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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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은 947년부터 951년까지 존재했던 오대 십국 시대의 왕조이다. 요나라가 후진을 멸망시킨 후 하동절도사 유지원이 개봉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건국했다. 유지원의 사후, 그의 아들 유승우가 은제로 즉위했지만, 권력 다툼과 곽위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후한은 2대 만에 멸망했으며, 후한의 잔존 세력은 북한을 세워 요나라의 보호를 받으며 존속하다가 송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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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오대)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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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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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명 | 한(漢) |
통칭 | 후한 (오대) |
한어 병음 | Hàn |
역사 | |
성립 | 947년 |
멸망 | 951년 |
건국 | 태원에서 건국 |
멸망 | 곽위가 황제로 즉위 (법률상 멸망) |
사실상 멸망 | 개봉 함락, 은제 피살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통치자 | |
역대 황제 | 고조 (947–948) 은제 (948–951) |
수도 | |
수도 | 개봉 |
언어 및 종교 | |
공용어 | 중국어 |
종교 | 불교 도교 유교 중국 민간 신앙 |
경제 | |
통화 | 중국 전 중국 동전 동전 등 |
선대 및 후대 | |
선대 | 후진 |
후대 | 후주 북한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중국 |
2. 역사
후진이 요나라(거란)에게 멸망될 때, 후진을 섬기며 진양에 주둔하던 하동절도사 유지원은 후진을 돕지 않고 형세를 관망하였다. 948년 요나라 군이 돌아간 뒤, 유지원은 개봉부에 입성해 황제가 되어 국호를 '''한'''(漢)이라 칭하고 후진을 대신하는 왕조를 열었다. 이후 낙양을 점령하고 중원을 지배하여 오대의 명맥을 이었다.[9]
요나라 군이 유지원과 전투를 벌이지 않은 이유는 요나라가 개봉부 통치에 실패하여 거란인 병사들이 북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요나라의 남진은 후진에 대한 징벌과 약탈이 목적이었기에 유지원의 군대와 싸울 필요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유지원은 10개월 만에 사망했고, 차남 유승우가 황제가 되었다. 유지원의 묘호는 고조이다. 은제 때는 내분이 잇따라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웠다. 곽위가 이를 모두 진압하였으나, 젊은 은제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재상 추밀사 양빈, 삼사사 왕장, 대장 사홍조 등 여러 중신들을 제거하려 했다. 이에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칠 것을 느낀 곽위는 분노하여 위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은제를 공격했다. 950년 곽위의 군이 카이펑에 육박하던 도중 은제는 곽윤명(郭允明)에게 살해당한다.
중원 근처에서는 유지원의 두 동생 유숭과 유신, 그리고 유숭의 장남 유윤(유지원의 조카로, 한때 유지원의 신임을 받아 양자가 됐었다)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곽위는 일단 유윤을 옹립하였으나, 부하들의 추대로 스스로 제위에 올라 후주를 건국하였다.
후주 건국으로 불필요한 존재가 된 유윤이 살해되자, 그의 아버지 유숭은 분노하여 하동절도사로 있던 진양에서 자립하여 십국 중 하나인 북한을 세웠다. 북한은 후주를 대신한 송나라에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유지원이 세운 오대의 정통 왕조 후한(後漢)은 2대 2년이라는 오대 중 최단명 왕조로 막을 내리고, 그 뒤는 오대의 마지막 왕조 후주가 이었다. 후주가 망하자 송나라가 세워져 십국을 차례로 멸망시켰고, 북한도 이때 사라졌다. 이로써 송나라는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연운 16주를 포함한 화북지방 북부 지역은 요나라의 지배 하에 있었다.
2. 1. 건국 배경
요나라(거란)가 후진을 멸망시킬 당시, 후진을 섬기면서 진양에 주둔하던 하동절도사 유지원은 후진을 돕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였다.[5] 947년 2월, 유지원은 개봉부에 입성하여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칭하며 후진을 대신하는 왕조를 열었다.[9] 이후 낙양을 점령하고 중원을 지배하여 오대의 명맥을 이었다.요나라 군대가 유지원과 전투를 벌이지 않은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942년 5월, 후진의 고조 석경당이 사망하고, 그의 유지를 따르지 않은 2대 황제 소제 석중귀가 재상 풍도와 천평군 절도사 경연광에 의해 옹립되었다.[11] 대요 강경파였던 경연광은 재상과 시위친군마보군도지휘사(중앙 금군 총사령관)를 겸임하며 국정 실권을 장악하고, 세폐를 중단하며 요나라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요나라에 알려져 944년에 두 차례의 요 남침을 초래했고, 946년 11월에는 요나라 태종 야율요골의 친정이 시작되었다.[12] 946년 12월, 개봉이 함락되고 소제는 요에 납치되어 후진은 멸망했다.[13] 요나라 태종의 침공 목적은 반요나라 자세를 취하는 후진 소제 정권에 대한 징벌과 연운 16주 이남 화북 지배를 꾀한 것이었다.[13]
하지만 요나라 본국에서는 요나라의 농경 사회 직접 지배에 대해 비판적인 유목 세력(술율태후 일파)의 모략 활동이 있었다. 또한, 요나라의 약탈 전문 부대인 "타초곡기"가 화북 지방에서 격렬한 약탈 활동을 벌였지만, 한족의 격렬한 저항에 요나라 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947년 4월, 요나라는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13]
후진 건국 당시 고조 즉위에 공을 세워 '시위친군마보군도지휘사'로서 요지 절도사를 겸하고 있던 유지원은 요의 남침이 격화됨에 따라 '하동절도사'로서 진양에 주둔하게 되었다.[14] 당시 진양은 요나라에 대한 국방 거점이었고, 유지원은 이곳에서 훗날 후한 친위 부대의 중핵이 될 병력을 증강했다.[5]
후진이 요나라에 멸망한 후, 947년 2월 유지원은 황제에 즉위하여 후진을 대신하는 '후한'을 건국했다.[9] 당시 강대한 요나라 군대가 개봉을 중심으로 화북을 점령하고 있었고, 화북 각지에서는 요나라 군대에 대한 반항 운동이 격화되었다.[5] 요나라 본국에서는 태종에 대한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요나라 군대는 결국 퇴각했다. 후한 군대의 개봉 입성은 요나라 군대가 물러간 후인 947년 6월에 이루어졌다.[6]
후한 고조(유지원)가 개봉에 입성했을 때, 후진 및 요나라에 의해 임명된 절도사들과 그 장리들은 그 지위가 안정된 채였다.[10] 이들은 전 절도사에서 황제가 된 후한의 유지원을 매우 싫어했고, 이 때문에 후한 왕조는 성립 초기부터 각지의 유력 번진들의 반란에 시달렸다.[10] 이 반란을 진압하여 공을 세운 것은 당시 재상이자 추밀사였던 곽위였다.[10] 훗날 곽위는 후주의 건국자가 된다.
유지원은 현재의 산시성 타이위안 주변 지역인 병주(현재의 산시성)의 군벌이었다. 이곳은 오랫동안 한화된 사타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그가 섬기던 후진은 약했고,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거란 요나라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후진이 마침내 거란에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을 때, 요나라는 남쪽으로 원정군을 보냈고, 그 결과 후진은 멸망했다.
요 태종이 이끄는 군대는 황하까지 진격했지만, 그는 현재의 베이징 중심부에 있는 그의 기지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논쟁의 대상인 연운 16주의 핵심 지역이었다. 그러나 귀환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끊임없는 괴롭힘을 받은 후, 그는 947년 5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후진의 멸망과 거란의 계승 위기가 겹치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유지원은 그 공백을 메우고 후한을 건국할 수 있었다.
출처에 따라 후한과 북한 황제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상충되는데, 일부에서는 사타족 혈통을, 다른 곳에서는 황제들이 부계 한족 혈통을 주장했다고 한다.[2]
2. 2. 후한의 멸망과 후주, 북한의 건국
요나라군이 개봉부를 점령하고 후진을 멸망시킨 뒤, 하동절도사 유지원은 948년 개봉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한'''(漢)으로 정하고 후진을 대신하는 왕조를 열었다. 이후 낙양을 점령하고 중원을 지배하여 오대의 명맥을 이었다.유지원이 10개월 만에 사망하고, 차남 유승우가 황제가 되었으나, 내분이 잇따라 천하가 어지러웠다. 곽위가 이를 진압하였으나, 은제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신들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곽위는 위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은제를 공격했다. 950년 은제는 곽윤명(郭允明)에게 살해당했다.
곽위는 유지원의 조카 유윤을 옹립하였으나, 부하들의 추대로 스스로 제위에 올라 후주를 건국하였다. 후주 건국 후 유윤은 살해되었고, 그의 아버지 유숭은 진양에서 자립하여 북한을 세웠다. 이로써 유지원이 세운 후한은 2대 2년 만에 멸망하고, 오대의 마지막 왕조 후주가 뒤를 잇게 되었다.
후주가 멸망한 후, 송나라가 십국을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북한도 멸망하여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다(단, 연운 16주를 포함한 화북지방 북부 지역은 요나라의 치하에 있었다).
3. 역대 황제
묘호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
---|---|---|---|---|
고조(高祖)[3] | 예문성무소숙효황제(睿文聖武昭肅孝皇帝) | 유지원 | 947년–948년 | 천복(天福) 947년 건우(乾祐) 948년 |
없음 | 은황제(隱皇帝) | 유승우 | 948년–950년 | 건우(乾祐) 948년–951년 |
- 은제 사후 곽위에 의해 일시적으로 옹립된 유윤은 개봉으로 향하던 도중 송주에서 상음공으로 강등되었고, 곽위 즉위 직후 살해되어 후한의 정식 황제로 인정되지 않는다.[15]
유지원의 동생 유숭은 진양에서 후한을 계승했다고 자립하여 북한을 세웠다.[16]
묘호 | 시호 |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
---|---|---|---|---|
세조(世祖) | - | 유민 | 951년 ~ 954년 | - |
예종(睿宗) | - | 劉鈞|유균중국어 | 954년 ~ 968년 | - |
소주(少主) | - | 劉继恩|유계은중국어 | 968년 | - |
영무제 (英武帝) | - | 劉继元|유계원중국어 | 968년 ~ 979년 | - |
3. 1. 후한
유지원은 현재의 산시성 타이위안 주변 지역인 병주(현재의 산시성)의 군벌이었다. 이곳은 오랫동안 한화된 사타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그가 섬기던 후진은 약했고,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거란의 요나라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후진이 마침내 거란에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을 때, 요나라는 남쪽으로 원정군을 보냈고, 그 결과 후진은 멸망했다.요 태종이 이끄는 군대는 황하까지 진격했지만, 그는 현재의 베이징 중심부에 있는 그의 기지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논쟁의 대상인 연운 16주의 핵심 지역이었다. 그러나 귀환 과정에서 중국인들의 끊임없는 괴롭힘을 받은 후, 그는 947년 5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후진의 멸망과 거란의 계승 위기가 겹치면서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 유지원은 그 공백을 메우고 후한을 건국할 수 있었다.
출처에 따라 후한과 북한 황제의 기원에 대한 내용이 상충되는데, 일부에서는 사타족 혈통을, 다른 곳에서는 황제들이 부계 한족 혈통을 주장했다고 한다.[2] 후한(後漢)은 중국의 긴 역사 속에서 가장 단명한 왕조 중 하나였다. 유지원은 왕조 건국 이듬해에 사망했고, 그의 십 대 아들이 뒤를 이었다. 왕조는 2년 후 한족 출신 곽위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후주의 황제를 칭하면서 멸망했다.
묘호 | 시호 | 개인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
---|---|---|---|---|
고조(高祖)[3] | 예문성무소숙효황제(睿文聖武昭肅孝皇帝) | 유지원 (劉知遠) | 947년–948년 | 천복(天福) 947년 건우(乾祐) 948년 |
없음 | 은황제(隱皇帝) | 유승우 (劉承祐) | 948년–951년 | 건우(乾祐) 948년–951년 |
후한 고조(유지원)는 황제 즉위 직후 이듬해 948년 1월에 사망했고, 18세의 은제 유승우가 뒤를 이었다.[10] 950년 4월, 요나라 군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곽위는 추밀사로서 "천웅군 절도사"가 되어 업도로 부임했다.[10] 이 기회를 틈타, 은제의 측근은 유력한 무신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고,[10] 이에 곽위는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개봉으로 입성해 은제의 측근을 살해했다.[10] 이 과정에서 은제 유승우도 살해되었다.[10]
곽위는 일단 유지원의 조카(유지원의 동생 유숭의 아들)인 유빈 (당시 무녕군 절도사)을 다음 황제로 옹립했지만, 요나라 군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개봉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던 도중 선주에서 부하들에게 황제로 추대되었고, 이로써 곽위는 제위에 올라 "후주"를 건국했다.[10] 후주의 건국으로 불필요하게 된 유빈은 서주에서 개봉으로 향하던 도중에 살해되었다.[15] 유빈의 아버지 유숭은 자신이 "하동 절도사"로서 주둔하는 진양에서 후한을 계승했다고 자립하여, 십국 중 하나인 "북한"을 세웠다.[16]
- 은제 사후에 곽위에 의해 일시적으로 옹립된 유윤은 개봉으로 향하던 도중 송주에서 상음공으로 강등되었고, 곽위의 즉위 직후 살해되었기 때문에 후한의 정식 황제로 인정되지 않는다.[15]
3. 2. 북한
유숭은 자신이 "하동 절도사"로서 주둔하는 진양에서 후한을 계승했다고 자립하여, 십국 중 하나인 '''북한'''을 세웠다.[16]유지원의 동생 유숭이 세운 북한은 사타족의 근거지인 산서성에 위치했으며, 때로는 동한이라고도 불렸다. 요나라의 보호를 받으며 후주로부터 독립을 유지했다. 송나라는 960년에 후주를 멸망시킨 후 북중국에서 안정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 송나라는 978년에 남부 국가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지만, 북한은 요나라의 도움으로 버텼다. 북한의 존속은 요-송 관계의 두 가지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마침내 송나라는 979년에 북한을 자국 영토로 병합하여 십육주를 제외한 중국의 통일을 사실상 완료했는데, 십육주는 요나라의 수중에 남게 되었다.[17]
북한의 역대 군주는 다음과 같다.
묘호 | 시호 | 개인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
---|---|---|---|---|
세조(世祖) | - | 유민 (劉旻) | 951년 ~ 954년 | - |
예종(睿宗) | - | 劉鈞|유균중국어 (劉鈞) | 954년 ~ 968년 | - |
소주(少主) | - | 劉继恩|유계은중국어 (劉继恩) | 968년 | - |
영무제 (英武帝) | - | 劉继元|유계원중국어 (劉继元) | 968년 ~ 979년 | - |
4. 계보
후한 황제 | 북한 황제 |
유전 | 양자 | |||||||||||||||||||||||
---|---|---|---|---|---|---|---|---|---|---|---|---|---|---|---|---|---|---|---|---|---|---|---|---|
유민 | 결혼 | |||||||||||||||||||||||
유전 | | | 유전 | 현조 | |||||||||||||||||||||
유지원 | | | 유민 | | | 유지원 | 고조 | 947–948 | 유민 | 세조 | 951–954 | |||||||||||||||
유승우 | | | 유윤 | | | 유준 | | | 설조 | 부인 유씨 | 하씨 | 유승우 | 은제 | 948–951 | 유윤 | d.951; r.950 | 유준 | 예종 | 954–968 | 설조 | 유씨 부인 | 하씨 | |||||
유계은 | 유계원 | | | 유계은 | 소주 | 968 | 유계원 | 영무제 | 968–979 |
- 1, 2: 후한 황제
- (1)-(4): 북한 황제
참조
[1]
서적
Imperial China 900–1800
2003
[2]
문서
According to ''[[Old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zh:s:舊五代史/卷99|vol. 99]], and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zh:s:新五代史/卷10|vol. 10]]. [[Liu Zhiyuan]] was of Shatuo origin. According to ''[[Wudai Huiyao]]'', [https://archive.org/stream/06049337.cn#page/n30/mode/2up vol. 1] Liu Zhiyuan's great-great-grandfather Liu Tuan (劉湍) (titled as Emperor Mingyuan posthumously, granted the temple name of Wenzu) descended from Liu Bing (劉昞), Prince of Huaiyang, a son of [[Emperor Ming of Han]]
[3]
웹사이트
Hòuhàn Gāozǔ 後漢高祖
http://www.chinaknow[...]
University of Tübingen
[4]
문서
愛宕他 (199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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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宕他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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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宕他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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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宕他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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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第1章五代 1.五代王朝の興亡
山川出版社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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