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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 (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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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민은 오대 십국 시대 북한의 초대 황제이다. 후한의 고조 유지원의 동생으로, 곽위의 반란으로 조카 유승우가 살해되자 타이위안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북한을 건국했다. 북한은 요나라에 굴욕적인 외교를 펼치며 군사적 지원을 받았으나, 후주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국력이 쇠퇴했고, 유민 사후 아들 유균이 제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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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 (십국)
기본 정보
칭호북한의 황제 시조
중국어북한 세조 (北漢世祖)
이름유민 (劉旻)
로마자 표기Liú Mín
시대중국
통치
즉위북한의 제1대 황제
재위 기간951년 – 954년
이전유승우, 후한의 마지막 황제
계승유계원, 아들
연호건우 (乾祐), 후한 고조와 은제로부터 이어짐
4년: 951년 2월 9일 – 952년 1월 29일
5년: 952년 1월 30일 – 953년 1월 17일
6년: 953년 1월 18일 – 954년 2월 5일
7년: 954년 2월 6일 – 955년 1월 26일
인물 정보
유 (劉)
숭(崇)에서 민(旻)으로 개명 (951년)
시호신무황제 (神武皇帝) (951년)
묘호시조 (世祖)
아버지유전 (劉琠)
어머니안씨 (安氏)
출생895년 또는 896년 1월
사망954년 (59세)
사망 장소태원, 북한 (오늘날의 산서성 타이위안시)
가족 관계
자녀유윤 (劉贇), 아들
유계원, 아들
유고 (劉鎬), 아들
유개 (劉鍇), 아들
유기 (劉錡), 아들
유석 (劉錫), 아들
유선 (劉銑), 아들
딸, 유계은과 유계원의 어머니

2. 생애

후한의 고조 유지원의 동생이다. 젊은 시절에 음주와 도박을 좋아하고, 얼굴에 문신을 하고 종군하였다고 사서에 기록되었다. 유지원후진에 의해서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에 임명되었을 때, 도지휘사를 담당하였고, 유지원이 후한을 건국한 다음은 타이위안(太原)을 다스리고, 조카 유승우가 황제로 즉위 하면서 동시에 하동절도사에 임명되었다.

후한의 건우 3년(950년), 추밀사 곽위의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군이 후한의 수도인 대량(大梁, 현재의 하남성 카이펑 시)에 점령하여 은제 유승우는 도망갔고, 그러나 반란군에 잡혀 살해되었다. 곽위가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유민은 당초 반란군에 대항하여 남하하는 계획했지만, 곽위가 유민의 아들인 무녕절도사 유윤을 황제에 옹립할 계획을 알고,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951년 곽위는 스스로가 황제로 즉위하여 후주를 건국하자, 유윤을 살해하였고, 유민은 이에 분노하여 타이위안에서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북한을 건국하여 이름을 유민으로 개명했다.

북한은 국토가 작아서 백성들의 경제력도 궁핍했지만, 후한의 부흥을 목표로 삼았고, 요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여, 요나라와 북한을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외교를 하여 요나라 황제를 삼촌 황제, 스스로를 조카 황제로 하여 굴욕적인 외교를 시행하였고, 요나라는 유민을 대한 황제(大漢皇帝)로 책봉 하였다. 요나라의 지원을 받은 북한은, 후주에 대한 군사 행동을 많이 일으켰다. 특히 건우 7년(954년), 곽위의 사망을 이용하여 후주를 공격했을 때에는, 후주 세종인 시영의 군대에 대패하여, 유민은 농민으로 위장하여 도망갔다.

이 전투에 의해서 북한은 심각한 타격을 받아 후주를 공격할 여력이 없었다. 국력이 쇄락해져가는 중에 유민이 병사하였고, 묘호를 세조로 하였고, 그의 아들인 유균이 제위를 계승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후한 시기 활동

유민은 젊은 시절 음주와 도박을 즐겼으며, 얼굴에 문신을 새기고 군에 입대하였다고 전해진다.[3] 튀르크계 돌궐 사타족 출신으로, 형 유지원후진에서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임명되자 도지휘사(都指揮使)를 담당했다.[3] 유지원이 후한을 건국한 후에는 타이위안(太原)을 다스렸으며, 조카 유승우 즉위 후 하동절도사에 임명되었다.[3]

2. 2. 북한 건국과 통치

후한 고조 유지원의 동생 유민은 젊은 시절 음주와 도박을 즐겼으며, 얼굴에 문신을 새기고 종군하였다. 유지원후진에 의해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에 임명되자 도지휘사를 담당하였고, 유지원이 후한을 건국한 후에는 타이위안을 다스렸다. 유승우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하동절도사에 임명되었다.

950년, 추밀사 곽위(郭威)의 반란으로 유승우가 살해되고 951년 곽위가 후주를 건국하자, 유민은 타이위안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북한을 건국하고 이름을 유민으로 고쳤다. 북한은 국력이 약했으나, 유민은 후한의 부흥을 목표로 요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여 '부자 관계'의 외교를 맺었다. 요나라 황제를 숙부 황제로, 자신을 조카 황제로 칭하며 요나라의 지원을 받아 후주를 공격했다.

954년, 곽위 사후 후주를 공격했으나 세종 시영에게 대패하여 큰 타격을 입고, 이후 병사하였다.

2. 3. 묘호 및 계승

유민은 후한 고조 유지원의 동생이다. 951년 곽위가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후주를 건국하고 유윤을 살해하자, 유민은 타이위안에서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북한을 건국하였다. 국력이 쇠락해져 가는 중에 유숭이 병사하였고, 묘호는 세조(世祖)이다. 사후 그의 아들인 유균이 제위를 계승하였다.

3. 가족 관계

아버지 유전(劉琠)은 장성황제(章聖皇帝)로 추존되었으며, 묘호는 현조(顯祖)이다. 어머니 안씨 부인은 오국태부인(吳國太夫人)으로, 장의황후(章懿皇后)로 추존되었다. 부인은 황후로 이름은 미상이다. 후궁 왕비 (915년-971년)가 있었다. 자녀로는 유승운 혹은 유운, 상음공(湘陰公) (951년 추봉, 곽위에게 951년 피살), 유승균 (유준) (劉承鈞, 후일 예종(睿宗)), 유호(劉鎬), 유개(劉鍇), 유기(劉錡), 유석(劉錫, 형제와 성조가 다름), 유전(劉銑, 형제와 성조가 다름), 최소 3명의 아들, 그리고 공주(유기은과 유기원의 어머니)가 있었다. 유호, 유개, 유기, 유석은 유기원에게 968년경에 피살되었다.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4. 3. 종합적 평가

5. 둘러보기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http://zh.wikisource[...]
[2] 서적 Zizhi Tongjian http://zh.wikisource[...]
[3] 서적 Wudai Shiji http://zh.wiki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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