을 기준으로 일본과 러시아 제국이 분할 통치했으나, 얄타 회담에서 소련이 참전 대가로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 영유권을 인정받으면서 침공의 배경이 마련되었다. 소련은 8월 9일 만주 침공과 함께 남사할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일본군은 제5방면군 예하 제88사단을 중심으로 방어에 나섰다. 전투는 육상과 해상에서 격렬하게 진행되었으며, 일본군은 홋카이도 침공을 우려한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사할린 사수를 시도했으나, 소련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밀려 결국 항복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과 민간인, 특히 조선인에 대한 학살이 발생했고, 많은 일본 민간인과 포로가 발생했다. 남사할린은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후 러시아 영토인 사할린 주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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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할린 침공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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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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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명칭 | 남사할린 침공 |
전쟁 | 소련-일본 전쟁의 일부 |
날짜 | 1945년 8월 11일 - 8월 25일 () |
장소 | 사할린섬 |
결과 | 소련의 승리 |
영토 변경 | 가라후토 청은 소비에트 연방에 합병되어 사할린 주로 통합됨.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소련군 지휘관 | 막심 푸르카예프 레온티 체레미소프 아나톨리 페트라코프스키 이반 바투로프 블라디미르 안드레에프 |
일본군 지휘관 | 히구치 기이치로 사부로 하기 주니치로 미네키 |
부대 | |
소련군 부대 | 제16군 태평양 함대 |
일본군 부대 | 제5방면군 |
병력 규모 | |
소련군 병력 | 100,000명 |
일본군 병력 | 19,000명 (예비군 10,000명 제외) |
사상자 | |
소련군 사상자 | 제56 소총 군단: http://www.kolymastory.ru/glavnaya/hh-vek-neizvestnoe-o-vojnah-na-tihom-ok/kurilskaya-operatsiya/ 태평양 함대: 총 사망자: https://histrf.ru/uploads/media/artworks_object/0001/06/6ac3ee282df258dfa034ea6fa3b2a5dcf0107d9d.pdf p. 22, retrieved 6 April 2018 |
일본군 사상자 | 북부군: |
민간인 사상자 | 일본 민간인 사망자 3,500–3,700명 |
2. 배경
1905년 포츠머스 조약 이후 사할린 섬은 북위 50도선을 기준으로 이북은 러시아 제국, 이남은 일본 제국이 통치했다. 일본은 남사할린을 가라후토 청이라 불렀다.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최고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 항복 후 2~3개월 안에 일본에 전쟁을 선포할 것을 약속했다. 그 대가로 소련은 쿠릴 열도와 남사할린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미국은 훌라 계획을 통해 소련의 침공 준비를 도왔다.
1945년 4월 5일, 소련은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8월 9일, 소련은 만주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시작했고, 이는 소련-일본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이 전쟁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 3일 후에 시작되었으며, 남사할린 침공 계획을 포함했다. 침공의 주요 목적은 일본의 저항을 제거하고 일본 본토 최북단인 홋카이도를 10~14일 이내에 침공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령이 된 남사할린에는 1913년 가라후토 수비대 폐지 이후 일본군이 상주하지 않았고, 경무장한 국경 경찰대가 국경 경비를 담당했다.[10] 그러나 1939년 대소련 방비를 위해 가라후토 혼성 여단이 설치되었다. 제7사단 개편이나 관동군 특종 연병에 따라 주둔 병력이 점차 증강되었다.
태평양 전쟁 중반, 남사할린의 전비는 대미 전 중시로 방침이 전환되었다. 북방군 사령관 히구치 기이치로는 미군 상륙에 대비한 남부 방비 강화를 지도했다.[11] 1945년 주둔 부대 대부분을 재편성하여 제88사단이 창설되었지만, 주력은 남부 지구에 배치되었다. 히구치는 소련의 남사할린 공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사기 저하를 우려해 겉으로는 언급하지 않았다.[12]
소련군의 병력 증강 움직임이 가라후토에서도 관찰되었고, 가라후토의 일소 국경 감시초소에서 긴박한 움직임이 사단에 전해졌다. 사단은 침공 시기를 8월 초순 또는 늦어도 9월 초로 보고 제5방면군에 구체적인 작전 지도 결정을 요구했지만, 방면군은 대미 전 중심이었기 때문에 7월까지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15][16]
예비역 주체의 예비 전력 정비도 진행되어, 1944년 특설 경비대인 특설 경비 대대 3개·특설 경비 중대 8개·특설 경비 공병대 3개가, 1945년 3월에는 지구 특설 경비대 9개가 설치되었다.[17] 국민 의용 전투대 조직도 준비되었다. 지구 특설 경비대와 국민 의용 전투대는 유격전을 수행할 것이 기대되었고, 7월 이후 육군 중야 학교 출신자에 의한 교육이 실시되었다.[18] 종전 후 소련에 억류된 군인·관료의 기록에 따르면, 여성·학도까지 전 주민을 동원하여 국민 의용 전투대를 조직하고, 제1선에서 죽창·수류탄·독화살을 무기로 전원 옥쇄까지 유격전을 수행할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19]
약 40만 명의 일반 주민 중 노령 및 유년의 자녀는 홋카이도로의 긴급 소개가 예정되어 있었고, 오쓰 토시오 가라후토청 장관과 제88사단 참모장 스즈키 야스 대좌, 도요하라 주재 해군 무관 구로키 고이치 소장에 의한 3자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주민 피난 대책은 거의 취해지지 않았다.[18]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남사할린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소련은 남사할린 점령을 참전 후 첫 번째 작전으로 꼽았고, 얄타 협정에는 "남사할린의 소련 반환"이 포함되었다.[20] 남사할린 공략 담당은 제2극동 전선의 제16군이었다. 그러나 실제 작전 계획에서 가라후토·치시마 방면 공략은 만주 방면에 비해 순위가 낮았다.[21]
남사할린 및 쿠릴 열도 진공과 관련하여 소련 해군은 함정이 부족했다. 그래서 렌드리스의 일환으로 미국과 소련의 합동으로 함정 대여와 승무원 훈련을 실시하는 플라 계획이 실행되었다.[22]
일소 중립 조약이 1945년 8월 시점에도 유효했지만, 소련의 대일 참전은 실시되었다. 일본은 소련을 중재자로 한 연합국과의 평화 협상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소련에 대한 보상으로 남사할린 반환도 검토되었다.[23]
소련군 침공 전 가라후토에서 미국 잠수함의 활동으로 일본 상선이 공격받거나, 해표도 등이 포격을 받았다. 1945년 7월 23일에는 미국 잠수함 "바브"에서 수병이 상륙하여 가라후토 동선 철도를 폭파했다.[24]
2. 1. 역사적 배경
1905년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사할린 섬은 북위 50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일본, 북쪽은 러시아가 통치하게 되었다. 일본은 남사할린을 가라후토 청이라 불렀다.[10]1945년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최고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 항복 후 2~3개월 안에 일본에 전쟁을 선포할 것을 약속했다. 그 대가로 소련은 쿠릴 열도와 남사할린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미국은 훌라 계획을 통해 소련의 침공 준비를 도왔다.[22]
1945년 4월 5일, 소련은 소련-일본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23]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사할린을 침공했다.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와 함께 일본의 항복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 소련군의 침공 목적은 남사할린을 점령하고 홋카이도 침공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20]
2. 2. 한국과의 연관성
일제강점기 당시 남사할린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강제징용되어 노동하고 있었다. 소련군 침공 와중에 미즈호 사건과 같이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한국인들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3]3. 전투 서열
소련군과 일본군은 각각 제2극동전선군과 제5방면군을 주축으로 전투를 벌였다. 소련군은 제16군과 태평양 함대를 투입하였고, 일본군은 제88사단을 중심으로 방어에 나섰다.
소련군 주요 지휘관은 제2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육군원수, 제16군 사령관 레온티 체레미소프, 태평양 함대 사령관 이반 유마셰프 제독이었다. 일본군 주요 지휘관은 제5방면군 사령관 히구치 기이치로 중장, 제88사단장 미네키 도이치로 중장이었다.
일본군은 육군과 해군 외에도 국경 경찰대, 국민 의용 전투대 등 다양한 조직이 전투에 참여했다. 특히, 국경 경찰대는 중기관총 8정, 경기관총 10정, 소총 141정으로 무장하고 육군 부대와 함께 소련군을 요격했다.[49]
3. 1. 소련군
제2극동전선군(사령관: 육군원수 막심 푸르카예프) 예하 제16군 (사령관: 레온티 체레미소프)과 러시아 태평양 함대(사령관: 제독 이반 유마셰프)가 참전하였다.- '''제2극동전선''': 육군원수 막심 푸르카예프
- '''제16군''': 레온티 체레미소프
- 제56소총병군단[130] : A. 페트라코프스키
- 제79소총병사단
- 제2소총병여단
- 제5소총병여단
- 제214소총병여단
- 제113소총병여단
- 제255혼성항공사단 (총 106기)
- '''태평양 함대''': 제독 이반 유마셰프
- 북태평양 소함대: 블라디미르 안드레예프
- 태평양 함대 항공대 (총 80기)
- 제365해군보병대대
편제는 다음과 같다.
부대 | 구성 |
---|---|
제16군 (레온티 체레미소프 Л. Г. Черемисовru 소장) | |
해군 | |
항공 부대 |
3. 2. 일본군
제5방면군 (사령관: 히구치 기이치로 중장) 예하의 제88사단이 주력이었다.- 육군
- * 제88사단 (사령관: 미네키 도이치로 중장)
- ** 카라후토 국경 수비대 (17개 벙커, 28개 포병 및 18개 박격포 진지, 기타 시설 보유, 수비대 5,400명)
- ** 예비군 부대
- ** 배속 부대: 특설경비 제351-제353대대, 특설경비 제301-제306·제308중대, 제301-제303특설경비공병대
- * 소야 요새 중포병 연대 제2중대 - 니시노토로. 15cm카논포 4문.
- ** 배속 부대: 특설경비 제307중대
- * 도요하라 지구 사령부 (야나기 이사무 소장) - 대소련 개전 후 제88사단 지휘 하에 편입.
- ** 도요하라 지구 제1-제9 특설경비대 - 총 3,628명을 방위 소집.
- * 가라후토청 경찰부 (국경 경찰대) - 중기관총 8정, 경기관총 10정, 소총 141정.
- * 육군 제1비행사단 - 홋카이도에 주둔. 가동 항공기 44기.
- 해군
- * 해군 육전대
- ** 북동 항공대 카라후토 지구대 (쿠보리 미치요시 대위) - 시스카 기지, 오도마리 기지. 지상 요원만.[5]
- ** 오미나토 방비대의 일부[6] - 주로 기지 방공 부대. 이 중 시스카에 12.7cm 연장 고사포 3기, 20mm 연장 기총 5기.[126]
- ** 소야 방비대의 일부 - 쇄빙선 "오도마리", 특설 포함 "치토세마루", 소야 방비 위소, 니시노토로 방비 위소.
- ** 도요하라 해군 무관부 - 무관: 구로키 고이치 소장[127]
- 민병·자경 조직
- * 국민 의용 전투대 - 가라후토 철도 연합 의용 전투대 외, 직장과 지역별로 편성.
- * 기타 - 가라후토청 관할의 방공 감시대 (20세 전후의 여성을 주력), 구제 중학교 학생에 의한 학도대 외.
4. 전투 경과
1945년 8월 11일, 소련 제16군이 북사할린에서 남사할린으로 육상 침공을 시작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소련군의 침공은 가라후토 요새선에서 일본군의 격렬한 방어로 인해 진격이 저지당했다. 소련군은 약 2만 명의 병사와 100대의 전차 지원을 받고 있어 전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지만, 소련군의 진격은 최소화되었고 가라후토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4일이 걸렸다. 8월 15일 일본 제국군 총사령부가 모든 전투 및 작전을 중지하고 소련군과 평화 협상에 나서라고 명령했지만, 제5지역군은 명령을 거부하고 제88보병사단에 최후의 1인까지 사할린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일본군 3,000명이 소련군에 항복했다. 일본군은 568명의 사망자를 냈다.[8]
소련 해군은 사할린섬 침공 속도를 높이고 육상 병력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일본 주요 항구에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 부대의 탈출을 막기 위해 민간 수송선을 포함한 함선들을 공격하고, 사할린섬 전체를 해상 봉쇄했다. 8월 16일, 소련 해안경비함 자르니차와 기뢰제거함 4척, 수송함 2척, 경비정 6척, 어뢰정 9척이 토로 항에 정박했다. 소련군 제365독립해병대대와 제113보병여단의 1개 대대(약 1,400명)가 토로에 상륙하여 일본군 수비대 200명과 교전했다. 토로는 곧 점령되었고, 에스토루 항의 인구 밀집 지역 4곳도 확보되었다. 일본군은 100명이 사망하고 150명이 부상당했으며, 30명이 포로로 잡혔다. 소련군은 12명이 사망했다.[8]
8월 20일, 소련 해병대대와 제113보병여단 연합군 3,400명이 마오카 항에 상륙했다. 상륙대는 일본군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소련 함선 몇 척이 피해를 입자, 소련군은 마오카에 해상 집중 포격을 가해 600명에서 1,0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했다. 마오카는 8월 22일 점령되었지만, 일본군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300명이 사망하고 6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소련군은 육군 병사 60명과 해군 보병 17명이 사망했다.[131] 8월 25일, 소련군 1,600명이 코르사코프에 상륙했고, 일본군 수비대 3,400명은 항복했다. 같은 날 제88보병사단의 잔병들이 도요하라에서 항복하면서 소련군의 사할린 침공은 종결되었다.[8]
8월 19일, 일본 대본영은 제5방면군에 정전 협상과 무기 인도를 허가했지만, 제5방면군은 같은 날 17시 30분, 제88사단에 남사할린을 계속 점령하고 소련군이 진주하면 전투를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9][8] 이는 정전 협상으로 끝나야 할 자위 전투를 계속하며 남사할린을 끝까지 지키려는 의도였다.
8월 20일, 만주의 관동군은 사할린에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긴급 조치를 요구하는 전보를 대본영과 제5방면군에 보냈다.[8] 제5방면군은 "소련군의 불법 행위는 눈뜨고 볼 수 없다"며 소련군 최고 지휘관에게 엄명을 내려달라고 회신했다.[8]
8월 21일, 제88사단장 미네키는 히구치 기이치로 제5방면군 사령관에게 전화로 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음을 설명하고, 전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무장 해제와 소련군의 진주를 허용해야 한다고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다.[47][8] 이는 만주에 파견된 대본영 아사에 시게하루 참모로부터 자위 전투를 구실로 전투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경고 전문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85][8]
8월 22일, 제5방면군은 남사할린 사수 명령을 철회하고 제88사단에 대본영의 무기 인도 허가를 전달했으며, 시스카에서 소련군과 정전 합의에 도달했다.[86]
소련은 진주 후 일본인과 재산의 본토 철수를 저지하려 했고, 23일에 섬 밖으로의 이동 금지를 통고했다. 24일에 도요하라시는 소련군 점령 하에 놓였고, 25일의 오토마리 상륙으로 남사할린 점령은 끝났다.[8]
4. 1. 가라후토 전선 (육상 전투)
1945년 8월 11일, 소련 제16군은 북사할린에서 남사할린으로 육상 침공을 시작했다.[8] 소련군의 침공은 가라후토 요새선에서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저지되었다. 약 2만 명의 병사와 100대의 전차를 보유한 소련군은 전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지만,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4일이 걸렸다.[8]8월 15일, 일본 제국군 총사령부는 모든 전투 및 작전 중지를 명령하고 소련과의 평화 협상을 지시했다. 그러나 제5방면군은 이 명령을 거부하고 제88사단에 사할린을 끝까지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8] 같은 날, 3,000명의 일본군이 소련군에 항복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568명의 사망자를 냈다.[8]
8월 9일 소련이 대일 참전을 개시하면서, 8월 11일 남사할린 점령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침공의 목적은 남사할린을 획득하고, 이후 예정된 홋카이도 침공의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8] 소련군은 보병 사단, 보병 여단, 전차 여단 각 1개 부대를 중심으로 공격했고, 북태평양 함대와 보병 여단 1개 부대가 상륙 작전을 보조했다. 일본군은 보병 사단 1개 부대를 중심으로 응전하여 국경 지대에서 소련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8]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면서 태평양 전쟁은 정전을 맞이했다. 일본군 대본영은 8월 15일에 각 군에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하면서 적극적인 진공 작전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8월 16일에는 불가피한 자위 전투를 제외하고는 전투 행동을 중지하라고 전군에 명령했다. 그러나 8월 16일 삿포로 제5방면군 사령관 히구치 기이치로 중장은 사할린 제88사단에 남사할린을 사수하도록 명령했다.[8]
소련군은 남사할린 각지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고, 일본군과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8월 19일 대본영은 22일 0시 이후 일체의 전투 중지를 명령했지만, 히구치 기이치로 중장은 다시 남사할린 사수를 명령했다.[9] 현실적으로 남사할린에서의 정전은 8월 19일 이후 일본군 각 부대의 철수나 항복으로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소련군의 상륙 작전으로 새로운 전선이 확대되기도 했다. 8월 22일 일본군 사단 사령부와의 정전 교섭이 성립되었고, 23일까지 일본군 주요 부대와의 정전이 성립되었다. 8월 25일 오토마리 점령으로 사할린 전투는 종료되었다.[8]
당시 남사할린에는 40만 명 이상의 일본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소련군 침공 후 홋카이도 방면으로 긴급 피난이 이루어졌다. 10만 명이 섬 밖으로 피난에 성공했지만, 긴급 피난선 3척이 소련군에게 공격받아 약 1,700명이 사망했다 (미후네호 참사). 육상에서도 소련군의 시가전 등 무차별 공격으로 약 2,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8]
에스토루 주민들은 군이 먼저 도망쳤다고 비난했다. 제88사단 참모장 스즈키 야스오 대좌는 현지 재향군인 2백 명을 모아 특설 경비대를 편성하고, 소련군 상륙 시 추가 3개 중대를 급파하여 방어하려 했으나, 승산이 없어 후퇴를 지시한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했다.[55] 그는 특설 경비대도 16일에는 에스토루로 후퇴했을 것이라며, 이는 전투 수단이었다고 주장했다. 에스토루에서는 주민들이 소련군의 명령을 받아 일본군에게 항복을 권고했고, 결국 1,000명 이상의 장병이 투항했다.[55]
특설 경비대와 의용 전투대는 에스토르 시가지 방어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설 경비 제301중대는 소련군 300명을 격퇴하고, 피난민을 지원했다. 그러나 다른 의용 전투대는 전멸한 것으로 보인다.[56][57][58]
8월 19일, 일본 대본영은 제5방면군에 정전 교섭과 무기 인도를 허가했지만, 제5방면군은 8월 19일 17시 30분에도 제88사단에 남사할린 사수를 명령하고, 소련군 진주 시 전투를 계속하도록 지시했다.[9][8]
8월 21일, 미네키 제88사단장은 제5방면군에 전면 충돌 회피를 위해 무장 해제와 소련군의 진주를 용인할 수밖에 없음을 설명하고, 히구치 기이치로 사령관의 승인을 얻었다.[47][8] 이는 대본영 참모로부터 자위 전투를 구실로 전투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85][8]
8월 22일, 제5방면군은 남사할린 사수 명령을 변경하고, 제88사단에 무기 인도 허가를 전달하여 시스카에서 소련군과의 정전 합의에 도달했다.[86]
소련은 진주 후 일본인과 재산의 본토 철수를 저지하려 했고, 23일에 섬 밖으로의 이동 금지를 통고했다. 24일 도요하라는 소련군 점령 하에 놓였고, 25일 오토마리 상륙으로 남사할린 점령은 완료되었다.[8]
4. 2. 소련의 해상 봉쇄 및 상륙 작전
소련 해군은 사할린 섬 침공 속도를 높이고 육상 병력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일본 주요 항구에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 부대의 탈출을 막기 위해 민간 수송선을 포함한 함선들을 공격하고, 사할린 섬 전체를 해상 봉쇄했다.8월 16일, 소련 해안경비함 자르니차와 기뢰제거함 4척, 수송함 2척, 경비정 6척, 어뢰정 9척이 토로 항에 정박했다. 소련군 제365독립해병대대와 제113보병여단의 1개 대대(약 1,400명)가 토로에 상륙하여 일본군 수비대 200명과 교전했다. 토로는 곧 점령되었고, 에스토루 항의 인구 밀집 지역 4곳도 확보되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00명이 사망하고 150명이 부상당했으며, 30명이 포로로 잡혔다. 소련군은 12명이 사망했다.
8월 20일, 소련 해병대대와 제113보병여단 연합군 3,400명이 마오카 항에 상륙했다. 상륙대는 일본군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소련 함선 몇 척이 피해를 입자, 소련군은 마오카에 해상 집중 포격을 가해 600명에서 1,000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사망했다. 마오카는 8월 22일 점령되었지만, 일본군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일본군은 300명이 사망하고 6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소련군은 육군 병사 60명과 해군 보병 17명이 사망했다.[131]
8월 25일, 소련군 1,600명이 코르사코프에 상륙했고, 일본군 수비대 3,400명은 항복했다. 같은 날 제88보병사단의 잔병들이 도요하라에서 항복하면서 소련군의 사할린 침공은 종결되었다.
4. 3. 정전 협상과 전투 종결
1945년 8월 19일, 일본 대본영은 제5방면군에 정전 협상과 무기 인도를 허가했다. 그러나 제5방면군은 같은 날 17시 30분, 제88사단에 남사할린을 계속 점령하고 소련군이 진주하면 전투를 계속하라는 명령을 내렸다.[9][8] 이는 정전 협상으로 끝나야 할 자위 전투를 계속하며 남사할린을 끝까지 지키려는 의도였다.[8]8월 20일, 만주의 관동군은 사할린에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긴급 조치를 요구하는 전보를 대본영과 제5방면군에 보냈다.[8] 제5방면군은 "소련군의 불법 행위는 눈뜨고 볼 수 없다"며 소련군 최고 지휘관에게 엄명을 내려달라고 회신했다.[8]
8월 21일, 제88사단장 미네키는 히구치 기이치로 제5방면군 사령관에게 전화로 소련군의 진격을 막을 수 없음을 설명하고, 전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무장 해제와 소련군의 진주를 허용해야 한다고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다.[47][8] 이는 만주에 파견된 대본영 아사에 시게하루 참모로부터 자위 전투를 구실로 전투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경고 전문을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85][8]
8월 22일, 제5방면군은 남사할린 사수 명령을 철회하고 제88사단에 대본영의 무기 인도 허가를 전달했으며, 시스카에서 소련군과 정전 합의에 도달했다.[86] 같은 날 오전 10시 30분경부터 교섭이 시작되어, 오후 0시 10분 지토리 소방서에서 제88사단 참모장 스즈키와 소련군 아리모프 소장 간에 정전 협상이 성립되었다.[35]
8월 25일, 소련군은 오토마리에 상륙하여 일본군 기지 등을 점령했다.[91]
5. 결과
일본의 항복 이후 사할린섬은 소련의 영토로 인정되었고, 가라후토청은 50도선 이북 지역과 통합되어 사할린주로 개칭되었다.[37] 소련군의 홋카이도 침공 계획은 서방 연합군이 계획한 몰락 작전이 시행되지 않으면서 함께 취소되었다.
침공 과정에서 최소 10만 명의 일본 민간인이 소련의 점령을 피해 탈출했다. 살아남은 일본군 장병들은 시베리아 억류로 인한 강제 노동을 당했으며, 일부는 시베리아로 이송되었고, 나머지는 사할린 섬 내 포로 수용소에서 노역에 종사했다.[19]
1945년 8월 23일, 소련은 사할린 섬 밖으로의 주민 이동을 금지하여 탈출하지 못한 주민들은 소련의 행정 아래 놓이게 되었다. 1946년 12월부터 일반 주민을 중심으로 귀환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일본 측에서는 하코다테 원호국이 수용을 담당했다.[121] 1949년 6~7월까지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79,356명이 사할린에서 홋카이도로 건너갔다.[122]
소련군 점령 직후 약 2만 3천 명이었던 조선계 주민은 대부분 소련 당국의 의향에 따라 사할린에 잔류하게 되었고, 이들은 사할린 한인이라 불리며, 대부분 정주를 강요받았다.[125]
소련은 홋카이도 북부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국의 반대와 남사할린 침공에서 일본군의 저항 등으로 인해 몰락 작전이 시행되지 않으면서 홋카이도 침공 계획을 폐지하였다.[69]
5. 1. 인명 피해
일본군의 사상자는 전사자 700명에서 2,000명 사이로 추산되며, 민간인은 약 3,500명에서 3,7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약 18,202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많은 사할린의 일본군 포로들이 시베리아의 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전쟁 후에도 억류되었다.[92][93][89]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 18,302명이 포로가 되었다.[89] 전투 중 민간인의 피해는 군인을 넘어 3,700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희생자는 군과 민간인을 합쳐 약 5천 명에서 약 6천 명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19]
정확한 희생자 수는 주민대장 등 행정 기록이 소실되어 불분명하다. 후생성 자료에 따르면, 공습, 함포 사격, 육상전 등 섬 내 전투에 휘말려 사망한 민간인은 마오카(真岡)에서 약 1,000명, 토로(塔路)에서 약 170-180명, 에스토르(恵須取)에서 약 190명, 도요하라(豊原)에서 약 100명, 시스카(敷香)에서 약 70명, 오치아이(落合)에서 약 60명 등 총 약 2,000명으로 추정된다. 긴급 피난선에서의 희생자를 합하면 약 3,700명에 달한다.[117]
낙오되거나 피난하지 못한 민간인 중에는 소련군에 붙잡히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 8월 20일 우체국 여성 직원 12명이 집단 자결을 시도한 (마오카 우편 전신국 사건) 외에, 토로 상륙 작전 당시 다이헤이 탄광 병원의 간호부 23명의 집단 자결(6명 사망)이 발생했다(가라후토 간호부 집단 자결 사건)[119]。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스파이 행위를 하고 폭행과 약탈을 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공포심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나요시 마을 7명 학살 사건[96], 미즈호 사건, 가미시스카 사건 등 일본군과 민간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지도리 제1 국민학교 강당 폭살 계획[96], 우치호로 갱도 폭파에 의한 매몰 계획[96], 조선인 헌병·주원룡 암살 계획[96] 등은 실패했다.
5. 2. 전후 처리
일본의 항복 이후 사할린섬은 소련의 영토로 인정되었고, 가라후토 청은 50도선 이북 지역과 통합되어 사할린 주로 개칭되었다.[37] 소련군의 홋카이도 침공 계획은 서방 연합군이 계획한 몰락 작전이 시행되지 않으면서 함께 취소되었다.일본군의 사상자는 병사 700~2,000명, 민간인 3,500~3,700명으로 추산된다. 약 18,202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많은 사할린의 일본군 포로들은 시베리아의 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전쟁 후에도 억류되었다.[37] 최소 10만 명의 일본 민간인이 침공 중 소련의 점령을 피해 도망쳤다. 살아남은 일본군 장병은 시베리아 억류로 인한 강제 노동을 당했다. 많은 수가 시베리아로 이송되었지만, 일부는 사할린 섬 내에 설치된 포로 수용소에서 노역에 종사했다.[19]
1945년 8월 23일, 소련은 사할린 섬 밖으로 주민 이동을 금지했고, 탈출하지 못한 주민들은 소련의 행정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일반 주민을 중심으로 한 귀환 사업은 1946년 12월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일본 측에서는 하코다테 원호국이 수용을 담당했다.[121] 1949년 6~7월까지 사할린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79,356명이 홋카이도로 건너갔다.[122]
소련군의 점령 직후 약 2만 3천 명이었던 조선계 주민은, 대부분이 소련 당국의 의향에 따라 사할린에 잔류하게 되었고, 사할린 한인이라고 불리며, 대부분은 그대로 정주를 강요받았다.[125]
5. 3. 홋카이도 침공 계획
소련은 몰락 작전이 시행되지 않으면서 홋카이도 침공 계획을 폐지하였다.[69] 소련은 홋카이도 북부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국의 반대와 남사할린 침공에서 일본군의 저항 등으로 인해 이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6. 민간인 피해
Совéтско-япóнская войнá|소-일 전쟁ru 당시 남사할린에는 계절 노동자를 포함하여 약 40만 명의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소련의 참전 후 홋카이도로의 피난이 시작되었지만, 많은 민간인들이 전쟁에 휘말려 피해를 입었다.[92]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전쟁을 선포한 후, 오쓰 사할린 청 장관과 스즈키 제88사단 참모장, 구로키 해군 무관 3명이 사전 협정을 확인하고 홋카이도로의 민간인 피난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전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105] 긴급 피난은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
사할린 청은 14세 이상의 여성 및 13세 이하의 남녀 16만 명을 15일간 이송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06] 실제 피난 시에는 오쓰 사할린 청 장관이 15-64세 남성의 피난을 금지했는데,[107] 이는 이들을 국민 의용 전투대 등에 참가시키려는 의도였다.[19] 피난 과정에서 경찰관에게 사살된 사람도 있었다.[108] 한편, 작은 배를 스스로 마련하여 탈출하거나,[109] 해군 관계자들은 피난선에 끼어들어 탈출하기도 했다.[110]
피난 지시를 받은 주민들은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의 재현을 두려워하며 승선지로 향했다.[92] 8월 13일 소야마루를 시작으로 긴급 피난선이 출발했다. 그러나 마오카는 8월 20일 소련군에 점령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혼토도 위험해 운용이 중단되었다. 8월 23일 소련군은 섬 밖으로의 이동을 금지했고, 같은 날 밤 "소야마루"와 "하루카제마루"를 마지막으로 피난이 종료되었다.
8월 22일에는 오가사와라마루, 다이토마루, 제2신코마루 3척이 홋카이도 연안에서 잠수함 공격으로 격침되어 1,708명이 사망하는 삼선 순난 사건이 발생했다.[115] 소련 잠수함의 공격으로 추정되며, 소련 측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이날 사할린의 정전 협상이 성립되었지만, 잠수함에 공격 중지 명령이 전달되기까지 몇 시간의 차이가 있었다.
목표의 절반 정도인 76,000명이 긴급 피난에 성공했고, 이후 밀항으로 24,000명이 추가로 탈출했다. 그러나 이는 남사할린 주민의 1/4 이하였다.[117] 갑작스러운 피난 지시로 준비가 늦어져 혼란이 발생했고, 군과 관청 관계자가 우선적으로 피난하는 사례가 발생하여 만주에서의 유사 사례와 함께 비난받았다.[114]
후생성 자료에 따르면, 섬 내 전투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마오카에서 약 1,000명, 토로에서 약 170-180명, 에스토르에서 약 190명, 도요하라에서 약 100명 등 총 약 2,000명으로 추정된다. 긴급 피난선 희생자를 합하면 약 3,700명에 달한다.[117]
피난하지 못한 민간인 중에는 소련군에 대한 공포로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다. 8월 20일 마오카 우편 전신국 사건으로 우체국 여성 직원 12명이 집단 자결을 시도했고,[119] 토로에서는 가라후토 간호부 집단 자결 사건으로 간호부 23명이 집단 자결하여 6명이 사망했다.[120]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스파이 행위를 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공포심이 확산되었고, 일본 군인과 민간인에 의한 조선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미즈호 사건''', '''가미시스카 사건''' 등)[96]
7. 논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항복하고 대본영에서 정전 명령을 내렸음에도, 히구치 기이치로 제5방면군 사령관은 사할린 제88사단에 남사할린 사수 명령을 내려 전투가 장기화되고 민간인 피해가 커져 논란이 되었다.[8]
일본군은 '자위 전투'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이는 명확한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해석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자위 전투'는 공식 용어가 아니었으며, 대본영은 항복을 전제로 휴전 교섭 중 공격받은 경우에만 자위 전투를 언급했다.
7. 1. 히구치 기이치로의 남사할린 사수 명령
1945년 8월 16일, 삿포로의 제5방면군 사령관 히구치 기이치로 중장은 사할린 제88사단에 남사할린을 끝까지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8] 이는 8월 15일 일본의 포츠담 선언 수락 발표와 대본영의 정전 명령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결정이었다.소련군은 남사할린 각지에 대한 공습을 계속했고, 일본군과의 전투도 이어졌다. 8월 19일, 대본영은 8월 22일 0시 이후 모든 전투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히구치 중장은 다시 한번 남사할린 사수를 명령했다.[9]
이러한 히구치 중장의 명령은 결과적으로 전투를 장기화시키고 피해를 확대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당시 남사할린에는 40만 명 이상의 일본 민간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소련군의 침공으로 홋카이도 방면으로 긴급 피난이 이루어졌다. 약 10만 명이 섬 밖으로 피난했지만, 피난선 3척이 소련군에게 공격받아 약 1,700명이 사망하는 미후네호 참사가 발생했다. 또한 육상에서도 소련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약 2,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히구치 기이치로는 소련군의 홋카이도 점령을 막기 위한 방파제로 남사할린을 사수하려 했다는 설이 있다. 히구치 본인은 소련의 남사할린 공격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언급하지 않고 사단장급에게는 대미, 대소련 준비를 지시했다고 주장한다.[12]
8월 19일, 대본영은 제5방면군에 정전 교섭과 무기 인도를 허가했지만, 제5방면군은 같은 날 17시 30분에도 제88사단에 남사할린 사수를 명령하고, 소련군이 진주할 경우 전투를 계속하도록 지시했다.[9][8]
8월 21일, 미네키 제88사단장이 제5방면군 하기 사부로 참모장에게 전화로 전면 충돌 회피를 위해 무장 해제와 소련군의 진주를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히구치 기이치로 사령관의 승낙을 얻었다.[47][8] 이는 대본영 참모로부터 자위 전투를 구실로 전투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85][8]
8월 22일, 제5방면군은 남사할린 사수 명령을 변경하고, 대본영의 무기 인도 허가를 제88사단에 전달하여 시스카에서 소련군과 정전 합의에 도달했다.[86]
7. 2. 자위 전투의 해석
일본군은 '자위 전투'를 명분으로 전투를 계속했지만, 이는 명확한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해석이었다는 비판이 있다.일본군 보병 제25연대 제1대대장 나카가와는 소련군의 접근을 알고 백기를 준비했지만, 마오카 공격을 이유로 소련군이 일방적으로 잘못했다고 주장했다.[65] 그는 히구치 사령관의 남사할린 사수 명령이나 대본영의 자위 전투 허가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고, "자위의 전투"에 대해 모호하게 이야기했다.[80]
나카가와 대대장은 위수령에 근거하여 무기 사용을 계속했다고 주장했지만,[77] 이는 히구치 중장의 사할린 사수 명령과 모순되며, 참모본부의 정전 명령에 반하는 교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발언일 가능성이 있다.
8월 19일, 대본영은 제5방면군에 정전 교섭과 무기 인도를 허가했지만, 제5방면군은 남사할린 사수를 명령하고 전투를 계속하도록 지시했다.[9][8] 이는 정전 교섭 성립으로 끝나야 했을 자위 전투를 계속하고 남사할린을 사수하려는 의도였다.
8월 21일, 미네키 제88사단장은 전면 충돌 회피를 위해 무장 해제와 소련군의 진주를 용인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히구치 기이치로 사령관의 승인을 요청하여 승낙을 얻었다.[47][8] 이는 만주에 파견되었던 대본영 참모로부터 자위 전투를 구실로 전투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85][8]
8월 22일, 제5방면군은 남사할린 사수 명령을 변경하고, 시스카에서 소련군과 정전 합의에 도달했다.[86]
'자위 전투'라는 용어는 공식적인 용어가 아니었으며, 국제법상 자위 전쟁은 영토 방위 등을 포함한다. 대본영은 포츠담 선언 수락에 따른 항복을 전제로 휴전 교섭 중 공격을 받은 경우로 한정하여 자위 전투를 언급했다. 나카가와 대대장의 증언은 무장 해제와 소련군 진주를 전제로 하며, 형법의 정당방위나 긴급 피난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제88사단의 스즈키 참모장은 자위 전투에 대해 이와이 소위에게 질문했고, 이와이는 군사 점령과 진주의 차이를 설명하며 휴전 협정 성립 전까지 전투를 계속하라는 의미가 아니냐고 답했다.[87] 그러나 실제로는 헤이그 육전 조약에 따라 휴전 중에는 점령지의 현행 법률과 사유 재산이 보호되어야 했다. 이와이는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상급 부대에 확인하지 않았고, 사단 역시 방면군에 확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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