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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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명우는 서울 한강중학교 재학 중 복싱을 시작하여 1982년 프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권투 선수이다. 1984년 동양 타이틀을 획득하고, 1985년 WBA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조이 올리보를 꺾고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17차 방어에 성공하며 한국 프로복싱 최다 방어 기록을 세웠으며, 1991년 이오카 히로키에게 패해 타이틀을 잃었으나 이듬해 재대결에서 승리하여 타이틀을 되찾았다. 1993년 은퇴했으며, 2013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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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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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유명우 |
별칭 | 소나기 (작은 들소) |
출생일 | 1964년 1월 10일 |
출생지 | 서울특별시 |
신장 | 161cm |
체급 | 라이트플라이급 |
스타일 | 오소독스 |
총 전적 | 39전 |
승리 | 38승 |
KO승 | 14KO승 |
패배 | 1패 |
리치 | 65인치 |
2. 선수 경력
서울 한강중학교 재학 시절 복싱에 입문하여 3학년 때 전국학생신인선수권대회에 처음 출전했다.[7] 1982년 프로 데뷔 후, 1984년 동양 타이틀을 따고, 1985년 조이 올리보를 판정으로 꺾고 WBA 챔피언에 등극했다.[7] 1991년 이오카 히로키에게 판정패하며 타이틀을 잃었으나, 1992년 재대결에서 승리하여 챔피언 벨트를 되찾았다. 이후 1993년 은퇴할 때까지 타이틀을 유지했다. 은퇴 후에는 예식장, 설렁탕집, 오리고기집 등을 경영하며 사업으로 생긴 수입으로 복싱계를 지원하고 있다.[7] 1988년에는 3억 8000만원의 대전료를 받아 국내 프로복서 중 최고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8]
당시 연 2억원 이상의 소득에도 불구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부친이 정년 퇴직한 후에야 자가용을 구입할 정도로 성실함과 철저한 자기관리를 보여주었다. 세계 챔피언으로서 17차 방어전을 성공하며 약 6년간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유명우가 세운 '17차 방어'는 이 체급 최다이자 한국 프로복싱 사상 최다 기록이며, '프로 36연승'의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9]
2. 1. 프로 데뷔와 동양 챔피언
서울 한강중학교 재학 시절 복싱에 입문했으며, 3학년 때 전국학생신인선수권대회에 처음 출전했다.[7] 1982년 프로에 데뷔해, 1984년 동양 타이틀을 획득하고, 이듬해 조이 올리보를 판정승으로 누르고 WBA 챔피언이 되었다.[7]1982년 3월 3일 진주에서 최병범을 상대로 프로 데뷔전을 치러 4라운드 판정승을 거두었다. 이후 6번의 경기를 모두 4라운드 판정승으로 이겼다. 1982년 7월 박효영과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4라운드를 넘어선 6라운드 판정승을 거두었다.
8번째 경기인 대구에서 열린 김기창과의 8라운드 경기에서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무패 행진을 이어갔다. 김기창은 이후 한국 챔피언과 OPBF 슈퍼 플라이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후 안래기와의 8라운드 경기에서 판정승을 거두었고, 안래기는 한국 플라이급 타이틀 및 WBC 플라이급 타이틀 도전 기회를 얻었다.
다음으로 미래의 한국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 보유자인 임하식을 판정으로 이기고, 리틀 바기오를 2라운드 KO로 제압하며 첫 KO 승을 기록했다.
15번째 경기에서 미래의 IBF 플라이급 챔피언인 충주원을 10라운드 판정으로 꺾으며 진정한 컨텐더임을 입증했다.
16번째 경기에서 에드윈 이노센시오를 3라운드 KO로 꺾고 공석이었던 OPBF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 경기는 1984년 12월 2일 대한민국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다.
OPBF 타이틀을 투바거스 자야를 상대로 3라운드 KO승을 거두며 1차 방어에 성공했고, 첫 번째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기 전에 또 다른 비 타이틀 경기에서 승리했다.
1984년 4월 15일, 논타이틀전에서 2회 KO승을 거두며 데뷔 이후 14연승을 기록, 자신의 첫 KO승을 달성했다.[1]
1984년 12월 2일, 동양태평양 타이틀 첫 도전에서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에드윈 이노센시오(필리핀)를 3회 KO로 꺾고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5년 2월 24일 첫 방어에 성공하고, 11월에 타이틀을 반납했다.[1]
2. 2. WBA 세계 챔피언 등극과 방어전
1985년 12월 8일, 유명우는 당시 WBA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이었던 조이 올리보에게 도전하여 15라운드 판정승을 거두고 생애 첫 세계 타이틀을 획득했다.[7] 김환진에 이어 이 타이틀을 보유한 두 번째 한국인 선수가 되었다.이후 1991년 이오카 히로키에게 패하여 타이틀을 빼앗길 때까지 17차 방어에 성공하며 약 6년간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9] 1990년 4월 29일에는 WBA 세계 미니멈급 초대 챔피언이었던 레오 가메스를 판정으로 꺾고 15차 방어에 성공, 장정구가 가지고 있던 세계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 방어 최다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같은 해 11월 5일 가메스와의 재대결에서도 승리하며 장정구의 기록을 넘어섰다.[1]
1991년 12월 17일, 일본 오사카부립 체육회관에서 열린 18차 방어전에서 이오카 히로키에게 1-2 판정패를 당하며 프로 첫 패배와 함께 타이틀을 잃었다.[1]
1992년 11월 18일, 이오카와의 재대결에서 12회 판정승을 거두며 11개월 만에 세계 타이틀을 되찾았다.[1] 1993년 7월, 1차 방어전(통산 18차 방어)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은퇴를 선언하고 타이틀을 반납했다.
2. 3. 이오카 히로키와의 대결과 은퇴
1991년 12월 17일, 유명우는 WBC 스트로급 챔피언 이오카 히로키를 상대로 18번째 방어전을 치렀다. 이 경기는 유명우의 선수 경력에서 처음으로 한국 밖에서 열리는 경기였다. 일본 오사카부립 체육회관에서 이오카는 113-115, 117-112, 115-113 점수로 12라운드 스플릿 판정승을 거두며 WBA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을 획득했다.[1] 심판은 해롤드 레더만, 오스카 페레즈, 필 뉴먼으로 모두 미국인이었다. 이 판정으로 인해, 현역 시절 '무패 상태에서 명예롭게 은퇴하겠다'던 유명우의 꿈은 무너졌다.타이틀을 잃은 후, 유명우는 재경기를 기다리며 거의 1년 동안 링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동안 이오카는 두 번의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다.
1992년 11월 18일, 유명우는 타이틀을 잃었던 오사카부립 체육회관으로 돌아와 이오카 히로키를 상대로 12라운드 다수 판정승을 거두며 타이틀을 되찾았다. 114-114, 117-112, 119-111 점수로 WBA 라이트 플라이급 타이틀을 되찾았다.[1] 심판은 모두 중립국 출신이었다.
이후 1993년 7월 25일, 유명우는 호소노 유이치를 상대로 12라운드 판정승을 거두며 타이틀을 방어했는데, 이는 두 번째 타이틀 방어 기간 중 유일한 방어전이었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명우는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발표하며 38승 1패(14 KO)의 전적을 남기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유명우는 "세계 타이틀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이오카에게 설욕하고 싶었다. 이오카에게 진 채로 은퇴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3. 은퇴 이후
은퇴 후 유명우는 예식장, 설렁탕집, 오리고기집 등을 경영하였으며,[7] 사업으로 생긴 수입으로 복싱계를 지원하고 있다. 1988년 3.8억원의 대전료를 받아 국내 프로복서 중 최고의 소득을 올렸다.[8]
당시 연 2억원 이상의 소득이 있었지만 늘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부친이 정년 퇴직을 한 후에야 자가용을 구입했다. 1991년 일본에서 이오카 히로키에게 판정패하며 타이틀을 빼앗겼으나, 1992년 이오카 히로키에게 다시 도전하여 챔피언 벨트를 되찾아왔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발표하며 38승 1패(14 KO)의 전적을 남기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유명우가 세운 '17차 방어'는 이 체급 최다이자 한국 프로복싱 사상 최다 기록이며, '프로 36연승' 기록은 한국 복싱에서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9]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17차 방어에 성공하여 이 부문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이는 장정구가 세운 15차 방어 성공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2013년에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 학력
참조
[1]
웹사이트
Yuh regains WBA light-flyweight title
https://www.upi.com/[...]
United Press International
2023-02-25
[2]
뉴스
South Korean Yuh to be inducted into Hall of Fame
https://www.reuters.[...]
2023-02-25
[3]
웹사이트
[4]
문서
‘소나기 펀치’의 대명사 유명우
http://bravo.etoday.[...]
2018-01-17
[5]
뉴스
프로복싱 "안방 챔피언"들 많다
http://news.joins.co[...]
中央日報
1987-04-15
[6]
문서
SC 페이퍼진 잊을 수 없는 순간들 : 유명우
http://m.chosun.com/[...]
スポーツ朝鮮
2009-11-02
[7]
뉴스
전 WBA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 유명우
http://www.sports2.c[...]
스포츠2.0
2007-12-17
[8]
문서
1988년 한국 프로복서 소득랭킹 1위 유명우
http://blog.naver.co[...]
[9]
문서
전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유명우 “내가 장정구와 맞붙지 않은 이유는…”
http://news.donga.co[...]
[10]
문서
복싱 명예의 전당 헌액되는 유명우 "기쁘고도 슬픕니다"
http://news.chosu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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