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그 (루앙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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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그는 카롤링거 왕조 출신으로 프랑크 왕국의 궁재 피핀 2세의 손자이며, 루앙의 주교였다. 그는 713년에서 715년 사이에 사제 서품을 받았고, 이후 여러 교구의 총대리, 주교, 수도원장을 역임했다. 720년 루앙 대주교가 되었으며, 730년 사망할 때까지 다양한 종교적 직무를 수행했다. 그는 베네딕토회 소속이었으며, 축일은 4월 9일이다.

위그 (루앙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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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카롤링거 왕조 출신으로, 아버지는 프랑크 왕국의 궁재였던 피핀 2세와 플렉트루데의 아들인 드로고 1세이다. 어머니는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베르카르의 딸이자 와라톤의 외손녀인 안스가르데였다. 이를 통해 위그는 카를 마르텔의 이복 조카가 된다.

성직자가 되기 전, 위그는 생 완드리에 수도원과 쥐미에주 수도원에 상당한 재산을 기부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기증한 뒤, 713년715년 사이에 쥐미에주의 코친(Cochin) 신부의 집전 하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718년에는 메츠 교구의 부교구장(Vicar-General)이 되었다.

719년 이전에 그는 리지외 주교가 되었고, 같은 해 아브랑슈 주교, 퐁트넬 수도원 및 성 드니 수도원의 원장을 맡았다. 722년에는 공석이던 루앙 대교구의 대주교로 선출되었으며(일부 자료에서는 720년), 이후 파리 교구와 바유 교구의 행정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다양한 직위에서 얻은 수입을 사용하여 경건함과 학문을 증진하는 데 힘썼다.

723년, 그의 형제들이 카를 마르텔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위그는 이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 대가로 카를 마르텔은 피핀 2세의 지지자였던 그리포 주교가 사망한 후 루앙 교구의 권한을 위그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그는 프랑크 왕국의 왕실 성당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만년에 위그는 노르망디의 쥐미에주 수도원으로 은퇴하였고, 730년 4월 9일 그곳에서 사망하여 안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후에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위그는 베네딕토회 소속으로도 활동했으며,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어 그의 축일은 4월 9일로 지켜지고 있다. 9세기경,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유해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유골과 유물들은 벨기에 북부 아스프레로 옮겨졌다가 다시 반출되기도 했다.

2.1. 가문 배경

카롤링거 왕조 출신으로, 아버지는 프랑크 왕국의 궁재였던 피핀 2세와 플렉트루데의 아들인 드로고 1세이다. 어머니는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베르카르의 딸이자 와라톤의 외손녀인 안스가르데였다. 이로써 위그는 아버지 쪽으로는 피핀 2세와 플렉트루데의 손자, 어머니 쪽으로는 와라톤과 안스펠디스의 손자가 된다. 그의 외할아버지 와라톤과 아버지 드로고는 모두 궁재를 지냈다. 또한 그는 카를 마르텔의 이복 조카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멀리 샹파뉴 공작으로 나가 있는 동안, 위그는 할머니 안스펠드의 손에서 자랐다. 역사가 폴 포에이커(Paul Fouracre)는 이러한 위그의 성장 배경이 당시 프랑크족 가문의 운영과 정치 전반에서 여성이 맡았던 중요한 역할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2.2. 성직 활동

성직자가 되기 전 위그는 생 완드리에 수도원과 쥐미에주 수도원에 상당한 재산을 기부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기증한 뒤, 713년715년 사이에 쥐미에주의 코친(Cochin) 신부의 집전 하에 사제품을 받았다. 아직 평신도였을 때 쥐미에주 수도원을 하사받기도 했으며, 718년에는 코친 수도원장 아래 수도사로 입회했다. 같은 해 메츠 교구의 부교구장(Vicar-General)이 되었다.

위그는 다양한 교구와 수도원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으며 성직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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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외 주교 | |
아브랑슈 주교, 퐁트넬리 수도원 원장, 성 드니 수도원 원장 | |
루앙 대교구 대주교 선출 | (다른 자료에서는 720년 대주교 승격 언급) |
퐁트넬 수도원 담당 | 형제들이 카를 마르텔에 대한 반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대가로, 피핀 2세 지지자였던 그리포 주교 사후 루앙 교구 권한 획득 |
파리 교구 및 바유 교구 행정 담당 | (다른 자료에서는 723년-730년 바이유 주교 언급) |


이후 그는 프랑크 왕국의 왕실 성당을 관리하였으며, 자신이 맡은 다양한 직위에서 얻은 수입을 사용하여 경건함과 학문을 증진하는 데 힘썼다.

만년에 위그는 노르망디의 쥐미에주 수도원으로 은퇴하였고, 730년 4월 9일 그곳에서 사망하여 안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후에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위그는 베네딕토회 소속으로도 활동했으며, 사후 성인으로 시성되어 그의 축일은 4월 9일로 지켜지고 있다. 9세기경,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유해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유골과 유물들은 벨기에 북부 아스프레로 옮겨졌다가 다시 반출되기도 했다.

2.3. 은퇴와 죽음

위그는 생애 말년에 노르망디 지역의 쥐미에주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그는 730년 4월 9일 쥐미에주 수도원에서 사망했으며, 그곳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유해는 노트르담 성당으로 옮겨졌다.

9세기 경,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유해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유골과 유물들은 벨기에로 옮겨졌다. 위그는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그의 축일은 4월 9일이다.

3. 유산과 평가

주어진 원본 자료에는 위그 주교의 유산이나 평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