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귀비 가리엽특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가리엽특씨는 옹정제의 넷째 아들인 건륭제의 첩으로, 건륭제 치세 동안 상재, 귀인, 빈, 비를 거쳐 귀비에 이르렀다. 5황자 영기를 낳았으며, 원명원 화재 당시 건륭제를 구하는 데 기여했다. 1792년에 사망하여 유귀비로 추증되었고, 순혜황귀비의 원침에 부장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14년 출생 - 사카이 다다요시 (1714년)
사카이 다다요시는 데와 마쓰야마 번의 3대 번주로, 번정 개혁 시도 실패, 막부의 재정 지원 및 영향력 행사, 영지 확장, 장기 명인으로 알려졌으며, 74세에 사망하여 차남이 뒤를 이었다. - 1714년 출생 -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마쓰다이라 다케치카는 히타치국 후츄번주의 아들로 태어나 다테바야시번을 계승한 후 다나구라번으로 이봉되었으며, 로쥬 수좌로서 도쿠가와 요시무네, 이에시게, 이에하루 3대 쇼군을 섬기며 타누마 오키쓰구와 협력 관계를 맺고 유력한 귀족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에도 시대의 다이묘이다. - 1792년 사망 - 조슈아 레이놀즈
18세기 잉글랜드의 초상화가이자 미술 이론가인 조슈아 레이놀즈는 왕립예술아카데미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고상한 양식'을 추구하며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고, 당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영국 화가의 직업적 지위 확립에 기여했다. - 1792년 사망 - 리처드 아크라이트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수력 방적기 발명과 공장 시스템 구축으로 영국 섬유 산업 발전에 기여한 산업혁명 시대의 발명가이자 기업가, 경영자이다. - 청나라의 후궁 - 화유황귀비
화유황귀비는 청나라 가경제의 후궁으로, 가경제의 첩 시절 두 자녀를 두었으며 함비, 함귀비를 거쳐 현희황귀태비로 봉해졌고 사후 화유황귀비로 추증되었으며 73세에 사망하여 창릉에 안장되었다. - 청나라의 후궁 - 경민황귀비
경민황귀비는 강희제의 후궁으로, 옹친왕 인상의 생모이며, 비빈으로 총애를 받아 윤상 등 자녀를 낳고 사망 후 민비로 추증, 아들 윤상의 공헌으로 황귀비로 추봉, 최종적으로 경민황귀비로 추존되어 경릉에 합장되었으나, 출생년도, 입궁 시기, 가족 배경 등은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유귀비 가리엽특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휘호 | 유귀비 (愉貴妃) |
출생일 | 강희 53년 5월 4일 (1714년 6월 15일) |
사망일 | 건륭 57년 5월 21일 (1792년 7월 9일) |
사망 장소 | 청나라 북경 자금성 영화궁 |
매장지 | 청유릉비원침 |
가계 | |
성씨 | 출생 시: 커리예터 (珂里葉特) 결혼 후: 아이신 교로 (愛新覺羅) |
부친 | 원외랑 엘지투 |
배우자 | 건륭제 |
자녀 | 5황자 화석영순친왕 영기 |
작위 경력 | |
책봉 | 해격격 → 해상재 → 해귀인 → 유빈 → 유비 → 유귀비 (추봉) |
2. 생애
옹정제 연간에 옹정제의 넷째 아들 홍력(후일의 건륭제)의 측실인 격격이 되었다. 건륭제 즉위 후 건륭 10년(1746년) 유비(愉妃)로 진봉되었다. 건륭 28년(1764년) 원명원 구주청연전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아들 영기가 건륭제를 구출하였다. 건륭 57년(1792년)에 사망하여 건륭제는 유귀비(愉貴妃)로 추존하고, 순혜황귀비의 원침에 부장시켰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강희제 53년 5월 4일 (1714년 6월 15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5품 문관(員外郎)을 지낸 어얼지투(額爾吉圖)이다.[1] 옹정제 5년(1727년)에 황제의 넷째 아들 홍력의 격격(格格) 8~9명 중 한 명으로 추측된다.[1]옹정 13년 9월 3일 (1735년 10월 18일), 옹정제의 넷째 아들인 보친왕 홍력이 건륭제로 즉위했고, 그 해 9월 24일 해씨는 해상재(海常在)로 봉해졌다.[1]
건륭 2년 11월 24일 (1738년 1월 13일), 해상재는 장상재와 함께 진봉되어 해귀인(海貴人)으로 불렸다.[1]
건륭 6년 2월 7일 (1741년 3월 23일), 축시에 해귀인이 산파 왕씨, 진씨의 도움을 받아 5황자 영기를 출산하였고,[1] 같은 해 2월 13일 경황태후의 뜻을 받아 유빈(愉嬪)으로 봉해졌으며, 같은 해 11월에 유빈 책봉례를 했다.[1]
2. 2. 건륭제 시기
건륭제 즉위 후, 해씨는 '''해상재'''(海常在)에 봉해졌다.[1]건륭 2년(1738년), 해상재는 장상재와 함께 '''해귀인'''(海貴人)으로 진봉되었다.[1]
건륭 6년 2월 7일(1741년 3월 23일), 해귀인은 5황자 영기를 출산하였고, 같은 해 2월 13일 경황태후의 뜻을 받아 '''유빈'''(愉嬪)으로 봉해졌으며, 같은 해 11월에 유빈 책봉례를 거행했다.[1]
건륭 10년 정월 23일, 유빈은 다른 비빈들과 함께 '''유비'''(愉妃)로 진봉되었고,[1] 11월 17일, 대학사 찰량아를 정사로, 예부 좌시랑 목화림을 부사로 하여 유비 책봉례를 거행했다.[1]
건륭 28년(1763년) 5월 5일, 원명원 구주청연전에 불이 나, 유비의 아들 영기가 몸소 건륭제를 등에 업고 위험에서 벗어났다.[1] 이튿날, 건륭제는 유비에게 시계 등을 하사했다.
건륭 29년(1764년) 3월 22일, 유비 휘하의 여인이 나상재로 봉해졌다.[1]
2. 3. 말년
건륭 46년 윤5월 6일, 유비의 손녀이자 건륭제의 5황자 영기의 장녀가 사망하자, 건륭제는 4황자 영성의 딸을 5황자의 사위에게 보내고, 이 격격을 궁으로 데려와 단칙문 옆 집에 살게하고, 유비와 영기의 정실부인인 서림각라씨에게도 가서 보살피라고 명하였다.[1]건륭 57년 5월 21일 (1792년 7월 9일) 유비가 영화궁에서 78세의 나이로 별세하여, 47년동안 비의 자리를 지켰다.[2] 이후, 길안소에서 정령되고, 그 해 5월 23일 건륭제가 유귀비로 추존하여 귀비의 예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였는데, 이에 대한 예의는 경귀비와 같았다.[2] 유비 해씨의 장례는 귀비의 예에 따랐지만 기록물을 보면 일찍 사망한 흔귀비, 경귀비의 장례에 비해 크게 뒤떨어졌다.[2] 또한 건륭제가 지목한 입효자 명단에는 영기의 정실부인인 서림각라씨도 오지 않았고, 유비의 친손자인 면의도 오지 않아 알려지지 않았다.[2]
건륭 57년 5월 27일, 인시에 유귀비 금관이 길안소에서 정안장의 빈궁으로 옮겨졌다.[2] 유귀비의 초제례는 같은 해 6월 2일, 대제례는 6월 12일에 거행되어 문치제를 함께 읽었으며, 승제인은 17황자 영린, 예부시랑 철보이다.[2]
건륭 58년 10월 12일, 유귀비의 금관은 정안장 장례식장에서 동릉 승수욕 순혜황귀비의 원침으로 보내졌다.[2] 그 해 10월 20일 유름비원침 두번째 줄에 봉안한 유귀비 금관은 서쪽으로 2번째 침권을 받았다.[2]
3. 소생
珂里葉特氏중국어는 강희제 53년 5월 4일 (1714년 6월 15일)에 태어났다. 옹정제 5년(1727년), 황제의 넷째 아들 홍력은 결혼 전이었는데, 격격 8~9명 중 한 명으로 추측된다. 옹정 13년 9월 3일 (1735년 10월 18일), 옹정제의 넷째 아들인 보친왕 홍력이 건륭제로 즉위했고, 그 해 9월 24일 해씨는 건륭제 잠저 시절 측복진, 격격과 함께 봉해졌으며, 해씨는 해상재로 봉해졌다.[1]
건륭 2년 11월 24일 (1738년 1월 13일), 해상재는 장상재와 함께 진봉되어 해귀인으로 불렸다. 건륭 6년 2월 7일 (1741년 3월 23일) 축시, 해귀인은 산파 왕씨, 진씨의 도움을 받아 5황자 영기를 출산하였고,[1] 같은 해 2월 13일 경황태후의 뜻을 받아 해귀인을 유빈으로 봉하고, 같은 해 11월에 유빈 책봉례를 했다.[1]
건륭 10년 정월 23일, 유빈은 다른 비빈들과 함께 유비로 진봉되었다. 3월 3일 《옹화궁만문문서번역편》에는 영화궁 유비가 제후 등을 따라 혜현황귀비의 금관정령인 육계도 빈궁으로 갔고, 유비는 순귀비와 같은 마차를 타고 육계도로 향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유비 휘하에는 여섯 명의 태감이 따라다니며 말 5필을 썼다. 유빈은 유비로 진봉되었으나, 아직 책봉례를 하지 않았으며, 위하에는 수령인 태감이 몇 명 배치되지 않았고, 일반 태감도 후빈의 예에 따라 배치되었다.[1]
건륭 10년 11월 17일, 대학사 찰량아를 정사로 하고, 예부 좌시랑 목화림을 부사로 하여 유비 책봉례를 거행했다. 건륭 24년 11월 13일, 광저사의 매년 황태후 등위 금선에 공진하는 기록물에는 유비가 경빈 등과 같이 금실 6개를 누렸다고 기록되어있다. 건륭 28년 5월 4일, 유비의 50세 천추축제에서 건륭제는 후궁의 처우에 따라 은 300냥을 하사했다.[1]
건륭 28년 5월 5일, 원명원 구주청연전에 불이 나, 유비의 아들 영기가 몸소 건륭제를 등에 업고 위험에서 벗어났다. 이튿날, 상녕시지상유비도금 아치꽃은 박스 2면, 화이트 에나멜 다이얼 2핀 시계 1개와 도금 올리브색 매화줄을 하사했다. 건륭 29년 3월 22일, 유비 휘하에 있는 여인에게 나상재로 봉했다.[1]
4. 미디어에서의 등장
참조
[1]
날짜
雍正十三年 九月 二十四日
[2]
날짜
乾隆六年 十一月
[3]
날짜
乾隆十年 十一月 十七日
[4]
날짜
乾隆五十八年 十月 二十日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